즉 병이란 결코 상실이나 과잉만이 아니다. 병에 걸린 생명체, 다시 말해서 개인은 항상 반발하고 다시 일어서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고 주체성을 지키려고 한다. 혹은 잃어버린 주체성을 되찾으려하고 아주 기묘한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반드시 반응한다. - P22

그렇더라도 인간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은 감정, 의지, 감수성을 갖고 있는 윤리적인 존재입니다. 신경심리학은 이런 것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이 영역에서 당신은 그의마음에 영향을 미쳐 그를 변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P69

성스러운 종교의식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의 마음은 미사의 정신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긴장과 정숙이 감도는가운데 그는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서 종교의식에 자신을 내맡기고있었다. 그런 모습 어디에서도 기억상실증이나 코르사코프 증후군의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병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생각할 수없을 정도였다. 이제 그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메커니즘의 희생자가아니었다. 기억상실증이나 기억의 불연속 따위가 도대체 그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는 어떤 하나의 행위에 그의 존재를 기울여 그것에 몰두했다. 인간에게 감정과 의미를 부여하는 유기적인 통일을, 바늘 하나도 꽂을 틈 없는 연속을 그는 달성하고 있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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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다고요. 제가 이틀에 한 번씩은 꼭 저 형님 전화를 받는데요, 가만히 들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매일매일 어두운 이야기뿐이니까, 충분히 지겹고 과민할 때가 있는 거라고요. 그래서 전화 좀 몇번 끊었다고 이 한밤에 사람을 죽일 듯이,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요. - P29

그건 너무 덧없다고 내가 말하자, 덧없는 편이 낫다,라는 것이 유도 씨의 대답이었다.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덧없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유도 씨.
유도 씨는, 덧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에라, 하고,
유라, 혹은 미라, 하고,
- P57

.......떨어져 내린다.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을 것이라 희망을 품었다가도 이렇게 떨어져서야 가망이 없다는 낙담뿐이다. 누가 누가 누가 없어요 나와 나와 나와 충돌해줘.
- P78

시끄러운 생물이 인간이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억울해 땅을 칠노릇인 것이다. 도무지 이 몸이란 짐승 역시 먹고사는 것을 제일로여기는 처지, 먹고사는 일로 따지자면 어느 짐승의 먹고사는 일이가장 중요한지는 누구도 간단히 말할 수 없는데도, 자기들만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듯 아무 데나 눈을 흘기는 인간들이 승하는 세계란 단지 시끄럽고 거칠 뿐이니 완파되는 편이 좋을 것이다.
- P115

어쨌든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디디는 도도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비좁은 거실을 가로질렀다.
달칵, 하고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 P179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눈에 갇혔다.
그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나를 부르라. 그 남자, 그 기록, 그 새끼, 그 물건, 그것, 나는 즉 그다. 그는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뒤 그 집에 당도했다. 많은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고 그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런 얼굴들 속에 있었다. 겨울이었다.  - P183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텅 빈 납골당으로 들어서는 사람, 눈사람과도 같은거인, 그의 등과 머리에 쌓인 눈, 체온의 냄새. 한발 한발 전진해갈때마다 그는 그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에 관한 꿈으로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갈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하.
후.
하.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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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온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간 고목처럼 파삭파삭했다.
죽은 막냇동생 이야기를 할 때에도 물기 없이 덤덤했다. 하지만 해동은 아버지가 옥에서 나올 때, 죽을 때, 애간장이 녹도록 울던 고모를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왔다. 고모의 무표정은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울고, 멍하니 넋이 나가고, 오랜 시간 멍했던 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 찾아온 굳은살 같은 얼굴이었다.
- P58

"원래부터, 그게 아주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인쇄기를숨겼다가 발각된 정도라면 뭐, 큰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 시골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신 건 아닐 테니까요. 안골의이성준이건 눈티재의 이성준이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사촌형이라는 작자가, 누워 계신 고모님 앞에서 말하는 꼴이 하도 아니꼬워서, 제가 속이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사내들 하는 짓이 뭐그런 것이지요."
- P232

그것을 두고 간 자도 차지한 자도똑같이 욕하는 목소리였다. 적산, 적이 남겨두고 간 자산이라는 표현에는 불을 지르고 싶은 적의와 한입에 삼키고 싶은 상반된 욕망이 뒤섞여 듣기만 해도 잠잠하던 피마저 들끓게 했다.
- P67

그런데 왜 나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 따위 조금도 하지않고 잘사는데,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에이어서 나까지,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하는 것인지.
- P235

막걸리로 흐려진 눈을 애써 껌벅거리며, 해동은 진형을 보았다.
형제자매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부숭부숭한 어머니와 억센 형제자매들은 진형의 깊은 뿌리였다. 해동이 가지지못한 그 건강하고 단단한 뿌리들을 해동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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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자기들을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따뜻함을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따뜻함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멀어지고 있다. 이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이웃 사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페스트를 옮길 수 있고 방심한 틈을 타 감염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P231

리외는 으레 그러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것은 랑베르 자신의 문제이고 랑베르는 행복을 선택한 것이며 자신은 그에게 반대할 논거가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해 무엇이 옳고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 P237

그러는 사이에 내가 이 세상을 위해 더이상 쓸모가 없다는 사실과,
죽이는 것을 단념한 그 순간부터 결정적으로 추방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역사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겠죠.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그 자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것을 우월성이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이제 나는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어요.. 겸손을 배운 거죠. - P295

"통행증을 보여주면 방파제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페스트 속에서만 사는 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에요. 물론 인간이라면 희생자들을 위해 싸워야죠. 하지만 뭔가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투쟁은 해서 뭐하겠어요?"
- P298

그러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이라면, 희망하는 것을 다 잃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기억에 남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괴로운 삶일까. 타루가 경험한 삶이 아마 그런 삶이리라. 그래서 그는환상 없는 삶이 얼마나 황량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희망이 없으면 마음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 타루는 인간이 인간을 단죄할 권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없으며, 심지어 희생자도 때로는 사형집행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았고 희망이라곤 전혀 경험하지못했던 것이다. 그가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한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 P340

공포가 끝나면서 페스트도 끝이 났고, 그렇게 부둥켜안은 팔들은심오한 의미에서 페스트가 사실은 유배와 이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P348

그것들을 바라보며 의사 리외는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페스트에 걸렸던 사람들에 대해 우호적으로 증언하기 위해,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그리고 재앙 중에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이라도 말하기 위해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결심했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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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이 옳아요. 랑베르, 절대적으로 옳아요. 당신이 지금 하려는일을 나는 결코 막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하려는 일은 내가 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주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뭔가요?" 랑베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예로 들면, 성실성은 내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 P194

 페스트 발생 초기만 해도 그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뚜렷이 기억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사랑하는사람의 얼굴과 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행복해했던 어떤 날,
이런 것들은 모두 분명하게 기억났지만, 그들이 그 사람을 다시 그려보는 바로 그 순간에, 또 이제는 그렇게도 먼 곳이 되어버린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결론적으로그 시기에 그들은 기억력은 있었지만 상상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페스트가 둘째 단계로 접어들자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이지만, 얼굴에 살이 없어져 마음속에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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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1-0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19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도 성실성이겠지요.
정부의 방침에 성실히 따라주는 의료진과 국민들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경제적 상황이 안 좋다 보니 정부에 항의하는 업주들의 시위가 생기기도 해요.
영업을 할 수 없으니 이해가 되어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책을 저는 홍신문화사 걸로 오래전 읽었는데 좋은 글 뽑아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1-01-06 13:3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서 보게 되더라구요. 예전에 읽었다면 지금처럼 실감하면서 읽지는 못했을것 같아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을 까뮈는 이렇게 써내려간걸 보면서 문학의 힘을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