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아 있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 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9쪽
자연은 신이다. 이름 없는 한 포기 작은 잡초에 이르기까지 신의 창조가 아닌 것이 없다. 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인간이 손을 대지 않으면 안될만한 그러한 졸작, 그러한 미완품이 있을까? 이것은 생각만으로도 어리석은 일일것이다.-25쪽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다. 그 맑은 향기를, 찬 가을공기를 기다려 우리에게 주는 것이 고맙고, 그 수묵필로 주욱쪽 그을 수 있는 가지와 , 수묵 그대로든지, 고작 누른 물감 한 점으로도 종이 위에 생운을 떨치는 간소한 색채의 꽃이니 빗물 어릉진 가난한 서재에도 놓아 어울려서 더욱 고맙다. 국화를 위해서는 가을밤도 길지 못하다. 꽃이 이울기를 못 기다려 물이 언다. 윗목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으면 방안은 더욱 향기롭고 품지는 못하되 꽃과 더불어 누울 수 있는 것. 가을밤의 호사다. 나와 국화뿐이려니 하면 귀뚜리란 놈이 화분에 묻어 들어왔다가 울어대는 것도 싫지는 않다.-45쪽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선하고 상냥스러우랴! 고서점에서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것들은 자못 미망인다운 함축미인 것이다. 서점에서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찻길이 멀수로 복되다. 집에 갖다 한 번 그들 사이에 던져버리는 날은 그제는 잠이나 오지 않는 날 밤에야 그의 존재를 깨닫는 심히 박정한 주인이 된다.-61쪽
나는 이번 병 후에 완저한 건강이란 의심해 본다. 나아갈 무렵 수십일은 초저녁에 길어야 세 시간이나 네시간을 잘뿐, 그 긴긴 겨울밤을 뜬눈으로 밝히곤 하였다. 그 지루하던 시간에 나는 몇 가지 소설 플롯을 생각하였다. 거의 전부가 슬픈 것들로서 그 인물들의 어떤 대화를 지껄여 보다가는 내 자신이 그 주인공인 듯 흑흑 느끼고 울기를 여러번 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날로 곧 집필하리라고 매우 만족하였던 것이 여러 가지였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붓을 들 수 있는 때 생각해보니 하나도 쓸만한 것이 없다. -125쪽
나무들은 아직 묵묵히 서 있다. 봄은 아직 몇천리 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무 아래 가까이 설 때마다 나는 진작부터 봄을 느낀다. 아무 나무나 한 가지 휘어잡아보면 그 도틈도틈 맺혀진 눈들, 하룻밤 세우만 내려주면 하루아침 따스한 햇발만 쪼여 주면 곧 꽃피리라는 소근거림이 한 봉지씩 들어있는 것이다. 봄아 어서오라! 겨울 나무 아래를 거닐면 봄이 급하다.-132쪽
나무는 클수록 좋다. 그리고 늙을수록 좋다. 잔가지에 꽃이 피거나, 열매가 열어 휘어짐에 그 한두 번 바라볼만한 아취를 모름이 아니로되, 그렇게 내가 쓰다듬어 줄수 있는 나무보다는 나무 그것이 나를, 내 집과 마당까지를 푹 덮어주어 나로 하여금 한 어린 아이와 같이 뚱그레진 눈으로, 늘 내 자신의 너무나 작음을 살피며 겸손히 그 밑을 거닐 수 있는 한, 뫼뿌리처럼 높이 솟은 나무가 그리운 것이다.-134쪽
나는 처음에 도급으로 맡기려 했다. 예산도 빠듯하지만 간역할 틈이 없다. 그런데 목수들은 도급이면 일할 재미가 없노라 하였다. 밑질까봐 염려, 품값 이상 남기랴는 궁리. 그래 일 재미가 나지 않고, 일 재미가 나지 않으면 일이 솜씨대로 되지 않는다는것이다. 이런 솔직한 말에 나는 감복하였고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조선건축의 순박, 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그런 전통을 표현함에는 돈보다 일에 정을 두는 이런 구식 공인들의 손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임으로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 일급으로 정한 것이다.-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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