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내내 유난히 피곤해했었다. 저녁에 애들 재우는 시간에 보통은 애들 재우고 다시 일어나는데 대부분의 날들 그냥 애들과 같이 잠들어버리거나 깨도 다시 일어나기 싫어서 그냥 자고....

몸만 피곤한게 아니라 기분도 계속 울적해서 컨디션 엉망. 책도 들여다 보기도 싫고, 알라딘도 시들.... 서재에 가끔 들러 글을 보기는 하나 그냥 제목한 쭉 한번 읽어보거나 아니면 그도 안하는 날도 대부분이고.... 마지막날에 여기 저기 들러 인사도 겨우 하고, 그러다보니 빼먹은 분도 많고....

그냥 몸이 안좋아지나? 건강검진을 한번 받아볼까 했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에서야 든 생각. 다시 힘도 펄펄나고 우울증도 싹 가시고...

쩝~~ 명절 증후군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다시 재발한 거였군....

결혼하고 처음 한 2-3년은 정말 명절만 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경 예민해지고 미칠지경이었다. 일단 명절동안의 엄청난 노동의 양도 양이려니와 기본적으로 내 가치관은 씨알머리도 안 먹히는 시집의 가부장적인 명절 분위기가 주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것 때문에 이혼할 것도 아니고 결국 나를 바꾸는 수 밖에... 대충 3년쯤 지나니 일은 익숙해지고, 절대적인 일의 양도 해마다 변동은 있지만 그래도 좀 줄어들고, 그리고 시집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도 무시할 것은 무시해버리고, 포기할 것은 포기해버리고 나니깐 좀 견딜만해졌었다.

근데 갑자기 왠 명절 증후군이냐고?

올 추석은 적어도 내게는 좀 특별했었다.

윗동서가 둘 있는데 큰 형님은 처음으로 직장을 다니게 되어 명절 전날 밤에나 올수 있단다. 그리고 멀리 사는 둘째 형님은 연휴가 짧아서 아예 못온단다. 거기다가 그래도 없을 때는 그나마라도 도움이 되던 시누이는 얼마전에 결혼했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들어온 이후에는 명절 전날에 집에 계시는적이 거의 없고...(명절이 대목인 분이라 명절 전날 바쁘시다) 

결국 말이다. 그 엄청난 명절 준비를 나 혼자 다 해야 된다는 거다. 원래 살림하고 전혀 안친한 내가 말이다. 난 아직도 무 채썰기도 어버버 거리면서 하는데.... 이 상황을 처음 알게된 이후로 그냥 걱정은 좀 되었지만 어떻게 되겠지 했었는데 이게 겉으로만 그랫던 것 같다. 속으로는 엄청 스트레스를 나도 모르는 새 받았던 것! 그러니 내내 아프고 우울하지.... 에휴~~~

추석 전날 아침 시집에 도착 -가까우니까 20분이면 간다. (이건 유일하게 좋은거다)

일단 서방은 시어머니 심부름 하러 다시 나가고 애들과 툭탁거리면서 엉망인 집 청소부터... 그리고 나서 시할머님 시아버님 계시니까 애들하고 점심 챙겨드리고, 설겆이까지 끝내고 나니까 서방은 심부름 마치고 들어왔다. 그 때부터 서방은 애들 둘 완전 마크하고, 나는 혼자 부엌에서 추석 준비 시작.

뭐부터 해야지... 이건 내 살림도 아니니까 그릇 하나 찾는 것도 일이다. 그리고 구석 구석에 시어머니가 숨겨두신(?) 재료들도 찾아야 하고... 일단 시간 제일 많이 걸리고, 솜씨 없어도 대충 할 수 있는 것, 각종 전부터 굽기로 했다. 일단 찌짐부터 뒤벼야지..('전'이나 '부침개'란 말은 결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냥 경상도에선 찌짐이 딱인 표현이다.)

가스렌지 두개에다가 프라이팬 두개 올려놓고 찌짐부터 뒤빈다. 이게 우리 시집 명절 일을 가장 큰 부분이다. 워낙에 식구들이 찌짐을 좋아하고, 또 워낙에 많은 식구라 돈 적게 들고 양으로 죽일 수 있는것인 덕분이다.(결혼하고 첫해에는 이 부추찌짐 한 통, 호박찌짐 한통을 혼자서 다 부친적도 있다. 이 때 통의 크기는 갓난애들  목욕시키는 통  크기였다.) 각종 찌짐을 엄청 오랫동안 부치고 있으니 아빠와 놀기에 지친 예린이가 부엌에 와서 같이 놀아달란다. 엄마 아빠 놀이터 해야 하는데 엄마가 없어서 못한대나? 엄마 찌짐 부쳐야 돼서 안된댔더니..

"엄마 찌짐을 왜그렇게 많이 해?"

"응 내일 어른들이 많이 오실거기 때문에 많이 해야 나눠 먹을 수 있어."

"그러면 그냥 잘라서 어른들이 나눠먹으면 되잖아"

그래 예린아 네 생각이 정답이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는가?

겨우 각종 찌짐만 다 부치고 나니 벌써 저녁 차릴 시간이다. 나머지야 시간은 별로 안걸리는 것들이니 한시름 놓겠다. 하지만 나물같은건 솜씨가 문젠데 난 아직도 시집의 음식맛이 내 입에 안맞다보니 그대로 하는게 참 난감하다.

이 때 그래도 다행히 구세주 등장. 막내 숙모님이 평소보다 좀 일찍 오신거다. 그리고 시어머니 드디어 귀가. 겨우 한숨돌리고 저녁상차리고, 이 때부터는 그냥 음식은 두분이서 하시고 난 옆에서 설겆이 하고 또 청소하고.... 그래도 자려고 정신차리니 밤 11시더라....

명절 증후군 끝났냐고요? 다른 건 씻은 듯 나았는데 새로운 병을 얻어왔다. 허리 아프던게 거의 다 나아 갔었는데 명절날 내내 너무 오랫동안 서 있었기 때문인지 다시 도졌다.

애고 내일부터 다시 침맞으러 가야할 듯....

게다가 앞으로 명절이 내내 이럴 것같으니 내 명절 증후군도 한동안은 없어지지 않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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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9-1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우째요 ㅠ.ㅠ 허리 빨리 나으세요...

바람돌이 2005-09-1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 심한건 아니니 빨리 가서 며칠 침맞으면 나을듯... 제 경험상 말예요. 만두님도 푹 주무시고 내일 뵈어요.

야클 2005-09-1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여자분들에게 참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명절만 되면.

바람돌이 2005-09-20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야클님 미안해하지 마세요. 명절날 어른들 눈치안보고 열심히 움직이며 일하는 멋진 남편이 되면 되지요. ^^

히피드림~ 2005-09-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셨군여. 재밌게 읽었어요. 저는 예전엔 시엄마랑 저랑 딱 둘이서 하느라 참 힘들었는데, 작년에 시동생 결혼해서 동서 생기구, 작은 어머니도 작년부터 갑자기 오셔서(그전에는 수십년 동안 전혀 오지 않았음) 한결 편해졌지만, 동서가 좀 얌체라 없느니만 못하더라구요. ^^;;

바람돌이 2005-09-2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지간 참 어렵죠. 정말 얄미운 동서는 없느니만 못하고 열만 받죠. ^^;;

클리오 2005-09-22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애들 목욕통 크기의 찌짐이라니요... 저는 식구도 적고 먹는 것도 시원찮은(--;) 시댁을 감사해야겠군요... 고생하셨어요... 제 뜨뜻한 기운을 님의 허리에 보냅니다... ^^

바람돌이 2005-09-22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술병(?)은 다 나으셨어요?
어쨌든 다시 님의 댓글을 보니 즐거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