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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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바이크 글의 강점은 무엇보다 상황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정교하고 섬세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생생한 묘사가 가능한 것은 글의 대상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관찰하고 생각하고 되새겼다는 말일 것이다. 그 상황 속에 온 몸이 잠기도록 깊게 침잠해들어가며 마치 자신이 그 일을 겪고 있는 것처럼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될 때 츠바이크와 같은 묘사가 나오는게 아닐까?


  이 책에 실린 단편 <거대한 침묵>은 츠바이크가 당대 유럽의 상황에 대해 쓴 에세이다. 그는 그의 장기를 여지없이 발휘해 나치당이 점령한 유럽의 친구들과 친척, 동료들이 겪고 있을 고통을 묘사한다. 그 고통을 짐작하고 묘사하는 과정은 작가가 지금 바다 건너 안전한 미국이 아니라 폭력의 한 가운데 유럽에서 그것을 자신이 직접 겪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처음에는 고통과 비명이 소리들, 저항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하지만 거대한 폭력 앞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침묵이 들려온다. 그 끔찍한 침묵을 츠바이크는 이렇게 표현한다.


 침묵, 뚫을 수 없는 침묵, 끝없는 침묵, 끔찍한 침묵, 나는 그 침묵을 밤에도 낮에도 듣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로 내 귀와 영혼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어떤 소음보다 견디기 힘들고, 천둥보다, 사이렌의 울부짖음보다, 폭발음보다 더 끔찍하다. 그것은 비명이나 흐느낌보다 더 신경을 찢고 더 슬프다. 수백만 사람이 이 침묵 속에서 억압받고 있음을 나는 매 순간 깨닫는다. 그것은 고독의 정적과 전혀 다르다.  -101쪽


  츠바이크는 1942년 2월 브라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도망쳐 온 곳에서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저렇게 되새김 한다면 이 지독할만큼 예민한 작가의 정신이 버텨내기가 힘들었겠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뛰어난 작가의 글을 읽는 다는 것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곳을 보게 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는 시간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에세이든 학술서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츠바이크의 여기 실린 글들이 주는 울림의 비밀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가 나에게 세상이 더 많은 면들을, 다른 면들이 이렇게 많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더 많이 본다고 해서 삶이 무조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명백하다.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무심함으로 인해 일으킬 수 있는 수많은 잘못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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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5-22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민한 작가의 정신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울림과 희망을 줄 수 있고, 또 그럴 테지만, 본인으로서는 무척 힘들었을 것 같아요.
츠바이크의 글을 치열하게 관찰하고 생각하는 바람돌이님과 같은 독자가 있어서 그나마 츠바이크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바람돌이 2025-05-22 14:41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저는 한강작가의 책을 읽을 때 정말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특히 작별하지 않는다는 책 내용보다 작가님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었어요. 그래서 참 걱정도 되고 했는데 이번에 나온 에세이 빛과 실을 읽다보니 그 한강 작가님은 참 강한 사람이구나 느껴져 마음이 좀 놓이기도 하구요.
우리는 작가가 아니니까 둔하게 둔하게 살아요. ^^

새파랑 2025-05-22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의 심리 묘사는 정말 대단한거 같아요. 소설이든 산문이든 평전이든 안좋았던적이 없었습니다 ㅋ

바람돌이 2025-05-22 14:42   좋아요 1 | URL
저도요. 츠바이크 책은 읽을 때 다 좋았어요. 그래도 저는 그 중에서도 특히 소설이 정말 좋더라구요.

레삭매냐 2025-05-22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그것 참 -

츠바이크 선생이 꿋꿋하게 생존하
셔서 더 좋은 작품들을 남겨 주었
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보았답니다.

곁에 두고 계속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바람돌이 2025-05-22 14:44   좋아요 2 | URL
맞아요. 오래도록 좋은 글을 더 많이 썼더라면 후대의 우리 독자들에겐 더 큰 기쁨이었겠죠. 이분의 책은 다 좋아요. 이번 책은 짧아서 금방 읽을 수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