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막달라마리아는 신학적으로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무형의 빈 공간null?
‘이었다. 그녀에게 날을 세운 베드로의 정통파 교회가 기독교 주류가 되면서, 그 빈 공간은 너무도 쉽게 얼룩덜룩한이미지로 더럽혀졌다. - P22

 올랭피아는 인기 많은쿠르티잔으로 설정됐기에 일단 미모가 출중해야 했다. 마네는 올랭피아의 미모가 돋보이려면 한눈에 비교될 만한 ‘생긴‘ 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네에게 그런 여자로는 흑인이 적격이었다. 이는 마네 이전에도 백인 남성 화가들이 흑인 여성을 소비한 방식이기도 하다. - P32

대중들은 켈러가 시각·청각 장애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접하지 못해, 순백의 영혼을 지녔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켈러는 튀어나온 눈을없앤 뒤 유리로 만든 파란색 의안을 새로 끼웠고, 수수한 하 - P40

얀색 드레스를 입은 채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갖췄지만 ‘불행히도‘ 장애를 지닌 여성은, 사회가 편안하게 소화할 수 있는 안전한 이미지였다. 사람들은 동정이 깃든 눈길로 그녀에게 ‘숭배의 박수를 쳤다.
헬렌 켈러를 향한 이 같은 ‘낭만적‘ 시선은,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그림 <눈먼 소녀>에서도찾을 수 있다. - P41

"커버링은 주류에 부합하기 위해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라며 "사회가 소수자성을 ‘티내지 말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주류의 눈치를 살폈던 대처는 자신의 여성 음색을, 루스벨트는 자신의 장애를 숨긴 셈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시선에 민감한 정치인들만 커버링을택했던 걸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1475-1564 도 일평생 자신의 본 모습을 커버링했다. 왜냐하면 그는 성소수자였기 때문이다. - P61

특기할 사실은 대리모 사업을 옹호하는 쪽이 그 이유로자신의 유전자(남성의 정자)를 가진 아이를 갖고자 하는 열망을내세운다는 점이다. 즉 대리모 출산은 부계 ‘혈통‘을 지키기위해 모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제의 폭력‘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대리모 같은 소리》의 저자 레나트 클라인의 말처럼 말이다. "불임인 이들이 다른 제3자 여성의 포궁(자궁)과 난자를 빌려서까지 ‘자기‘ 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망은 - P78

근본적으로 남성의 것이며 이 절차가 보장하는 것은 ‘대리모를 의뢰한 남성‘의 유전자인 것이다." 이때 가난하고 어두운피부의 여성은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환원될 뿐이다. - P79

툴루즈 로트레크는 이런 성 구매 경험을 토대로 자신을 엄숙한 성도덕으로부터 ‘해방된‘ 예술가로 포장했고, 19세기 프랑스를 지배하던 성 보수주의 규범에 반항한 화가로 평가받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의도했든 아니든,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노동으로서의 성매매‘는 성구매자를 ‘서비스이용자‘로, 포주를 ‘사업가‘ 혹은 ‘관리자‘로 은연중에 정당화한다. 결과적으로 툴루즈 로트레크의 그림이 성매매 현장의폭력성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고 하면 너무 박한 평가일까. - P88

 실제로 드가가 그린발레리나는 앞서 보았듯 얼굴이 뭉개져 있거나 땀 흘리거나푸념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등 아름답게 묘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을현실 속의 인간으로 대한 증거가 아닐까. 무엇보다 드가는누드모델 출신이었던 수잔 발라동을 비롯해 메리 커샛, 마리브라크몽 같은 여성 화가들을 발탁하고 작업을 격려한 화가이기도 하다. 이렇듯 여성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했기에, 성매매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처지를 툴루즈 로트레크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 P93

어쨌거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셋 중 누가 주문했든 그들 모두 부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굳이 목돈을 들여 <내반족 소년을 주문했을까. 바로 가난한 사람의 존재는 부자들에게 천국을 보장하는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 P174

그래서일까.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원주민은 더 이상괴성을 지르며 백인을 공격하는 악인이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원시인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대평원에서 생태주의적 삶을 영위하는 초월자나 현자로 그려진다. 백인에게 영적인 각성을 주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신화적, 낭만적인 재현은 이제 원주민들이 백인에게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어쩌면 죄의식의 위장된표현일지도 모른다. 원주민을 야만시하는 신성시하든 둘 다타자화인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이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면, 이런 낭만적인 시각은 곧바로거둬진다. - P190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이렇게 얘기했다. "중요한 질문은 동물들이 이성을 가지고 있는가, 말을 하는가가아니다. 그들이 고통을 느낄 줄 아는가이다." 맞는 말이다. 비건 활동가 캐럴 애덤스의 말대로 "정의란 호모사피엔스라는종의 장벽에 갇힌 취약한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 P220

기후 위기의 책임을 인간 일반으로 설정하면 윤리적 책임과 결단을 요구할 주체를구분하고 가시화하기 어려워, 사실상 책임자에게 면죄부를주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 모두의 잘못이라고 하면 아무의잘못도 아니게 되듯 말이다. - P228

이 덕분에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은 CIA의 간택을받을 수 있었다.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와 달리 미국의예술은 자유를 수호한다는 이미지가 필요했는데, 더할 나위없이 자유로운 그의 화법은 이에 딱 들어맞았다.  - P261

 추상표현주의가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순수성‘
때문이 아니라 뚜렷한 ‘정치성‘ 때문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격하며 "예술가의 미적 상상력은이데올로기와 타협해서는 안 되며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서도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알고 보면 이 말은 곧 스스로를 비판하는 말이기도 했던 셈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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