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은 일을 잘 수행해내기 위해서 가면을 써야 하는 것이 괴로울 때면 5천 억이 있는 가짜부모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계약 내용을 꼬치꼬치 따져 묻는 사람 한번 못 되겠는가 싶고, 주인공의 공을 다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자료실에 가두고 주요 파일을 지우고 CCTV를 없애고 애인까지 뺏는 상사를 보면서 고작 점심 메뉴를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내 상사는 정말 양반이다 싶고, 부모의 원수인 전 남편의 현 부인과 한 회사를 다니는 주인공을 보며 뭔가조금 불편했던 동료 정도는 얼마든지 와락 끌어안게되는 것이다. - P19

<강남스캔들>은 얼마나 재미있는 드라마였을까, 엄마와 동생에게 물어보니 ‘말도 안 되지만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큰 칭찬인데…. 어쩐지 아쉬워지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그 드라마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갖은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아침드라마 정도면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감사하다. 설마, 아침드라마는 그래서 언젠가부터주말에는 하지 않게 된 것인가? - P24

조금만 기준과 달라 보여도 색안경을 끼고 보기 바쁜 현실과는 달리 아침드라마 속 세상에서는 그어떤 형태의 가족도, 혹은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어느 누구 하나 경계 밖으로 밀어내거나 소외시키지 않는다. 머글들 사이에서 평생 자신이 이상한 존재라고생각해왔던 해리포터가 호그와트에서 받았던 환대에비유할 수 있을까? 아침드라마는 아침마다 우리의 인식의 폭을 넓혀주고 편협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허무는 유연하고 급진적인 매체였던 것이다. - P40

의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기 전 아침드라마가 펼쳐놓는 심각한 상황에 미리 노출되는 것은 예방주사를 맞거나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기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며 웃었다. 세라젬 의료기를 장만한 뒤로는 TV 볼륨을 높이고 거실에 누워 소리만듣기도 한다. 아침드라마는 분주한 아침 시간에 화면에 집중하지 않고도 딴 일을 하면서 즐길 수 있도록설명적인 대사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P83

말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어렵지만 말을 하고서는 부덕을 피하기가 어렵다. 내 말과 글을 어딘가에 계속 남긴다는 것은 ‘N년 전 오늘‘을 계속해서생산해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이순간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저 그 과거의 오늘들이 쌓여 덜 무례하고 덜 실수하는 오늘을 만들 수 있기를, 그리고 지금 지나는 오늘 또한 미래의 오늘이 좀 더 낫기 위한 뒷받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P123

 우리는 밤을 새워 몰아보는 B급 영화가 괜찮은 영화를 쾌적하게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거나 하루에 인천 3대 돈까스집을 모두 방문한 후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들러 냉면을 먹고 돌아오는 행동 자체를 좋아서 하는것이 아니라,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무조건 함께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좋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무조건 함께한다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 - P147

 예술 계통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내 취향에 대해 모종의기대감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최근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있는지, 요즘 듣는 음악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어딘가 마음이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자니 수준이 낮아 보이고, 저것을 말하자니 젠체하는 것 같고,
그것을 말하자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 어려움 속을 헤매다가 문득 아침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털어놓고 나면 일종의 해방감이 찾아온다. 쿵짝이 맞지않아도 우하하하 웃을 수 있고, 쿵짝이 맞는다면 우하하하 신날 수 있고, 기대를 와르르 무너뜨릴 수도있고, 예측을 유유히 피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P160

내사 좋아하는 것이 여간해서는 나에 대한 판단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침드라마를 좋아하는 점을 좋아했다. 어떤 이는 의외라며 좋아하고, 어떤 이는 예상대로라며 좋아했다. 아마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아침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상대가 나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더할수는 있지만, 팔씨름의 꺾기처럼 경계선 반대편으로넘어가버리는 역할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 P161

관심 있는 것 말고는 관심이없던 우리는 매일 뉴스를 놓치지 않고 보게 되면서 강제로 세상사에 밝아지게 되었다. "어머 어머 웬일이니" 라는 추임새는 아침드라마에도 아침뉴스에도 똑같이 어울리는 것이었고, 잠을 깨우는 놀라움과 비현실성 또한 여전했다. 우리는 픽션에 놀라는 쪽이 팩트에 놀라는 것보다 훨씬 행복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 P165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5-31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발췌글 넘 재미있어요. 아침드라마는 주로 집안일을 하면서 보는 이들이 많아 대사가 많고 자극적이고, 저녁드라마는 모든 일을 마치고 제대로 보기에 영상미에 치중한다는 글 본 기억이 납니다. 이 책도 재미있겠어요 ~~~

바람돌이 2022-05-31 17:11   좋아요 1 | URL
아침 드라마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도 이 책 재미있게 읽었어요. ㅎㅎ
아침드라마와 저녁 드라마의 차이에 대한 얘기도 한편으로 수긍이 가네요. ^^

파이버 2022-05-31 2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 재미있어요! 저는 드라마는 안보고 저 장면만 돌아다니는 걸로 많이 봤는데 책표지로 보니 더 재미있네요~

바람돌이 2022-06-01 10:34   좋아요 2 | URL
저 장면과 김치 싸대기 장면은 밈계의 고전아닐까요? ㅎㅎ

모나리자 2022-06-01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무튼 시리즈가 날개 돋친 듯하네요.ㅎ
아침 드라마를 본지가 언제인지.. 재미있는 내용 같은데요.
6월에도 좋은 책과 많이 만나세요. 바람돌이님~^^

바람돌이 2022-06-02 21:36   좋아요 0 | URL
저는 아무튼 시리즈 처음 본게 이거예요. 근데 생각보다 재밌네요. 앞으로도 간간히 찾아볼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