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초창기 짜지앙미엔은 공화춘과 같은 식당이 아니라 손수레를끌거나 지게를 짊어진 장사꾼들이 노동자들을 상대로 판매하는 음식이었다. 조선으로 건너온 화교들 대부분이 님성이라는 점도 이런 음식들을판매하게 만들었다. 가족이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밖에서 시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조신 사람들이 짜장면만을 접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둥 지역의 요리인 노채魯菜가 모두 바다를 건너와서 이 땅에 선보였다. 오늘날우리에게 짜장면만큼이나 익숙한 라조기와 깐풍기, 팔보채 같은 것들이바로 산둥의 요리들이다.  - P72

그럼에도 조선으로 넘어오는 화교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잠시 주춤했던 화교들의 조선 진출은 다음해부터 재개되었다. 청일전쟁 패전 이후 일어난 의화단의 난으로 인해 산둥 지방이 큰 피해를 입었고, 여기에 흉년까지 거듭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살길을 찾아조선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러면서 경성과 인천의 화교들이 급증했다.
- P73

일본은 조선에 사는 화교들을 탄압했을 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조선인들을 선동해서 갈등을 일으켰다. 1931년 7월에 벌어진 만보산 사건이 대표적이다. 중국 지린성 만보산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충돌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후 흥분한 조선인들이경성과 평양, 원산의 화교들을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수많은 요릿집과 상점들이 불타고 백여 명이 넘는 화교들이 숨졌다. 총독부는 폭동을 수수방관하면서 양측의 갈등에 더욱 불을 지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화교들의 고난은 더욱 심해져서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따라서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화교들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 P76

1962년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화교들을 겨냥한화폐개혁을 실시했다. 아울러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시켰다. 당시대한민국에 외국 국적사의 대부분이 화교라는 섬을 감인하면 명백하게그들을 노린 조치였다. 덕분에 화교들에게는 큰 요릿집을 운영하면서 연회와 혼례 등을 치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작은 규모로 쪼그라들면서 한 때 외식의 꽃이었던 청요릿집들은 이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집‘이 되었다.
- P78

짜장면이 우리 음식이 되기까지는 앞서 소개한 대로 슬프고 잔혹한근대사를 거쳐야만 했다. 임오군란이 없었다면 산등의 전통요리인 짜지앙미엔이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총독부가 화교들을 집요하게 탄압해 요릿집만 할 수밖에 없게 만들면서 결과적으로 산둥요리의 대중화에 부채질을 했다.
- P81

돈까스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그들과 같아지겠다는 근대 일본의야망이 밑바탕에 깔린 음식이다. 천 년 넘게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던 일본인들은 국가를 서양처럼 발전시키겠다는 대의명분 아래 육식을 시작했다. 그렇게 돈까스는 우리의 짱장면처럼 일본에서 일상이 되었다. - P104

일본에서 카레라이스가 뿌리를 내리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것은 바로 군대와 학교의 급식이었다. 사실 일본이 외친 서구화와 문명화는 강력한 군대의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잘 먹이는 것이 필수였다.
- P155

엄청난 피해를 입은 다음 일본 육군도 뒤늦게 식단을 바꾸고 라이스카레를 도입했다. 이렇게 영국과 일본이 커리를 받아들인 것은 맛있어서가 아니라 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영국 해군의 경우사망 원인 1위가 전투가 아니라 각기병이었고, 그 비율도 압도적이었다.
일본 해군 역시 각기병으로 인해 병사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수 없게 되면서 전력 운용에 차질을 빚었다. 커리와 카레는 제국에서 병력 손실에대한 해결책으로 나왔으며, 필요에 의해서 섭취했던 음식이었다.
- P158

이처럼 빵의 역사는 전쟁과 사무라이, 서구화와 문명화의 그늘에서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단팥빵을 먹으면서 제국주의를 실현시켰고, 조선은 뜻하지 않은 근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 P189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은 영원할 것 같았던 이즈모야전성기의 막을 내리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군산으로 건너온 히로세 켄이치와 그의 자식들에게 조선은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었다. 당시 한반도에 살던 수십만 명의 일본인들 또한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미군정이추방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어떻게든 한국에 남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추방 명령이 떨어지자 히로세 켄이치와 그 가족들은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다.
- P193

여전히 얼음과 과일 시럽으로 만드는 일본의 카키코오리와는 달리 한국의 빙수는 단팥이 잔뜩 올라간 팥빙수로변신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화사나 생활사전문가들은 씹는 맛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민족 특유의 입맛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단팥은 달콤하기도 하고 씹는 감촉을 충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차츰 많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과일 시럽을 대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P250

식민지로 상징되는 우리의 근대에는 수탈과 침략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흡수해우리의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근대의 맛이 쓴맛이 아니라 다채로운 맛을 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 P253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이 시기에 가정에서 가마솥이 사라지는 현상과 맞물리면서 커피의 소비량이 늘었다고 얘기한다.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아궁이에 걸어놓은 가마솥은 그고 무거워서 따로 빼서 씻을수 없었기 때문에 물을 붓고 끓이는 방법으로 세척했고, 그 과정에서 생긴 숭능을 식사 후에 차처럼 마셨다. 한국의 전통 밥상은 코스별로 요리가 나오지 않고 반찬부터 입가심까지 한꺼번에 한 밥상에 모두 놓고 먹기 때문에 디저트라는 개념이 따로 없었다. 구수한 숭늉은 식후에 마시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가마솥대신 압력밥솥이나 전기밥솥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가정에서는 더 이상숭늉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대체해야 할 만한 식사 후 마실 것을 찾아야 했다. 여러 가지 음료들 중에서 낙점된 것이 가장 대중적인 음료인 커피다. 때마침 국내에서 생산이 되면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물에 타서 바로 먹을 수 있었고, 다방이나 회사에서 자주 마서왔기 때문에 익숙하기도 했다. 식사 후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완전히 정착되었다.  - P280

진한 원두커피는 물론 인스턴트 믹스커피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그정체불명의 쓴 맛에는 서구 열강을 좇고자 했던 ‘모던 뽀이‘ 들의 욕망과,
잦은 야근에도 정신을 붙들어야 했던 노동자들의 고단함과, 다방에서 얼굴을 붉히며 토론했던 장발 대학생들의 열기와, 여전히 남아 있는 서구에 대한 희미한 동경을 담은 낭만이 모두 녹아 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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