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는 《제이콥의 방을 비롯한 소설에서 빈번하게 ‘틈‘과 ‘부재‘를 사건의 출현으로 그려낸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작가 자신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울프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있다가 사라지는 순간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부재‘가 곧 시간의 틈을 만들어내고, 울프는 거기에서자신의 죽음을 보곤 했을 것이다.
이 도저한 부정성의 세계가 곧 울프의 미학을 구성했다고 할수 있다. 소설은 결국 과거의 이야기다. 이 과거야말로 무엇인가사라진 흔적이다. 아무리 다시 기억해낸다고 해도 결국 ‘틈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울프가 소설을 통해 추구한 ‘의식의 흐름은 바로 이런 ‘부재‘와 ‘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노력이었다.
- P68

따라서 울프가 쓴 전기는 사실상 소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뒷날 그의 소설은 이런 전기적 요소를 자양분 삼아 세상으로 나온다. 울프에게 삶이란 이런 의미에서 소설의 언어로 다시정의되어야 하는 날것이다. 개인사를 소설로 다시 쓴다는 것은실제 삶 자체를 마치 울프 자신이 발명한 것처럼 여기는 과정인것이다. 울프의 소설을 읽고 자전적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울프의 소설이야말로 삶이었다는 사실을 이 지점에서 깨달을 수 있다. 그에게 삶은 실제의 차원을 갖고 있는 다른 무엇이아니라 소설에 담겨 있는 허구 자체였다.
- P75

울프는 삶이라는 날것의 재료를 가장 먼저 취급하고 거기에서전통적 글쓰기 형식으로 포섭할 수 없는 다양성을 발견해내는것이 전기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실험하고자 한 당사자가 바로 울프였다. 그가 이론화하고자 한 ‘모던 픽션‘은 삶이 곧 소설이고 소설이 곧 삶인 글쓰기의경지를 지칭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정신은 19세기부터 시작된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핵심이기도 하다.
- P79

《자기만의 방이나 세 닢의 금화 Three Guineas에서 울프는 특유의 유물론을 드러내는데, 울프가 제시하는 ‘도시의 삶은 막연한환상이라기보다 물질 토대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단순하게 여성은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시의 삶을 누릴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유는 권리의 문제이고, 따라서여성의 인권은 울프에게 항상 원천적인 문제였다.
- P92

말년의 울프는 자신의 미학과 현실 참여 사이에서 동요하는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울프의 양가성은 그의 약점이라기보다 사실에 집착하는 것을 작가의 미덕으로 여긴 현실 참여적 지식인의 본질이었다. 울프에게 미학과 현실 참여는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울프는, 소설은 허구를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글쓰기의 형식이라고 믿었다.
- P96

울프의 글쓰기는 끊임없이 주체의 문제를 탐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 지점에서 여성이라는 처지는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물론 울프는 출발점을 떠나자마자 다른 사람이 규정하는 여성의범주를 용감하게 넘어가 버린다. 울프는 남성을 통해 규정되는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해체하고자 했다.
- P114

울프는 독자처럼 책을 읽지 말고 작가처럼 읽으라고 이야기한다.
재판정의 판사가 아니라 피고인석에 선 범인처럼 책을 읽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한다.
- P121

울프가 생각한 바람직한 미래는 단순하게 여성도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남성처럼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 여성이라면 남성이 만들어놓은 폭력적인 세계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이런 주장만 놓고 보더라도, 울프야말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유를 한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P174

그러나 울프의 생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것은 글을 쓰기 위해 여성들이 참여하는 활동 전반이었다. 글을쓴다는 것은 그냥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모임에 참석하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교류하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에세이를 집필하는 일련의 과정 모두가 글을 쓰는 일이었다.
지적이고 예술적인 교류가 여성 작가의 의미였다. 말하자면 여성작가는 단순히 글을 써서 먹고사는 것만이 아니라, 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 P185

울프에게 여성해방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인류사의 발전을 통해 다가오는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문제는 이 해방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여성의 자아를 ‘생성‘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여성 되기‘다. 지배 이데올로기가표현할 수 없는 ‘여성‘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비로소 참된 여성의 자아는 생성될 수 있다. 물론 이 자아는 고정된 정제성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벗어나는 됨devenir‘의 과정일 것이다.
- P189

말년의 울프는 평화주의자이자 반제국주의자였다. 이런 울프의 신념을 드러내는 말이 그 유명한 여성으로서 나에게 조국은없다. 라는 발언이다. 《세 닢의 금화》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울프의 정치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된다. 울프는 여성을 아웃사이더‘로 규정하면서 여성에게 조국은 세계 전체이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말한다. 한 국가의 아웃사이더인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 P217

울프는 어린 시절 오빠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그 상처를 직시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키지 않았다.
그에게 글쓰기는 그 모든 상처를 넘어서는 냉철한 행동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여성의 차별을 보고, 평생토록 꿋꿋하게 여성의 처지에서 바라본 세상의 문제를 날카로운 산문으로직조했다. 그의 생애는 결코 가부장적 사회가 부여한 여성적인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여성이라서 정규 교육을받지 못했던 부당한 차별에 맞서 그는 쉬지 않고 글을 읽고 썼다.
그에게 모더니즘은 단순한 문화 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공고하게 할 만한 논거이기도 했다.
- P253

울프는 난무하는 ‘나‘에 대한 신변잡기들이 무미건조하고 답답한 소음이라고 생각했고, 그 나의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무수한 다른 형상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나는 특정 장소와 시간에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제약을 뛰어넘어 흐르는 것이었다.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시간성에 속해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과거를 말하고 미래를 말하지만, 항상 현재에 있다.
현재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를 살게 되고, 미래로 나아간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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