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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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째 눈이다나는 창가에서 밤을 바라보고 추위의 소리를 듣는다이곳의 추위에는 소리가 있다아주 특별하고 기분 나쁜 소리건물이 얼음 속에 끼어 짜부라지면서 끙끙대고 삐걱대는가 싶을 정도로 불안한 신음을 토해낸다 시각 교도소는 잠들어 있다여기서 한동안 지내다보면  건물의 신진대사에 익숙해져 어둠속에서 교도소가 거대한 짐승처럼 숨을 쉬고간간이 기침을 하고뭔가를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들을  있다교도소는 우리를 집어삼키고 소화한다우리는 그의  속에 웅크린 채 번호가 매겨진 주름들 속에 숨고 위장의 경련들 사이에서 잠을 청한다그저   있는 대로 살아간다.- P11

 

오랫만에 책을 열면서 마음이 설레었다.

저 첫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어느 춥고 바람소리가 거친 어딘가의 검은 숲으로 이동했다.

주인공은 교도소에 있다는데, 그래서 건물이 추위에 얼어붙은 숨을 쉬고, 기침을 한다는데 나는 왜 숲으로 갔을까?

생각해보니 아주 다른 곳은 아니었던듯하다.

나의 숲은 바로 그 건물을 둘러싼 검은 숲이었고, 나는 멍하니 숲의 가장자리에서 그 커다랗고 낡은, 추위에 떠는 건물을 보고 있었다. 책에서는 이 교도소가 숲이 아니라 강가에 있다고 얘기되어 지는데도 말이다.

 

이런 기묘함은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된다.

주인공은 교도소에 있고, 그는 밤마다 죽은자들을 만난다.

아버지 요하네스 한센, 아내인 위노나, 그리고 반려견 누크.

이들은 주인공 폴 한센이 평생에 걸쳐 가장 사랑한 이들이고, 이들과의 삶을 되새김으로써 어쩌면 감옥에서의 나날들을 그냥 살 수 있는 대로 살아간다.

 

위노나와 누크는 조금 더 늦게 찾아왔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우리는 잠시 서로 꼭 붙어 있었다. 산 자고 죽은 자고 상관없이, 우리가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을, 약간의 온기와 위안을 서로에게 주고 싶어서.   - P79

 

 

이야기는 폴이 저 세 사람과 살아왔던 일생을 되돌아보는 한 축과, 현재 교도소에서의 생활이 또 한축이다.

두 개의 삶을 대하는 폴의 태도는 내가 책의 서두에서 숲의 가장자리에서 건물을 보는 태도와 비슷하다.

한없는 연민과 애정으로 넘치지만 폴은 주인공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한다.

어쩌면 폴은 사랑하던 이들과의 삶을 돌아보고 되새김질하는 것만이 지금의 삶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들의 삶은 슬펐다고 해야 할까?

아니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그들의 삶에도 빛나는 순간들은 무수히 존재했고, 그들은 그 빛나는 순간을 영원히 살고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참으로 가혹하게도 그 변화의 흐름은 이들의 지속하고픈 일상을 거부하고 배제한다.

아버지 요하네스가 68혁명 이후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에 절대로 편승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도,

아들 폴이 공동체적 가치가 무너지고, 자본만이 최상의 가치가 되어버리는 삶에 편승할 수 없었던 것도,

그들에게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달라지는 세상은 너무 가혹하다.

 

아버지 요하네스의 마지막 설교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아버지 요하네스는 이 설교를 마치고 교회를 나가는 길에 쓰러져 죽고만다.

 

여러분이 나를 심판하고 단죄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P161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들의 삶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과도한 몰입도 동일시도 없었고, 거부도 없었다.

그저 한없는 연민으로 그들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느낌.

우연처럼 들이닥치는 삶의 변곡점들은 저렇게 잔인할 수 있겠구나.

내가 나의 삶의 원칙을 그런대로 지키고 살아올 수 있었던 건 그저 남보다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겠구나.

팬데믹 이후 나타날 새로운 세상에서도 나와 나의 아이들은 지금껏 가져온 삶의 원칙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어쩌면 결국 닥쳐봐야 안다는게 답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특별할게 없는 사건과 서사로 풀어나가는 얘기라 조금만 더 내용을 얘기하면 모든게 스포일러가 되버리는 책이다.

이 책은 사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들의 마음과 그 마음에 대한 연민으로 읽어나가는 책이었다.

주인공들의 삶의 순간 순간, 그들의 고통을 한발짝 물러서서 관조함으로써 더 절실하게 그들의 삶을 연민하게 하는 그런 문장들이 독서의 시간들을 가득 채운다.

스카겐으로 돌아간 폴에게 부디 그 자신의 삶이 계속 지속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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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03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이 프랑스 소설 장폴 뒤부아 작품이네요. 저는 표지만 보고 정세랑 작품인줄

바람돌이 2021-01-03 00:14   좋아요 1 | URL
표지는 딱 정세랑 작가 책 맞네요. ㅎㅎ 실제 책 분위기와 저 표지는 안 맞는거 같아요

syo 2021-01-03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꼬마 시절 최초로 사랑에 빠진 프랑스 소설이 장폴 뒤부아였는데, 한동안 한국에 책이 안 나와서 타계하신 줄...... 이런 책이 나온 것도 깜쪽같이 모르고 있었네요-_-

바람돌이 2021-01-05 00:44   좋아요 0 | URL
전 이 사람 책을 이 책으로 처음 봤어요. 찾아보니까 꽤 많이 번역되어 있네요. 진지한데 유머감각을 잊지 않는 책이라 다른 책들도 살짝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