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품절


90년대에는 이렇게 온갖 문화적 실험과 시도들이 시작되었다. 이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절대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된 뒤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었으며, 집단에 매몰되어 있던 개인성을 '문화'를 통해 구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향유는 어느 정도 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67쪽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지식으로 부르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들을 신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농업, 어업, 임업, 중소기업, 특허, 근로, 교육, 문화 예술, 금융, 가정 (농어민, 경영인, 공무원, 자영업자, 기타 분야는 현재 폐지) 등의 분야에 걸쳐 총 3580명을 신지식인으로 선정하였다.
'신지식인 선정'과 '문화 산업 육성'은 지식과 문화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고자 했다는 면에서 같은 맥락이었다. 한국 사회의 지식과 문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상품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상품화될 수 있는 것들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뒤로 한다고 하더라도-지식과 문화를 기반으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매우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는 물론이고 '성과가 당장 눈에 띄지 않는' 영역들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책들은 당장의 '부가 가치'만을 고려했을 뿐, 문화의 기본적인 토대에 대한 성찰은 전무한 것들이었다. -172쪽

제2의 빌게이츠나 이찬진을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지만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간다'는 이 시대의 명제를 따라 '한 우물만' 팠던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제야 '이제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의 시대'라며 인식을 전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애써 팠던 우물에서 기어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회는 그들에게 '젊으니까 괜찮아'라는 공허한 위로만 던졌다.
-181쪽

당신은 지금 마시멜로를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달콤한 위로,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면 언젠가 얻을 수 있다는 조언, 그것들의 진짜 의미는 사실 '그러니까 혼자 알아서 하세요'라는 냉정한 외면이다.-185쪽

열정 노동의 확산은, IMF사태라는 국내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창궐이라는 전 세계의 상황을 근간으로 한다. 국가와 자본은 사람들의 열정을 필요로 했다. 동시에 신자본주의는 '불안정함'이라는 운명을 새 시대에 부여했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요구되었다. 면접장에서도, 구직자가 열정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인사 담당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널 대체할 사람은 많아'라고 이야기했다.-187쪽

'일도 많이 시키고, 돈도 안 주어도 되는'-착취에 최적화 된-상황이 펼쳐졌다-190쪽

영국의 문화 이론가 테리 이글턴은 "신기하게도 이 세계는, 구성원 대부분을 쫓아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선택 가능한 항목은 단지 두 가지이다. 착취당하거나, 그조차도 당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세계는 넓어졌으나 갈 곳은 없어진 역설적인 상황,-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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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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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도서관에 갔다가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읽었다. 하인리히 뵐은 굉장히 유명하다는데, 나는 그의 책을 처음 읽는 것이었고, 다른 도서관에서 <9시 반의 당구>를 슬쩍 본 이래로, 그의 소설을 모두 읽고 말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그래서 그 토요일의 오후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 갔다가 하인리히 뵐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나는 본의 아니게 이 얇은 책을 다 읽고 말았다. 정말로 하루만에 먹어치우듯이 다 읽어버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단지 눈을 뗄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잠깐 눈을 뗄 틈도 주는 그런 소설이었지만-그런데 이거 말하자면 소설 같다는 느낌보다 여기 저기서 오려내서 사건을 이어 붙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았다.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조심하세요. 소설 내용이 약간 들어가 있습니다.)간단히 이야기하면 카타리나 블룸은 평범하고 성실한 여성인데 살인자가 된다. 왜냐면 황색언론이 그렇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흔히 알고 있듯이 언론은 거의 독재적이고 자기 나름대로 객관적이라서 굉장히 주관적일 수도 있다. 진실은 편집되고 사람의 인격은 추락하거나, 어쩌면 완성되기도 한다. 읽으면서 ..진짜 사람이 사람한테 질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게 카타리나의 아픈 어머니를 찾아가 카타리나가 범죄자와 연관이 있으므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겠다고 추궁하는 기자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참 나쁘네, 했다. 의사가 면회를 거절했는데도, 페인트공으로 위장해서, 거의 죽을 것 같은 사람한테 가서 그 딸의 심각한 상황 혹은 오해되고 있는 상황을 전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진실을 왜곡하거나 탈락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들이댄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죽고 만다. 카타리나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카타리나는 총을 손에 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 역시 그녀가 총은 단지 분노의 표현이었을 뿐, 누군가를 살해할 생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총을 숨기고 있는 그녀를 향해 기자가 노골적으로 그녀를 무시했기 때문에, 게다가 그녀를 인격이 아닌 잡년으로 취급한 것에 대해 순간적으로 화가 났기 때문에, 총은 쏘아지고 말았던 것이다.   

 <카타리나 불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기 일주일 전에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는데, 내 안에서 두 소설이 비슷하게 섞여버린 감이 있다. 둘 다 총이 나왔고, 어떤 이유로 의도치 않게 살인자가 되었고, 무고하다면 무고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더욱 설명하기 힘들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방인>이 뫼르소 자신에 대한 기록이고, 자신에 대한 정당방위적인 고백이라면, <카타리나>는 외부에서 비춰지는 대로 진행되는 것이고, 가해자가 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되고야 마는 상황인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그러나 결국 둘은 같은 길 앞에 당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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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6-0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안읽어봤어요. 그런데 9시 반의 당구라는 제목은, 전에도 한번 들은 것 같은데, 언제들어도 참 서늘하게 감각을 찌르네요. 단지 9시 반의 당구, 일 뿐인데.

김토끼 2011-06-08 16:53   좋아요 0 | URL
전 당구가 뭔지 잘 몰라서, 그 '감'이 잘 안오지만 ㅋ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 것 같아요.
 

나는 내가 조금도 읽지 않고 쓰지도 않고 살 수 있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 그렇게 해봤는데, 그런 결심을 했을 때, 내 상황은 대학원까지 끝난 상태에서 학교로 갈 수도 없었고, 글 쓸거예요, 하면서 부모님한테 빌붙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외부적인 상황이 내가 지난 몇 년동안 유지해온 삶의 체계를 바꾸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취직이라는 것을 해야한다면 영어를 해야 하니까 영어를 하겠다고 말하고, 다시 학원비를 타다 쓰고 밥값을 타다 쓰고 가끔 놀아야 된다고-그러나 거의 놀지 않았다 돈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일이만원을 추가로 타서 썼다. 물론 내 통장에도 빈약하나마 돈이 약간 있었고, 내 돈을 탕진하면 믿는 구석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아끼고 아끼면서 썼다. 그러다가 겨우, 통장잔고가 바닥을 찍기 전에 일자리-임시적인-를 얻었다. 그 사이 나는 책을 아주 안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짜 많이 읽지 않았고, 스스로도 책 따위가 지금 뭐가 중요해, 하면서 읽지 않았고, 글은 진짜 쓰지 않았다. 가끔 쓰고 싶어서 몇 자 끄적였지만, 그것은 완성되지 않았고, 완성된 것을 쓰는 것은 왠지..죄를 짓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다소 혼란스러웠던 일 년동안 예전과 달리 나에게도 세상에 나갈 때 내밀 수 있는 토익 점수라는 것이 생겼고-그러나 부족하다고 느낀다 왜냐면 토익 고득점자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아서 그렇게 느끼게 만드니까- 당분간은 돈을 벌 수도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안정권. 그리고 주말이 되자, 친구도 별로 없고, 애인도 없고, 할 것도 많지 않은 나는, 집요하게 도서관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주말에 그러다가 이제는 사무가 끝나면 도서관에 갔다. 왜 가냐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거기 가면 내 눈에 활자를 찍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되도록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도서관-어차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에 가서 아무거나 읽고 있다. 그런데, 이 기분이 학교 다닐 때 책을 읽던, 그 숙제하는 기분이 아니었다. 정말 좋았다. 책을 읽고, 글도 좀 썼다. 하지만 이제 나란 인간은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읽고 싶었던 것이라고 느낀다. 점점 알게 된 것은, 세상에 책의 형태로 나온 것 중에 쓰레기란 없는 것이 아닐까. 그냥 책이라는 판형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것의 가치를 느끼는 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 정말 좋아서 미치게 만드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만 읽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누군가 가치 있다고 선정해 놓은 것만 읽는 일이, 어쩌면 지난 몇 년간의 내 독서를 힘들게 했던 것이다. 이제는 거의 읽는 일, 쓰는 일로 업을 삼겠다는 마음을 포기했고 그래서 읽고 싶은 것에만 마음을 기울이게 됐고, 그러자 정말 즐거워졌다. 하루 종일 앉아서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프고 엉덩이도 아픈데, 사무실에서 나오면 바로 도서관으로 가서 다시 아픈 눈, 아픈 엉덩이로 책을 보고 메모한다. 그리고 아무런 욕심도 갖지 않는다. 이 상태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난 이런 삶을 내가 계속 살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틀리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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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6-08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도 읽지 않고 쓰지도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럴 때 읽게 되고 쓰게 되는 무언가가, 굉장히 좋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예감이 있어요. 통장잔고는 떨어지고, 날은 덥고, 저도 오늘은 도서관에나 가야겠어요.

김토끼 2011-06-08 16:51   좋아요 0 | URL
저도 30분 후면 도서관에 앉아 있을 것 같아요. 5시가 퇴근!! 여름에는 시원해서 가는 일이 많아요. 작년 여름에는 거의 도서관에서 살았던 거 같아요. 공부도 공부지만, 무엇보다 도서관은 무료고 집에 있으면 더워서요 ㅎ 조금도 읽지 않고 쓰지도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조금이라도 읽고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걸 깨달았어요. '쓰고 읽는 것' 이외의 삶의 다른 부분을 고민하게 되면서,,,이상하게도 '쓰고 읽는 것'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잠시후에는 서로 각자의 도서관에 있겠네요.^^
 

 

2011년 5월 29일 일요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4쪽-56쪽

_과연 정말 좋아서 하는 걸까?  
_항상 더 열심히를 부르짖게 되는 건 내재화된 기업가의식 때문?
_문화종사자: 우린 노동자 x 장인 o 그런데 배고프고 일은 죽도록 하는데 삶의 질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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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파구가 없을 때 보게 되는 종류의 책들이 있다. 자기계발서. 혹은 셀프-코칭. 이렇게 처세를 강조하는 책들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저항하는 그룹도 있지만, 반대로 지지하고 숭배하는 세력도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잘 써진 자기계발서는 아주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편. 말하자면 지지 세력이다. 시기적절한 순간에 등장해주는 자기계발서는 고맙기까지 하다. 솔직히 말하면 '여자의 운명은 20대에 결정된다'는 나만의 명저다. 속물 20대의 철저한 자기 관리 같은 게 뭔지 알게 되었을 때 어쩐지 쾌감이 들었다. 원래부터 말초신경을 자극하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잘 팔릴 목적으로 세상에 나오는 책들은 말초적으로 가는 부분이 있다. 그래도 안 팔리는 책들이 있고, 잘 팔릴 목적 없이 세상에 나와서 잘 팔리는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목적이 어떻든 책은 읽히려고 태어난다는 점이다. 여하튼 '읽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신문의 단평이나 블로그 한 꼭지, 심지어 화장실 낙서에도 적용된다. 분명 그 세계에서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쓰는 사람이 있고 대충 읽혀도 그만 안 읽혀도 그만인 태도로 쓰는 사람이 있을 테다. 그런데 결과는 묘하게도 열정을 다해 쓴 글이 안 읽히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대충 썼는데 막 읽히는 때가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이기는 습관>을 보고 쓰는 글이니만큼, 이기는 습관에 초점을 두고 얘기해보겠다. 그러니까 '열정적!' 그것은 이기는 습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 '열정적'이 '지는 습관'을 감싼 금박의 포장지 같은 건 아닌가 싶다. '잘 하고 싶다. 완전 잘 하고 싶다. 미친 듯이 잘 하고 싶다' 라는 마음이 '열정'이라는 껍데기를 썼을 뿐. 그런 마음은 기본적으로 못하는 자신을 인식하는 데서 온다. 못하니까 잘하고 싶어지는 거다. 잘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 안 한다. 잘 하는 사람들은 좀 더 세부적으로 말한다. 예를 들면 '잘 쓰고 싶다. 엄청 잘 쓰고 싶다'랑 '조사의 쓰임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다' '좋은 문장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스스로도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지만 더 얘기하면 '대충'이라는 말 속에 오히려 '이기는 습관'이 있다고 본다. 100ml컵에 물을 부어 넘치려면 얼마의 물이 필요하나? 뭐, 100ml이상의 물이겠지. 인풋이 넘쳐야 아웃풋이 나온다고, 지금 메모지를 펼쳐 한 문장만 써보면 된다. 그것이 바로 컵에서 쏟아진 물이다. '대충'하는데 결과가 좋은 사람들은 평소 컵에 물이 차고 넘치는 사람일테다. 막 휘갈기는데 작품이다. 그간의 과정이 struggle인지 enjoy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의 컵은 이미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런고로 때때로 열정은 대충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그 대충이라는 경지 속에 오랜 열정의 시간이 축척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뭐든 대충할 위인은 안되니, 감히 추측만 할 뿐이다.

 

★ 이 구절이 좋았습니다. 

(140) 프로는 아마추어처럼 '노력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이나 '전보다 조금 더 성장했다'는 낭만적인 생각으로는 생존할 수가 없다. 결국 프로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은 경기에 나가 이기는 것, 탁월한 실적으로 우승컵을 거머쥐는 것뿐이다.  

(끝)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
 

       모든 일에서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 
       일에서나, 길에서나
       마음의 혼란에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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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3-29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일단 지금까지의 저는 항상 '아 젠장 엄청 잘쓰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쪽. :)

김토끼 2011-03-30 10:10   좋아요 0 | URL
팝트레쉬님은 '아 젠장 엄청'까지는 아니어도 '엄청' 잘 쓰고 있으신데요!! '아 젠장'까지 바라시는 거였군요 ㅎ _자기계발서가 질타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생각의 틀을 이분화시키니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극단으로 밀어붙일만큼 혼란을 주는 책을 읽어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런고로 누군가는 안 읽히려고 기를 쓰고 써나가는 모습도 멋있지 않을까요.ㅎ 저만의 생각일까요.. (갑자기 강연회에서 박상륭 소설가가 "남자들은 소설 쓰지 마세요, 여자는 좀 괜찮지만, 그래도 왠만하면 쓰지마세요"라고 한 게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