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대로 옛날 생각이 나서 읽던 페이지를 펼쳐두고, 이런 일 저런 일 짧은 일기를 적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2월 초에 (책 선물할 일이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의 날 10개의 질문



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한참 생각했는데, 특별히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방 안에서 독서대를 세우고 책을 읽습니다. 차 안이나 비행기 안에서는 쉽게 피곤해져서 잘 읽지 않습니다. 도서관에 갔다가 서가 옆에 서서 책을 읽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워서 벌서는 아이처럼 책을 눈높이에 들고 팔을 후들후들 떨며 읽을 때도 있습니다. 여하간 제 생각에 책 읽기가 가장 유용할 때는, 노트북 전원을 눌러놓고 부팅되기를 기다리는 순간입니다(노트북이 다소 오래되어서요). 순간이라고 하기에는 길고, 시간이라 하기에는 짧은 몇 분동안 한 쪽 정도 책을 읽습니다. 부팅이 끝나고 몇 분 더 읽던 것을 마저 읽기도 합니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크레마를 선물 받은 후 한 동안 전자책만 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주로 종이책을 봅니다. 개인적으로 종이책이 더 예쁘고, 손에 닿는 질감이 있는 확실한 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메모는 하지 않지만 밑줄은 그어 둡니다. 떠오르는 단상은 수첩에 메모합니다. 책을 접지는 않습니다. 도그지어를 시도해보는데, 항상 내키지 않아서 접었다가 다시 펼쳐놓습니다. 대신 중요한 구절이 있는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여둡니다.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엊그제 침대를 방에서 치워버려서 침대가 없습니다. 머리맡 대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행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필경사 바틀비>, <이만큼 가까이>, <나홀로 제주>. 지난 주부터 나쓰메 소세키에 관심이 생겨 관련 책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두 시간 전 알라딘에서 당일 배송으로 받은 책입니다.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개인적으로 서재가 없습니다. 책장으로 둘러쌓인 방에 식구들의 온갖 책이 모여 있습니다. 책배열은 소설은 소설끼리, 에세이는 에세이끼리 모아놓는 식입니다. 책은 일단 다 읽고 중고서점에 팔거나 마음에 드는 책은 소장합니다. 십여 년 전부터 책을 사서 쌓아두는 습벽이 있어 요즘은 조금씩 고쳐보고 있습니다. 일단 오래 갖고 있었지만 읽지 않은 책들을 중고서점에 팔고 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밥이 줄지 않는 기분이 들 때처럼 책을 팔아도 팔아도 줄지 않는 기분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아주 어렸을 때는 책을 안 좋아했습니다.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읽기는 했지만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좋아한 책은 어쩌면 중학교 도덕 교과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래의 청사진'이라는 단어가 멋져서 그 페이지를 여러 번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중학교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을 빌려 읽고, 소설은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뒤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은 하루키를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소설도 꽤나 읽고 있습니다.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혹시 그런 책이 있을까 싶어서 방금 책장을 뒤져보고 돌아왔는데,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런 책이 없다니 저야말로 섭섭해서 이 질문에 길게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김연수 소설가를 만나고 싶습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소설가의 체력 같은 것(탄력이나 끈기 같은 것)은 어떻게 길러지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달리기라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썰을 여러 번 풀었지만, 한국 소설가는 어떻게 달리고 어떻게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소설을 써나가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무엇을 드시는지도 궁금하네요. 내친 김에 한국 작가들은 무엇을 먹고 글을 쓰는지 탐구한 책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인간의 조건>입니다. 한나 아렌트와 에릭 호퍼가 아니라 한승태 작가의 책입니다. 재작년에 구입하고,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금정연 서평가의 서평을 읽고 꼭 읽으리라 생각했는데, 자꾸 미뤄지는 책 중 하나입니다. 서평을 다시 읽고 독서 의지를 불태워야겠습니다.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을 몇 장 읽다가 나쓰메 소세키에 밀려 덮어두었습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두 권 짜리를 다 읽을 때까지 나쓰메 소세키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잠시 밀어둔 것 뿐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을 읽은 뒤 집어든 책은 정세랑 소설가의 <이만큼 가까이>입니다. 내년 책의 날에는 8번 답안에 <한밤의 아이들>을 답변으로 쓰고 있을 듯 합니다.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가져가겠습니다. 다시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3권이며, 다소 분량이 두껍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을 계기로 저에게 소중한 책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저녁 상을 앞에 두고 아버지께 나쓰메 소세키를 아시느냐고 여쭤보았다. 워낙 신문을 자주 보시니 특별히 문학에 관심이 없어도 유명한 작가 목록은 어느 정도 훑는 분인데, 그를 모르겠다고 하셨다. 대신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안다고 하셨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상을 받았으니, 신문에 이름이 나오긴 나왔을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인세 수입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어, 다소 강한 인상을 받아 기억하시는 것 같았다. 나쓰메 소세키가 국민 작가이고 일본 지폐에 등장했던 인물이라 말씀드리자 그런 작가가 있었냐며 눈을 휘둥그레 뜨셨다. 사후 100주년 기념으로 번역된 현암사의 나쓰메 소세키 전집 중 <행인>을 읽으면서, 아버지께 어떤 부분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특히 오빠가 독립한 뒤로 점차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드는 점이나, 어릴 적 어머니가 두 형제를 다루는 모습에 나타나는 차이 따위가 비슷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문호란 대인간관찰자에 다름 아니다, 소세키는 오랜 세월 위궤양을 앓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저녁 식사를 마쳤다. 



   <행인>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친구, 형, 돌아오고 나서, 번뇌. 이렇게 나누어진다. 친구/형, 돌아오고 나서/번뇌. 이렇게 3개의 중편으로 세분하여 읽어도 이야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럽지 않을 듯하다. 특히 앞장 '친구' 편은 개별적으로 읽어도 완성된 느낌이 있다. 그래서 혹시 <행인>의 두꺼운 분량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 앞장만 읽어도 좋을 듯 하다. 시작 또한 흥미로운 소설이다. 




  우메다 역에 내리자마자 나는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곧장 인력거를 잡아타고 오카다의 집으로 달렸다. 오카다는 어머니 쪽으로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대체 어머니와 어떻게 되는 사이인지도 모른 채 그저 먼 친척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오사카에 내리자마자 그를 찾아간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일주일 전에 한 친구와, 지금부터 열흘 안에 오사카에서 만나자, 그리고 함께 고야 산에 오르자,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세에서 나고야까지 둘러보자, 라고 약속을 했는데 둘 다 오사카에는 딱히 만날 만한 장소가 있는 게 아니어서 나는 그 친구에게 그만 오카다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었던 것이다.(행인, 현암사, 15쪽)




   러시아 소설만큼 일본 소설도 이름과 지명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오카다, 오카네, 오사다, 오시게. 인물 이름이 짧긴 해도 굉장히 헷갈리는 구조다. 읽다보면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공책에 이름을 적어놓고 읽었다. 그렇지만 얼마 읽지 않아 인물들의 개별적 윤곽이 잡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비슷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었다(그로 인해 중반부까지 굉장히 탄력적인 독서를 할 수 있다, 천천히 읽으려 해도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갔다, 물론 이것은 '중반부'까지의 상황이다. 세번째 장이 시작되면서 소설은 느린 독서를 요구하는 듯 하다). 얼마 전 독서한 <보바리 부인>에서는 좀처럼 인물의 개별성에 닿지 않는 인물의 전형성을 읽었다면, <행인>에서는 반대로 인물의 전형성에 닿지 않는 인물의 개별성/개인성을 읽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이렇구나, 저 사람은 저렇구나 감히 판단내릴 수가 없게 된다. 인물의 내면을 탐사해가면서, 사건은 먼지 더께가 앉은 듯 흐려진다. 가령 형인 이치로가 부인인 나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형과 함께 여행 중인 H의 편지를 통해 2중으로 흐릿해진다. 신경쇠약을 겪는 이치로의 광기가, 가족에게 폭발한 최초의 사건은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남기지 않는다. 이치로의 부인 나오는 이치로에게 맞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처럼 저항없이 맞는다. 사실 나오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부의 인물이다. 화자인 지로와 지로의 형인 이치로 사이에서 두 사람의 사색을 더욱 깊게 만드는 여자로서 등장한다. 그녀로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지로가 형수인 나오를 두고 생각하는 구절을 읽어보면,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더 명확히 알게 된다.



  나는 그동안 한 사람의 형수를 여러 가지로 보았다. 그녀는 남자조차 초월할 수 없는 것을 시집온 그날부터 이미 초월해 있었다. 그녀에게는 어쩌면 처음부터 초월해야 할 담도 벽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였다.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때는 또 그녀가 모든 것을 가슴속에 넣어두고 쉽사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른바 야무진 사람처럼 비쳤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녀는 흔해빠진 야무진 사람의 단계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그 차분함, 품위, 과묵함, 누가 평해도 그녀는 너무 야무진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놀랄 만큼 뻔뻔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떤 순간 그녀는 인내의 화신처럼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인내에는 고통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고상함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쓰러져 우는 대신 단정히 앉았다. 마치 그렇게 앉아 있는 자리 밑에서 자신의 발이 썩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요컨대 그녀의 인내는 인내라는 의미를 넘어서 거의 천성에 가까운 어떤 것이었다.(행인, 현암사, 303쪽)



   화자인 지로는 형수와 자신 사이 위태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어 형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로 역시 형수만큼이나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이러한 처사는 늘 형의 의심을 사게 된다. 그것이 형의 예민한 신경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형이 형수에게 손찌검을 하게 된 계기 중 많은 부분은 지로의 애매한 태도에 있으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 소설에서 모든 사건은 흐릿해지고, 작중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발설하며 오히려 자신을 지워나간다. 지로의 형인 이치로의 경우, 모두의 관심과 걱정 속에서 주시되고 있지만 그가 어떤 정신적 상태로 고통받는지 알 수 있는 증거는 형과 함께 여행을 떠난 H의 긴 편지 뿐이며, 편지의 주관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형의 상태는 도저히 객관적으로 이렇다, 결론 내릴 수 없는 처지이다. 게다가 나쓰메 소세키는 영원히 시원한 답을 내려주지 않을 작정으로 H의 편지를 끝맺으면서, 동시에 소설을 끝낸다. 내내 기대하고 있던, 편지를 받아본 지로의 반응이나, 형수와 지로의 관계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모든 일에 한 발 물러선 (진심으로는 사려깊다 할 수 없는) 지로처럼 책을 읽은 독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쓰여지지 않는 <행인>의 다음 장이 어떻게 되어갈 지 짐작하며 H의 편지를 읽을 뿐이다.



  자네나 어르신들은 형님의 장래에 대해 특별히 명료한 지식을 얻고 싶다고 바랄지도 모르겠네만, 예언자가 아닌 나는 미래에 참견할 자격이 없네. 구름이 하늘을 어둑하게 덮었을 때 비가 내리는 일도 있을 거고 또 비가 내리지 않는 일도 있을 거네. 다만 구름이 하늘에 있는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네. 자네나 어르신들은 형님이 곁에 있는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며 딱한 형님에게 다소 비난의 의미를 돌리고 있는 모양이네만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을 행복하게 할 힘이 있을 리 없네. 구름에 싸인 태양을 보고 왜 따뜻한 빛을 주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그렇게 다그치는 쪽이 억지일 걸세. 나는 이렇게 함께 있는 동안 가능한 한 형님을 위해 그 구름을 걷어내려 하고 있네. 자네나 어르신들도 형님에게 따뜻한 빛을 바라기 전에 우선 형님의 머리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을 걷어내주는 게 좋을 걸세. 만약 그걸 걷어낼 수 없다면 가족인 자네나 어르신들에게 슬픈 일이 생길지도 모르네. 형님 자신에게도 슬픈 결과가 되겠지. 나도 슬플 거네.(행인, 현암사, 41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픈 것아, 아픈 것아, 날아가라 - Novel Engine POP
미아키 스가루 지음, 현정수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아무리 말해도 날아가지 않았기에, 이 말은 계속된다. 그리고 계속되고 있으므로 알게 된다. 여전히 아프고 부지런히 위로해야 한다. 성실히 위로받아야 한다. 미아키 스가루. 이 작가에 대한 어떤 이들의 팬심이, 좀 대단하다고 느꼈다. 좋아하는 마음을 한껏 드러내도 괜찮을, 그런 뭔가가 있는 걸까. 그 기세에 밀려 앞뒤 재지 않고 미아키 스가루의 신작 <아픈 것아, 아픈 것아, 날아가라>를 구입했다. 읽어오던 소설과 다소 달랐다. 가볍다면 가볍지만 가없다면 정말 가없는 소설이었다. 주인공 두 사람의 불행을 너무도 쉽게 보여주고 만다. 애틋한 감정을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눈치채게 만든다. 이것은 독서의 진입장벽을 한없이 낮춘, 노골적인 전개다. 잔인한 묘사도 뭉그러뜨리지 않는다. 가혹은 흐려지지 않고, 촘촘하게 엮인다. 그것이 의외라면, 의외인 부분이었다. 철저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도중에 몇 번 책장을 덮었다. 두 번째로 책을 덮은 순간, 아마도 다시 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삶을 망친 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복수, 그 잔혹한 방식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방식이 여자 주인공인 키리코가 사용하는 양재가위처럼 날카롭게 신경을 세웠다. 하지만 언제 다시 펼쳐든 걸까. 잔인성과 가혹성에도 불구하고 키리코와 미즈호 군이 만들어내는 연약하고 기묘한 평온에 매료되었다. 결국 무심결 책을 펼쳤다 불편한 자세로 읽어 나갔다. 나중에는 독서대를 펼치고 책상에 앉아 끝까지 읽었다. 사로잡힘이 있는 가독은, 독자에게는 충분한 미덕이라 생각한다. 미아키 스가루는 그것을 해냈다. 예고된 만큼 복잡한 드라마는 아니지만 키리코와 미즈호 군이 빠진 불가해한 함정 속에서, 나는 예고되지 못한 복잡한 심경에 자주 휩싸였다. 어찌할 수 없음을 어찌할 수 없음으로 두어야 하는 '약함'을 이겨내기 위해, 키리코와 미즈호 군,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날아가지 않겠지만 아픈 것아, 아픈 것아, 날아가라. 적어도 진심을 다한 위로는 지치지 않고 계속 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테드 강연으로 유명한 나이지리아 출신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얇은 책이다. 애초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규정하지 않던 아디치에가 사전에서 찾은 페미니스트 뜻은 이렇다.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말하자면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싫어하고, 일체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여 일부러 제모하지 않고, 하이힐을 신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흔히 오해하는 남성혐오자=페미니스트 공식은 케케묵은 옛날의 것이다. 사견이지만 남성 혐오를 바탕에 둔 여성의 불평등 해소는 자칫 남성 불평등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예전에 미혼의 한 여성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혼을 하면 '돈 버는 일'도 '집안일'도 남편이 다 하게 만들 거야 라고. 당시 나는 좀 의아해 하며 넘겨 들었지만, 훗날 거듭 떠올리면서 그 농담은 농담이란 핑계를 대더라도 이기적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아니라 노예를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녀 개인의 의식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결혼한 여성은 살림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집안일도 남편'에게 미루겠다는 생각을 낳게 한 건 아닌가. 그녀가 '집안일'을 자신에게 부과될 노역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 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리자로 남편을 내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살림이 여자의 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면, 집안일은 그녀의 일만이 아니게 되고 그러므로 그녀의 남편이 집안일을 온전히 떠맡게 될 확률도 거의 없다고 본다. 



중학생인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함께 외출하면, 둘 다 십대라서 용돈이 몇푼 없는 것은 똑같지만 늘 남자아이가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돈을 다 내야 한다고들 여깁니다. (그러고서는 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부모의 돈을 슬쩍하는 경우가 더많을까 의아해하지요.) 

만일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남성성과 돈을 연결 짓지 않도록 배운다면 어떨까요? "원래 남자애가 내는 거야" 대신 "남자든 여자든 돈이 더 있는 사람이 내는 거야"라는 태도를 취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지금까지 누려온 이점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실제로 돈이 더 많은 사람은 대체로 남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아이들을 다르게 키운다면, 앞으로 오십년 혹은 백년 뒤에는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물질적 수단으로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더는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자들에게 저지르는 몹쓸 짓 중에서도 가장 몹쓸 짓은, 남자는 모름지기 강인해야 한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아를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낄수록 사실 그 자아는 더 취약해집니다.

  또한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대단히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남자의 그 취약한 자아에 요령껏 맞춰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자신을 움츠리라고, 자신을 위축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망을 품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성공해서는 안 돼. 그러면 남자들이 위협을 느낄 테니까. 설령 남자와의 관계에서 네가 가장 노릇을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는 특히 그렇지 않은 척 해야 해. 안 그러면 남자가 기가 죽을 테니까(30-31)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강요로 일어나는 문제를 아디치에는 위와 같이 지적한다. 남녀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일상에 도사리는 모호한 문제를 분명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만 아니라 남성 문제도 말한다. 젠더는 연결되어 있으니 여성을 말하면 남성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나면 성적 불평등은 교양과 교육의 문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성평등이 잘 이뤄진 나라인 스웨덴에서 여러 단체 후원으로 이 책을 16세 스웨덴 청소년 모두에게 선물했을 때, 이 현상은 뉴스거리 조차 되지 못했다고 한다. 유일한 불만은 이 책이 스웨덴 고등학생들에게 구식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십대 청소년에게 성적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이야기가 구식이라니. 왜 나의 16세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16세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까. 지금 스웨덴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 불평등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이다.



나는 내 여성성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여성스러움을 간직한 나 자신으로서 존중받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럴 만하니까요. 나는 정치와 역사를 좋아하고, 사상에 관해서 훌륭한 논쟁을 벌일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그리고 나는 여성스럽습니다. 여성스러워서 행복합니다. 나는 하이힐을 좋아하고, 립스틱을 바릅니다. 남자에게 받는 칭찬도 여자에게 받는 칭찬도 다 좋지만(솔직히 털어놓자면 스타일 좋은 여자들의 칭찬이 더 기쁘긴 합니다), 가끔은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옷을 입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옷을 좋아하고, 그 옷을 입으면 내 기분이 좋으니까요. "남성의 시선"이 내 삶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바는 대체로 부수적입니다.(43)



솔직히 책을 읽기 전까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뜻모를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한 정의도 몰랐다. 그저 '극단적인 어떤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거부하는 건 페미니스트라는 기표 아래 숨은, 무조건 순응하지 않으려는, 귀를 닫아버린, 극단적인, 유연하지 못한, 예쁜 것을 혐오하고 남성성을 싫어하고, 반대편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끝없이 불만을 제시하는 피로한 영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상들은 누가 만들었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자아낸 인상이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잔상은 자신도 모르게 습격당한 상처 같은 것이었다. 미디어 폭력의 일부일 수도 있다. 지인들의 친절한 충고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남아 있는 것은, 좀 다른 기의들이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인정하되 그것의 '평등' 또한 부지런히 인정하는 것이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예쁜 건 예쁜대로, 멋진 건 멋진 대로 옳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에 집중하면서 타인이 추구하는 삶도 존중하는 근면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페미니스트'라는 기표는 올바르게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 책은 독자에게 이런 과제를 남기는 것 같지만, 이 질문으로 끝을 맺는 건 (내 생각에) 옳지 못하다. 아직 그 단어는 너무 많은 오독에 시달리고 있고, 단어 속으로 나의 개별성을 집어넣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런 질문을 해보는 건 나쁘지 않으리라. 앞으로는 자신을/타인을 성별로 구분짓지 않고 개별적으로 존중하려 노력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대체로 답이 정해져 있다. 혹시 그 답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굳이 대답을 하자면 이런거다. 네. 네. 당연히 YES겠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