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의 눈님이 방명록에 몇 가지 질문을 남겼는데, 질문들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제대로 답변하기가

어렵군요. 그래서 대신 한 10년 전에 제가 그 질문들과 비슷한 주제로 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진 데다가, 여러 모로 생각이 숙성되지 못했을 때 쓴 글이라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얼마간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 글을 퍼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공적인 논의나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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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캉귈렘-스피노자

[고대 대학원 신문] 1997. 5.



1. 잊혀진 물음: 역사유물론은 과학인가?


  80년대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과학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그들에게서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전제였으며, 문제는 ‘부르주아’ 과학들’(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 특히 인문, 사회과학들에 대한 그것의 우월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이 과학적 무기를 어떻게 ‘실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교조적인 정식화에 따르자면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적용’인 것처럼).반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잊혀진 담론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자명성만이 이 사태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제시될 뿐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아마도 거의 대칭적일 두 개의 자명성을 목격하게 된다. 다만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한 자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비과학성 또는 이데올로기적 본성에 대한 자명성일 뿐이다. 이러한 대칭성의 경험은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옹호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가시기는 하지만 끝내 외면해 버릴 수는 없는, 당혹감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은 위대한 비대칭성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적 독재이지만, 또한 그것은 모든 계급적 착취와 지배를 폐지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로 삼고 있으며(특히 발리바르, 「"공산당 선언"의 정정」, {역사유물론 연구} 참조),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은 모든 부르주아 인문, 사회과학들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비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회고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잊혀진 물음(또는 ‘억압된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이데올로기들(소위 ‘속류’ 정치경제학과 ‘과학적’ 정치경제학 모두를 포함하는)의 이데올로기적 본성을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 또는 비대칭적 과학이라면, 하지만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었다면, 이러한 본성과 경험, 원칙과 사실 사이의 괴리는, 그러한 괴리 자체의 설명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본성에 대한 물음을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은 과학, 더욱이 하나의 특권적인 과학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2. 역사유물론의 특수성: 토픽적 과학


  역사유물론이 하나의 과학인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어떠한 과학인가라는 또다른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역사유물론의 과학성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물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과학들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기준으로는 역사유물론에 대해 충분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유물론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학적 기준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식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자의 경우는 모든 과학들에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학이나 물리학 또는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필연적으로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엄밀한 의미에서 물리학이 ‘경험적인 것의 수학화’(A. Koyré, Etudes d'histoires de la pensée scientifique 참조)를 통해 성립될 수 있었다고 해서, 다른 과학들에게까지 그러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으며,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은 물리학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내적 기준에 따라 구성되고 분류되는 것이다(푸코의 인간과학들의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나 그 이전의 캉귈렘의 연구들은 과학적 기준들의 상대성을 보여주는 연구들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을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자와 같은 경우는 분명 역사유물론에만 고유한 현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전자의 경우처럼 보편화될 수 있는 성격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 모든 개별과학들의 성립이 과학철학 또는 인식론(바슐라르나 캉귈렘의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 영미 또는 독일적 전통에서 인식론은 인식주체의 심리적(또는 초월론적) 활동의 문제이지만,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에서 인식론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적 활동의 문제이다)의 일반적 원칙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역사유물론은 그 자체의 내재적인 과학적 기준을 통해 일반적인 인식론적 원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하나의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가장 일관되게 주장한 사람은 알튀세르였다. 알튀세르는 초기에는 세 개의 대륙(수학, 물리학, 역사과학)의 비유를 통해서(예컨대 알튀세르,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그리고 이후에는 역사유물론이 정신분석학과 함께 일종의 토픽적 과학(정확하게 말하자면 “분파적, 갈등적 과학”)을 구성한다는 테제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부단하게 주장해 왔다. 알튀세르는 우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 과학”이자 “분파적 과학”으로서 이들의 역사는 “언제나 재발되는 분열들로 표시”(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알튀세르와 라캉}(공감, 1996) 17쪽)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과학들의 역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 과학들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기존의 이론들 내지는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공격이 가해지다가, 이것들이 점차 수용되면서부터는 바로 그 과학들 내부로 침투해서 그 과학들의 과학적 핵심을 ‘수정’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수정주의적 경향들을 통해 결국은 그 과학들 자체가 갈등적 분파들로 분열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불가피한가, 그리고 그러한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우리가 과학들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알튀세르는 전자의 질문에 대해 그러한 분열과 갈등은 바로 그 과학이 분석하는 대상이며 동시에 그 과학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현실 자체가 갈등적이라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계급사회와 같은 필연적으로 갈등적인 현실 속에서는 어떤 위치에서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명한 확인이 있다. 사람들은 갈등 자체 속에서 일정한 입장 ... 을 취한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이러한 갈등적 현실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 20-21쪽.)

  그렇지만 아직도 결정적인 질문이 한 가지 더 남아있는데, 바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의 필연성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유물론이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바로 갈등과 분열 때문에,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적 객관성을 얻는다고 말해야 한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의 갈등성이 자신의 과학성, 자신의 객관성에 대하여 구성적이라는 사실”(위의 글, 20쪽)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우리에게 긍정보다는 당혹을 안겨다 준다. 갈등성이 과학성과 객관성에 ‘구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분파적 과학이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모델 또는 원칙을 다른 과학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두 과학들은 그야말로 유별난 과학들(이것의 의미는 ‘사이비과학’에서 ‘메타과학’까지 다양하게 진동한다)인가?

  알튀세르의 이러한 역설적 주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또는 과학적 활동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야말로 이론적 갈등의 원천이며, 따라서 갈등성과 객관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3.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개념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캉귈렘의 역설적인 개념, 즉 과학적 이데올로기라는 개념(Georges Canguilhem, “Qu'est-ce que l'idéologie scientifique?”, in 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 Vrin, 1988)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것이 역설적인 개념인 이유는 흔히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여기서는 서로 결합하여 모순적으로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념에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이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캉귈렘에 따르면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외재적인 방식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에 내재적이며, 과학이 갈등적이라면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서만 발전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데올로기 또는 오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전(前)과학적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이다(또는 전과학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

  전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적인 천문학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천동설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어떤 과학이 인식론적 절단(coupure)을 통해 형성되면서 폐기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에 비해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과학의 성립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다른 과학의 성립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캉귈렘은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의 다양한 진화론을 들고 있는데, 일례로 허버트 스펜서는 태양계와 동물 유기체, 생명종들, 인간, 사회, 언어 등 모든 것이 연속적인 미분화를 통해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일반화된 진화법칙을 설정한다. 이러한 일반화된 진화법칙의 문제는 한정된 영역에서 설립된 진화의 개념과 그것의 논증과 실험방식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차용해 온 과학성의 규준들을 넘어 탈선”한다는 점에 존재한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후에’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다른 과학의 규준과 위신을 존중하고 그것들을 모방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종교나 마술, 허위과학, 요컨대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한정된 영역에서 타당한 규준들을 일반화하여 총체적 지식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야말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판별적 특징이 되는 셈이며,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그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새로운 과학 또는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구성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전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는가? 또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비판되고 극복될 수 있는가? 요컨대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점에서 불가피하며, 그것은 과학적 활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두 가지 상이한 영역에서의 답변들을 요구한다. 그 하나는 과학사적인 시간성, 또는 과학적 활동에 고유한 역사성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학적․사회적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전화의 노력, 즉 고유하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윤리적 능동화의 운동에 대한 것이다.


4. 상징적 질서의 아포리아들


  첫번째 문제는 철학적 구조주의(알튀세르, 푸코, 라캉)의 고유한 기여로서 구조적 역사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주체와 역사를 제거했다는 통속적 비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이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가장 심원한 역사성에 대한 개념을 가공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들의 노력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의 역사화에서 출발한다. 칸트는 초월론적 주체의 선험적 활동(통각, 선의지)을 통해 모든 인식과 실천의 가능성이 정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초월론적 주체의 활동을 역사성을 지닌 초월론적 구조, 이를 테면 상징적 질서(라캉)(또는 담론의 질서,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전위시킨다. 이 때 상징적 질서는 모든 인식과 의미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초월론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하거나 불연속적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적 초월론이라고 할 수 있다(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이를 “역사적 선험”(a priori historique)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초월론적 구조가 역사화될 경우 진리의 상대화, 지식의 비객관화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식의 기준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면, 인식의 객관성이나 진리의 관념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적 연구들은 초월론적 구조들의 불연속성, 또는 지식체제의 정상화(normalisation) 기능들에 대한 과도한 강조 때문에, 일종의 상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인식론적 단절’ 개념」, {이론} 13호 참조).

  다른 한편으로 초월론적 구조의 역사화는 “주체” 개념의 의미 변화를 동반한다. 즉 이제 주체는 모든 인식과 활동의 토대로서 주권적 주체(subjectum) 또는 초월론적 주체가 아니라, 의미의 근거로서 상징적 질서 속에 필연적으로 포섭되어 있는 예속적 주체 또는 ‘분할된 주체’(라캉)가 된다. 하지만 예속적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되는 방식은 강제적이거나 물리적 폭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예속적 주체는 인식과 행동의 자율적 주체로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된다(특히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따라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근대 철학과 더 나아가서는 근대성 일반의 원리로서 자율적 주체의 역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율적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징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편입은 동시에 지배구조의 재생산 메커니즘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율적 주체가 모든 해방운동의 근본적인 전제로 간주되기 때문에 더욱 더 치명적인 역설이다.


5. 역사적 초월론을 넘어서: 과학-해방-교통


  이렇게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두 개의 심각한 아포리아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아포리아들 각자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계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순의 운동이다. 앞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토픽적 과학에 대한 테제가 하나의 역설, 또는 하나의 모순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알튀세르에게서 토픽적 과학의 과학적 객관성은 다름 아닌 그것의 내재적 갈등성과 그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캉귈렘의 과학적 이데올로기 개념 역시 그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초월론의 아포리아들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이러한 모순의 운동을 작동시킬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모순의 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좀더 분명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대칭적이라는 것, 또는 과학 그 자체가 정상화(normalisation)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과학적 진리/오류의 문제가 권력의 정상화 기능의 하위범주로 포섭된다는 것은 특히 {담론의 질서}에서의 푸코의 테제이다. 이 때문에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은 상대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의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기준 속에서만 인식되고 판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절단(coupure)과 단절(rupture) 내지는 개조(refont) 사이의 구분이 중요한데, 절단이 과학 자체의 설립의 사건을 의미한다면, 단절 내지는 개조는 과학 내부의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귀적 비판(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최초의 과학적 개념에 내재한 모순의 한 편향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은 항상 회귀적이다)과 전화의 작용을 의미한다(이것은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개념을 보완하고 정정해 주는 것이다. Balibar, “Coupure et refont”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참조).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의 절단을 통해 어떤 과학이 설립되는 사건은 하나의 진리의 발생사건이며, 이러한 진리는 개념 속에 물질화된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 역사유물론은 다른 어떤 과학들(이를테면 그 이전의 정치경제학들)에 의해서도 평가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자신에 고유한 진리의 공간, 과학적 객관성의 영역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장 속에서 그것들을 소재로 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비판하면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자체 내에 갈등과 모순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이후의 발전 속에서 각종의 경향들이 발생하게 되며, 이에 따라 최초의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적 계기들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적 비판과 개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조의 운동은 여전히 최초의 절단의 사건이 성립시킨 진리의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따라서 절단이라는 사건, 또는 특정한 과학적 진리의 설립 자체는 역사적으로 불연속적이지만, 이러한 과학의 역사적 구조 내부의 과정은 전진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지식의 객관성과 지식의 발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의 내재성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과학의 초월론적 구조 내에서 이데올로기화와 탈이데올로기화의 대립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Balibar, “Etre dans le vrai? Science et la vérité dans la philosophie de Georges Canguilhem”,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따라서 우리는 단지 역사유물론이나 정신분석학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의 운동 자체가 내재적인 갈등을 자신의 객관성의 조건으로 한다는 테제를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역사유물론에 고유한 범주들(모순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유물론이 과학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토픽적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은 단지 과학의 이론적 영역 안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사회적인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의 전화를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 또는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상상(imaginatio)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만이 아니라, 욕구(appetitus)의 필연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복합적인 정서들의 모방(affective imitation)의 메커니즘(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동일화(identification)와 유비적인)의 문제를 제기한다(이에 대해서는 {윤리학} 3부 전체를 참조하고, 이에 대한 주석으로는 E. Balibar, “Spinoza, l'anti-Orwell―Le crainte des masses”, in Le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참조). 즉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계급적 조건들에 따른 인식(또는 오히려 의식)의 분할의 문제이면서, 인식과 실천에 수반되는 욕망과 공포,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등과 같은 정서적 효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항상 정서적 효과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 사물에 대한 단순한 합리적 인식만으로 그 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자동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으며, 더 나아가 그것들은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방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서 작용, 정서들의 모방의 문제는 모든 사회운동과 이데올로기들(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의 은폐된 동력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초적 장애물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인식과 실천은 단지 집단적 또는 사회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관개체론적인 관점, 즉 개인들에 내재하면서 또한 개인들을 초과하는 관계들의 인식과 전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삶의 유형들(수동적/능동적)과 결부되어 있는 인식의 유형들(상상/과학적 인식/과학적 인식의 개인적 전유)의 문제로, 그리고 두 가지 유형들의 상호전화의 필요성의 문제로 분석했다(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알튀세르의 현재성}(공감, 1996) 참조). 결국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인식의 조건과 삶의 조건의 동시적인 전화의 과학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그 자체의 존재 조건들의 전화를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특수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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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7-0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97년이면, 연대항쟁 직후네요.

balmas 2006-07-03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셈~

에로이카 2006-07-04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렇겠지요? ^^), "갈등성이 과학성과 객관성에 ‘구성적’이라는 것"이라는 구절을 보며 떠오른 건데요... 옛날에 철학 세미나할 때, 그런 얘기들을 했던 게 기억나요... "변증법 - 그것이 사유의 방식이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이건 - 그 자체도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것인가"... 지금 기억하기로는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당시 우리들의 작은 머리통 속에서는 나올 수 없었는데요... (요즘은 아예 이런 질문 자체를 하지도 않으니, 뇌의 크기가 더 줄어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존재 자체의 속성의 일부라면, 그 존재는 대체 무언가요? (이게 철학적으로 말이 되는 질문인 지는 저도 전혀 모른답니다... 모순?)

그리고 또, 감히 여쭤보는 거지만, 이 잘 쓴 멋진 글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지금은 생각이 바뀌셨다고 하는 지도 궁금하네요.... 힘들고 오랜 공부를 날로 훔쳐먹을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여... 좀 죄송한 질문입니다... ^^

balmas 2006-07-0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에로이카님, 우문이 아니라 현문이고 난문입니다. ^^;;
사실 몇 가지 답변을 썼다가 다시 지웠습니다.
특히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언젠가 좀더 상세하게 논의해볼 기회가 있겠죠.
괜히 사람 궁금하게 만든다고 비난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
 

며칠 전 기인님 이벤트에서 상품으로 받은 책 중 한 권인 오규원 시인의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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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전하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마지막 장면을

잠시 보자.

 

한 좋지 못한 인간이 암으로 죽게 되어, 죽기 전에 그의 독살스런 아내와 심보 고약한 딸에게

용서를 구한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자기 자신도 놀라우리만큼 집안일의 잡동사니에 대해서만

유일한 관심을 갖고 있는, 감정도 메말랐고 사고력도 없는 자신의 가족들을, 불현듯 매우

측은하고 불행하게 여기는 동정심을 갖게 된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그는 기다랗고

부드러우며 고무 호스와 흡사한 관 속을 기어가는 느낌을 가진다. [......] 멀리서 빛이 반짝이고

그는 그 빛에 도달할 수가 없다 : 그는 우선 마지막 경계 ---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 를 넘지 않으면

안된다. 침대머리에는 그의 아내와 딸이 서 있다. 그는 그들에게 "용서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내뱉은 말은 "나를 지나가게 해다오"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분도출판사, 1991, 131쪽]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용서하다'와 '지나가다'라는 단지 이 두 마디로 죽음의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문제라는 점을 충격적으로 일깨워주지

않는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것은 '용서'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했다고

그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넘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지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문제를 '용서하다'와 '지나가다'라는

두 어휘로 집약해 표현하는 문학(국면)을 보고, 타르코프스키는 같은 지면에서 "무시무시한

진실성과 사실성" 때문에 "마치 묵시록처럼 우리들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는 말로

그 감동을 전달하려고 한다. 어떻든 우리는 '용서하다'라는 말은 사변적 사고의 핵심을 이루는

관념적 어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언어가 아닌, 실재적이고

사실적인 언어의 하나인 '지나가다'가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새삼 기억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날이미지와 시] 문학과지성사, 7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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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은, 아마도 한국 현대 시인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시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현상학과 구조주의라는 20세기 서양의 두 가지 철학적 사조, 그리고

동양의 선문답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탈인간 중심적 관점, 나(주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의 '날이미지'론인데,

이 책은 날이미지론에 관한 그의 사색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위의 인용문은 그 중 한 대목으로, 폴 세잔과 메를로-퐁티, 롤랑 바르트 등이 각자 나름대로

추구했던 "그냥 있는 세계"에 대한 문학적 표현을 톨스토이를 통해 예시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그냥 있는 세계, 또는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결과인

"날이미지로서의 현상"은 "우리들이 꿰뚫어보지 못할지라도 직시하고자 하는 진실의 형상이며

그 형상은 그 어떤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양식으로 담아내지 않으면 않을수록 자신의

올바른 모습에 그만큼 가까워지는 그런 것이다."(같은 책, 78쪽)

같은 언어를 쓰는 동시대의 시인들 중에서 이처럼 엄밀한 사고를 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업은 이미 그 자체가 엄밀한 해체의 작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품고 있는 관심 중 하나는 그가 현상학과 구조주의를 넘어서

좀더 적극적으로 해체론으로, 해체의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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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7-03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balmas 2006-07-03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ㅎㅎㅎ

릴케 현상 2006-07-03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관심이 있는 시인인데, 게을러서 잘 읽어내진 못하고 있지만^^ 이 책도 읽어야쥐 하고만 있네요...좀더 충동질해주시면 읽을텐데=3=3=3

로드무비 2006-07-0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좀 감상적인 시인으로 봤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오규원 시인을
다시 보게 되네요.
땡스투.^^

balmas 2006-07-0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ㅋㅋㅋ 2%가 부족하십니까? ^^;;
로드무비님/ 예, 오규원 시인은 감상적인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분이죠. :-)
땡스투 감사. ^^;

릴케 현상 2006-07-06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번에 로드무비님이 '전 오규원 별로 안 좋아해서요'라고 했어요. 고자질 ㅋㅋ=3=3=3

balmas 2006-07-06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이런 ...



고자질쟁이 ... ^^;;
 
 전출처 : mannerist > 과학기술 동맹의 전횡에 맞서는 비판적 이성을 기대하며
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한재각.강양구.김병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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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황우석, 혹은 아직도 황우석이냐고, 다소 촌스러운 빛깔의 표지에 음산하게 박힌 황우석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서울대 조사위의 결과보고와 검찰 최종 수사발표로 일단락 된 것은 황우석을 중심으로 형성된 줄기세포 연구 관련 인사들의 몰락뿐이다. 책 제목대로 소수의 비판자들을 '침묵'시키고 다수의 국민들을 맹목적으로 '열광'시켰던, 황우석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동맹의 매커니즘에 대한 비판과 이를 가능케 한 사회 토양에 대한 자성은 보이지 않는다. '진실보다 국익이 우선'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언론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반성하지도, 성찰하지도 않는다. 황우석 밀어주기에 여념이 없던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 황우석을 등에 없고 의료 산업화에 매진하던 재계 인사들은 자신들도 황우석에게 속은 피해자라고 강변하는것도 모자라, 아직도 황우석과 환자형 맞춤 줄기세포의 존재를 '믿고' 연구재개를 바라는 자들도 있다. 이 세력들이 잔존하는 한 황우석 사태는 마감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토양에서는 비판에 대한 '침묵'과 무비판적 '열광'만을 강요하며 자기 집단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정치, 경제, 언론, 학계 세력이 동맹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사회에 강요하며 공익을 훼손하는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요약하자면 '과학기술 동맹의 형성과 작용, 그리고 몰락과 그 영향'정도로 할 수 있겠다. 핵심 키워드 '과학기술 동맹'이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기술 영역의 전문 집단이 중심이 되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정치, 경제, 언론 집단이 강력한 동맹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사회의 중요 의사 결정을 움직이는 연합체를 말한다. 이들이 왜 문제인가?

황우석 사태에서 이 연합체의 결성 과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연구 자체보다 개인의 영달에 뜻이 있던 동물 복제 전문가 황우석이 배아줄기 세포 연구진과 학적 이해 관계에 따라 연합한다. 이들이 배아줄기 세포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난자 조달과 연구 개발에 따르는 막대한 재원과 윤리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재원 확충을 위해 황우석 연구팀이 제기한 논리가 의료산업화였고, 이는 의료/복지 체계에 시장논리를 적용하려는 거대 기업의 논리와 맞아떨어져, 대다수 기업 - 특히 제약 회사를 계열사로 거느린 - 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또한 윤리 문제는 집권 기간 동안 전 정부의 IT산업 육성과 비교될만한 산업 정책을 찾던 참여정부 정치인들의 이해와 맞물려 그들의 지지를 업고 법적 제한마저 해결하게 된다. 과학계 역시 전체 파이의 크기를 키운다는 면에서 비판적 견해를 자제한다. 여기에 언론은 '영웅 만들기'로 대변되는 상업적 이해에 따라 별다른 검증 없이 무분별하게 황우석 연구진 띄우기에 발벗고 나서며 기존의 과학기술동맹을 공고히 다진다. 문제는 저 강고한 동맹 체계가 모든 비판을 무력화시키면서 자기 집단의 이익을 무분별하게 추구하여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데 있다. 그 구체적 실례가 어떠하였는지를, 사태 추이를 명료하게 요약한 이 책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반년 전 생생히 목격한 바 있다.

이 책은 단순히 황우석 사태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요약하고 정리하는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앞에서 상술한 과학기술 동맹의 각각의 축을 이루는 집단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사안에 따라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며 정보를 은폐하고 공익을 저해하였는지 하나하나 실례를 들어가며 서술하고 있다. 황우석 연구진만을 위해 사회 각 계층간의 심도깊은 논의를 통해 도출한 법안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연구 성과를 과대포장하고 그 위험성에는 눈을 감았을 뿐만 아니라 의료산업화를 통해 거대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며 의료 공공성을 저해하려 한 사례들이 그것이다.

끝으로, 이 책에서 논의한 바를 뛰어넘지만 황우석 사태를 최악으로 이끈 사회적 공감대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결과지상주의'와 '태도에 대한 과잉집착'이다. 제대로 된 연구노트 하나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실험실 운영하다 논문조작까지 저지른 '전직' 과학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서조위 조사 중간 발표 이후에도 절반이 넘었다. 또한 YTN의 악의적 청부 취재 방영시, 대다수 사람들은 PD수첩 제작진의 '도를 넘어선 협박'에만 주목하여 진실보도를 추구한 프로그램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켰다. 그 '협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협박으로 인해 PD수첩 제작진에게 털어놓은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말이다. 그 사실 확인 없이 PD수첩의 협박에만 포커스를 맞춘 YTN의 보도만 듣고, PD수첩을 맹목적으로 비난했던 모든 사람들 역시 비판 의식을 상실하고 암묵적으로 과학기술 동맹의 전횡에 협조한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개개인의 책임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굳이 책임과 윤리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끌어올 필요도 없다. 정확하게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추악한 모습을 속속들이 알고 기억하는 게 그 시발점이다. 이 사건을 기회 삼아 개개인의 비판적 이성의 날을 조금 더 세운다면, 황우석 사태의 끝이 그리 암담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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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7-0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런 책이 나온 줄도 몰랐네 ... -_-v
 
 전출처 : waits > [펌/민소] 파견법보다 독한 파견노동자 '주봉희' 인터뷰

 

파견법보다 독한 파견노동자 '주봉희'
[인터뷰] 계란으로 바위 깬 방송비정규노조 위원장
문형구 기자    메일보내기

  노동운동판에서 주봉희를 모르면, 그는 '가짜'거나 '초짜'다.
  
  주봉희는 어느 노동운동단체의 명망가나 끝발있는 대공장 노조 위원장의 이름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머리에 파견철폐라는 붉은 글씨를 새기고 다녔던 파견노동자, 파견법보다 더 독하게 싸워서 결국 현장으로 돌아간 노동자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2000년 6월 해고자가 된 그는 '대가리를 박고 싸워서' 결국 4년 1개월만에 현장을 되찾았다. 알고보면 2차 하청이였지만, 그의 싸움을 지켜 본 이들에게 주씨의 복직은 어느 정규직화 투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니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봐라'
  
  파견법이 시행된 98년 이전에도, 파견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주봉희 위원장은 해고 당시 6년이 넘게 KBS에 근무해 왔는데, 다만 간간히 파견업체만 바뀔 뿐이었다.
  
  98년 7월 1일, 파견제가 합법화됐다. 달라진 점은 파견이 점차 늘어났다는 점이고, 2년마다 해고가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다.
  
  연차를 거듭할수록 7-8배까지 차이가 나는 임금에 대해 KBS 파견직 노동자들은 숙명처럼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보다 피부로 느껴지는 차별은 다른데 있었다.
  
  "정규직 기사들 대기실이 따로 있고 파견 대기실이 따로 있는데, 정규직 대기실은 개인 탁지라든가 의자, 옷장, TV도 칼라로 세대씩 있었지. 냉장고 공기청정기 에어콘 빵빵하고."
  
  

△"시골에 보면 그거 벼 날리는 선풍기 있잖어. 이따만한 거. 왱왱 방아찍는 소리나는 그 거" ⓒ민중의소리 김철수

  "우리방은 50평에 54명이 바글바글했는데, 17인치 흑백 로타리 TV에, 시골에 보면 그거 벼 날리는 선풍기 있잖어. 이따만한 거 왱왱 방아찍는 소리나는 그 거 틀어놓고 있고. 의자는 옛날 극장식 의자에 앉아있다가 마이크로 부르면 나가곤 했는데. 우리는 채널도 MBC KBS SBS만 고정돼 있었는데. 한번은 박찬호가 경기를 하는데 못보는 거야. 정규직들 방에 몰래 보다가 걸리면 '야 용역' '야 렌트카' '나가 시키야' 물 먹다 걸려도 '니네 방에서 사먹어 시키야' "
  
  그래서 파견직들은 한달에 2천원씩 돈을 걷어서 물을 사먹었다고 한다. "아까워서, 돈이 없으니까, 파견 노동자들끼리도 물을 먹는 것만 허용하기로 하고, 떠 가지는 못하게 했지"
  
  출장 중에 정규직 노동자를 추월이라도 하면 도착지에서 불려다녀야 했다. 정규직한테 아침에 인사를 안 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고분고분 하지 않아도 불러다녔다. 이튿날 동료가 보이지 않으면 으례히 교체된 걸로 여겼다. 파견 노동자들이 당시에 제일 무서웠던 건 사용자도 파견업체도 아니라 가까이 있는 정규직이었다.
  
  IMF 이후 정규직에 대한 강제 명예퇴직이 실시됐고, 그 자리를 파견 노동자들이 채웠다. 99년 KBS는 정규직 노동자 3백명을 정리해고 했는데, 파견 노동자들의 속이 후련했을 법도 하다. '니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봐라'
  
  "파견으로 다시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 당시에 울화통 터지게 얘기했지. 당신들 정규직으로 있을 때 얼마나 설움을 줬냐. 생각나냐."
  
  짝수해, 파견노동자의 시련
  
  지금도 그렇지만, 파견노동자에게 짝수 해는 시련이었다.
  
  파견법이 시행되고 만 2년을 앞둔 2000년 6월, 운전직·카메라 보조·오디오맨·웹디자인 등 방송사 파견노동자들에게도 계약해지가 들이닥쳤다. SBS 437명을 시작으로 MBC 160명, KBS에서도 227명이 해고됐다. 전체적으로는 5천명 가량의 파견노동자가 그 해 계약해지된 걸로 추정된다.
  
  6년 넘게 근무한 주씨를 비롯해, 파견노동자들은 5년에서 길게는 15년까지 KBS에서 일해 왔었다.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자르진 않겠지'라는 믿음은 여지없이 깨졌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 KBS는 '우리는 꼭 쓰고 싶다. 그런데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니 2년 후에 다시 오면 써주겠다. 파견법을 원망해라' 그랬어. 우리는 법을 몰랐는데, 아 파견법이 2년에 한번 쓰고 버리는 건가 보다 그때 알았지."
  
  KBS 운전직은 씨랜드 참사 당시, 현장을 촬영한 필름을 입수하고 삼풍백화점 붕괴 때도 인도를 타고 가서 특종을 만드는 등 뉴스보도에 큰 공을 세워왔다 실상 성수대교, 인천호프집 화재, 연천댐 붕괴 등 모든 특종은 운전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한다. 처음 모인 파견노동자들은 운전직이었다.
  
  "그렇게 일했는데도 우리는 칭찬 한번 못받고. 전부 해고된 거지. 처음엔 딱 열명을 만들었어. 그런데 모인 친구들이 안할라 그래.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노조를 만들어야 못 받은 연월차라도 받는다고 설득을 했어. 나도 이렇게 까지 올 줄 몰랐지. 골탕이나 먹이고 가자. 10년을 있었는데 KBS가 책임지는 게 뭐냐."
  
  방송사비정규노조, 화장실을 접수하다
  
  '비정규'라는 이름을 넣고 노조를 만든 건 이들이 처음이었다. 난데없이 한글학회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단다. '한글을 똑바로 알자. 국어 사전에 비정규 노동자라는 건 없다. 불안정 노동자로 고쳐야 한다' 주봉희 위원장은 '군대도 정규군이 있고, 빨치산 같은 비정규군이 있지 않냐"며 이 이름을 고집했다고 한다.
  
  주봉희 위원장도 처음부터 조합원 없이 싸운 건 아니다. 초기 400가까운 조합원은, 경찰특공대가 롯데호텔노조를 '작살'냈던 6월 29일에 방송사비정규직노조도 야간에 '습격'을 받고 27명으로 줄었다.
  
  남은 이들은 투쟁을 할래도, 사무실도 투쟁기금도 없었다. 해고자들에겐 당장 깃발 하나를 살래도 '돈'이었다. 현장에 있을 때도 기본급 72만 5천원에, 식대 5만원. 시간외 근무만 100시간을 해야 겨우 100만원을 채웠던 인생들이었다.
  
  "여의도에서 15일을 보냈지. 회의하러가자 하면 여의도야. 그 땐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어서. '형님 마포대교 갑시다'하면 거기 가서 회의하고 일정 짜는 거야. 2시에 대학로에 롯데호텔 집회 갔다가, 이랜드 집회 갔다가 저녁엔 다시 서강대교 밑으로 와서 막걸리 한잔 하고."
  
  한번은 비가 '억쑤로' 쏟아진 날, KBS로 들어가려다가 여의치가 않자 여의도 공원 남자 화장실을 접수하게 됐다.
  
  "거기서 전략회의 했어. 우리는 아주 판이 이상해.. 조합원 꿔서 집회하고, 화장실에서 생쥐같이 비맞고 냄새나는데 회의하고 그랬어"
  
  조합원도 없는 노조위원장
  
  
ⓒ민중의소리 김철수

  구차하고 승산없게 보이는, 비정규직의 싸움. 조합원들은 하나둘 떠나게 되고 결국 두달 후엔 주씨와 송진수(가명) 총무국장 이렇게 둘만 남게 된다.
  
  "나중엔 미안하더라고. 9월 15일인가 비가 무지 많이 왔는데. 롯데호텔 투쟁에서 '너 들어가라. 벌어야 하지 않냐' 그 놈이 딸만 둘인데 내가 깃대를 뺐었지. '보고 싶으면 핸드폰으로 전화해라' 비 쫄딱 맞고 막걸리 한잔 하고 울고 갔지. 삼각지까지 걸어가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고 거기서 헤어졌어. '형도 좀 있으면 들어갈 거다' "
  
  당시를 떠올리는 듯 주씨의 눈 언저리가 발갛다.
  
  "그 동지 가고 나 혼자 딱 남았잔아. 허망하더라구. 아무도 없는거야."
  
  조합원도, 사무실도, 당장의 차비도 없었던 주씨는 굶기를 밥먹듯 했고 잠자리조차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종철이 당시 부대변인이었어. 그 친구가 파견철폐공대위 집행위장이던 윤애림 동지 선배야. 애림이가 연락을 해서 당 회의실 하나 줄 수 없겠냐고 해서 책상을 들어내고 그렇게 시작했지"
  
  잠자리가 해결되도 배가 고픈 건 여전했다. 한창 더운 여름에 해고된 터라,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꼭 나같은 비정규직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그는 그렇게 미웠다고 한다.
  
  "오늘은 어떻게 밥을 먹나. 집회가서 동지들 따라가는데. 그 동지 못쫓아가면 밥 못먹는 거고. 지하철도 많이 몰래타고. 어떻해. 집회는 가야하고. 조끼 입고 쪽팔리기는 하는데"
  
  2000년 12월까지 민주노동당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이랜드, 한통계약직노조와 식구처럼 지내던 주 위원장은 겨울에 용두동에 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를 '접수'했다.
  
  2001년에는 굶지 않으려고 50을 바라보는 그가 명동성당 농성장 사수대를 자원했다. 당시 명동성당에는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차봉천 초대 공무원노조 위원장 등이 수배상태로 농성중이었다. '싸워야지, 여기오면 어떻하냐'는 단 위원장의 질문에 주씨는 '여기와서 싸우면 되요'라고 했지만 실은 '밥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명동성당에서 자고 새벽같이 마이크 차를 끌고 나와서 혼자 집회를 했다.
  
  레미콘 노조원들을 꿔서 집회를 하다
  
  혼자 남은 주씨에게는 사실상 '연대'가 없는 희망이란 없었을게다. 복직하던 날, 그가 떠올린 얼굴들은 그래서 참으로 많을 수 밖에 없었다.
  
  2001년 여의도를 접수했던 레미콘 노동자들은 기꺼이 주봉희 위원장의 조합원이 되어주었다. 주봉희 위원장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사람 참 좋은 장문기 위원장에게 조합원을 꿔서" 집회를 했다.
  
  경찰의 '도끼진압'으로도 유명한 레미콘 노동자들은,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갈 때면 "왜 KBS 앞에 가서 그러느냐"는 질문을 받게 됐다.
  
  "하루도 안빼고 여의도에 갔는데. 내가 특이하잖아. 대가리에 파견철폐를 쓰고 다니니. 금방 알아보는 거야. 나는 돈이 없으니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얻어먹는 거지. 조합원 꿔다가 아침 집회 한 놈은 나밖에 없을 거야. 아침에 방송차 끌고가면 조별로 쭈욱 밥먹고 있어 그럼 '조합원 좀 꿔조' 그러면 KBS까지 쌀자루 뒤집어 쓰고 밥그릇 뚜들기면서 와.. 50명이고 200명이고 거의 한달을 꿔다 썼네."
  
  한국은 월드컵 열풍이 불면서 바디페이팅도 붐이 일었지만, 주 위원장은 이미 바디페인팅엔 전문가였다. 머리에 '파견철폐'라는 붉은 글씨를 쓴 주봉희 위원장이 집회장에 없으면, 사람들이 궁금해 할 정도였다. 주씨는 머리카락은 0.7cm 정도가 가장 글씨가 뚜렷하게 나온다고 설명한다. 더 길어지면 글씨가 드러눕게 되어 '파견'이 '파전'이 된다고.
  
  "한달 되면 깎아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그래도 돈 생기면 밥은 굶어도 이거부터 했어. 사실 파견법 철폐라는 프랑카드, 구호하나 먼저 걸어주는 데가 없었지. 노동계에서도. 2003년에 경제특구법에 파견이 들어갔을 때 넣기 시작했지.. "
  
  박상윤, 김주익, 배달호, 이용석, 정종태..
  
  주봉희 위원장은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다. 특히 주씨에겐 고 박상윤 서울본부 사무처장이 가장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아픔일 것이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상윤이가 굉장히 애썼지. 상윤이가 살아 있을 때, 서울본부에서 주사모(주봉희를 사랑하는 모임)라는 걸 만들었어. 서울본부 대의원들하고 당시 한 삼심명 모집해서 CMS로 한달에 25만원에서 30만원씩. 집회 나갈 때 차비하고 밥먹으라고."
  
  "숙소가 서울본부 였는데, 3층이 내 방이야. 돈이 없어서 아침에 라면 반쪽에 고추장 풀어서 끓여먹고 책상위에 놓으면, 저녁에 와보면 박상윤, 여성호가 다 끓여먹고 없는거야. 어쩔 때 보면 스프 흔들어서 아작아작 먹고 있어. 내가 뭐라 했지."
  
  고 박상윤 사무처장은 노동절은 있어도 생일은 몰랐던 주봉희 위원장에게, 새벽같이 몰래 끓여놓은 미역국과 초코파이를 챙겨 주기도 했다.
  
  '아침부터 소주 한잔 했던 생각 나네.' 그는 정말 무지하게 울었다. 주봉희 위원장은 '그래도 민주노조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그런 활동가들, 내 숨을 던진 활동가들'이라고 믿는다.
  
  "김주익 동지는 손이 이 만해. 키도 크고. 2002년 8월에 부산에 갔더니 '위원장님 파견철폐 왜 지웠어요' '아. 머리가 빠져서' 다음달에 다시 쓸 거라고. 그게 마지막이었지. 2001년 배달호 열사부터 시작해서 당시엔 참 울다가 지쳤어. 이용석 동지는 하필 내 옆에서 분신했어.. 불이 확 올라오더라구. 몇 십초 순간이야. 내가 멎었어. 심장도 멈추고, 머리도 뭘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피켓을 막 뽑아서 불을 끄고 난 다음에는 화기를 다 먹었어. 그 동지 그렇게 보내고 이듬해 복직되고 나니 이용석 열사가 돌아가셨잖아. 기가 막히더라구. 그렇게 아들 아들 하더니 서른 살 나이에.."
  
  주봉희 위원장은 '이용석 동지는 전태일의 혼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한다. 주씨가 걸어 온 길에는 그렇게 '힘에 겨워 굴리다 못 다 굴린' 덩이를 맡은 이들이 많았다.
  
  "정종태 동지도 잊을 수가 없지. 그 동지한테는 참 미안해. 내가 참 구박 많이 했어. 이문동 옥탑방에 살았는데 여름엔 30도 겨울엔 영하 20도. 요만한 이불 하나에 치약 치솔 밖에 없었다니까. 지가 입던 옷하고. 걔도 나만큼이나 굶었어. 저녁에는 결국 장충단 공원에 올라가서 소주. '너 조직 관리 그렇게 못하냐' 내가 많이 혼내고. 내 생각엔 4천 대오 있을 때를 일깨워 주려고 했는데.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건강관리 했다면 더 살았을텐데."
  
  계란으로 바윗돌을 쳐서 이겼지. 다 할 수 있다고
  
  주봉희 위원장은,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한때 '도망'쳤었다.
  
  "2002년이 제일 힘들었던 때인데. 한통계약직 깃발 내리고 나서. KBS, MBC 다 무너지고. 나도 이제 여기서 끝내자. 그만 하고 내려가야겠다. 연세대에서 같이 보따리를 쌌어. 한통 동지들이랑 같이 울고 그 길로 온양으로 내려간거야. 농사를 짓든 다른 진로를.."
  
  주씨는 그러나 깃발을 내리지 못했다. 그를 붙잡은 것은 고 박상윤 사무처장과 같은 그런 '동지'들이었다.
  
  "누나네서 한달 반 정도 있다가 핸드폰을 꺼놨었는데, 받지 말았어야 하는데, 파견법 시행 5년이라고 철폐연대 서울본부 민변에서 뭘 하는데 발언해 달라고. 그게 계기가 되서 김혜진 동지나 이런 동지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죽기야 하겠냐' 여성호 박상윤도 '아 형님 도망갔다'고 난리를 피워서 2002년 말까지만 간다고 했는데 거기서 붙잡힌 거지."
  
  47살에 해고된 주봉희 위원장은 결국 52살에 복직했다. 다른 게 있다면 그가 운전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배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씨는 이제 실제 조합원들이 있는 방송사비정규직노조의 위원장이라는 점이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윗돌치기라고 그랬지. 내가 계란으로 바윗돌을 쳐서 이겼지. 다 이길 수 있다고. 당신들 어차피 우리같은 사람 필요한 거 아니냐는 거지."
  
  
ⓒ민중의소리 김철수

  
  
[관련기사]
•7월 1일 대량학살의 연원은? ㅣ 문형구 기자


2006년07월01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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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죄송하다' 말하기 그렇게 어렵나?"
  [기자의 눈] '생명공학의 중요성' 말하기에 앞서 할 일
  2006-06-30 오후 5:51:26

 

   "기술이 아니라 마술입니다. 동북아 시대, 2만 달러 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확실히 발견했습니다. (…) 감동에 몸이 떨릴 만큼 감전됐습니다." (2003년 12월 10일 황우석 박사 실험실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반년 만에'황우석 사태'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노 대통령은 29일 대전에 있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생명공학 산업은 우리 한국에 딱 맞는 경쟁력이 있는 분야"라며 생명공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황우석 사태를 염두에 둔 듯한 발언도 몇 마디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가 다 나서면 잘 될 것 같지만 정부가 나서서 도움이 안 되는 분야도 있다"며 "이 분야는 정부의 절제와 역할이 많이 필요한 분야"라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또 "황우석 사태를 보니 영웅은 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며 실험실의 수직적 위계질서도 언급했다.
  
  정부가 특정 과학자나 특정 분야를 '찍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과학기술 정책의 문제점이나 '실험실 민주화'의 중요성을 노 대통령은 아주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알게 된 모양이다. 뒤늦게나마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황우석 사태에 대해 '교훈'을 언급할 때인가? 조금 철 지난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연초의 기억을 들춰내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긴 '침묵'…핵심 관련자들은 모두 다 '면죄부'
  
  온 나라가 수 개월에 걸쳐 찬·반으로 나뉘어 격렬한 갈등 양상을 보였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폭력 사태가 계속됐고 심지어 한 사람이 분신자살해 생명을 잃기도 했다. 수 년간 지원한 수백억 원의 국민 혈세가 공중으로 날아갔고, '줄기세포 스캔들'은 결국 역사상 유례 없는 '과학 사기극'으로 규정되면서 대한민국은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2005년 12월 5일 "황우석 박사의 연구 성과에 대한 검증 문제는 이 정도에서 정리되기를 바란다"며 사실상 진실 규명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한 후 진실이 상당 부분 밝혀진 지금까지 노 대통령은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평소 '설화'를 몰고 다니던 노 대통령의 체질을 염두에 두면 기이한 일로 보이기까지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입만 다물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박기영 전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의 경질 여론이 비등할 때도 계속 그를 감싸다 1월 23일에야 박 전 보좌관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때도 청와대는 "박기영 보좌관이 공식 업무 수행에 지장을 느껴 사표를 제출해와 본인의 뜻을 존중해서 처리하게 됐다"며 표면적으로는 '박 전 보좌관이 잘못한 것도 없고 청와대도 책임을 물을 의사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박 전 보좌관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순천대로 복직했다.
  
  노 대통령은 박 전 보좌관뿐만 아니라 황우석 사태에 책임이 큰 다른 이들에게도 '면죄부'를 줬다. 정부 내의 비공식적인 황우석 박사 지원모임 '황금박쥐'의 핵심 멤버였던 김병준 전 정책실장은 총리 하마평에 오르다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제 교육 부총리 임명의 초읽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또 다른 '황금박쥐'의 멤버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섰다 낙선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심지어 1월 사의를 표명한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에게도 "아주 폭넓은 안목, 강한 비전과 추진력을 가지고 과학 행정을 이끌어주신 오명 장관님께 감사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명 전 장관이야말로 황 박사 감싸기에 앞장섰으며 검증 안 된 연구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부은 당사자인데 도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말인가?
  
  '황우석'에 감전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황우석 사태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황우석 띄우기'에 나섰던 사건의 핵심 당사자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2월 10일 황우석 박사의 실험실을 처음 방문하면서 "기술이 아니라 마술이라 느꼈다", "동북아 시대, 2만 달러 시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확실히 발견했다", "감동에 몸이 떨릴 만큼 감전됐다"는 극찬을 늘어놓으며 황 박사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말 많던 '최고과학자 연구지원 사업'을 만들어 황 박사를 지원하기로 한 것도 바로 그의 아이디어였다. 박기영 전 보좌관은 2005년 4월 25일 청와대 <국정브리핑>에 기고한 글에서 "최고과학자 연구지원 사업은 노 대통령이 처음 제안했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위해 아이디어도 직접 말해 줬다"며 "황 박사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가장 기뻐한 사람은 바로 노 대통령"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2005년 10월 19일 세계줄기세포허브 개소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준비해 간 연설 원고 내용까지 즉석에서 수정해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가지 논란이 훌륭한 과학적 연구와 진보를 가로막지 않도록 잘 '관리'해 나가겠다"고 약속한 것은 압권이었다. 오죽하면 이 발언에 대해 한 원로 생명윤리학자가 "한국이 야만국임을 세계에 알린 망언"이라고 개탄했겠는가?
  
  노 대통령은 더 나아가 진실을 가리려는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했던 12월 5일 '이만 덮자'는 식의 진실 은폐를 위한 선동까지 감행했던 셈이다. 이미 한 주일 전인 2005년 11월 28일 <PD수첩>의 취재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던 김형태 변호사가 김병준 전 정책실장을 만나 관련 내용을 전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노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위험한' 발언을 했는지 그 속사정이 궁금할 따름이다.
  
  "죄송합니다", 말하기가 그렇게 어렵나?
  
  노무현 대통령의 '긴 침묵'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됐다. 박기영 전 보좌관, 김병준 전 정책실장, 오명 전 과기부 장관 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것도, 선뜻 황우석 사태에 대해서 논평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본인의 '원죄'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 스스로 '황우석 띄우기'에 앞장선 마당에 그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망각의 마술'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지난 지금 노무현 대통령은 드디어 입을 연 것이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듯 황우석 사태의 교훈을 거론하면서 말이다. 다시 한 번 분명이 말하지만 순서가 틀렸다. "죄송합니다" 하는 사죄가 먼저고 그 다음에 교훈을 언급해야 했다.
  
  노 대통령은 틈만 나면 일본 측에 과거사와 관련해 진정한 사과와 그에 합당한 실천을 요구해 왔다. 왜 노 대통령은 일본에게 그토록 당당히 요구해 온 일을 본인은 실천하지 않는 것일까? 평소 역사와 대화를 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노 대통령이 '무능'한 데에다 '거짓말'에도 능했던 지도자로 기억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노 대통령은 생명공학의 중요성을 언급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 해야 할 발언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수순이 틀리면 모든 것이 잘못되는 법이다. 이것만은 결코 철 지난 이야기가 아니다.

   
 
  강양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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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7-02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만이 아니라 다른 관료들이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황우석을 지지했던 사람들치고 제대로 사과하는 사람을 못봤다.
(마***님은 예외 ... ^^;;;)

waits 2006-07-02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강양구 기자님, NO 대통령한테 바라는 게 너무 많군요...;;;

balmas 2006-07-02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사과를 하든 안하든 어쨌든 이런 얘기를 한번은 해줘야죠. 사실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서 속이 시원합니다. ^-^

중퇴전문 2006-07-02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사 문제와 황우석-노무현 문제는 사건의 주체와 현재 시점에서의 진행 여부가 좀 다른 문제겠죠. 서울 한복판에 사창가를 용인하면서 일군 위안부를 윤리적으로 비난할 자격이 있냐는 식으로 묻는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일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처럼요. 본문의 주제와는 벗어난 지적이지만, 기사 후반부에서 무리하게 대비를 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waits 2006-07-02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훌륭한 발마스님, 반어법이었사와요..^^;;;
요즘 '침묵과 열광' 보고서 강양구 기자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몇 있길래..ㅎㅎ

balmas 2006-07-02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퇴전문님/ 흐흐, 그런가요? 강 기자는 아마도 수사법적으로 강한 대조 효과를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나어릴때님/ ㅎㅎㅎ 그러셨군요.

딸기 2006-07-0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은 죄송하다 말하기가 어려운게 아니라 죄송하다는 마음이 진짜로 하나도 없는 듯해요. 모든 일에서요.

로드무비 2006-07-0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일 괘씸한 게 이 부분이랍니다.
석연치 않고.

balmas 2006-07-0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대통령이 되려면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
로드무비님/ 두 말하면 입 아프죠,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