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기인님 이벤트에서 상품으로 받은 책 중 한 권인 오규원 시인의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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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전하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마지막 장면을

잠시 보자.

 

한 좋지 못한 인간이 암으로 죽게 되어, 죽기 전에 그의 독살스런 아내와 심보 고약한 딸에게

용서를 구한다.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자기 자신도 놀라우리만큼 집안일의 잡동사니에 대해서만

유일한 관심을 갖고 있는, 감정도 메말랐고 사고력도 없는 자신의 가족들을, 불현듯 매우

측은하고 불행하게 여기는 동정심을 갖게 된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그는 기다랗고

부드러우며 고무 호스와 흡사한 관 속을 기어가는 느낌을 가진다. [......] 멀리서 빛이 반짝이고

그는 그 빛에 도달할 수가 없다 : 그는 우선 마지막 경계 ---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 를 넘지 않으면

안된다. 침대머리에는 그의 아내와 딸이 서 있다. 그는 그들에게 "용서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내뱉은 말은 "나를 지나가게 해다오"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분도출판사, 1991, 131쪽]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용서하다'와 '지나가다'라는 단지 이 두 마디로 죽음의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문제라는 점을 충격적으로 일깨워주지

않는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것은 '용서'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했다고

그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넘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지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문제를 '용서하다'와 '지나가다'라는

두 어휘로 집약해 표현하는 문학(국면)을 보고, 타르코프스키는 같은 지면에서 "무시무시한

진실성과 사실성" 때문에 "마치 묵시록처럼 우리들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는 말로

그 감동을 전달하려고 한다. 어떻든 우리는 '용서하다'라는 말은 사변적 사고의 핵심을 이루는

관념적 어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언어가 아닌, 실재적이고

사실적인 언어의 하나인 '지나가다'가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새삼 기억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날이미지와 시] 문학과지성사, 7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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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은, 아마도 한국 현대 시인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시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현상학과 구조주의라는 20세기 서양의 두 가지 철학적 사조, 그리고

동양의 선문답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탈인간 중심적 관점, 나(주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의 '날이미지'론인데,

이 책은 날이미지론에 관한 그의 사색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위의 인용문은 그 중 한 대목으로, 폴 세잔과 메를로-퐁티, 롤랑 바르트 등이 각자 나름대로

추구했던 "그냥 있는 세계"에 대한 문학적 표현을 톨스토이를 통해 예시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그냥 있는 세계, 또는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결과인

"날이미지로서의 현상"은 "우리들이 꿰뚫어보지 못할지라도 직시하고자 하는 진실의 형상이며

그 형상은 그 어떤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양식으로 담아내지 않으면 않을수록 자신의

올바른 모습에 그만큼 가까워지는 그런 것이다."(같은 책, 78쪽)

같은 언어를 쓰는 동시대의 시인들 중에서 이처럼 엄밀한 사고를 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업은 이미 그 자체가 엄밀한 해체의 작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품고 있는 관심 중 하나는 그가 현상학과 구조주의를 넘어서

좀더 적극적으로 해체론으로, 해체의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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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7-03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balmas 2006-07-03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ㅎㅎㅎ

릴케 현상 2006-07-03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관심이 있는 시인인데, 게을러서 잘 읽어내진 못하고 있지만^^ 이 책도 읽어야쥐 하고만 있네요...좀더 충동질해주시면 읽을텐데=3=3=3

로드무비 2006-07-0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좀 감상적인 시인으로 봤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오규원 시인을
다시 보게 되네요.
땡스투.^^

balmas 2006-07-0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ㅋㅋㅋ 2%가 부족하십니까? ^^;;
로드무비님/ 예, 오규원 시인은 감상적인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분이죠. :-)
땡스투 감사. ^^;

릴케 현상 2006-07-06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번에 로드무비님이 '전 오규원 별로 안 좋아해서요'라고 했어요. 고자질 ㅋㅋ=3=3=3

balmas 2006-07-06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이런 ...



고자질쟁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