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의 눈님이 방명록에 몇 가지 질문을 남겼는데, 질문들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제대로 답변하기가

어렵군요. 그래서 대신 한 10년 전에 제가 그 질문들과 비슷한 주제로 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진 데다가, 여러 모로 생각이 숙성되지 못했을 때 쓴 글이라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얼마간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 글을 퍼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공적인 논의나 인용은 불허합니다.

 

-------------------------------------------------------------------------------------------

 

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캉귈렘-스피노자

[고대 대학원 신문] 1997. 5.



1. 잊혀진 물음: 역사유물론은 과학인가?


  80년대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과학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그들에게서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전제였으며, 문제는 ‘부르주아’ 과학들’(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 특히 인문, 사회과학들에 대한 그것의 우월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이 과학적 무기를 어떻게 ‘실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교조적인 정식화에 따르자면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적용’인 것처럼).반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잊혀진 담론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자명성만이 이 사태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제시될 뿐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아마도 거의 대칭적일 두 개의 자명성을 목격하게 된다. 다만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한 자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비과학성 또는 이데올로기적 본성에 대한 자명성일 뿐이다. 이러한 대칭성의 경험은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옹호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가시기는 하지만 끝내 외면해 버릴 수는 없는, 당혹감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은 위대한 비대칭성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적 독재이지만, 또한 그것은 모든 계급적 착취와 지배를 폐지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로 삼고 있으며(특히 발리바르, 「"공산당 선언"의 정정」, {역사유물론 연구} 참조),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은 모든 부르주아 인문, 사회과학들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비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회고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잊혀진 물음(또는 ‘억압된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이데올로기들(소위 ‘속류’ 정치경제학과 ‘과학적’ 정치경제학 모두를 포함하는)의 이데올로기적 본성을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 또는 비대칭적 과학이라면, 하지만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었다면, 이러한 본성과 경험, 원칙과 사실 사이의 괴리는, 그러한 괴리 자체의 설명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본성에 대한 물음을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은 과학, 더욱이 하나의 특권적인 과학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2. 역사유물론의 특수성: 토픽적 과학


  역사유물론이 하나의 과학인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어떠한 과학인가라는 또다른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역사유물론의 과학성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물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과학들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기준으로는 역사유물론에 대해 충분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유물론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학적 기준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식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자의 경우는 모든 과학들에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학이나 물리학 또는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필연적으로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엄밀한 의미에서 물리학이 ‘경험적인 것의 수학화’(A. Koyré, Etudes d'histoires de la pensée scientifique 참조)를 통해 성립될 수 있었다고 해서, 다른 과학들에게까지 그러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으며,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은 물리학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내적 기준에 따라 구성되고 분류되는 것이다(푸코의 인간과학들의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나 그 이전의 캉귈렘의 연구들은 과학적 기준들의 상대성을 보여주는 연구들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을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자와 같은 경우는 분명 역사유물론에만 고유한 현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전자의 경우처럼 보편화될 수 있는 성격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 모든 개별과학들의 성립이 과학철학 또는 인식론(바슐라르나 캉귈렘의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 영미 또는 독일적 전통에서 인식론은 인식주체의 심리적(또는 초월론적) 활동의 문제이지만,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에서 인식론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적 활동의 문제이다)의 일반적 원칙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역사유물론은 그 자체의 내재적인 과학적 기준을 통해 일반적인 인식론적 원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하나의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가장 일관되게 주장한 사람은 알튀세르였다. 알튀세르는 초기에는 세 개의 대륙(수학, 물리학, 역사과학)의 비유를 통해서(예컨대 알튀세르,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그리고 이후에는 역사유물론이 정신분석학과 함께 일종의 토픽적 과학(정확하게 말하자면 “분파적, 갈등적 과학”)을 구성한다는 테제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부단하게 주장해 왔다. 알튀세르는 우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 과학”이자 “분파적 과학”으로서 이들의 역사는 “언제나 재발되는 분열들로 표시”(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알튀세르와 라캉}(공감, 1996) 17쪽)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과학들의 역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 과학들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기존의 이론들 내지는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공격이 가해지다가, 이것들이 점차 수용되면서부터는 바로 그 과학들 내부로 침투해서 그 과학들의 과학적 핵심을 ‘수정’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수정주의적 경향들을 통해 결국은 그 과학들 자체가 갈등적 분파들로 분열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불가피한가, 그리고 그러한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우리가 과학들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알튀세르는 전자의 질문에 대해 그러한 분열과 갈등은 바로 그 과학이 분석하는 대상이며 동시에 그 과학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현실 자체가 갈등적이라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계급사회와 같은 필연적으로 갈등적인 현실 속에서는 어떤 위치에서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명한 확인이 있다. 사람들은 갈등 자체 속에서 일정한 입장 ... 을 취한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이러한 갈등적 현실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 20-21쪽.)

  그렇지만 아직도 결정적인 질문이 한 가지 더 남아있는데, 바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의 필연성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유물론이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바로 갈등과 분열 때문에,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적 객관성을 얻는다고 말해야 한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의 갈등성이 자신의 과학성, 자신의 객관성에 대하여 구성적이라는 사실”(위의 글, 20쪽)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우리에게 긍정보다는 당혹을 안겨다 준다. 갈등성이 과학성과 객관성에 ‘구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분파적 과학이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모델 또는 원칙을 다른 과학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두 과학들은 그야말로 유별난 과학들(이것의 의미는 ‘사이비과학’에서 ‘메타과학’까지 다양하게 진동한다)인가?

  알튀세르의 이러한 역설적 주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또는 과학적 활동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야말로 이론적 갈등의 원천이며, 따라서 갈등성과 객관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3.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개념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캉귈렘의 역설적인 개념, 즉 과학적 이데올로기라는 개념(Georges Canguilhem, “Qu'est-ce que l'idéologie scientifique?”, in 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 Vrin, 1988)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것이 역설적인 개념인 이유는 흔히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여기서는 서로 결합하여 모순적으로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념에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이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캉귈렘에 따르면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외재적인 방식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에 내재적이며, 과학이 갈등적이라면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서만 발전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데올로기 또는 오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전(前)과학적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이다(또는 전과학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

  전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적인 천문학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천동설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어떤 과학이 인식론적 절단(coupure)을 통해 형성되면서 폐기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에 비해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과학의 성립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다른 과학의 성립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캉귈렘은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의 다양한 진화론을 들고 있는데, 일례로 허버트 스펜서는 태양계와 동물 유기체, 생명종들, 인간, 사회, 언어 등 모든 것이 연속적인 미분화를 통해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일반화된 진화법칙을 설정한다. 이러한 일반화된 진화법칙의 문제는 한정된 영역에서 설립된 진화의 개념과 그것의 논증과 실험방식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차용해 온 과학성의 규준들을 넘어 탈선”한다는 점에 존재한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후에’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다른 과학의 규준과 위신을 존중하고 그것들을 모방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종교나 마술, 허위과학, 요컨대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한정된 영역에서 타당한 규준들을 일반화하여 총체적 지식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야말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판별적 특징이 되는 셈이며,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그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새로운 과학 또는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구성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전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는가? 또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비판되고 극복될 수 있는가? 요컨대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점에서 불가피하며, 그것은 과학적 활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두 가지 상이한 영역에서의 답변들을 요구한다. 그 하나는 과학사적인 시간성, 또는 과학적 활동에 고유한 역사성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학적․사회적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전화의 노력, 즉 고유하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윤리적 능동화의 운동에 대한 것이다.


4. 상징적 질서의 아포리아들


  첫번째 문제는 철학적 구조주의(알튀세르, 푸코, 라캉)의 고유한 기여로서 구조적 역사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주체와 역사를 제거했다는 통속적 비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이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가장 심원한 역사성에 대한 개념을 가공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들의 노력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의 역사화에서 출발한다. 칸트는 초월론적 주체의 선험적 활동(통각, 선의지)을 통해 모든 인식과 실천의 가능성이 정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초월론적 주체의 활동을 역사성을 지닌 초월론적 구조, 이를 테면 상징적 질서(라캉)(또는 담론의 질서,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전위시킨다. 이 때 상징적 질서는 모든 인식과 의미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초월론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하거나 불연속적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적 초월론이라고 할 수 있다(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이를 “역사적 선험”(a priori historique)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초월론적 구조가 역사화될 경우 진리의 상대화, 지식의 비객관화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식의 기준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면, 인식의 객관성이나 진리의 관념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적 연구들은 초월론적 구조들의 불연속성, 또는 지식체제의 정상화(normalisation) 기능들에 대한 과도한 강조 때문에, 일종의 상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인식론적 단절’ 개념」, {이론} 13호 참조).

  다른 한편으로 초월론적 구조의 역사화는 “주체” 개념의 의미 변화를 동반한다. 즉 이제 주체는 모든 인식과 활동의 토대로서 주권적 주체(subjectum) 또는 초월론적 주체가 아니라, 의미의 근거로서 상징적 질서 속에 필연적으로 포섭되어 있는 예속적 주체 또는 ‘분할된 주체’(라캉)가 된다. 하지만 예속적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되는 방식은 강제적이거나 물리적 폭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예속적 주체는 인식과 행동의 자율적 주체로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된다(특히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따라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근대 철학과 더 나아가서는 근대성 일반의 원리로서 자율적 주체의 역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율적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징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편입은 동시에 지배구조의 재생산 메커니즘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율적 주체가 모든 해방운동의 근본적인 전제로 간주되기 때문에 더욱 더 치명적인 역설이다.


5. 역사적 초월론을 넘어서: 과학-해방-교통


  이렇게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두 개의 심각한 아포리아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아포리아들 각자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계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순의 운동이다. 앞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토픽적 과학에 대한 테제가 하나의 역설, 또는 하나의 모순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알튀세르에게서 토픽적 과학의 과학적 객관성은 다름 아닌 그것의 내재적 갈등성과 그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캉귈렘의 과학적 이데올로기 개념 역시 그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초월론의 아포리아들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이러한 모순의 운동을 작동시킬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모순의 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좀더 분명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대칭적이라는 것, 또는 과학 그 자체가 정상화(normalisation)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과학적 진리/오류의 문제가 권력의 정상화 기능의 하위범주로 포섭된다는 것은 특히 {담론의 질서}에서의 푸코의 테제이다. 이 때문에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은 상대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의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기준 속에서만 인식되고 판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절단(coupure)과 단절(rupture) 내지는 개조(refont) 사이의 구분이 중요한데, 절단이 과학 자체의 설립의 사건을 의미한다면, 단절 내지는 개조는 과학 내부의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귀적 비판(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최초의 과학적 개념에 내재한 모순의 한 편향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은 항상 회귀적이다)과 전화의 작용을 의미한다(이것은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개념을 보완하고 정정해 주는 것이다. Balibar, “Coupure et refont”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참조).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의 절단을 통해 어떤 과학이 설립되는 사건은 하나의 진리의 발생사건이며, 이러한 진리는 개념 속에 물질화된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 역사유물론은 다른 어떤 과학들(이를테면 그 이전의 정치경제학들)에 의해서도 평가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자신에 고유한 진리의 공간, 과학적 객관성의 영역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장 속에서 그것들을 소재로 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비판하면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자체 내에 갈등과 모순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이후의 발전 속에서 각종의 경향들이 발생하게 되며, 이에 따라 최초의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적 계기들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적 비판과 개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조의 운동은 여전히 최초의 절단의 사건이 성립시킨 진리의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따라서 절단이라는 사건, 또는 특정한 과학적 진리의 설립 자체는 역사적으로 불연속적이지만, 이러한 과학의 역사적 구조 내부의 과정은 전진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지식의 객관성과 지식의 발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의 내재성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과학의 초월론적 구조 내에서 이데올로기화와 탈이데올로기화의 대립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Balibar, “Etre dans le vrai? Science et la vérité dans la philosophie de Georges Canguilhem”,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따라서 우리는 단지 역사유물론이나 정신분석학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의 운동 자체가 내재적인 갈등을 자신의 객관성의 조건으로 한다는 테제를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역사유물론에 고유한 범주들(모순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유물론이 과학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토픽적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은 단지 과학의 이론적 영역 안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사회적인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의 전화를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 또는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상상(imaginatio)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만이 아니라, 욕구(appetitus)의 필연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복합적인 정서들의 모방(affective imitation)의 메커니즘(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동일화(identification)와 유비적인)의 문제를 제기한다(이에 대해서는 {윤리학} 3부 전체를 참조하고, 이에 대한 주석으로는 E. Balibar, “Spinoza, l'anti-Orwell―Le crainte des masses”, in Le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참조). 즉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계급적 조건들에 따른 인식(또는 오히려 의식)의 분할의 문제이면서, 인식과 실천에 수반되는 욕망과 공포,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등과 같은 정서적 효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항상 정서적 효과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 사물에 대한 단순한 합리적 인식만으로 그 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자동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으며, 더 나아가 그것들은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방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서 작용, 정서들의 모방의 문제는 모든 사회운동과 이데올로기들(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의 은폐된 동력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초적 장애물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인식과 실천은 단지 집단적 또는 사회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관개체론적인 관점, 즉 개인들에 내재하면서 또한 개인들을 초과하는 관계들의 인식과 전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삶의 유형들(수동적/능동적)과 결부되어 있는 인식의 유형들(상상/과학적 인식/과학적 인식의 개인적 전유)의 문제로, 그리고 두 가지 유형들의 상호전화의 필요성의 문제로 분석했다(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알튀세르의 현재성}(공감, 1996) 참조). 결국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인식의 조건과 삶의 조건의 동시적인 전화의 과학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그 자체의 존재 조건들의 전화를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특수성이 존재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6-07-0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97년이면, 연대항쟁 직후네요.

balmas 2006-07-03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셈~

에로이카 2006-07-04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렇겠지요? ^^), "갈등성이 과학성과 객관성에 ‘구성적’이라는 것"이라는 구절을 보며 떠오른 건데요... 옛날에 철학 세미나할 때, 그런 얘기들을 했던 게 기억나요... "변증법 - 그것이 사유의 방식이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이건 - 그 자체도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것인가"... 지금 기억하기로는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당시 우리들의 작은 머리통 속에서는 나올 수 없었는데요... (요즘은 아예 이런 질문 자체를 하지도 않으니, 뇌의 크기가 더 줄어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존재 자체의 속성의 일부라면, 그 존재는 대체 무언가요? (이게 철학적으로 말이 되는 질문인 지는 저도 전혀 모른답니다... 모순?)

그리고 또, 감히 여쭤보는 거지만, 이 잘 쓴 멋진 글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지금은 생각이 바뀌셨다고 하는 지도 궁금하네요.... 힘들고 오랜 공부를 날로 훔쳐먹을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여... 좀 죄송한 질문입니다... ^^

balmas 2006-07-0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에로이카님, 우문이 아니라 현문이고 난문입니다. ^^;;
사실 몇 가지 답변을 썼다가 다시 지웠습니다.
특히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언젠가 좀더 상세하게 논의해볼 기회가 있겠죠.
괜히 사람 궁금하게 만든다고 비난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