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호 2006년 1월 20일(금)


참여와 타협의 주술에서 벗어나자!
-2006년 연대운동의 확장을 위한 민중운동의 과제


 

폭력의 확산과 저항의 확산

IMF 구제금융협약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 정권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금융화된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에 완전히 종속된 새로운 축적 체계(이는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위기에 대한 위기관리체계이기도 하다)는 경기 안정과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동시에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집행력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대중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DJ의 정권교체와 노무현 정권의 출범은 이런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IMF와 세계은행, WTO 각료회의 같은 무역·금융투자기구의 위상을 제고하는 것이었다. 또 국가들 사이의 체계를 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 세계 지배세력들은 WEF, APEC 같은 회의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공공연히 드러내며 조율했고, 이런 것들을 축제화하면서 대중들을 선동해나갔다.

노무현 정권은 번영과 사회적 갈등의 해소를 약속했다. 금융화된 초민족적 자본의 투자처를 확대하는 것만이 평화번영의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이것이 거짓말임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도 안 걸렸다. 노동의 불안정화에 따른 경제적 궁핍과 가족을 유지할 수 없는 데에 따른 공동체의 해체의 위기를 겪으면서 대중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폭력(착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평화와 번영은커녕 한반도의 위기상태는 지속할 뿐이었고, 테러와의 전쟁(인간안보)이라는 미명아래 이라크 전쟁은 오히려 확산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대중들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드러내려고 했다. 2003년 열사들의 분신·자결을 시작으로 김선일 피살 사건에 분노해서, 핵폐기장에 건설에 맞서서, 미군기지 확장에 맞서서, 노동의 불안정화와 농업말살에 맞서서 노동자 농민, 여성들은 투쟁했다.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향한 지배세력들의 공론장인 WTO각료회의와 APEC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해나갔다. 자본이 세계화되는 만큼 이에 맞서는 투쟁도 조금씩 세계화되고 있다.

 

대중운동의 정치적 후퇴

하지만 이러한 투쟁이 민중의 정치적 단결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방식으로 분리, 위계화된 노동자의 현실에서 알 수 있듯) 구체적인 현실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은 개개인으로 분리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에서 민중은 자신의 혹은 서로의 문제를 정치쟁점화 하는데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대중조작적인 인민주의적 경향이 정치지형을 지배하고 있는 데다, 대중의 정치적 권리를 몇몇 정치스타에 대한 정념적 지지로 이해하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든 운동이 자기 개발을 담보할 수 있는 이념과 결합하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가속하는 지배세력들의 정치공세 속에서 기존에 있던 대중조직의 운동이 마땅한 대응 방법을 못 찾을 때 대중의 통념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 들거나 이미 운동에 내재해 있는 이념으로 현실을 해석하려 드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저해하고 대중운동이 운동의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데 장애가 된다. 대중운동에서 종종 드러나는 (민족주의적 틀에 갇혀있는) 코퍼러티즘적 경향은 가장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지극히 수동적이며 폐쇄적인 형태로 변모한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한 민족국가의 발전전망을 불투명하게 하고 이런 상황에서 민족의 보존(통합)이 다른 문제를 압도하게 되면 민족주의 이념은 자신의 보편성을 탈각하고 고립주의적인 경향을 띠며 급격히 우경화된다. 한편 경제위기상황에서는 지배세력들의 공세만이 강화될 뿐 타협의 여지는 크게 줄어드는데 이런 상황에서 기존 대중조직의 운동은 타협을 통한 탈출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결국 최종목표를 대중조직으로서 자신만이라도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조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중조직은 노동자/농민 일반이 아니라 오로지 조합원만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는 비즈니스 노선이 강화된다.

불행히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한국사회의 대중운동에서 이 같은 경향은 더욱 더 지배적인 경향이 되고 있다. 농민운동은 ‘식량주권’을 제기할 때 농민의 생존권, 농업에 대한 민중의 민주적 결정권보다는 민족국가의 안녕(식량안보)이라는 차원에서 제기하는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이 문제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지배세력들에게서 농업회생의 방안을 찾을 수 없었던 농민운동은 투쟁의 응집력을 통해서 이것의 문제점을 폭로하면서도 노무현의 배신 속에서 조직력과 투쟁력을 급격히 상실하게 된다. 2005년 두 농민 열사의 죽음에서 농민운동은 노무현 정권과 지배세력들의 농업말살정책에 치를 떨어야 했지만, 응집력을 보여주는 것에서조차 어려움을 겪고 만다.

노동조합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는 조합원의 투쟁을 응집력 있게 전개하는데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몇 번의 총파업 선언은 불발로 끝나거나 몇몇 사업장의 응집력에 기댄 채로 미약하게 전개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층 사업장, 연맹에서는 투쟁의 한계라는 이유로 몇 가지는 양보하고 쟁취하는 식의 교섭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교섭은 종종 미조직노동자의 요구가 외면된 채로 진행되지만 ‘현실’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이 같은 노동조합의 비즈니스 노선(자기중심적인 실리주의) 위에서 민주노총은 ‘사회적 합의’를 수립하는데, 이런 코퍼러티즘 전략은 사실, 조합원 중심의 실리주의 노선을 방어하기 위한 제도적 표현에 불과하다. 2005년 비정규직 관련 노동법 개악저지투쟁에서도 이 같은 교섭전략(기간제 사유제한 예외를 인정한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이 문제가 된다. 단위사업장의 교섭전략이 당과 총연맹의 교섭무대에 그대로 등장한 셈이다. 2006년 국회 투쟁을 기약하는 것으로 2005년 노동법개악저지투쟁을 마무리해야 하는 현실은 결국 오늘 노동조합운동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문제의식만 앙상해진 공동투쟁, 그리고 민중운동의 분열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한다는 목표아래 민중운동은 공동투쟁을 조직해 왔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로 전국민중연대 운동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조직 출범 3년 동안 공동투쟁이 제기했던 본래의 문제의식은 (반신자유주의 전선 강화, 운동의 외연 확대) 점점 축소되고, 대중운동들이 자체로 추진할 수 없는 투쟁들(시민운동과의 연계-외연 확장, 일정조율, 반전-반세계화운동)을 대리하는 양상이 강화된다. 이 과정에서 실용주의적 경향이 난무하고, 정치토론은 실종된 채로 기존 운동의 이념(민족주의)이 복원되면서 패권적 경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늘 노농연대 투쟁이 안 되는 이유는 (강력한 정치조직/연대체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대중운동 내에 자기중심적 실리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해야 하지만, 공동투쟁은 계속 이런 경향아래 갇혀져 있었고(기존 대중조직 운동의 외연 확대 - 시민단체를 끌어들이기 위한 각종 대책위 남발), 위기에 대한 공동의 인식에 근거해 민중들의 유대와 공통관념(반신자유주의 문제의식)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조금씩 뒤로 밀려났으며, 실용주의적 경향(투쟁의 이합집산, 일정조정)만이 강화되어 왔다.

기존 대중조직의 운동들 사이에서 조직 방어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실리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노농연대는 구호수준에만 머무를 뿐이다. 공동투쟁은 더더욱 형해화하고 그 자리에는 특정 조직의 단일사안 단일요구의 투쟁만이 남았다. 이런 가운데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이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정치쟁점화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의 폭은 오히려 좁아졌다. 수세적인 국면에서 이루어진 의회진출은 민중운동의 국회 의존성(대정부 의존성)을 도리어 더 높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민중운동의 역량은 국회 앞으로 집중하게 되고, 결국 가을 정기국회를 전후로 각종 요구들이 나부끼는 농성투쟁이 모든 민중운동의 투쟁을 대신하게 된다. 국회 앞 투쟁은 자신의 요구도 중요하다는 식의 알리바이를 제공했고, 현 단계 정치 투쟁의 방향, 민중운동의 과제를 망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자기 조직 확장을 위한 기본목표(의식화, 조직화)마저 사라지고, 소속된 조합원들로부터 책임을 면하기 위한 요구안의 달성여부가 투쟁의 기본목표가 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신자유주의 전선 강화는 고사하고 조합원의 확보조차도 쉽지 않게 된다. 지배세력들과의 타협이 어려운 상황에서 투쟁목표는 현실화라는 미명아래 낮게 조정되고, 이렇게 낮게 조정된 투쟁목표는 지배세력들의 목표지점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결국에는 기존 조합원의 요구를 방어하는 것도 실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배세력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반발하는 운동이 이제는 국회 앞에서 관리 받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2006년 민중운동진영의 연대운동이 나아가야 할 것

오늘날 한국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중운동의 발본적인 인식과 노선의 변화 없이는 이런 상황의 타개가 매우 어렵다. 경제위기상황에서 코퍼러티즘적인 운동노선이 불가능해진데도 기존 노선을 고집하려 들고, NGO 운동에 의해 관리 받고 끝내는 배신당하는 상황(2005년 12월 1일 7개 시민단체의 노동법 개악안 지지 사태)에서도 민중운동의 정치적 단결보다도 시민단체와의 연대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둔다면, 민중운동은 자신의 존립기반조차 상실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시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로 돌려야 한다. 정세인식을 위한 토론을 강화하고, 운동 내에서 어떤 요소들을 강화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인민의 권리를 자율적으로 실현하고, 사회적·경제적인 변혁을 추구하며, 사회운동과 공동체 사이의 교통과 연대를 확장하려는 운동’ 우리는 이를 대안세계화운동이라고 부른다. 공동투쟁이 무조건 만능이 아니다. 이 같은 요소들을 강화하기 위한 연대운동을 조직하면서 그 내에 다양한 물질적 장치(조직 이념, 조직 운영 원리)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연대운동의 방향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중운동은 지배세력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이에 근거하여 정치적인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민중운동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운동의 이념으로서 대중의 공통관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직 혁신으로 되지 않는다. 급진적이며 변혁적인 대중 운동이 일어나면서 새롭게 주체가 형성되고 이것이 대중조직의 운동과 교통할 때 혁신의 기운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배세력들과의 정치적 단절(반신자유주의)을 강조하는 것은 이 같은 운동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최소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 국가(및 사회체제)가 대중에게 가하는 폭력(착취, 배제)의 현주소에 대한 면밀한 인식과 이를 대중과 공유하기 위한 정치폭로가 필요하다. 자유주의들과 NGO운동이 심어놓은 ‘민주주의’의 미망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경계를 확장하고, 현존하는 사회관계의 변혁을 위한 머나먼 길에 나서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다양한 운동과 더 많은 운동이다. 대중을 분열시키려는 지배세력들의 책략에 맞서는 다양한 운동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우리는 이를 격려해야 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에 여러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운동에 노동자, 농민,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조직하며 운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시기에는 이런 다양한 운동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여러 조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다.

이렇게 등장한 다양한 운동들 사이에서 수평적인 토론이 확산되어야 한다. 공동투쟁에 참여하는 여러 운동 주체들이 자신의 경험, 자신의 이념, 자신의 전망을 놓고 평등하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운동들 사이의 교통을 통해서 대중들이 직접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확장하면서 운동 전망에 대한 공동의 관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들이 연대운동체/공동투쟁체의 조직운영원리(의사결정기구의 민주화)에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지금 만일 우리가 민중운동의 연대운동에 대해 새롭게 토론하고자 한다면, 바로 오늘 대중운동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대운동과 공동투쟁은 공동의 인식을 전제로 공동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이지만, 동시에 대중운동의 혁신을 위한 운동이며 변혁적인 운동 주체의 형성을 위한 운동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연대운동에서 노력과 고민을 집중해야 할 지점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발행처 사회진보연대
(140-801) 서울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 전화 : 02-778-4001/4002 / 팩스 : 02-77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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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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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오랜만에 [인물과 사상]이나 한번 사봐야겠네.

역시 강준만 교수 기동력은 대단해 ...

DC 과학갤러리에서 보니까 최승호 PD와의 인터뷰가 재미있다고 하던데.

 

[펌]

 

한학수하고 최승호 인터뷰하고
강준만이 지나간기사들디벼주고
미디어오늘에서 언론보도행태 파헤치더라

재밌는 것들 몇개 소개하면

최승호가 한겨레 실린 김어준의 "황우석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보고 기가막혀웃었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더래

취재를한 지강유철씨는 최승호에게 서프라이즈와 일부진보지식인이
황구라사태에서 보여준 작태 어떻게생각하느냐고 묻고

한학수피디는 참여연대가  이번 사태에서 성명서 한장 나온거 없었다며
시민단체에 섭섭함을 드러냈어
결국 그들도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롭지못했다고

안규리교수의 실험실장부에 줄기가 14개 나오는데
한한수 피디가 거기에서 황구라팀이 처음14개 줄기 만들라다
11개로 줄였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논문조작의 부분적 증거를 찾았데

바꿔치기가 될려면 전문가가 최소 30분이 걸린데
그리고 바꿔쳤다면 매일같이 셀을 관찰하는 전문가들이 모를리 없데
또 시시티브이가 설치되어서 쉽지 않다네
그래서 애초부터 미즈메디 수정란을 갖다놓았다는게 가장 설득력잇다네

우리가 들떳던 2004년 논문은 외국에선 그냥 과학적 발명정도로 받아들인데

2004년 논문으론 특허가 불가능하데
논문에 이미 단성생식 가능성을 배제할 수없다는 말이 있어
이런 딜레마를 가진 논문이 특허를 얻을 순 없데
당선생식은 과학적재현이 불가능한 데
그걸 어떻게 특허를 줄수있냐는 거지

다른 나라에서의 재연이 불가능한 이유는
난자는 30대도 40대도 안된데
20대 여성의 싱싱한 당일난자만이 가능하데
그런 난자를 수백개씩 공급받을 수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데
그래서 황구라의 논문은 검증이 불가능하데

황구라는 유럽과 미국 등 대부분 나라에서 배아보제연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논문이 검증에서 걸릴게 없다고봤데
최소 수년의 시간을 벌 수있다고 본거지
그래서 황구라는 최대 10년을 보고
철통보안속에 줄기를 만들려고했던거 같데
이런 대담한 계획을 황구라가할 수있었던 것은
첫째 그렇게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둘째 한국이 그의 연구조건을 충족시켰고
셋째 그의 연구팀에 어느 정도의 축척된기술이 잇었다는 거지
한학수가 황구라의 그 담력하나는 인정해줄만하데

한학수가 겪어본 황구라는
얼굴하나 안변하고
바로 내일 들통날거짓말도 아주 태연히 하는 사람이래
말도 정말 잘하고 설득도 잘한데

케이비에스 일요스페셜에서 황우석 2번 줄기세포가
슬로언 캐터링 연구센터에 있는걸 한피디가 우연히 알고나서
갈등 졸라 햇데
당장 그 연구소에 전화해서
자초지종 설명하고 2번 줄기세포 핑커프린팅 요구할까
정말 고민많이 했데
근데 그렇게 하면
그 자료가 피디수첩에 안오고
뉴욕타임즈에 갈게 뻔했대
팀내에서도 뉴욕타임즈보다 하루 늦게
쓰면 어때라는 말도 있었데

* 내말 : 그랬으면 정말 세계적 개쪽이었을거야 한피디 잘햇어

한피디 왈
이번 사태는 87년 이후 이룬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 기반이
얼마나 두께가 얇았던지를 적나라하게드러내준 사건이래
일부평론가와 정치가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확인했었데

재밌지
재밌으면 인물과 사상 사보던가
아니면 댓글이라도 달어줘

IP Address : 222.232.9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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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1-21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아다르고 어다르다고 말이 삐긋하면 황빠 아니면 황까로 나누는 세상이 된것 같아 말하기가 조심스럽군요.
황교수 2005년 논문에 대한 평을 하나 올립니다. 링크하려는데 잘 안되 퍼오는데 황교수 논문이 발표되었을때 논문을 평한 글입니다. 읽어보신분들이 있을수도 있는데 안 읽어보신분들은 읽어보시고,
논문조작이 밝혀지기 이전에도 판단할 분들은 그 연구와 이후 줄기허브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 칼날과 논평을 하고 있었다는것을 알아주시길.
출처는 goodking.new21.net 과학과 철학에서 나온것이고 이외 황교수에 대한 분석이 예전부터 읽고 조작은 아니지만 문제점에 대해 지적한 글이 있으니 참조해보시길 바랍니다.

축제기간이기에, 간만에 실험실에 들어온 어린 아이의 눈에서 미친 눈빛을 보는 것이 꽤나 즐거웠기에 술 한잔을 걸치러 외출한 동안 일은 터져버렸다. 새벽부터 뉴스에서는 황우석 교수의 엄청난 발견을 대서특필하고 있었고, 나는 그저 조용히 사태를 관망할 수 있는 인내심이 생겼음에 감사하고 있었다. 이젠 그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는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떠벌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속도일 뿐이지 않은가.

도대체 이번엔 어떤 연구를 했는지에 관해 뉴스나 기타 선정적인 언론을 통해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환자들로부터 핵치환을 통해 (치료용) 줄기세포를 만들어 내었다.

2. 지난 번 연구보다 더 향상된 복제 효율(15배)을 얻을 수 있었다.

3. 이는 난치병 치료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엄청난 사건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고 논문을 설명하도록 한다. 1과 2는 부분적으로만 참이고 3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할 것이 분명하다.

1은 치료용이라는 말에 괄호를 치면 정확히 맞는 보도다.

2는 15배가 아니라 정확히는 10배정도(3.3% 에서 35.4%)로 고치면 정확하고, 단순한 복제효율이 아니라 발달과정에서 살아남은 비율까지 합하면 효율은 더욱 줄어든다. 3.3%에서 ~24%로.

3은 연구자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논문이 밝히고 있는 것은 언론에서 떠드는 것처럼 매우 획기적인 과학적 도약은 아니다. 이미 인간의 체세포로부터 복제된 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시점에서, 어쩌면 이 보고는 첫째, 이러한 복제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능하다는 것과 둘째, 기술향상이 이루어졌다는 것 외에 밝혀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복제기술 향상은 중요한 진전이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도 산적해 있다. 사실 실용화는 요원한 일이다. 이 점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진이 '자신들의' 논문에 '자신들의 입'으로 쓴 것이다.

논문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부분에는 연구의 목적과 사전연구, 연구계의 동향, 연구결과의 간단한 요약등이 실려 있다.

쥐에서는 이미 이 논문에서와 비슷한 사례가 보고되었다고 한다. 사실 많은 이들이 놀란 것은 작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올해는 기껏해야 여성의 핵이 아닌 남성의 핵을 이용해 복제를 성공하지 않겠느냐는 관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연구진들도 남녀의 차이에서 복제효율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를 조사하기 위해 (어차피 실용화를 위해서는 당연한 수순이지만)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또한 복제된 줄기세포를 쥐의 Feeder Cell(줄기세포에 양분을 공급하는 양분공급세포)에서 키우기 때문에 치료에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외에도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배양액에 들어간 Calf Serum(소의 혈장액)등과 남아있는 인간에게서 유래되지 않은 오염원들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줄기세포라인으로는 반드시 치료용 목적뿐만이 아니라 해당 질병 연구가 가능하다. 선천적 질병일 경우 그 유전적 결함을 가진 줄기세포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줄기세포로 약개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선천적 결함을 가진 세포는 꼭 복제를 통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므로 이 말은 과학저널에 등장하는 약간 억지스런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문제는 이것이다. 세포핵을 제공한 환자의 질병이 선천적이 경우, 이렇게 복제된 세포는 어찌보면 무용지물일 수 있다. 복제된 줄기세포는 공여자의 유전정보를 그대로 복제했기 때문에 유전적 결함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질병에 관한 생물학적 연구가 항상 동반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말하고 있다. 또한 사고로 인한 질병일 경우 오염원의 제거와 분화과정을 조절하는 방식에 대한 세심한 연구가 있어야 치료용으로 사용가능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복제된 11개의 세포주에 대한 분석은 별다른 오염 없이 실험이 잘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들 세포를 분화시켜서 피부세포 등등으로 분화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개개의 환자들에게서 핵을 공여받아 복제를 해야하는 번거로움은 장기이식이나 줄기세포 주입시 일어날 수 있는 '면역거부반응'이라는 것 때문이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급성면역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면역거부반응에 관여하는 MHC분자들이 Somatic mutation을 통해 다양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다양성은 DNA의 배열을 바꾸는 엄청난 모험을 감행하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일종의 진화적 압력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같은 유전정보를 가진 사람이라도 면역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연구진은 MHC HLA로 면역거부반응을 확인했다. MHC-HLA는 면역학계에서는 실제로 가장 중요한 면역거부반응 인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실제 치료에서도 이 물질에 대한 분석으로 장기이식등을 결정하는 수가 많다. (물론 장기이식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련 분자들이 테스트된다). 그러나 연구진들도 밝히고 있지만 이들이 Science에 발표한 면역거부반응에 관한 데이터의 진실은 in vivo(생체 내)가 아니라 in vitro(시험관 내)실험이라는 것이다. in vitro에서, 즉 MHC HLA 분자의 동일성 여부를 관찰한다는 것이 면역거부반응에 대한 차후실험 없이 바로 치료용 복제를 실용화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정보가 면역반응에 관여한다는 보고가 있으며 환자의 미토콘드리아까지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복제된 모든 미토콘드리아의 정보는 난자제공자의 것이다) 이를 해결할 방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실제로 이식실험을 해보지 않고는 확신할 수 없다. 인간을 대상으로 in vivo실험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므로, 일단 MHC-HLA type matching정도로(물론 사실 이건 당연히 예측되는 결과다. 만약 MHC 정보가 달라진다면 귀신이 씌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만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복제의 효율성은 통계적으로 아직 향상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거 중요하다. 편차가 엄청나게 크다. 자세한 것은 논문 찾아보시길. 어떤 경우는 상당히 효율성이 낮았고 연구진은 난자공여 산모의 나이와 이를 연관시키기도 한다). 즉, 효율성은 평균적으로 10배정도 높은것이지만(35.4% vs 3.3%) 발달과정을 고려하면 더 낮아진다( ~24%뿐).

어쨌든 효율성이 증가했다 치고, 이들은 효율성의 증가를 가져온 5가지 실험과정의 발달을 나열한다.

1. 휴먼 피더셀을 사용
2. 핵 채취과정의 발달
3. 난자채취과정에서 cumulus 세포 제거과정의 향상
4. immunosurgery 과정을 거치지 않고 ES 세포 구축
5. 손기술의 비약적 향상 (실제로 기술된 원문은 이렇다 Scientist-specific micromanipulation improvements during the most exacting steps of the oocyte’s enucleation, and NT-injection and fusion): 이건 잘 아시듯이 젓가락질 운운하는 것을 말한다.

연구결과는 이게 전부다. 이 후 연구진들은 다음과 같은 전망을 제시한다.

우리가 이 복제기술을 실용화하려면 기술전과정에 걸쳐 모조리 사람에게서 나온 물질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치료에 드는 돈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또한 후생적 epigenetic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유전적 각인 현상의 제거, 미토콘드리아 정보, 정자에 의한 스핀들 폴 극체 형성, 소마틱 센트로솜의 유입, X-inactivation과정이 방해 받을 수 있음 (쥐에서 보고되었음), 유전체의 안정성, 분화과정의 정교화, 텔로머레이즈의 문제등등등.

복제인간연구는 절대 안한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논문은 마무리 된다.

이제 이 논문의 실체를 보셨으니, 이 연구결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과연 이 연구결과가 황교수가 런던(도대체 거긴 왜 갔을까. 논문은 미국에 발표하고 발표는 영국에서 하고..저러다 왕따 당할라..)에서 발표할 만큼 대단한 것인지의 문제와, 정말 난치병 환자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도 될지의 문제등은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내 말은 이 연구가 난치병 치료를 위한 기술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뜻이 아니다. 이 연구가 정말 이렇게 대서특필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묻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난치병 치료가 문턱에 다가온 것처럼 보도될 가치가 있는지에 관해 묻고 싶을 뿐이다. 어찌보면 과학적으로는 예측되었던 일들을 검증한 것에 불과한 논문이, 단순히 기술개발의 비약적 향상이라는 이유로 화제가 되고 있는 것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처럼 예측된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상의 실험설계로는 절대 Science지에 논문을 실을 수 없다. 논문이 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다소 정치적이고 복잡한 사안이 걸린 치료용 복제기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비에 관한 황교수의 언급, 언론의 종교적 보도태도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모두가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biosculp 2006-01-2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 링크입니다.

http://goodking.new21.net/bbs/rgboard/view.php?&bbs_id=0002&page=&doc_num=400

수퍼겜보이 2006-01-21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재밌네요. 요즘은 정치가와 평론가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수준이 현저히 낮다는 생각이 들어요. 에효~

balmas 2006-01-2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iosculp님/ 오랜만이시네요. 퍼온 글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한 말씀 드리자면, 저는 황빠 대 황까라는 대립 구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황빠 대 비황빠 또는 일반인들이 있을 뿐이죠. 비황빠 또는 일반인들 중 몇몇은
과격한 비판을 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태까지 황우석(팀)과 그 골수 지지자들이 해온 가증스럽고 역겨운 행태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수퍼겜보이님/ 그렇죠. 대중들의 지적, 정치적 수준도 문제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죠.
 

ㅋㅋㅋ 불교계 사람들한테는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정말 재미있는 인터뷰네. 잘은 모르지만 불교계 내부의 사정을 잘 드러낸 것 같다.

재일 재미있는 말은 "너는 떠들어라, 그래도 우리는 아줌마 보살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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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황우석 옹호, 지관 스님의 콤플렉스!

[신승근의 도전인터뷰]

‘100억원 모금’ 불교계에서 다른 목소리 내는 조성택 <불교평론> 주간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동일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가톨릭과 기독교가 생명윤리를 내세워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서양 윤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엄호사격과 함께 황우석 교수에 대한 전폭적 지원에 나섰던 한국 불교계의 황우석 감싸기가 멈출 기미가 없다. 줄기세포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외부세력 음모론’을 제기했던 불교계는 줄기세포 연구가 총체적 조작과 사기극으로 판명났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고 외친다. ‘황우석 박사 지키기 재가불자들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동산반야회 김재일 회장은 “황 박사의 연구 재개와 원천기술 재현을 위한 100억원 재단 설립 범국민운동본부 설립” 방침을 밝혔고, <법보신문>에 따르면 성금 기탁 의사를 밝힌 스님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불교계의 내부 인사인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불교학 전공)가 자신이 주간으로 있는 <불교평론> 2006년 봄호 권두언을 통해 “불교계의 황우석 감싸기 중단”을 요구하며 자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겨레21>은 서울대 조사위의 발표에 대한 황 교수의 해명 기자회견이 열린 직후인 1월12일 오후 조성택 교수를 만나 불교계 내부를 향해 칼날을 세운 이유를 물어봤다.

2002년엔 나 혼자 황우석을 지지했다

곧 나올 <불교평론>을 통해 불교계의 황우석 옹호 분위기, 특히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황우석 지지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이건 단순히 황우석씨에 대한 옹호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가톨릭은 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자신들의 종교적 생명윤리에 저촉된다는 것을 파악해 반대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는 유용성을 살리려는 나름의 노력의 결과로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1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가톨릭이 역사상 사회 문제에 관여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다. 하지만 불교계는 세속 문제에 대해 말하는 논리가 약하고 역사적 경험과 노하우도 적다. 근현대에 발생한 문제에 대한 대응도 상당히 미숙했다. 황우석 옹호는 종교 간 경쟁이 펼쳐진 현대적 다원주의 종교 체제에서 불교계가 지닌 콤플렉스가 작용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콤플렉스를 말하는 것인가.

=서구에서는 불교가 과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종교라며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지나쳐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얘기까지 한다. 황우석 감싸기는 한국 불교가 서양이 불교를 보는 이런 관점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우리 불교는 이런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기독교보다 더 현대적인 종교다”라고 내세우려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가 종교로서 한 역할과 비교하면 불교의 역할은 적다. 문화적으로 불교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근대 이후 불교는 극히 제한적인 역할을 했고, 오히려 반사회적·반민주적·반민족적 행태를 보여왔다. 이런 콤플렉스가 과학의 문제(황우석 사건)를 계기로 터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불교계의 호재였다. 무의식적으로 불교계가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본 것이다. 불교가 교리적 측면에서 이런 문제에 기독교보다 좀더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좋은 지점으로 생각한 것이다. 불교와 과학은 다루는 세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일 수는 있지만 불교가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은 줄기세포 연구에서 서양 논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며 동양 논리를 강조했다. 과학적 연구에 유용한 측면도 있는 것 아닌가.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생명 개념 자체를 창조주에 의한 것으로 신성시하지 않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논의는 가능하다. 다만 논의를 하되, 불교적 입장뿐 아니라 다른 세속적 사항, 과학과 윤리, 인류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고려를 생략한 채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이 자기 입장을 먼저 개진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돌아가신 전임 총무원장 법장 스님도 (줄기세포 연구 지지에) 적극적이었다. 그동안 불교학계의 논의를 보면 찬반이 나뉘었다. 하나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배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는 논외로 하고 이것이 가져다줄 요익중생, 즉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자비의 윤리가 더 크고 그게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뜻이라는 이유였다. 반대 논리는 비록 배아라 할지라도 생명으로 탄생할 수 있는 연장선에 있으므로 배아에 손대는 것은 ‘불살생’의 불교 윤리를 해친다는 것이었다. 불교학계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얘기한 2002년 <불교평론> 주최 생명윤리 세미나에서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한 것은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동국대 교수 등 나머지 분들은 전부 반대했다. 난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에 대해 종교가 잘못 재단했듯 종교적 가치와 과학적 사실의 문제는 다를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찬성했다. 당시 동국대 김종욱 교수 등은 불교에서 생명은 연장의 개념이고, 배아는 생명이 될 수 있는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손대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난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후 더 깊이 연구해 2005년 춘계학술대회 때 반대자가 됐다. 그런데 2002년의 반대론자들은 이제 전부 찬성론으로 돌아섰다.

전두환 보호와 황우석 보호의 차이

왜 그런 태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난 법장 스님의 원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황우석이 불교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랬을까. 정말 모르겠다. 그게 이상했다. 또 지금도 이해 안 되는 것은 불교계가 기독교와 달리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면 그 연구를 지원해야지, 왜 특정 연구자를 지원하냐는 것이다. 그건 황우석씨가 불교인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황씨 자신도 항상 염주를 두르고 다니지만, 불교계도 황씨가 불교인이라는 것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첨단과학에 종사하는 국민적 영웅인 황우석씨가 “나는 불교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교인에게는 상당한 자긍심을 주었다. 그게 (황우석 지지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거기에 법장 스님, 지관 스님 등 조계종 총무원장이 앞장선 것인데, 문제 있는 태도다. 가톨릭 주교나 추기경이 거느린 스태프의 전문성은 대단하다. 반면 조계종 총무원장이 갖는 전문성은 대단히 미약하다. 교육 과정에서 차이가 나고 신부들은 재가자(속세에 머문 교인)와 연대가 밀접한 데 반해, 조계종은 재가자의 개입을 제한하고 자기들끼리 한다. 불교계가 사회 현안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역사적 노하우도 적다 보니 대응이 미숙하고, 이번 (황우석 교수 파문) 같은 현안에 대한 발언도 상당히 촌스럽다. 불교계가 최근 세사에서 일반 정서와 달리 행동한 게 백담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받아들인 것인데, 이번 경우도 흡사하다. 그런데 전두환 보호는 사실 종교의 역할이다. 정치적 고려를 한다면 전두환을 받아들이면 안 되지만 정치 논리를 넘어 용서와 화해라는 종교 논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황우석 감싸기보다는 더 나은 사건이었다.

전두환을 받아들인 것보다 황우석을 두둔하고 감싸는 게 훨씬 나쁜 행동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황우석은 사실의 문제였다. 모든 사실이 종결된 다음에 과학자가 아니라 인간 황우석을 불교계가 받아들이고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모르겠는데, 과학이라는 사실의 문제, 이미 조작이라고 명백히 밝혀졌는데도 자꾸 감싸는 것은 문제가 있다. 좋게 보면 우직하고 의리파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불교계가 그렇게 무분별하게 과학자 황우석을 감싸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건 아니다.

그럼에도 지관 스님이 황우석을 옹호하는 태도를 바꿨다는 기미는 없다. 혹시 불교계 전반이 황우석 옹호에 공감한 것 아닌가.

=불교계의 말없는 다수는 오히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찬반이 쪼개진 상황에서 이미 돌팔매 맞고 있는 사람에게 돌 하나 더 던질 수 없어 침묵할 뿐이다.

불교계에서는 황 교수에게 원천기술의 재현 기회를 주자며 100억원 모금 운동까지 일고 있는데.

=말이 안 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도 하나의 단체고 하나의 구성원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공익적 연구에 민간기업의 돈이 투여되는 것을 우려한다. 100억원의 모금 주장은 황우석과 친한 특정 단체나 기업에서 황우석에게 100억원을 주겠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또 황우석의 연구 결과가 정말로 요익중생을 실현할 정도인가. 갈 길이 엄청나게 먼데, 100억원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다. 100억원 지원설은 그간의 지원을 볼 때 불교계의 스타 만들기 차원이지 진정으로 국익이나 요익중생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관 스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서양 윤리라고 무조건 황우석 연구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성체 줄기세포 연구 지원이라는 나름의 대안도 내놓았고, 개신교의 어른인 강원룡 목사가 배아 줄기세포 연구도 가능하다는 신학적 입장을 제기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배아가 생명이라고 해서 당장 연구 성과가 나오는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불교계도 그렇게 다른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우린 기독교와 다르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교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지율의 위험한 독선주의와 폭력

불교계에서는 그런 비판적 의견이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말없는 다수가 있다. 지관 스님이 얘기한 것에 대해 동국대 교수 등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감히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현안 분석과 전문가적 안목이 필요한데, 그런 싱크탱크도 없이 그냥 총무원장의 개성이 드러나는 발언을 막 하는 것은 미숙한 행동이다. 불교도 세속 문제에 전문가적 안목을 갖춰야 한다. 전문성 없이 자꾸 불교적 논리만 갖다대니 항상 각론에서 논리가 달리고 밀리는 것이다.

어떻게 현안에 대한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가.

=출가자와 재가자가 좀더 긴밀한 연관을 가져야 한다. 출가자만의 집단, 출가자 우위는 곤란하다. 깨달음만 추구하는 조계종 중심의 출가자 집단이 아니라 일반 불교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정치·교육·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부작용을 일으켰지만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거의 무임 승차해왔다. 만해 한용운의 경우도 조계종단에서는 결코 띄우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결혼도 했고, 대처를 주장했다. 하지만 근대 정치·사상·문학에서 드문 스타고 그를 통해 불교가 가지는 사회적 이미지도 좋아지기 때문에 못 놓는 것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자꾸 황우석씨를 붙잡아두려는 것 같다.

지율 스님의 계속되는 단식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환경 문제는 사실의 문제다. 얼마나 훼손하는지, 개발하지 않는다고 다 보호되는지 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간과한 채 자기 가치관의 심증적인 문제만 갖고 덤벼드는 게 있다. 환경과 과학 문제는 한국 불교계가 먼저 선점했다고 자부하는 분야다. 환경 문제는 더욱 그렇다. 환경이 근대화 이후에 빚어진 여러 문제를 다룬 것인 만큼 전통 종교들이 거기에 목소리 낼 지분이 있다. 실제 새만금 개발 반대 삼보일배, 지율의 단식 등 사회적 이슈를 선점해왔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목숨 건 단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대중과 함께 가야 할 문제다. 또 환경단체와 달리 종교인의 환경운동은 다른 지점이 있어야 한다. 새만금 사건 때 당진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했는데, 종교인은 내 뜻을 이루겠다고 이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없는 것이다. 삼보일배도 내 뜻을 이루는 게 목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자신까지 부정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수행 과정이라야 한다.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것은 환경운동가들의 시위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부분이 전혀 구분 없이 이뤄지고, 그렇게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결국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가 한 일이 없고 사회적 지분이 없다고 하는 나름의 자책감,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율 스님의 단식이 환경과 생명 존중의 중요성을 일깨운 긍정적 측면도 있지 않는가.

=물론,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우리 내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도롱뇽이, 배아가 생명이다 어쩌다 할 정도로 고도의 생명윤리를 가졌다면 육식 문제도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도롱뇽이 아파요”라고 말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간과하는 식육 고기의 도축 과정에 대해 불교계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건 자기 모순이다. 또 불교 사찰 내에서 벌어지는 비환경적인 재건축 등 엉망진창인 일들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그대로 놔두면서 천성산만 가지고 그러는데, 정말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반 환경단체 활동가라면 그냥 자기 목표가 ‘천성산 지키기’고 그것만 하면 된다. 하지만 종교인이기 때문에 자기 입장도 한번 물러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종교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인데, 그런 점에서 (지율 스님은) 차별성이 없다. 나만 죽으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독선주의고 엘리트주의다. 나 하나 죽어서 된다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이냐.

아줌마 보살들만 있으면 다다?

불교계를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불교계 안에서 생존이 가능한가.

=난 너무 궁금한 게 있다. 나는 황우석, 지율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불교가 깨달음이 아니라 행복의 종교가 돼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바로 조계종의 본질적 문제에 바로 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런 블랙홀 같은 분위기가 기괴하고 음산하다. 아는 스님들에게 여쭈면 그냥 웃고 “할 말이 없는 것이겠지요”라고 답한다. 기본적으로 깨달음이 가능한가란 의문이 가능하고, 조계종의 화두선은 이미 말도 안 되고 물건너간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조계종 존립의 근거 자체를 뒤흔드는 비판인데도 그냥 가만히 있다. 달라이라마가 히트를 치는 것 등은 한국 사회가 불교에 대해 다른 방식의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데도, 조계종은 거기에 답을 못 내놓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냥 블랙홀이다. 돌아오는 답이 없다.

왜 그런가.

=너는 떠들어라, 그래도 우리는 아줌마 보살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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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1-2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퍼갈게요.

balmas 2006-01-2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러세요.

라주미힌 2006-01-20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 귀에 경읽기가 불교에서 나온 속담인거 맞네요.
종교의 컴플랙스라.. 재미있는 현상이네욤.

balmas 2006-01-2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소귀에 경읽기 ...
어젠가 신문기사 보니까 1000억 모금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불교계에는 무슨 눈먼 돈이 그렇게 많은지 ... 그 돈이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
수십만을 구제하겠구만.

비로그인 2006-01-2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0억으로

비영리 기업 세워서 장애를 가지신 분들 자활 도우미 같은 것 하면

진짜 대단할 텐데. 웬 사기꾼에게.....ㅡㅡ;;


꼬마요정 2006-01-2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가 사회에 간섭하는 건...정말 어려운 일이에요...흠...
이 글을 읽고 성철큰스님이 그리워지는 건 왜 일까요..?? ^^;;

로쟈 2006-01-20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불교계 내부에도 '목소리'가 있군요...

깍두기 2006-01-20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한 마디는 참.....^^
이 분, 유머감각 있으시네요.

balmas 2006-01-2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글쎄 말이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불교계도 그렇고 ...
꼬마요정님/ 종교인의 사회 관여는 사실 쉽지 않은 문제죠. 그래도 저런 식이면
정말 너무 한 것 같아요.
로쟈님/ 그 주장은 약간 편파적인 데도 있는 것 같군요. 지율 스님이야 어찌 되었든
계속 정부로부터 경원되고 기만당한 입장이니 같은 평면에 놓고 평가하기는 좀 어려울 듯 ...
깍두기님/ 압권이죠, 저 한 마디. ^^

릴케 현상 2006-01-2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네요

수퍼겜보이 2006-01-2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요~

balmas 2006-01-2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오랜만이삼. ^^ 거침없죠. ㅎㅎ
수퍼겜보이님/ 감사. :-)

2006-01-22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술, 심지어 가장 사실주의적인 예술조차도 재현된 대상에 이타성이라는 특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재현된 대상은 우리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예술은 대상을 벌거

벗음 속에서, 진정한 벌거벗음 속에서 나타낸다. 진정한 벌거벗음은 옷의 부재가 아

니라 말하자면 형식의 부재 자체이다. 즉 벌거벗음은 외재성이, 형상이 이루어내는

내재성으로 변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림의 형식과 색채는 사물 자체를 은폐하

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형식과 색채는 사물의 외재

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실재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세계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이

의미에서 예술 작품은 자연을 모방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멀리 자연으로부터 떨

어져 나간다. 또한 이런 까닭에 과거 세계들에 속한 모든 것, 즉 고풍스러운 것, 옛것

들은 미감적 인상을 내뿜는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84-85쪽 

 " L'art, même le plus réaliste, communique ce caractère d'altérité aux objets représentés qui font cependant partie de notre monde. Il nous les offre dans leur nudité, dans cette nudité véritable qui n'est pas l'absence de vêtements, mais, si on peut dire, l'absence même de formes, c'est-à-dire la non-transmutation de l'extériorité en intériorité que les formes accomplissent. Les formes et les couleurs du tableau ne recouvrent pas, mais découvrent les choses en soi; précisément parce qu'elles leur conservent leur extériorité. la réalité reste étrangère au monde en tant que donné. Dans ce sens, l'oeuvre d'art, à la fois, imite la nature et s'en écarte aussi loin que possible. C'est pourquoi aussi tout ce qui appartient à des mondes passés, l'archaïque, l'antique produit une impression esthétique."

 Emmanuel Levinas, De l'existence a l'existant, Vrin, 1990, pp. 84-85.

 

 

 

“지각 속에서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다. 소리, 색채, 말은 어떻게 보면 그것들이 은폐하는 대상들을 가리킨다. ... 그리고 지각은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통해서 또한 주관적 의미를 가진다. 즉 외재성은 내재성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사물 자체의 외재성이 아니다. 예술의 운동은 감각(sensation)을 복원하기 위하여 지각과 결별하는 데서 성립하며, 대상을 조회하는 기능[대상에 준거시키는 기능renvoie à l'objet]을 하던 성질을 그 대상 조회의 기능[대상 준거의 기능]으로부터 떼어놓는 데서 성립한다. 지향은 대상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감각 자체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감각 속에서, 즉 아이스테시스(aisthesis) 속에서의 길 잃어버림이 미감적 효과를 일으킨다. 감각은 대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리하여 감각은 더 이상 주관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감각은 지각의 질료가 아니다. 예술 속에서 감각은 [지향적 인식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요소로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감각은 요소의 비인격성으로 되돌아간다.”(85-86쪽)



“예술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상으로도 인도해주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 감각적 성질의 방식은 감각으로서의 감각 사건, 즉 미감적 사건이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감각의 음악성이라고 부른다.”(86쪽)


“그러므로 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 여기서 사물 자체란 상위 등급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대상을 제외시켜 버렸을 때 어떤 새로운 요소로 귀착하는 그런 것으로서의 사물 자체를 말한다. 이것은 ‘외면dehors’과 ‘내면dedans’의 모든 구별과 이질적이며 명사의 범주조차 거부한다.”(87쪽)



“게다가 그림이란 세계의 한 조각을 떼내에서 따로 놓아두는 것이며, 또 그림이란 서로 침투할 수 없고 서로 이질적인 세계들의 공존을 내재성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이미 하나의 적극적인 미감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를] 한정짓는 질료적 필연성에서 기인하는 그림의 한계는, 이 한정에서 오는 추상적이고 돌연적인 선들에 힘입어 미학상의 긍정적 제약을 가능케 해준다. 또한 이런 것은 무관심한 덩어리, 로댕의 조각상을 빚어내는 그런 덩어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실재는 세계가 부재하는 실재의 이국적 벌거벗음 속에서 정립된다. 실재는 부서진 세계로부터 솟아 나온다.”(88쪽)



“그러나 더 이상 객관적[객체적, 대상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내재성을 가리키지 않는 예술의 이국적 실재는 그 스스로 하나의 내재성의 겉봉[겉면, enveloppe]으로서 나타난다. 예술 작품 속에서 인격성[개성, personnalité]을 획득하는 것은 우선[무엇보다] 사물의 내재성 자체이다. [...]

예술적 실재는 영혼의 표현 수단이다. 사물 안에 깃들인 영혼이나 예술가의 영혼과의 공감을 통해서 예술 작품의 이국 정서는 우리 세계와 통합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식으로, 타인의 이타성이 타아로 유지되는 한에서는 예술 작품의 이국 정서는 공감을 통해 접근될 수 있다.”(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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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독회 모임이 있어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많지 않은 예술에 관한 논의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 있어서 옮겨봤다.

나름대로 흥미있는 통찰이기는 한데, 초기 저작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때(1940년대)와 지금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어서 그런지(실로 엄청난 격차가 있다!)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 더 불만을 말하자면, 이런 글을 읽다 보면,

가령  감각과 지각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적 감각과 일상적인 감각

사이의 관계는? 또 왜 예술에 대해(서만) 이런 특권을 부여할까? 과연 "일상적 지각" 같은 게

존재할까? 등등

이런 물음을 묻게 되는데, 그는 자기의 체험, 자기의 인식의 경험에 기초를 둔 통찰들을 툭툭 던지지,

따져 묻고 답변하고 의심하고 새로 모색해보고 하지는 않는다.

(레비나스식) 현상학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이런 책들을 몇 권 읽다 보면 금방 물린다.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나 고진류의 저술도 마찬가지다.

 

이 책([존재에서 존재자로])의 백미는 아무래도 1장인 것 같다. 깊이도 있고 상당히 독창적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몇군데 오역들이 엿보인다. 오역처럼 읽히지 않는 오역들도

있고 명백하게 논리를 전달하지 못하는 오역들도 있다. 물론 뒷 장들에도 조금씩 있고 ...

무난한 번역인데, 학문적인 토론에 사용하려면 오역들을 좀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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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9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1-20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행복나침반님, 오랜만이에요. ^-^
레비나스에 관심이 있으시구나. ㅎㅎ 그런데 저도 레비나스는 잘 몰라요.
조금씩 읽고 있는데, 가끔 페이퍼를 한번씩 올릴 테니, 행복나침반 오셔서
같이 이야기해봐요. :-)
숨어계신님/ 이경신 씨가 번역한 [니체와 철학]은 오역이 꽤 있습니다. 아주 못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어려운 구절들에서는 자주 오역이 나옵니다. 불어본이나 기타 외국어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같이 읽는 게 좋습니다.
[들뢰즈 커넥션]은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두 번역본을 비교해서 말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 ...

onookoh 2006-01-2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온욱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새 불어 공부 (이제 문법 막 익힌 정도)하던 참에, 아침에 불어 한 페이지씩 독해라는 목표를 세워 놓고 괜찮은 공부사이트를 찾고 있었어요. 이런 글들 (불/한 대역) 가끔씩 올려주시면 읽는 저로서는 일석이조겠네요. 눈팅만 하다가 한 자 남기고 갑니다. 혹시 추천할 만한 불어공부 사이트 알고 있는 분 계시나요? 추천 바랍니다...

balmas 2006-01-24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
외국에서 설을 맞으시는 기분이 좀 쓸쓸하시겠어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시기 바랍니다. 공부도 잘 되시구요. :-)
직장 생활 하시면서도 공부는 여전히 열심히 하시네요.
그렇다면 앞으로는 가끔씩 불어 원문하고 번역문을 함께 올려드려야겠네요. ㅎㅎ
불어공부 사이트는 제가 별로 아는 데가 없네요. 혹시 대학 불어불문과 홈페이지
같은 데 가보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종종 들르세요. ^-^
 

역시 과갤에서 하나 더!

이런 센스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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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 33조 얘기하는 아그들 한번 봐봐라

 

오레오

 

진짜 뻘짓이긴 한데, 줄기세포 시장규모가 33조라는 것에 대해 이 흉아가 한번 분석해 볼께.
먼저 가정.
1. (만든 게 없다고 밝혀졌지만) 6개월 주면 황박이 줄기세포 만들 수 있다.
2. 그 줄기세포 이용해서 특허 딸 수 있고 기술료 벌 수 있다.
3. 그 무슨 연구소에서 발표한 33조 주장이 맞다.
4. (아무도 장담 못하지만) 줄기세포가 몇년 안에 임상에 사용되어 난치병 고칠 수 있다.

이 정도 가정이면 황빠들도 다들 인정하겠지? 그럼 진도 나가자.

우선 시장규모 33조라는 게 순전히 기술료 수입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어. 그걸 좀 나눠보면 줄기세포 제작비용 + 기술료 + 시술비용 이렇게 나눌 수 있겠지?

우선 줄기세포 제작비용.
황박의 구라를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17개 정도에서 줄기세포 하나 나올꺼야. 그러면 2명 정도에게서 난자를 채취한다고 치자. 김수 연구원이 얘기한 딴딴한 난자가 하나도 안나온다는 가정 하에서 말야.
불쌍하게 신용불량자 처지에 놓은 두 여성이 난자를 내놓겠지. 150씩 줬다고 쳐. 이들에게 300만원이 들어가. 우리나라가 줄기세포허브 사업해서 난자 제공하면 전세계를 상대로 줄기세포 하나당 300을 벌겠지.
줄기세포 만드는 연구원들 인건비, 기타시설사용료 등등 해서 하나당 200씩 잡자. 그래서 500만원이 고스란히 대한민국에 떨어지는 돈이라고 보자.

둘째, 기술료
너네들 무지 착각하는 게, 기술료로 엄청난 돈 벌 수 있는 줄 아는데, 기술료의 패러독스는 "비싸면 안쓴다"는 거야. LG전자 (의 자회사인 제니스)가 디지털TV 원천기술 있는 것 알지?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TV로 업그레이드 하는 이 상황에 LG가 이 원천기술로 얼마나 번다고 그래? 신화창조의 비밀에도 나오고 그래서 참 자랑스럽긴 한데, 실제로 1년에 몇천억 수준이란다. 엄청난 기술료 주고 가져오는 퀄컴의 휴대폰 칩도 개당 10만원이 안된다고 들었어.
줄기세포 특허를 이용한 기술료? 이거 껌값이라고 보는 게 맞아. 더군다나 기술은 점점 개량될 것이고, 개량된 기술로 줄기세포 만들면... 지금 내놓은 특허는 오히려 개량된 기술에게 밀릴 가능성도 크지.
어쨌든, 정말정말 인심 써서 기술료 100만원 잡자. 너무 싸게 잡았어? 그럼 천만원 해볼까? 난치병 환자들에게서 집단 테러당할 일 있니? 어차피 기술료 역시 시장에서 결정되는거야. 비싸면 안써. 합리적인 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는거야.

세째, 시술비용
이게 진짜 돈되는 거야. 병원에 입원해서 각종 검사하고, 의사들 여럿 동원되어서 수술하고, 그러고 또 회복되는동안 입원해 있고...
좀 어려운 수술인 암제거 수술이랑 비교해보면 대략 5000만원? 우리나라처럼 건강보험공단이 시술료 낮게 책정하는데서는 이렇고, 미국처럼 의료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곳에서는 시술비용은 억을 넘어간다고 보는 게 맞지.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시술비용은 대한민국이 10%도 건질 수 없다는거야. 전세계 환자들에게 한국 와서 치료하라고 할래? 그냥 지네 동네에서 지네 의사들이 치료할꺼야. 그러니까 33조를 한국이 다 먹을거라는 착각은 제발 하지를 말아줬으면 해.

자 이제 더하기 들어간다.
제작비 (500만원) + 기술료 (100만원) + 시술비용 (5천만원) = 5600만원

이건 정말 싸게 잡은 1인당 치료비라고 볼 수 있지. 난치병 치료에 5600만원이라... 의사들이 웃겠지만...
어쨌든, 이제 33조를 5600만원으로 나눠보자.
대략 57만명이 나오네. 줄기세포로 치료할 수 있는 인간이 1년에 57만명 정도라는 거지.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순수하게 벌어들일 돈은? 57만*600만원 = 3조 4천만원.

어마어마하게 큰 것 같지?
하지만 기술료로 벌 돈은 1/6인 5천7백억 정도란다. 그나마 줄기세포 제작기술이 특허로 인정이라도 받는다면 말야. 노성일이 40% 먹고, 서울대 산학연인가 그곳이 60% 먹는다.
나머지는 줄기세포 제작하는 연구원에서 1조 정도 돌아가고, 난자 기증하시는 성스러운 분들이 1조 7천을 먹지.

근데... 이까지 계산하니까 조낸 이상하지 않니? 난자 기증으로 1조 7천을 먹을 수 있다고????
아까 환자 57만명이라고 그랬지? 1인당 2명의 난자 기증자로 계산했고, 그렇다면 1년에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네!!!! 이 장사 몇달이나 버티겠어? 난자 기증할 의지가 있는 2-30대 여성이 1년에 114만명이나 있어야 한다고????

3줄 요약
----------------------------------------------
33조는 줄기세포 제작비 + 기술료 + 시술비용을 포함한다.
그 중에 시술비용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게다가, 33조 벌려면 1년에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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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1-1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 33조원을 왜 5600만원으로 나눈 거죠?
33조원은 저 무슨 연구소에서 추정한 전체적인 '시장규모'이고
그걸 몽땅 '먹을 수 있는 돈'으로 치부한 것에 대해서 반박하겠다는 것 같은데,
환자의 숫자를, '33조 나누기 5600만원'으로 한 것은 이해가 안 가네요.

환자 한사람에게 치료비 5600만원씩 받는다고 치면,
33조 벌려면

딸기 2006-01-1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3조 벌려면 57만명 치료해야 한다, 그러니까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다
그런 논리인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이 글 역시 말장난이 넘 심한 것 같아요.

balmas 2006-01-1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딸기님, 33조원을 5600만원으로 나눈 건, 33조원이라는 시장 규모를 가정했을 때, 그리고 난치병 치료에 5600만원이 든다고 가정했을 때, 난치병 환자의 숫자가
얼마인지, 그리고 치료에 소용될 난자의 갯수가 얼마인지 따져보자는 뜻이겠죠.
글을 쓴 사람은, 이런 가정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보여주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과갤은 나름대로 진지한 사람들이 많은데, 표현법들은 상당히 짓궃고
장난기가 많이 섞여 있답니다. 요즘 인터넷 글쓰기의 한 풍경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