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움'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은 자본, 국가, 미디어가 독점하고 있는 지식과 그것의 생산 및 유통의 경로를 대중들 스스로 영위하기 위한 장입니다. 새움은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지식을 대중이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고, 나누는 곳이고자 합니다.


새움의 활동에 참여하시는 데에는 학력이나 지식의 많고 적음에 따른 제한이 없습니다. 전문 연구자에서 부터 단순한 호기심을 가진 일반인까지 누구나 오셔서 지식을 나눌 수 있습니다.

 

새움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식의 많고 적음의 차이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며, 긴 안목에서 보면 그 차이는 소멸되어야 하고 소멸될 수 있다고 저희는 믿으며, 그 믿음이 새움이 존재하는 기본입니다. 새움은 자신이 더 많이 아는 어떤 것을 나누어 주고 잘 알지 못하는 다른 것을 배워가는 지식의 장터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새움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라는 큰 들 이외에는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분이든 간에 누구나 새움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하며 소통하고 토론하는 곳이 새움입니다.


새움은 어떤 다른 기관, 단체, 개인에게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새움의 활동을 주도하는 고정된 개인이나 집단도 없습니다. 새움에 먼저 참가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어떤 기득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권리가 아니라 더 많은 의무를 지게 됩니다.

새움의 주인은 어떤 현실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분들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더 많이 나누고자 하는 분들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고 열려있고자 하는 분들입니다. 또 새움의 주인은 새움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남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새움의 모든 활동에는 참가비가 없습니다. 진보적 지식을 나누는 일에 돈이 필요해서는 안 된다고 저희는 믿습니다.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지식에의 접근을 막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움의 학술 활동을 담당하시는 모든 강사, 간사분들도 강의료 없이 무료로 자신의 지식과 시간과 노력을 나누고 있습니다.


새움의 활동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참여하시는 분들의 자발적인 기여로 충당됩니다. 저희의 취지에 공감하고 경비를 분담하고자 하는 분들이 매월 일정액(대부분 매월 1만원)을 납부해 주고 계십니다. 물론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의무적으로 회비를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분만 자발적으로 납부하시면 됩니다.


새움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1. 새움의 활동에 참가하시면 됩니다.

2. 새움의 활동을 위한 실무를 함께해 주시면 됩니다.

3. 새움의 활동을 위한 경비를 분담해 주시면 됩니다.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의 세 번째 강좌 및 세미나>

 

“새움”은 대중들 스스로가 진보적 지식을 공유하는 장입니다. 참가하시는 데 어떤 제한도 없습니다.

*장소: 모든 강좌 및 세미나는 새움 세미나실에서 진행합니다.

      (맑스주의 역사(기획 강좌)는 서울대에서 진행됩니다.)

*문의: 유승민(011-9975-1392, rufrl@hanmail.net)

       및 http://club.cyworld.com/seumnet 를 참고하세요.


<강좌>

1. 맑스주의 경제학 입문

 ․ 시간: 10월 1일 부터 매주 월요일 7시

 ․ 강사: 채만수 (노사과연 소장)

 ․ 교재: 노동자 교양 경제학, 채만수 지음, 노사과연

 ․ 강의 일정:

   - 1회: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상품과 그 가치

   - 2회: 화폐/ 가격

   - 3회: 자본가 잉여가치, 이윤/ 임금

   - 4회: 공황

   - 5회: 독점 자본주의

   - 6회: 국가 독점 자본주의

   - 7회: 신자유주의




2. 한국 현대사

 ․ 시간: 10월 5일 부터 매주 금요일 7시

 ․ 강사 : 정진아 (연세대 사학과 박사, 한국경제사 전공)

 ․ 소개 : 누구나 알기 쉽게 한국 현대사의 문제들을 접할 수 있는 강의 입니다.

 ․ 강의 일정: 8회




3. 맑스주의 역사

 ․ 시간/ 장소: 10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6시 30분/ 서울대 사회대 16동 237호

 ․ 문의: 최희명(011-9360-2058)

 ․ 강사 : 한형식 (연세대 철학과 박사 수료)

 ․ 소개 : "맑스주의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 이론과 실천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같거나 다른가?",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계승된 것과 단절된 것들은 무엇인가? 맑스주의에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정세는 어떤 것이었나?"라는 문제의식 하에 중요한 맑스주의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강의입니다. 맑스주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분들도 들을 수 있습니다.

 ․ 강의 일정: 6회


< 신규 세미나 > 

1. 자본론Ⅰ

․ 시간: 11월 2일부터 매주 금요일 7시

․ 소개: 자본론을 꼼꼼히 읽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내용을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세미나는 직접 텍스트를 읽는 강독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간혹 발제도 병행할 예정입니다.

․ 문의: 유승민(011-9975-1392)

․ 담당자: 유승민 (연세대 경제학 박사과정)




2. 자본론 Ⅲ

․ 시간: 11월 1일(첫 세미나) 부터 격주 목요일 7시

․ 예비모임: 10월 11일 목요일 7시

․ 소개: 자본론을 꼼꼼히 읽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내용을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 문의: 유승민(011-9975-1392)

․ 담당자: 김정주 (연대 BK21 연구교수)




3. 한국 경제의 구조와 노동

․ 시간: 10월 2일 부터 격주 화요일 7시

․ 소개: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한국 경제의 중요 문제들을 살펴봅니다. 이 세미나는 중요 문제들과 관련된 기존 연구들을 텍스트로 세미나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 문의: 유승민(011-9975-1392)

․ 담당자: 황선웅 (연세대 경제학 박사)




<진행중인 세미나>

*진행 중인 세미나에도 얼마든지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일정이 간혹 변경되는 경우가 있으니 새움 클럽의 게시판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맑스주의와 환경

․ 시간: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 담당자: 김민정 (성공회대 사회학과 박사수료)


2. 불어강독

․ 시간: 매주 금요일 6시 반

․ 담당자: 김지홍 (연세대 철학과 석사과정)




3. 레비나스

․ 시간: 격주 수요일 7시

․ 담당자: 김성호 (성공회대 신학과 박사수료)




4. 경제학설사

 ․시간: 격주 월요일 7시

․ 담당자: 유승민 (연세대 경제학 박사과정)




5. 맑스주의 역사

․ 시간: 매주 토요일 2시

․ 담당자: 한형식 (연세대 철학과 박사수료)




6. 역사적 자본주의

․ 시간: 매주 화요일 6시

․ 담당자: 정웅기 (연세대 사학과 석사과정)






<찾아 오시는 길>









*신촌역 1번 출구-> 현대백화점, KFC에서 우회전->신보건약국에서 좌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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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1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졸업하고, 자리잡고, 저도 이런거 다니고 싶습니다. 레비나스 들어보고픈데.

자꾸때리다 2007-09-1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꼭 가야겠다.

발박사님 안녕하셨쎄요~ (이거 아실려나?)

balmas 2007-09-1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ㅎ 아프락사스님, 어서 졸업하고 다니세요. 나중에 저하고도 보시겠네요. :-)
Mravinsky님/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님도 안녕하셨쎄요??
 

* 오랜만에 알라딘 서재에 글을 써봅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부칠 [역자 해제]입니다. 아직 교정이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길게 붙잡고 있던 번역이 끝이 났으니 속이 후련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은 아직 밀려 있는 일들이 많아서일까요? 흑흑

원고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더 답답하네요.

에효,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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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유령들, 데리다의 유령들


I

  여기 우리가 번역ㆍ소개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자크 데리다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한 권이다. 지난 2004년 사망하기 전까지 약 40여년에 걸친 저술활동 기간 동안 데리다는 80여권의 책을 출간하고 수백편의 글과 대담 등을 발표했으며,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물론 이 영화들은 다큐멘터리나 실험적인 영화들이다)1), 또 상당한 분량의 미간행 원고를 남겼다. 그가 남긴 책들과 논문, 대담은 거의 모두 많은 토론과 주석,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난 1993년에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만큼 큰 화제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작은 드물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여러 나라 말로 신속하게 번역되었고2), 이 책에 관한 많은 서평과 논평들이 쏟아져 나왔으며3),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4)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데리다의 저서들 중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저작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왜 이처럼 이 책이 큰 화제가 되었을까? 이 질문에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답변할 수 있다. 첫째는 이 책이 출간된 시기를 꼽을 수 있다. 1993년은 알다시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 몰락함으로써 현존 사회주의(또는 역사적 공산주의)가 종언을 고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며, 또한 이 책의 2장에서 데리다도 논의하고 있다시피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1992)5)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예찬이 울려 퍼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의 예찬에도 불구하고 걸프 전쟁(1990-1991)과 유고슬라비아 전쟁(1991-2000), 아프가니스탄 내전(1989- ) 및 수다한 아프리카 내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종류의 내전ㆍ국제전이 세계 곳곳에서 분출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 책이 출간된 시기는 바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현실 운동의 준거든 이론적 준거든 간에)의 토대가 와해된 상황에서 데리다 같은 세계적인 철학자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마르크스에 대한 저작을 냈다는 사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이 큰 화제가 된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데리다가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본문의 이곳저곳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데리다는 학생 시절인 1950년대부터 줄곧 좌파 진영에 속해 있었고, 또 스스로 자신을 좌파의 인물로 간주해왔다.6)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드문 몇몇 경우를 제외하다면, 그는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 일반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이론이나 정치 정세에 대해서 극히 말을 아꼈으며, 이러한 쟁점에 대해 발언을 하는 경우에도 매우 신중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7) 프랑스처럼 정치적인 발언과 참여가 지식인의 주요 조건이자 의무 중 하나로 간주되는 곳에서 이러한 데리다의 태도는 호응을 얻지 못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1968년 5월 봉기 이후 맹위를 떨친 여러 좌파 지식인들에게 불신과 의혹,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데리다의 저작이 1970년대 말 이후 미국의 문학이론계에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가 이른바 예일학파의 한 성원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 역시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의혹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8) 따라서 그가 마침내 마르크스에 대해 입을 열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큰 화젯거리가 되기에 족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데리다 사상의 전개과정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 자신은 줄곧 부인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특히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주저 없이 “정치적 전회”나 “윤리적 전회”로 특징짓고 있다. 80년대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정치적ㆍ실천적 쟁점들에 대한 침묵 내지 유보적인 태도가 두드러졌다면, 그 이후의 저술들, 특히 󰡔법의 힘󰡕과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후부터 데리다는 법과 정의, 마르크스주의, 민주주의, 인권, 이주와 이민, 세계시민주의, 환대, 메시아주의(및 성서의 종교들) 등과 같은 윤리ㆍ정치적인 쟁점들을 자신의 주요 주제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 정세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단정적이고 획일적인 “전회”나 “단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저술들을 통해서 비로소 그의 초기 작업에 담겨 있던 실천적 함의를 이해하고 또 발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위시한 그의 “정치적” 또는 “윤리적” 저술들은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후기 데리다, 또는 90년대 이후 데리다 작업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II

  이 책이 화제를 불러 모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책의 제목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사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범상치 않다. 우선 마르크스를 주제로 한 책에 “유령”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을뿐더러, 시종일관 유령, 망령, 환영, 허깨비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자못 충격적이다. 데리다 이전에 과연 누가 유령을 주제로 마르크스에 관해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거의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또한 반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유령이나 망령, 환영 따위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논의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하찮고 부차적인 주제에 불과했을 것이다.9) 하지만 데리다는 정말 대담하게도 자신의 저서에 유령들이라는 제목을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산당 선언󰡕이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같은 저작, 특히 󰡔독일 이데올로기󰡕나 󰡔자본󰡕 같은 핵심적인 이론적ㆍ철학적 저작에서 유령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

  이처럼 매우 사소하고 주변적인 것으로 보이는 어떤 주제나 개념 또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이런저런 사상 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데리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기록학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1967)에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를 분석하면서 기의나 기표 같은 중심 개념들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écriture”이라는 매우 하찮은 단어, 소쉬르 자신이 지극히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 이전까지는 누구도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하찮은 이 단어가 사실은 플라톤 이래 레비스트로스까지 지속되어온 서양의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중심주의를 드러내주는 핵심 쟁점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또한 루소의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에 나오는, 역시 하찮기 짝이 없는 “supplément”(보통은 “보충”을 의미하지만 데리다의 용어법에서는 “대체 보충”을 뜻한다)이라는 단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데리다는 루소에서도 역시 음성중심주의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원초적인 기원이란 사실은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따라서 데리다가 유령이라는 주변적이고 하찮게 보이는 단어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독해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매우 일관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중심에서, 아니 첫머리에서부터 “유령들”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의미심장한 것이라면, 이는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이 단수인 “유령”이 아니라 복수인 “유령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복수형의 제목이 필요했을까? 또 이런 복수형의 제목이 어떤 의미에서 그처럼 중요한 것인가? 

  단순히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된 제목은 마르크스의 저작,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유령이나 환영, 망령, 허깨비라는 주제가 양가적인 주제였음을 시사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기회로 삼아 사람들이 무력화시키고 또 몰아내고자 하는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가리킨다. 지난 150여 년 동안 전개되어 왔고, 특히 지난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래 현실적인 정체(政體)로 존재해왔던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몰락을 통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한 체제로, 역사의 유물로 사라졌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만이, 자본주의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체제로 살아남아 영속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그 환영마저 모두 몰아내자. 이 허깨비를 사라지게 하자.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푸닥거리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유령은 계속 다시 망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령은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것인 한에서 결코 소멸할 수 없으며, 언제든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면 늘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견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몇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면,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데리다가 3장에서 말하듯이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찬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출현하고 있는 “10가지 재앙”(실업, 빈곤, 망명 및 이주, 경제전쟁, 자유 시장의 모순, 종족 간 전쟁, 외채 등)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에 대한 상속은 필수적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 이론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해방의 운동이라는 이유에서도 유령처럼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법적인 공정함의 질서 바깥에서, 자본주의적인 시장의 질서의 모순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차별받는 타자들의 고통의 호소가 울려 퍼지는 한에서 정의에 대한 요구와 해방의 운동은 사라지지 않으며, 지난 150여 년 간 해방의 운동의 대명사로 존재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유령 역시 끊임없이 자유주의의 공모자들에게 악몽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이러한 이유들은 결국 존재론을 넘어서는 유령론의 필요성, 아니 필연성을 시사해준다고 본다. 당ㆍ국가 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사라졌고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이러저러한 측면들 역시 한계에 봉착했음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주의의 유령의 명령들이 우리의 상속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는 바로 마르크스주의를 해방의 운동과 이론으로서 고취시킨 메시아주의적인 것의 차원이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노동의 존재론, 생생한 현재의 존재론을 넘어서 “유령론hantologie”의 문제설정이 필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령론은 존재론을 대체하는 좀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이론이기 이전에 타자들의 부름 및 호소에 대한 책임의 윤리ㆍ정치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이 갖는 한 가지 의미는 마르크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푸닥거리에 맞서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우리들에게 부르짖는 호소에 귀기울이고, 그것의 명령을 상속하고 따라야 한다는 책임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내가 인상적이고 야심적이며 필수적인 또는 모험적인 [...] 이 콜로퀴엄의 기조 강연을 하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의 망설임 끝에, 내가 지닌 능력의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베른트 매그너스가 영광스럽게도 제안한 초대를 수락한 것은, 철학적이며 학문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책임의 본성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여러분의 토론에 부치기 위해서다.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이러한 책임이 역사적인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또한 마르크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유령들, 또 마르크스 자신이 계속 몰아내려고 했던, 하지만 결국 완전히 몰아내는 데, 소멸시키는 데 성공할 수 없었던 유령들을 가리킨다. 왜 그는 유령들을 몰아내려고 했을까? 또 왜 그는 그것들을 쫒아내는 데, 푸닥거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까?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공모했던 그의 적수들(󰡔공산당 선언󰡕이 말하는 “낡은 유럽의 열강들”이자 오늘날 “새로운 세계질서”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가 생생한 현실 대 가상ㆍ환영의 대립, 삶과 죽음의 대립을 신뢰했고 이러한 대립 위에 자신의 이론을 세우고 또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곧 이 책의 4장에서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이제 공산주의는 더 이상 하나의 유령이 아니라 “당 자체의 선언”이자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는 과거의 정치혁명과 오늘날의 “사회혁명”을 대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이유는, 공산주의야말로 과거의 모든 이데올로기, 가상, 환영과 결별하는 참된 현실의 운동이고 혁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공산주의는, 마르크스 그 자신은 모든 가상과 환영, 유령과 결별할 수 있었을까? 그는 모든 유령, 망령과 결말을 볼 수 있었을까? 데리다는 󰡔독일 이데올로기󰡕 2부에서 전개되는 마르크스와 슈티르너의 논쟁 및 󰡔자본󰡕 1권의 서두에 나오는 사용가치 및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을 검토하면서(이는 5장의 주요 주제다), 마르크스가 결코 유령의 논리, 신들림의 논리(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또한 차이(差移)différance의 논리이자 되풀이 (불)가능성의 논리이다)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만 그것과의 단절을 (부당하게) 가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슈티르너에게, 유령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구체적인 것으로서 자아, 유일자의 신체에 의거할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자아의 신체는 바로 유령의 장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노동 및 사회적인 실천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묻는다. 자아 또는 구체적인 개인이 그 내면에서부터 이미 유령에 신들려 있다면, 유령에서 벗어나 있는 실천이나 노동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이나 실천은 이러한 질문을 회피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자본󰡕 1권의 서두에 대한 분석에서도 동일한 문제제기는 계속 된다. 마르크스는 놀라운 통찰력과 수사법으로, 평범한 나무탁자가 어떻게 교환의 과정 속에 진입함으로써 “감각적 초감각적 사물”, 곧 상품이 되는지, 따라서 마치 유령처럼 변모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면 목재로 탁자를 만들면 목재의 형태는 변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자는 여전히 목재이고 보통의 감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탁자가 상품으로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그것은 초감각적인 사물로 전환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발로 땅을 딛고 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을 마주보고 머리로 거꾸로 서기도 한다. 그리고 탁자의 이 나무 머리는, 탁자가 자기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기이한 망상들을 빚어낸다. 그러므로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10)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치 교환가치를 갖기 이전의 사용가치, 상품이 되기 이전의 자연적이고 평범한 나무탁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을 하며, 또한 마치 상품들의 관계를 둘러싼 몽롱한 물신숭배의 세계는 우리가 다른 생산양식으로 넘어가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것처럼, 이데올로기 없는, 물신숭배 없는, 따라서 환영이나 유령이 없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평범한 나무탁자에는 항상 이미 상품의 신비한 성격이 기입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항상 이미 상품들의 사회적 관계, 따라서 유령들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과잉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곧 상품 이전의, 교환 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 가치의 낙원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모든 유령과 결별해야만 하는 것일까? 일체의 망령이나 유령, 환영과 단절하는 것은 해방의 운동과 이론을 위해 필수적인 것인가? 어쨌든 유령이나 환영, 망령은 우리가 어떻게든 몰아내야만 하는 일종의 악을 가리키는 것일까? 데리다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책의 1장에서 데리다가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는 햄릿의 말과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을 결합함으로써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데리다는 햄릿의 말을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른 복수의 다짐이나 정신분석에 의거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표현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정의의 존재론 또는 정의의 유령론의 심오한 울림으로 파악한다. 곧 데리다에게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음은, 어떤 불순한 시대 상황을 의미하거나 시간의 질서의 일시적인 왜곡이나 일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서 안에, 따라서 현존으로서 존재의 질서 안에 근원적인 탈구와 이접, 간극이 존재함을 뜻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탈구와 이접, 간극은 존재자들 및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불행한 숙명ㆍ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현재들의 시간적인 연속, 곧 과거 현재에서 지금 현재로, 또 지금 현재에서 미래 현재로 나아가는 연대기적인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은 계산 가능성의 질서이이면서 또한 인과적인 응보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법, 분배의 계산, 복수 또는 징벌의 경제”인데, 시간의 흐름 안에, 존재자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어긋남이나 간극은 계산 가능성과 응보의 질서에 균열을 냄으로써, 법적인 처벌과 보상의 논리를 넘어서는 정의의 도래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데리다는 햄릿의 말이 하이데거가 수행한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보다 한 걸음 더 나가 있다고 평가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대한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데거는 “어떤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이나 “어긋남, 불화”를 의미하는 “아디키아adikia”를 “어떤 것의 이음매가 빠져 있는etwas ist aus den Fugen” 상태로, “무언가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며, 반대로 디케dike(보통 “정의”로 번역되는)는 “연결해주고 어울리게 해주는 이음매”로, 곧 화합의 이음매를 “허여(許與)하는Zugeben”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햄릿의 말과 달리, 또는 햄릿의 말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과 달리 이음매가 어긋남, 이음매가 빠져 있음에서 정의의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반대를 보고 있다. 데리다가 하이데거는 “조화롭게 한데 모으는 또는 받아들이는 허여/일치accord(Versammlung, Fug) [...]에 호의적으로 기울어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달리 시간의 순서, 현존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어긋남이야말로 계산 가능한 현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장래의 도래, 타자의 도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의의 조건 자체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또한 유령이 출현하고 망령이 되돌아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이러한 어긋남, 탈구, 이접이 만들어내는 균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어긋남과 탈구가 없다면, 마르크스의 정신도,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정신, 그 유령의 명령들에 대한 상속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정신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상속의 호소가 데리다의 윤리적ㆍ정치적 진정성을 표현한다면, 햄릿의 말에 대한 해석은 이 책에 담겨 있는 철학적 깊이의 정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또는 근대성 일반에서) 종교는 사라져야 할 과거의 유물로 치부되었으며, 적어도 공적인 것의 영역에서는 더 이상 존속될 이유가 없고 또 존속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되었다(정교분리의 원칙).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종족 간 전쟁에 항상 종교의 문제가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 또한 특히 서양 사회 내에서 인종 문제가 계급 관계 이외에 종교적인 갈등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있는 양상 등은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종교적인 것이 단지 개인의 사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또 그것으로 국한될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데리다는 2장 및 5장의 말미에서 이러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한 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전유를 둘러싼 성서의 세 가지 유일신론(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사이의 투쟁의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메시아주의와 메시아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로 제시하고 있다. 곧 데리다는 오늘날 국내 정치나 국제 정치에서 종교적인 것은 끊임없이 유령으로서, 망령으로서 다시 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 정치를 분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해방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서도 종교의 문제는 우회할 수 없는 필수 쟁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해방의 정치, 도래할 민주주의의 정치는 과연 종교적인 원천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 해도 역사적인 메시아주의로부터 메시아주의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메시아주의적인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또 그것은 어느 정도나 종교적인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종교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는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또 암묵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들이며,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후에도 데리다가 계속 던지는 질문들이다.11) 

  철학자로서 데리다가 지닌 비범한 능력 중 하나는 어떤 철학자나 이론가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서 글을 쓸 줄 알았다는 점이다. 가령 데리다는 반플라톤주의자가 아니면서도 플라톤 철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밝혀냈고, 하이데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어떤 하이데거주의자도 밝혀내지 못했던 그의 철학의 숨은 면모를 드러냈으며, 니체주의자도 아니고 반니체주의자도 아닌 방식으로 니체의 양가성을 읽어낸다. 이른바 창조적 오독(그리고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영향의 불안”)이 철학사의 규칙 아닌 규칙으로 작용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진정으로 희귀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이 책에서도,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다. 사실 만약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만 (또는 반마르크스주의자로서만) 이 책을 썼다면,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이나 의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상속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으면서도,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고서 또는 상속이란 항상 식별과 선별을 요구한다는 점을 명시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데리다 자신으로서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이론 및 그 현재와 장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훨씬 더 큰 기회를 제공하며, 훨씬 더 큰 장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1993년 출간된 이래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으로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각자 떠맡아야 할 과제는, 아마도 데리다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데리다와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책과 대결하는 일일 것이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불러내고 그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 속에 깃들어 있는 데리다의 유령들의 부름은 어떤 것인지, 이제 우리가 귀기울여볼 때가 되었다.  

III

  무척 단정하고 “고전적인” 문체로 씌어진 초기 저작들을 제외한다면, 데리다 번역에서 가장 힘든 일은 아마도, 빈번히 나타나는 데리다의 언어유희를 놓치지 않고 적절하게 살려내는 일과 그의 문체가 지닌 고유한 리듬을 살리는 일, 이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데리다가 수사학적 어법과 철학적인 논증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다양하게 언어유희를 하는 것은 “대체 보충”이나 “되풀이 (불)가능성” 또는 “산종(散種)” 같은 그의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수행적으로 실천하려는 데서 나오는, 불가피하면서 또 매우 의미심장한 철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역자들, 특히 상이한 문자 체계를 사용하는 역자들에게는 괴롭기 짝이 없는 짐을 안겨준다.  

  또 데리다는 때로는 10줄이 넘는 긴 문장에서 같은 단어, 같은 문구를 반복함으로써 문장 전체에 리듬감을 주면서도 또한 이를 조금씩 변용하여 의미의 변화를 낳고 있는데(마치 되풀이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의 사례를 보여주듯이), 문장의 호흡이 길지 않은 우리말 문장으로 이를 살리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어법을 그대로 옮기면 그만큼 문장이 난삽해지고, 반대로 문장을 잘게 끊어내면 데리다의 고유한 어법, 고유한 리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역자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 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과가 얼마나 만족스러울지는 전혀 장담할 수가 없다. 예전에 몇 차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비교적 쉽게 이 책을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건 전혀 그릇된 판단이었다. 이전의 어떤 책보다 더 힘겹고 능력에 부친 번역이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번역이 어려웠던 그만큼 이 책의 번역은 역자 자신에게는 이 책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것만으로도 이 번역은 개인적으로 아주 소중한 작업이었다. 이전에 불어본이나 다른 외국어본으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이 번역본이 얼마간이나마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주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IV

  이 책은 나의 세 번째 데리다 번역서다. 내가 턱없이 부족한 능력에도 데리다 책을 세 권이나 번역하게 된 것은 10여 년 전에 한 비평이론 전문지에 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책들을 대상으로 주제 서평을 쓴 것이 계기였다.12) 5권의 번역서와 국내 학자들이 쓴 한 권의 논문 모음집을 대상으로 한 서평이었는데, 서평 대상이 된 대부분의 번역서가 오역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큰 실망을 느꼈고 또 충격을 받았다. 그 뒤에도 데리다 책들은 여러 권이 더 번역되었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번역의 질은 결코 좋아졌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렇게 데리다 번역서들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데리다 연구자들 및 전공자들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국내에도 데리다에 대해 이런저런 논문을 쓰고 심지어 책까지 내는 연구자들이 있지만, 내가 알기로 그들 중 데리다의 저서를 번역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물론 잘 된 번역의 경우를 말한다). 이건 참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데리다가 고국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미국의 경우(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번역은 전문가들(그들 중 상당수는 독창적인 이론가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이 맡고 있으며, 또 데리다에 대한 논의도 그 번역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식의 논의 구조는 번역의 질을 한층 더 높일 뿐만 아니라 데리다에 대한 논의를 훨씬 더 생산적이게 만들고 또 미국의 이론적 맥락 속에 더 밀접하게 연결시켜 준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방식이며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는 비단 데리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번역서가 존재한다 해도 굳이 원서를 인용해서 논의를 할 뿐만 아니라, 불어 해독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영역본이나 독어본, 일어본 같은 각종 외국어본을 인용해서 글을 쓴다. 이 경우 기존에 나와 있는 번역본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서로 다른 판본을 바탕으로 삼아 데리다의 주요 개념이나 용어들을 서로 다른 식으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더욱이 대부분의 경우 왜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하는지 아무런 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또 대개는 미국이나 독일 또는 심지어 일본 내의 논의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수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게 된다. 데리다 국역본 중 상당수가 심한 오역으로 훼손되고 있어도 데리다 전문가들로부터 아무런 비판이나 문제제기도 나오지 않는 것이나, 데리다에 대한 논의가 초점 없이ㆍ맥락 없이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성실하고 진지한 논의를 하는 여러 연구자들을 섣부르게 폄훼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국내에서 데리다에 관한 독서와 연구가 좀더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수용 및 논의 방식에 대한 좀더 진지한 반성과 전환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반복하거니와 이는 비단 데리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일환으로 우선 이 번역본에 대한 좀더 치밀하고 신랄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V



  이국의 땅, 그것도 데리다가 오랫동안 살고 사고하고 저술하고 죽었던 땅에서 데리다의 저서를 번역을 하는 일은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했지만, 또 그에 못지않은 불편함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나를 대신해서 번역과 관련된 이런저런 번거로운 일을 맡아 해준 친구 ***과 후배 ooo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한없이 늦어지는 원고를 기다리면서 조바심을 친 이제이북스 여러분들에게도 사과와 감사의 말을 함께 건네고 싶다. 그들이 마음을 졸인 그만큼 독자들에게는 좀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번역이 되었으면 한다.    


프랑스 리용에서
역자





http://www.hydra.umn.edu/derrida/jdin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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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14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잘 지내세요? :) 데리다는 아는게 없어서 어설프게나마라도 말할 수가 없군요. 프랑스에서 공부하시면서 계속 번역 작업 하시는건가요?

balmas 2007-08-14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안녕하세요? 아프락사스님. 모처럼 방학을 맞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겠네요. 원래는 여기 오기 전에 끝내야 할 번역인데, 이제서야 끝을 맺게 됐습니다. 덕분에 다른 일들도 계속 차질을 빚고 있지 뭡니까? -_-; 서울은 꽤 후텁지근하다고 들었는데,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벌써 가을이 시작되려는지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합니다. ㅎㅎ

로쟈 2007-08-1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부지런하시네요.^^ 번역도 끝내시고. 올가을에 나오는 건가요?..

balmas 2007-08-15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지런하긴요, 진작에 끝마쳤어야 했던 일인데 ... 아마 9월 정도에는 나올 것 같더군요.

mravinsky 2007-08-16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막 읽고 있어요. 발 박사님 무지하게 바쁘시겠네요. ㅜ.ㅜ

청년도반 2007-08-17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배님, 글로나마 오랜만에 뵙습니다. 더군다나 그 글이 『마르크스의 유령들』 출간 임박을 알리는 역자해제라니! 정말 반갑네요. 물론 "마르크스의 유령들" 세미나는 결국 제게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하나의 기표(혹은 "도래할" 사건)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ㅎㅎ

전적으로 제 느낌입니다만, 역자해제는 이전 역서들의 그것보다 좀더 차분하면서도 (그러나!) 더욱 신랄해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책이 정말 기대되네요. 사실 (표현이 좀 뭐하지만) 번역하신 책들의 내용(본문과 역주, 해제, 참고문헌, 용어해설)을 볼 때마다 제가(혹은 우리가) 선배님의 공력을 흡혈귀처럼 빨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더군요. ㅎㅎ;; 아무튼 늘 좋은 글과 번역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

연말쯤엔 한번 귀국하실 예정은 있으신지요? 아무튼 다시 뵐 때까지 건강 조심하세요.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

balmas 2007-08-17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ravinsky님 오랜만입니다. ^^ 지난 번에 질문에 답변도 못해주고 미안합니다.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 ㅎㅎ
오랜만이구나, 웅기야. ㅎㅎ 뭐 빨아먹을 게 있어야지. 서울에 가게 되면 한번 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의 유령들 스터디는 한번 했어야 하는데 못해서 좀 아쉽구나. 나중에 언제 기회가 있겠지. :-)

릴케 현상 2007-08-1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읽지는 안했지만 가지고는 있는 책이네요^^ 신기해요. 출간되면 같이 읽어볼게요~

balmas 2007-08-1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산책님 오랜만이시군요. 폭염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예전에 나온 책 가지고 계시군요. :-)

탈주선 2007-08-2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고가 많구먼. 아주 훌륭한 해제라고 생각해. 보고 싶네그랴. 언제쯤 귀국할련지...

menwchen 2007-08-24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발마스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좋은 글 읽습니다. 곧 나오는군요^^*
위, 더 피플....은 언제쯤^^ 건강하세요~~

람혼 2007-08-25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월 출간이라,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따끈한 번역본을 손에 넣을 수 있겠군요.^^ 고대하고 있습니다. 멀리서나마 건강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천재뮤지션 2007-09-0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긴이 귀찮아 그냥 남깁니다. 선생님 와~~~~~!!!! 완전 기대~!!!! 좋아~~~!!!!! 왜 이런 책 <예약구매> 표시 안 뜨는 건지..ㅠㅠ 샘~ 근데 언제까지 리옹에 계실 겁니까..ㅠ 올림피크 리옹 축구팀도 얼마전 한국에 왔다 갔는뎅~~ 후후.. 어쨌든 잘 읽겠습니다! ㅋ

balmas 2007-09-03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답글 남기는 것을 용서들하시길. ^^
탈주선님/ 좋은 소식 있다고 들었는데, 먼저 축하부터 할게. :-) 귀국은 때가 되면 하겠지. ㅎㅎㅎ 귀국하면 한 턱 얻어먹는 건가? ㅋㅋ
멘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위, 더 피플은 글쎄 빨리 내긴 내야겠는데, 리요타르가 발목을 강하게 붙잡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있답니다. 리요타르를 어서 마쳐야할 텐데, 거참 ...
람혼님/ 처음 뵙습니다. 예정은 9월 중순 경이니까, 아마 추석 전에는 나오겠죠. ㅎㅎ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천재/ ㅎㅎㅎ 살다보니까 리용에 정이 들어서, 앞으로 그냥 눌러살지도 모르겠는걸. ㅋㅋ
나는 여기 살면서도 아직 올림피크 리용 경기 한 번 못봤는데 ;;;
책의 출간을 반가워해주니 고맙다. 건강하게 군 생활 잘 마치고,
얼른 제대하기를 빌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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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의 여름 강좌>







1. 맑스주의의 역사

 ․ 시간/장소 : 7월 26일부터 9월 13일까지 매주 목요일 7시

 ․ 강사:한형식(연세대 철학과 박사수료) 011-821-5371 / philliee@empal.com

 ․ 소개: "맑스주의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진 이론과 실천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같거나 다른가?",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계승된 것과 단절된 것들은 무엇인가? 맑스주의에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정세는 어떤 것이었나?"라는 문제의식하에 중요한 맑스주의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강의입니다. 맑스주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없는 분들도 들을 수 있습니다.

 

 ․ 강의 일정

제1강(7월 26일) : 맑스이전의 사회주의,공산주의/맑스-엥겔스의 사상과 제1 인터내셔널 1

제2강(8월 2일) : 맑스-엥겔스의 사상과 제1인터내셔널 2

제3강(8월 9일) :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이론과 실천 1

제4강(8월 16일) :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이론과 실천 2

제5강(8월 23일) :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제6강(8월 30일) : 소련의 맑스주의

제7강(9월 6일) : 웨스턴맑시즘

제8강(9월 13일) : 중국공산주의와 문화혁명







2. 한국 경제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 시간/장소 : 7시 새움 세미나실(날짜는 아래 강의 일정 참고)

 ․ 강사 : 김덕민(고려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수료)

 ․ 연락처 : 유승민(연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011-9975-1392 / rufrl@hanmail.net

 ․ 소개 :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경제를 이해하기 위한 강좌입니다. 맑스주의 경제학의 기본 개념과 방법론을 익히고 이를 통하여 오늘날 한국 경제의 변화와 위기를 진단하고자 합니다. 

 

 ․ 강의 일정

제1강(7월 25일) :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1): 노동, 가치, 화폐

제2강(7월 27일) :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2):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 그리고 축적, 위기

제3강(8월 1일) : 신자유주의와 금융 세계화

제4강(8월 3일) : 1980년 이후 한국경제: 이윤율 저하와 거시경제적 불안정성, 금융세계화

 

 




<‘새움’의 새로운 세미나>

1. 현대 중국 독회

 ․ 예비모임 : 7월 24일 화요일 6시 새움 세미나실(시간과 요일은 세미나 참여자들의 상황에 맞게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연락처 : 정웅기 (연세대 사학과 석사과정), 011-9631-8357 / singeruk@naver.com

 ․ 소개 :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현실적인 규정을 담지하는 정치/사회이론의 구성은 불가능합니다. 본 독회에서는 미국의 저명한 중국현대사가인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의 책을 주텍스트로, 마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중국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깊이있는 탐색을 시도합니다. 이와 더불어 한국사회성격논쟁의 중요한 이론적 전거였던 '중국사회성격논쟁'의 검토와 '문화대혁명'을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 작업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한편, 세미나 후반부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혹은 사회주의 이후 중국의 정치경제를 소유권 개혁과 기업구조의 변화, 그리고 노동정책의 전환을 중심으로 일별하면서, 다시 세계자본주의권으로 접궤(接軌)한 중국의 전체상을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주로 ‘신좌파’들의 이론적 작업을 통해, 마오주의적 기획을 비판적으로 재전유하려는 중국 지식인들의 새로운 시도를 음미해 볼 것입니다.

 

 ․ 주요학습내용

 現代中國的歷史的形成 (The Historical Formation of Modern China)

 ‘中國社會性格論爭’

 文化大革命和毛澤東主義(‘Cultural Revolution’ and Maoism)

 改革開放以後中國的政治經濟(Post-Socialist Political Ecomony of China)







2. 외국어 강독 모임

1) 영어

 ․ 시간/장소 : 매주 목요일 2시 새움 세미나실

 ․ 교재 : Penelope Deutscher,『A Politics of Impossible Difference -the later work of Luce Irigara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2

 ․ 연락처 : 장희은(연세대 경제학과 4학년), 010-7141-0665 / greenstar623@gmail.com

 ․ 소개 : 현대 페미니스트 사상가인 이리가레의 입문서를 윤독함으로써 영어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는 능력을 키웁니다.




 2) 불어

 ․ 예비모임 : 7월 23일 월요일 6시 새움 세미나실(예비모임에서 스터디 일정과 시간을 정합니다)



 ․ 교재 : Difficultés expliquées du français for english speakers

http://www.amazon.fr/Difficult%C3%A9s-expliqu%C3%A9es-fran%C3%A7ais-english-speakers/dp/209033701X/ref=sr_1_1/171-2899896-9359434?ie=UTF8&s=books&qid=1183485690&sr=8-1 (교재는 사시는 게 좋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복사해서 나눠드릴 수 있습니다.)

 ․ 진행 : 일주일에 2과씩, 23주간 진행됩니다.

 ․ 연락처 : 김지홍(연세대 철학과 석사과정), 011-9890-1592 / for7594@nate.com

 

 ․ 소개 : 불어를 새롭게 익히고 싶으신 분, 혹은 문법강의를 심화복습하고 싶은 분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모임은 강의가 아니라 함께 공부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단 불어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재가 중고급수준이기는 하나 주제별로 자세히 정리 되어있어 알파벳만 읽을 줄 아시는 분도 충분히 볼 수 있을 책입니다. 불어를 익히고 싶으신 분이면 누구든 환영합니다.




 

 



 

<‘새움’의 진행 중인 세미나 안내>




1.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

 ․ 시간/장소 : 매주 금요일 2시 새움 세미나실

 ․ 연락처 : 정기인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018-295-1804 / kiinchong@hanmail.net

 ․ 소개 : 맑스와 엥겔스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맑스주의 문예이론을 함께 공부하여, 한국의 문학사, 문화현상 나아가 세계의 문학사와 문화현상들을 맑스주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론적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맑스주의에 대해 기본적 지식이 없더라도 참여 가능합니다. 한국문학, 문화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싶어하는 분들, 맑스주의 문예이론에 관심있는 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2. 마르크스주의와 환경 세미나

 ․ 시간/장소 : 매주 월요일 6시 30분 새움 세미나실

 ․ 연락처 : 김민정(성공회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019-372-3025 / good21life@daum.net

 ․ 소개 : ‘마르크스주의와 환경’을 고민했던 학자들의 문제의식을 살펴보고, 마르크스주의 내의 다양한 환경 관점들을 공부합니다. 각 조류들의 장점 및 한계를 고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환경 및 생태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유의미성을 찾아볼 것입니다. 교재는 선행 연구들을 모아놓은 자료집과 각 세미나 내용에 따른 읽기자료 등입니다. 진행은 발제와 참여자들의 문제 제기를 통한 토론을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3. 자본론 1권 읽기

 ․ 시간/장소 :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새움 세미나실

 ․ 연락처 : 유승민(연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011-9975-1392 / rufrl@hanmail.net

 ․ 소개 : 자본론의 꼼꼼한 독해를 통해 맑스의 경제사상 읽기







4. 역사적 자본주의론 (1): 브로델을 읽는다

 ․ 시간/장소 : 매주 화요일 오후 5시 새움 세미나실

 ․ 연락처 : 정웅기 (연세대 사학과 석사과정), 011-9631-8357 / singeruk@naver.com

 ․ 목표 : 역사적 자본주의의 문제설정은 "역사 없는 역사성"이라는 맑스의 이론적 공백을 '대체보충'함으로써, 속류화된 역사유물론을 갱신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합니다. 또한 맑스가 기초한 『자본』의 '플란' 후반부를 생산적으로 계승하고 개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 역시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총 3부작으로 기획된 본 세미나의 (1)부에서는, 프랑스 아날학파의 총수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강독을 통해 이같은 작업을 진행합니다. 현재 『물질문명과 자본주의』Ⅱ-1권 강독이 진행중입니다.







5. 헤겔 세미나

 ․ 시간/장소 :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새움 세미나실

 ․ 연락처 : 이상경 (연세대 사회학과 3학년), 011-9270-6751 / gpspiel@yonsei.ac.kr

 ․ 목표 : 헤겔의 주저인 <대논리학>은 진정한 "과학"으로서의 변증법을 가장 정교하게 사유/기술하고 있는 역작입니다. 본 세미나는 <대논리학>을 체계적으로 독해하려는 취지에서 결성되었으며, 이를 위해 D.G. Carlson의 <대논리학> 연구서를 주 텍스트로 하고, V. Miller의 <대논리학> 영어본을 참고로 하여, 이러한 목적에 다가가려 합니다.

 ․ 교재 : D. G. Carlson, A Commentary to Hegel's Science of Logic, New York, 2007

G. W. F. Hegel, The Science of Logic, translated by A. V. Miller, London 1969

 

 




* 이 세미나들은 참가에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오실 수 있습니다.

* 회비는 참가하는 세미나 수에 무관하게 매달 1만 원씩 입니다.

  (수입이 없으신 분은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 문의 : http://club.cyworld.com/seumnet







<새움 세미나실 찾아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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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avinsky 2007-07-0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미나 말고 강좌들도 무료인가요?

balmas 2007-07-05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잘 모르겠네요. 새움 쪽에 함 물어보세요.

지형 2007-07-15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mravinsky / 네에~

Merdeiros 2011-08-0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有物論的時各星雲錄>"중세 열망기"{The Euthusiastic Dictational Brought of Middle Dark Age}
-von, Glenn Merdeiros 9
[Too Far Gone From the Living-skeletons Switched by Far Behind for One's Remarks]
"1)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조물주이자 능력의 하나님께서 태초에 궁창과 생태계에 생기를 불어넣어 심히 보시기 좋았더라 하매 그 동시에 사람과 뱀을 동시에 공존하게 하셨으므로 이는 앞날 선지자 요엘이 본 환상에 대한 대답인즉, 젊은이들은 예언할것이며 중년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한 그 대답이 하나님께서 훗날 인간들에게 하고자 한 말이니라 하더라.2)구약시대는 이미 끝났지만 그때 역사하신 성령과 영적인 움직임은 그대로 이고 중세는 이렇게 암흑기라서 이렇게 따로 구별되느니라 하더라.3)내가 그 옆에 사자에게 물어 가라사대 어찌 이렇게 많이 번성한 인간세계에 그들에게 사역하고자하고 뜻하시는 명령이 여러가지 달란트를 가지고 기름부으실텐데 오늘날도 동일하시나이까 하되 그 건장한 사자가 가로되 이는 너희 거룩한 하나님을 소홀히 대하지 말지어다 다만 너희 마음을 감찰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니라.3)중세시대에 이르러 한가지 어두움이자 올무가 있다면 인간들의 야만적인 모습과 야탈하는 강팍함이 아니오리까 묻자 그 사자가 내 손을 잡고 이르되 그 올무는 중세인들의 칼싸움 싻트기시작한 맑시즘의 뿌리니라 하시고 앞날 이론에게 사로잡혀 많은 이들이 음부로 떨어지고 둘째 사망에 이르는데 참여하게 될 것임이니라 하더라. 그 중세시대에 공존한 "프라이곤(Frigon)"도 앞으로 미래에 나타날 무저갱처럼 실제 생존했던 용이 아닌 수호짐승이니라 하며 이 모든 말이 모두 사실이니라 하더라."-(끝)Glenn Merdei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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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별시대, 노동자운동 어디쯤 와 있나

   

작년부터 민주노총의 소속 연맹들이 대대적으로 산별노조로 전환하면서 본격적인 산별시대가 열렸고 현재 국회에 관련법안도 계류 중이다. 본격적인 산별중앙교섭을 앞두고 산별노조와 지역운동 관련한 고민들이 초벌적이나마 시도되고 있는데, 오늘은 대표적인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와 공공노조, 그리 …
    산별, 제도화인가 계급주체 형성인가 | 정영섭
    [좌담]산별노조와 지역운동, 시작과 경로를 찾아 | 이승철, 김혁, 박준형, 임재경
#

 

06
2007년 06월 (75호)

 갈월동에서



전쟁을 멈춰라


이라크 전비법안 통과와 사회운동의 대응 | 김영식

   

더욱 멀어지는 ‘이라크의 자유’ 지난 5월 25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전날 상·하원에서 통과된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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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세계화를 향하여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변화와 현실 | 정지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자 재계와 대부분의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을 환영했고, 각종 연구소들 …

신자유주의와 지속 불가능한 성장 |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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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향한 여성운동


[기획연재⑤ 한국여성운동사] 한국 여성노동자운동, 그 길찾기② | 문설희

   

1987년은 노동운동사와 여성운동사에서 이정표가 되는 해이다.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그러하고 198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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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계의 역사』, 윌리엄 맥닐 지음, 김우영 옮김, 이산, 2007 | 고원

책속의책
세계시민주의와 국제주의 | 에티엔 발리바르


 
검색로고
검색로고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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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87년 6월, 기억 속의 몇 장의 사진과 넋두리 | 박하순

   
[책과나]
노동을 사유하는 시 최종천 「투명」을 읽고 | 강영규
  [갈월동기행] 민들레를 무쳐 먹으며 사회진보연대를 생각하다 | 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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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6-2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른쪽 옆구리가 짤려서 아프잖아요~~~

balmas 2007-06-25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예전 같으면 다 올라왔을 텐데, 서재가 개편하더니, 폭이 좁아지면서 잘리네요. ^^;
여우님은 몸은 좀 좋아지셨나 모르겠네요. :-)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다?
남북한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기사인쇄    

사회진보연대 
범민련 남측본부가 발행하는 <민족의 진로>에 실린 기사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과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반박 성명서를 발표했다.(바로가기) 우리 역시 이주노동자를 민족 고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은 혼혈과 이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유럽의 극우세력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민족의 단일한 기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민족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모든 시도는 철저히 ‘야만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인류사에 대한 무지를 넘어서 인류사를 조작, 왜곡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민족의 순수화(정화)’라는 반동적 해결책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와 손쉽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출처:노동과세계]주작을 상징화했다는 2006년 민주노총 노동자대회 로고는 당시 드라마 주몽의 삼족오를 패러디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동북아시아의 종족적 민족주의

그런데 민족 고유성, 특히 언어적·문화적 단일성과 나아가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동북아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종족의 신화·상징의 공통성에 기초해 ‘민족주의 이전에 민족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지지하며,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인종(주의)적 관점과 친화성이 높다. (이방인에 대한 공포, 경멸, 적대심을 뜻하는 ‘외국인혐오증’을 넘어서 강한 의미의 인종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인종의 위계에 따라 구성하고, 우월한 인종의 신성한 임무와 불필요한 인종의 배제·제거를 주장한다). 또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체를 초월적·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와 매우 가깝다.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될수록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에 근간을 두는 근대적 정치이념보다는 전근대적 이념·사조가 강화된다. 반면 종족적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시민적 민족주의는 대체로 ‘근대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 발명되었다’는 관점을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민족구성원의 인격적 동등성이라는 관념이 작동하므로 민족자결과 함께 인민주권, 즉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강조되며, 사회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의 유사과학적 종족/인종 관념이 도입되면서 등장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비롯해 동북아 공산주의 운동의 성과와 일본의 패전을 통해 종족적 민족주의가 다소 억제된 상태였으나, 최근 상호 경쟁적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중국인민’이라는 구호를 장개석의 ‘중화민족’이라는 구호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중서적에서는 400만년 가까이 대중화지역에서 살아온 ‘중화인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일본은 '군사력 보유 금지'와 '교전권 부인'을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의 개정을 추진하며, 국기·국가의 법제화,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은 곧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상징이다.
한편 남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1945년 이후로 종족적 민족주의, 이른바 ‘단군민족주의’(단군숭배)가 법으로 보장되고,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대중의 내면을 강력히 장악하고 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걸었고, 1993년 돌연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예외를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남한의 ‘단군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한 어머니의 소생을 뜻하는 ‘동포’(同胞), 같은 핏줄의 사람을 뜻하는 ‘겨레’(族)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혈연의식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히 근대 이후의 일이다. ‘2천만 동포’, ‘삼천리 강토’, ‘4천년 역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1907-8년 이후부터이며, 배달겨레라는 말은 1920년대에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근대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한 개인들의 관계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데, 혈연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종의 국가공인 교과서인 <동몽선습>은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의 건국으로 시작하지만, 국가 지배자들의 국가계승 의식을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단군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단군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사조가 사상계에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여 종교에서는 1909년 대종교의 창건으로, 역사학에서는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으로 투사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은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채호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학부에서 주관한 학부 교과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던 이 교과서는 ‘조선’ 계승 의식보다 ‘한(韓)’ 계승 의식이 강조했고, 기자문화(기자조선→마한)에 모든 개화정책을 결부시켰다. 이는 17세기 후반부의 ‘마한정통론’을 부활시키고, 대일본주의에 바탕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긍정하는 이었다. 반면 신채호는 ‘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하였다.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우리 역사에서 부여족이 주족(主族)이고 외래족인 중국족, 선비족, 말갈족과 토착족인 한족, 예맥족이 그들에게 동화된 객족(客族)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군조선이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기자조선 정통주의는 ‘사대모화’, ‘중화주의’이며, ‘한’ 계승의식은 임나일본부설의 수용으로 연결되면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결국 ‘일본숭배의 노예근성’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신채호 이후 종족적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었다.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이자 2대 교주인 김교현이 1914년에 서술한 <신단실기>는 우리 민족이 배달종족에서 출발했으며, 그 계통은 조선족, 북부여족, 예맥족, 옥저족, 숙신족이라고 잡았다. 민족의 주류가 조선족→한족→신라족으로 형성되었고, 중국족인 기자와 그 후예 마한은 반배달족으로 조선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의 조선족과 북의 부여족이 모두 주족이라고 보았고, 신채호가 외래족이라고 간주했던 선비, 거란, 여진, 만주족을 모두 고구려, 백제와 함께 배달족의 한 계통인 북부여족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신채호의 부여족 계승의식을 범동이족 계승의식으로 확대하면서, 한 계승의식도 종합함으로써, 민족의 구성을 대폭 확대한 ‘대단군주의’를 주창한 것이었다. 김교현의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조선인이 서술한 한국사 서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동이주의의 정통이 신교(神敎) 또는 한(韓) 종족을 바탕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을 매개로 대동이주의는 대일본주의, 곧 대동아공영론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최남선은 일본의 단군말살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단군주의/대동이주의를 대일본주의로 변형시켰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동이문화권을 더 확대시켜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유구를 포함시켰고, 한일문화동원론를 승인했다. 대일본주의로 변형된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유포되었고, 현재 위서로 판명난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규원사화>는 일본, 조선, 만주족 연합을 통한 중국제패를 주장했고, <환단고기>는 단군조선과 일본 건국신화와 일본 신도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단기고사>는 고대 단군민족과 중국민족의 전쟁 체험을 강조하면서 불함문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종족과 일본문화를 포괄하는 대동아시아문화우월주의를 내세웠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했지만, 이것이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포섭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고대사를 현재의 정치적 맥락에 따라 조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낳은 역설인 셈이다.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국가적 제도 속에서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 정치적 기반과 정당성이 취약했던 한국의 민족주의 경향은 단군주의를 정치적 상징, 구심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단기(檀紀) 연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홍익인간’은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이었던 삼균주의(조소앙), 신민족주의(안재홍)를 매개로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법제화되었다. 현재에도 단군주의는 “단일민족”, “혈연공동체”라는 신화를 뒷받침하며, “대통일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하며 선택받은 민족”이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며, 특히 최근에는 “대륙에 대한 영토의식”을 자극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민족주의의 대전환과 단군릉 사건




북한이 93년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단군릉


1957년 북한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단계>는 민족주의가 “인민들간의 친선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자체의 민족적 이익과 계급적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밝혔다. 1973년 발행된 정치사전에서도 “민족주의는 언제나 부르죠아적 성격을 띤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1986년 북한의 후계자 김정일이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180도 전환되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조선민족이 제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으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우리 수령, 우리 당의 위대성”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민족 개념에 대한 정의도 변화하였다. 1950-60년대까지 북한의 민족 개념은 스탈린의 정식화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적 상태의 공통성).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민족의 구성요소에 ‘혈통’이 포함되었고, 1980년대 이르러서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고 혈연의 공통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민족의 지표로서 핏줄과 언어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핏줄과 언어는 사실상 불변의 본질로 간주되고, 민족의 형성 시기는 상고시기로 소급되었으며 이는 근대에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스탈린의 이론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과의 논리적 정합성 문제가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이론대로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강조하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경제생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인해 서로 다른 민족이 되기 때문이며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이제 통일의 당위성을 말할 때 ‘혈통의 공통성’이 가장 강조될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1993년 북한은 난데없이 평양시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금동관 조각 때문에 고구려 당시의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출토된 인골을 측정하니 5011(±267)년 전에 죽은 사람의 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때 개장한 단군묘라고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북한 역사학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남한에서는 위서로 간주하는 <단기고사>, <태백일사>, <규원사화>가 사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은 “평양이 인류의 발상지로, 민족문화의 중심지로, 조선민족의 성지로 온 세상에 이름 떨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이 강화되고 수령론/대가족론이 득세하면서 정치공동체의 초월적, 유기체적 성격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강조하는 정치이념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언어와 핏줄로 맺어진 공통성을 부각되면서 인종적 관점의 민족관으로의 퇴행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실천

단군 민족주의,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신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합리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반제국주의 저항운동이 종족적 민족주의에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관련이 없으며 지역적 차원의 해방을 모색했다. 특히 현재의 정치적 조건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이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중국의 역사 해석에 대응해 한국 역시 역(逆)동북공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나 중세사는 결코 특정 민족사의 기원으로 해석될 수 없다. 동북아지역 고대사를 현존 국가의 민족사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허구적인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따라서 최근 민주노총이 ‘주몽’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어떤 이유든 간에 대중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정서에 편승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영유권 분쟁을 고대사로 환원하려는 시도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자연·자원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강화할 따름이다.
둘째,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하는 국면에서 반동적 기능을 한다. 민족이 과거지향적(사실은 허구적) 종족적 동일성이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마땅히 이주노동자가 정치공동체의 시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의 미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동북아시아 각 국가에서 종족적 민족주의 확산에는 지역적 차원의 안보위험성이 기능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미국, 일본과의 잠재적 갈등에 상당히 기인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일본만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위선이다. 남북한,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가운데 일본만이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지 ‘일본이 패전국이니까’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각 국이 일본 평화헌법이 지향하는 바를 동일하게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조선일보>가 영어공용화를 주창하고,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졌고, 한국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편협한 국사/세계사 교과서를 개혁해야 한다고 나서는 등 세계화를 주도하는 지배 엘리트가 훨씬 더 민족적 특수주의를 지양할 태세인데 반해 피지배 대중이 ’민족주의‘, ’인종주의‘에 훨씬 더 유혹을 느끼는 것은 역설적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파괴적 효과는 결국 민중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대결하고 시민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운동의 진지한 모색과 대응이 시급하다.
2007년06월21일 23:41: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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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2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나요? :)

balmas 2007-06-25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잘 지내고 있답니다. 아프님도 잘 지내시죠? 이제 방학하셨나 모르겠네요. :-)

mravinsky 2007-06-26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 전에 싸이월드에서 대문에 남북한은 한민족이라는 글이 있길래 딴지 걸었다가 악플에 시달린 적이 있네요... 요즘 여러 대학 캠퍼스에 가보면 증산도 같은 계열에서 자꾸 이런 내용을 퍼뜨려서 좀 눈살이 찌푸려지더군요.

마늘빵 2007-06-26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방학하려면 멀었어요. 지금이 젤 바쁜 시기랍니다. 시험문제 내고 수행평가 채점하고 수업준비 막바지하고 정신 없어요. 오늘도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왔다는.

릴케 현상 2007-06-2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울이라는 '순수문학' 사이트에 가입했더니^^ 요즘 군가산점 줘야 된다는 메일이 계속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