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알라딘 서재에 글을 써봅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부칠 [역자 해제]입니다. 아직 교정이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길게 붙잡고 있던 번역이 끝이 났으니 속이 후련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은 아직 밀려 있는 일들이 많아서일까요? 흑흑
원고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분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더 답답하네요.
에효,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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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유령들, 데리다의 유령들
I
여기 우리가 번역ㆍ소개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자크 데리다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한 권이다. 지난 2004년 사망하기 전까지 약 40여년에 걸친 저술활동 기간 동안 데리다는 80여권의 책을 출간하고 수백편의 글과 대담 등을 발표했으며,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물론 이 영화들은 다큐멘터리나 실험적인 영화들이다)1), 또 상당한 분량의 미간행 원고를 남겼다. 그가 남긴 책들과 논문, 대담은 거의 모두 많은 토론과 주석,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난 1993년에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만큼 큰 화제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작은 드물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여러 나라 말로 신속하게 번역되었고2), 이 책에 관한 많은 서평과 논평들이 쏟아져 나왔으며3),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4)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데리다의 저서들 중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저작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왜 이처럼 이 책이 큰 화제가 되었을까? 이 질문에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답변할 수 있다. 첫째는 이 책이 출간된 시기를 꼽을 수 있다. 1993년은 알다시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 몰락함으로써 현존 사회주의(또는 역사적 공산주의)가 종언을 고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며, 또한 이 책의 2장에서 데리다도 논의하고 있다시피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1992)5)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예찬이 울려 퍼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의 예찬에도 불구하고 걸프 전쟁(1990-1991)과 유고슬라비아 전쟁(1991-2000), 아프가니스탄 내전(1989- ) 및 수다한 아프리카 내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종류의 내전ㆍ국제전이 세계 곳곳에서 분출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 책이 출간된 시기는 바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현실 운동의 준거든 이론적 준거든 간에)의 토대가 와해된 상황에서 데리다 같은 세계적인 철학자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마르크스에 대한 저작을 냈다는 사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이 큰 화제가 된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데리다가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본문의 이곳저곳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데리다는 학생 시절인 1950년대부터 줄곧 좌파 진영에 속해 있었고, 또 스스로 자신을 좌파의 인물로 간주해왔다.6)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드문 몇몇 경우를 제외하다면, 그는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 일반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이론이나 정치 정세에 대해서 극히 말을 아꼈으며, 이러한 쟁점에 대해 발언을 하는 경우에도 매우 신중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7) 프랑스처럼 정치적인 발언과 참여가 지식인의 주요 조건이자 의무 중 하나로 간주되는 곳에서 이러한 데리다의 태도는 호응을 얻지 못할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1968년 5월 봉기 이후 맹위를 떨친 여러 좌파 지식인들에게 불신과 의혹,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데리다의 저작이 1970년대 말 이후 미국의 문학이론계에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가 이른바 예일학파의 한 성원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 역시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의혹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8) 따라서 그가 마침내 마르크스에 대해 입을 열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큰 화젯거리가 되기에 족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데리다 사상의 전개과정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 자신은 줄곧 부인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특히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주저 없이 “정치적 전회”나 “윤리적 전회”로 특징짓고 있다. 80년대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정치적ㆍ실천적 쟁점들에 대한 침묵 내지 유보적인 태도가 두드러졌다면, 그 이후의 저술들, 특히 법의 힘과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후부터 데리다는 법과 정의, 마르크스주의, 민주주의, 인권, 이주와 이민, 세계시민주의, 환대, 메시아주의(및 성서의 종교들) 등과 같은 윤리ㆍ정치적인 쟁점들을 자신의 주요 주제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 정세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단정적이고 획일적인 “전회”나 “단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저술들을 통해서 비로소 그의 초기 작업에 담겨 있던 실천적 함의를 이해하고 또 발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위시한 그의 “정치적” 또는 “윤리적” 저술들은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후기 데리다, 또는 90년대 이후 데리다 작업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II
이 책이 화제를 불러 모은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책의 제목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사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범상치 않다. 우선 마르크스를 주제로 한 책에 “유령”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을뿐더러, 시종일관 유령, 망령, 환영, 허깨비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자못 충격적이다. 데리다 이전에 과연 누가 유령을 주제로 마르크스에 관해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거의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또한 반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유령이나 망령, 환영 따위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논의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하찮고 부차적인 주제에 불과했을 것이다.9) 하지만 데리다는 정말 대담하게도 자신의 저서에 유령들이라는 제목을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산당 선언이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같은 저작, 특히 독일 이데올로기나 자본 같은 핵심적인 이론적ㆍ철학적 저작에서 유령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
이처럼 매우 사소하고 주변적인 것으로 보이는 어떤 주제나 개념 또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이런저런 사상 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데리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기록학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1967)에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를 분석하면서 기의나 기표 같은 중심 개념들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écriture”이라는 매우 하찮은 단어, 소쉬르 자신이 지극히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 이전까지는 누구도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하찮은 이 단어가 사실은 플라톤 이래 레비스트로스까지 지속되어온 서양의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중심주의를 드러내주는 핵심 쟁점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또한 루소의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에 나오는, 역시 하찮기 짝이 없는 “supplément”(보통은 “보충”을 의미하지만 데리다의 용어법에서는 “대체 보충”을 뜻한다)이라는 단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데리다는 루소에서도 역시 음성중심주의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원초적인 기원이란 사실은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따라서 데리다가 유령이라는 주변적이고 하찮게 보이는 단어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독해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매우 일관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중심에서, 아니 첫머리에서부터 “유령들”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의미심장한 것이라면, 이는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이 단수인 “유령”이 아니라 복수인 “유령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복수형의 제목이 필요했을까? 또 이런 복수형의 제목이 어떤 의미에서 그처럼 중요한 것인가?
단순히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된 제목은 마르크스의 저작,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유령이나 환영, 망령, 허깨비라는 주제가 양가적인 주제였음을 시사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기회로 삼아 사람들이 무력화시키고 또 몰아내고자 하는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가리킨다. 지난 150여 년 동안 전개되어 왔고, 특히 지난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래 현실적인 정체(政體)로 존재해왔던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몰락을 통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한 체제로, 역사의 유물로 사라졌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만이, 자본주의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체제로 살아남아 영속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그 환영마저 모두 몰아내자. 이 허깨비를 사라지게 하자.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푸닥거리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유령은 계속 다시 망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령은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것인 한에서 결코 소멸할 수 없으며, 언제든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면 늘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견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몇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면,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데리다가 3장에서 말하듯이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찬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출현하고 있는 “10가지 재앙”(실업, 빈곤, 망명 및 이주, 경제전쟁, 자유 시장의 모순, 종족 간 전쟁, 외채 등)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에 대한 상속은 필수적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 이론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해방의 운동이라는 이유에서도 유령처럼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법적인 공정함의 질서 바깥에서, 자본주의적인 시장의 질서의 모순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차별받는 타자들의 고통의 호소가 울려 퍼지는 한에서 정의에 대한 요구와 해방의 운동은 사라지지 않으며, 지난 150여 년 간 해방의 운동의 대명사로 존재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유령 역시 끊임없이 자유주의의 공모자들에게 악몽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이러한 이유들은 결국 존재론을 넘어서는 유령론의 필요성, 아니 필연성을 시사해준다고 본다. 당ㆍ국가 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사라졌고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이러저러한 측면들 역시 한계에 봉착했음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주의의 유령의 명령들이 우리의 상속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는 바로 마르크스주의를 해방의 운동과 이론으로서 고취시킨 메시아주의적인 것의 차원이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노동의 존재론, 생생한 현재의 존재론을 넘어서 “유령론hantologie”의 문제설정이 필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령론은 존재론을 대체하는 좀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이론이기 이전에 타자들의 부름 및 호소에 대한 책임의 윤리ㆍ정치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이 갖는 한 가지 의미는 마르크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푸닥거리에 맞서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우리들에게 부르짖는 호소에 귀기울이고, 그것의 명령을 상속하고 따라야 한다는 책임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내가 인상적이고 야심적이며 필수적인 또는 모험적인 [...] 이 콜로퀴엄의 기조 강연을 하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의 망설임 끝에, 내가 지닌 능력의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베른트 매그너스가 영광스럽게도 제안한 초대를 수락한 것은, 철학적이며 학문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책임의 본성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여러분의 토론에 부치기 위해서다.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이러한 책임이 역사적인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또한 마르크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유령들, 또 마르크스 자신이 계속 몰아내려고 했던, 하지만 결국 완전히 몰아내는 데, 소멸시키는 데 성공할 수 없었던 유령들을 가리킨다. 왜 그는 유령들을 몰아내려고 했을까? 또 왜 그는 그것들을 쫒아내는 데, 푸닥거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까?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공모했던 그의 적수들(공산당 선언이 말하는 “낡은 유럽의 열강들”이자 오늘날 “새로운 세계질서”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가 생생한 현실 대 가상ㆍ환영의 대립, 삶과 죽음의 대립을 신뢰했고 이러한 대립 위에 자신의 이론을 세우고 또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곧 이 책의 4장에서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이제 공산주의는 더 이상 하나의 유령이 아니라 “당 자체의 선언”이자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는 과거의 정치혁명과 오늘날의 “사회혁명”을 대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이유는, 공산주의야말로 과거의 모든 이데올로기, 가상, 환영과 결별하는 참된 현실의 운동이고 혁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공산주의는, 마르크스 그 자신은 모든 가상과 환영, 유령과 결별할 수 있었을까? 그는 모든 유령, 망령과 결말을 볼 수 있었을까? 데리다는 독일 이데올로기 2부에서 전개되는 마르크스와 슈티르너의 논쟁 및 자본 1권의 서두에 나오는 사용가치 및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을 검토하면서(이는 5장의 주요 주제다), 마르크스가 결코 유령의 논리, 신들림의 논리(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또한 차이(差移)différance의 논리이자 되풀이 (불)가능성의 논리이다)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만 그것과의 단절을 (부당하게) 가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슈티르너에게, 유령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구체적인 것으로서 자아, 유일자의 신체에 의거할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자아의 신체는 바로 유령의 장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노동 및 사회적인 실천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묻는다. 자아 또는 구체적인 개인이 그 내면에서부터 이미 유령에 신들려 있다면, 유령에서 벗어나 있는 실천이나 노동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이나 실천은 이러한 질문을 회피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자본 1권의 서두에 대한 분석에서도 동일한 문제제기는 계속 된다. 마르크스는 놀라운 통찰력과 수사법으로, 평범한 나무탁자가 어떻게 교환의 과정 속에 진입함으로써 “감각적 초감각적 사물”, 곧 상품이 되는지, 따라서 마치 유령처럼 변모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면 목재로 탁자를 만들면 목재의 형태는 변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자는 여전히 목재이고 보통의 감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탁자가 상품으로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그것은 초감각적인 사물로 전환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발로 땅을 딛고 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을 마주보고 머리로 거꾸로 서기도 한다. 그리고 탁자의 이 나무 머리는, 탁자가 자기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기이한 망상들을 빚어낸다. 그러므로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10)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치 교환가치를 갖기 이전의 사용가치, 상품이 되기 이전의 자연적이고 평범한 나무탁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을 하며, 또한 마치 상품들의 관계를 둘러싼 몽롱한 물신숭배의 세계는 우리가 다른 생산양식으로 넘어가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것처럼, 이데올로기 없는, 물신숭배 없는, 따라서 환영이나 유령이 없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평범한 나무탁자에는 항상 이미 상품의 신비한 성격이 기입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항상 이미 상품들의 사회적 관계, 따라서 유령들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과잉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곧 상품 이전의, 교환 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 가치의 낙원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모든 유령과 결별해야만 하는 것일까? 일체의 망령이나 유령, 환영과 단절하는 것은 해방의 운동과 이론을 위해 필수적인 것인가? 어쨌든 유령이나 환영, 망령은 우리가 어떻게든 몰아내야만 하는 일종의 악을 가리키는 것일까? 데리다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책의 1장에서 데리다가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는 햄릿의 말과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을 결합함으로써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데리다는 햄릿의 말을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른 복수의 다짐이나 정신분석에 의거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표현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정의의 존재론 또는 정의의 유령론의 심오한 울림으로 파악한다. 곧 데리다에게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음은, 어떤 불순한 시대 상황을 의미하거나 시간의 질서의 일시적인 왜곡이나 일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서 안에, 따라서 현존으로서 존재의 질서 안에 근원적인 탈구와 이접, 간극이 존재함을 뜻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탈구와 이접, 간극은 존재자들 및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불행한 숙명ㆍ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현재들의 시간적인 연속, 곧 과거 현재에서 지금 현재로, 또 지금 현재에서 미래 현재로 나아가는 연대기적인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은 계산 가능성의 질서이이면서 또한 인과적인 응보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법, 분배의 계산, 복수 또는 징벌의 경제”인데, 시간의 흐름 안에, 존재자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어긋남이나 간극은 계산 가능성과 응보의 질서에 균열을 냄으로써, 법적인 처벌과 보상의 논리를 넘어서는 정의의 도래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데리다는 햄릿의 말이 하이데거가 수행한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보다 한 걸음 더 나가 있다고 평가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대한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데거는 “어떤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이나 “어긋남, 불화”를 의미하는 “아디키아adikia”를 “어떤 것의 이음매가 빠져 있는etwas ist aus den Fugen” 상태로, “무언가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며, 반대로 디케dike(보통 “정의”로 번역되는)는 “연결해주고 어울리게 해주는 이음매”로, 곧 화합의 이음매를 “허여(許與)하는Zugeben”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햄릿의 말과 달리, 또는 햄릿의 말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과 달리 이음매가 어긋남, 이음매가 빠져 있음에서 정의의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반대를 보고 있다. 데리다가 하이데거는 “조화롭게 한데 모으는 또는 받아들이는 허여/일치accord(Versammlung, Fug) [...]에 호의적으로 기울어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달리 시간의 순서, 현존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어긋남이야말로 계산 가능한 현존의 질서에서 벗어나 장래의 도래, 타자의 도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의의 조건 자체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또한 유령이 출현하고 망령이 되돌아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이러한 어긋남, 탈구, 이접이 만들어내는 균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어긋남과 탈구가 없다면, 마르크스의 정신도,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정신, 그 유령의 명령들에 대한 상속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정신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상속의 호소가 데리다의 윤리적ㆍ정치적 진정성을 표현한다면, 햄릿의 말에 대한 해석은 이 책에 담겨 있는 철학적 깊이의 정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또는 근대성 일반에서) 종교는 사라져야 할 과거의 유물로 치부되었으며, 적어도 공적인 것의 영역에서는 더 이상 존속될 이유가 없고 또 존속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되었다(정교분리의 원칙).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종족 간 전쟁에 항상 종교의 문제가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 또한 특히 서양 사회 내에서 인종 문제가 계급 관계 이외에 종교적인 갈등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있는 양상 등은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종교적인 것이 단지 개인의 사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또 그것으로 국한될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데리다는 2장 및 5장의 말미에서 이러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한 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전유를 둘러싼 성서의 세 가지 유일신론(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사이의 투쟁의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메시아주의와 메시아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로 제시하고 있다. 곧 데리다는 오늘날 국내 정치나 국제 정치에서 종교적인 것은 끊임없이 유령으로서, 망령으로서 다시 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 정치를 분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해방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서도 종교의 문제는 우회할 수 없는 필수 쟁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해방의 정치, 도래할 민주주의의 정치는 과연 종교적인 원천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 해도 역사적인 메시아주의로부터 메시아주의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메시아주의적인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또 그것은 어느 정도나 종교적인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종교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는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또 암묵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들이며,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후에도 데리다가 계속 던지는 질문들이다.11)
철학자로서 데리다가 지닌 비범한 능력 중 하나는 어떤 철학자나 이론가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서 글을 쓸 줄 알았다는 점이다. 가령 데리다는 반플라톤주의자가 아니면서도 플라톤 철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밝혀냈고, 하이데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어떤 하이데거주의자도 밝혀내지 못했던 그의 철학의 숨은 면모를 드러냈으며, 니체주의자도 아니고 반니체주의자도 아닌 방식으로 니체의 양가성을 읽어낸다. 이른바 창조적 오독(그리고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영향의 불안”)이 철학사의 규칙 아닌 규칙으로 작용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진정으로 희귀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이 책에서도,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다. 사실 만약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자로서만 (또는 반마르크스주의자로서만) 이 책을 썼다면,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이나 의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상속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으면서도,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고서 또는 상속이란 항상 식별과 선별을 요구한다는 점을 명시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데리다 자신으로서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이론 및 그 현재와 장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훨씬 더 큰 기회를 제공하며, 훨씬 더 큰 장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1993년 출간된 이래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으로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각자 떠맡아야 할 과제는, 아마도 데리다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데리다와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책과 대결하는 일일 것이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불러내고 그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 속에 깃들어 있는 데리다의 유령들의 부름은 어떤 것인지, 이제 우리가 귀기울여볼 때가 되었다.
III
무척 단정하고 “고전적인” 문체로 씌어진 초기 저작들을 제외한다면, 데리다 번역에서 가장 힘든 일은 아마도, 빈번히 나타나는 데리다의 언어유희를 놓치지 않고 적절하게 살려내는 일과 그의 문체가 지닌 고유한 리듬을 살리는 일, 이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데리다가 수사학적 어법과 철학적인 논증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다양하게 언어유희를 하는 것은 “대체 보충”이나 “되풀이 (불)가능성” 또는 “산종(散種)” 같은 그의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수행적으로 실천하려는 데서 나오는, 불가피하면서 또 매우 의미심장한 철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역자들, 특히 상이한 문자 체계를 사용하는 역자들에게는 괴롭기 짝이 없는 짐을 안겨준다.
또 데리다는 때로는 10줄이 넘는 긴 문장에서 같은 단어, 같은 문구를 반복함으로써 문장 전체에 리듬감을 주면서도 또한 이를 조금씩 변용하여 의미의 변화를 낳고 있는데(마치 되풀이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의 사례를 보여주듯이), 문장의 호흡이 길지 않은 우리말 문장으로 이를 살리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어법을 그대로 옮기면 그만큼 문장이 난삽해지고, 반대로 문장을 잘게 끊어내면 데리다의 고유한 어법, 고유한 리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역자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 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과가 얼마나 만족스러울지는 전혀 장담할 수가 없다. 예전에 몇 차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비교적 쉽게 이 책을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건 전혀 그릇된 판단이었다. 이전의 어떤 책보다 더 힘겹고 능력에 부친 번역이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번역이 어려웠던 그만큼 이 책의 번역은 역자 자신에게는 이 책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것만으로도 이 번역은 개인적으로 아주 소중한 작업이었다. 이전에 불어본이나 다른 외국어본으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이 번역본이 얼마간이나마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주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IV
이 책은 나의 세 번째 데리다 번역서다. 내가 턱없이 부족한 능력에도 데리다 책을 세 권이나 번역하게 된 것은 10여 년 전에 한 비평이론 전문지에 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책들을 대상으로 주제 서평을 쓴 것이 계기였다.12) 5권의 번역서와 국내 학자들이 쓴 한 권의 논문 모음집을 대상으로 한 서평이었는데, 서평 대상이 된 대부분의 번역서가 오역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큰 실망을 느꼈고 또 충격을 받았다. 그 뒤에도 데리다 책들은 여러 권이 더 번역되었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번역의 질은 결코 좋아졌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렇게 데리다 번역서들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데리다 연구자들 및 전공자들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국내에도 데리다에 대해 이런저런 논문을 쓰고 심지어 책까지 내는 연구자들이 있지만, 내가 알기로 그들 중 데리다의 저서를 번역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물론 잘 된 번역의 경우를 말한다). 이건 참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데리다가 고국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미국의 경우(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번역은 전문가들(그들 중 상당수는 독창적인 이론가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이 맡고 있으며, 또 데리다에 대한 논의도 그 번역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식의 논의 구조는 번역의 질을 한층 더 높일 뿐만 아니라 데리다에 대한 논의를 훨씬 더 생산적이게 만들고 또 미국의 이론적 맥락 속에 더 밀접하게 연결시켜 준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방식이며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는 비단 데리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번역서가 존재한다 해도 굳이 원서를 인용해서 논의를 할 뿐만 아니라, 불어 해독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영역본이나 독어본, 일어본 같은 각종 외국어본을 인용해서 글을 쓴다. 이 경우 기존에 나와 있는 번역본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서로 다른 판본을 바탕으로 삼아 데리다의 주요 개념이나 용어들을 서로 다른 식으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더욱이 대부분의 경우 왜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하는지 아무런 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또 대개는 미국이나 독일 또는 심지어 일본 내의 논의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수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게 된다. 데리다 국역본 중 상당수가 심한 오역으로 훼손되고 있어도 데리다 전문가들로부터 아무런 비판이나 문제제기도 나오지 않는 것이나, 데리다에 대한 논의가 초점 없이ㆍ맥락 없이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성실하고 진지한 논의를 하는 여러 연구자들을 섣부르게 폄훼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국내에서 데리다에 관한 독서와 연구가 좀더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수용 및 논의 방식에 대한 좀더 진지한 반성과 전환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반복하거니와 이는 비단 데리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일환으로 우선 이 번역본에 대한 좀더 치밀하고 신랄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V
이국의 땅, 그것도 데리다가 오랫동안 살고 사고하고 저술하고 죽었던 땅에서 데리다의 저서를 번역을 하는 일은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했지만, 또 그에 못지않은 불편함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나를 대신해서 번역과 관련된 이런저런 번거로운 일을 맡아 해준 친구 ***과 후배 ooo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한없이 늦어지는 원고를 기다리면서 조바심을 친 이제이북스 여러분들에게도 사과와 감사의 말을 함께 건네고 싶다. 그들이 마음을 졸인 그만큼 독자들에게는 좀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번역이 되었으면 한다.
프랑스 리용에서
역자
http://www.hydra.umn.edu/derrida/jdin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