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때리다님의 질문

회폐의 책을 읽다가 (지금 순수이성비판 부분만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뜻을 모르는 구절이 나와서 질문드려요.

"모순율은 분석적 판단으로 보아진다. 반면에 직관의 공리, 지각의 공리, 지각의 예취, 경험의 유추(예컨데 인

과원리), 그리고 경험적 사고의 요청은 종합적 판단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직관의 공리, 지각의 공리, 지각의 예취, 경험의 유추(예컨데 인과원리), 그리고 경험적 사고의 요청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질문에 대한 답변

ㅎㅎㅎ 자꾸 때리다님, "지각의 공리"라는 말은 잘못 넣으셨네요. 회페 책에는 원래 없는 말인데, 자꾸 때리다님이 문장을 옮기면서 집어넣으신 것 같네요. ^^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복잡한 체계로 되어 있는데, 크게 보면 인식의 요소들(직관, 개념, 이념)을 다루는 “초월적 요소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과 사유의 훈련, 규준, 건축술, 역사 등을 다루는 “초월적 방법론”(transzendentale Methodenlehre)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요소론은 “초월적 감성론”(transzendentale Ästhetik)과 “초월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으로 구별되죠. 그리고 이 중에서도 초월적 논리학은 다시 “초월적 분석론”과 “초월적 변증론”으로 구별됩니다. 또 초월적 분석론은 “개념의 분석론”과 “원리의 분석론”으로 나뉘어지죠. 또 원리의 분석론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은 “지성의 순수 개념의 도식론”이고, 2장은 “순수 지성의 모든 원리의 체계”, 3장은 “모든 대상을 현상계와 가상계로 구별하는 근거”입니다. 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취, 경험의 유추, 경험적 사고의 요청은 2장에 나오는 것으로서, 각각 순수 지성의 원리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분류를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I. 초월적 요소론


1. 초월적 감성론


2. 초월적 논리학


1) 초월적 분석론


(1) 개념의 분석론



(2) 원리의 분석론


① 지성의 순수 개념의 도식론

② 순수 지성의 모든 원리의 체계

(1. 직관의 공리, 2. 지각의 예취, 3. 경험의 유추들, 4. 경험적 사고의 요청들)

③ 모든 대상을 현상계와 가상계로 구별하는 근거


2) 초월적 변증론



II. 초월적 방법론



그러니까 자꾸 때리다님이 질문하신 문장의 뜻은 이런 겁니다. 우리의 판단은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으로 구별되죠.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모든 분석 판단의 토대를 이루는 지성의 최고 원리는 바로 모순율이며, 모든 종합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최고 원리가 바로 이 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취, 경험의 유추, 경험적 사고의 요청이라는 뜻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분석 판단이 아니라 종합 판단을 문제 삼고 있는데, 이 네 가지 원리는 우리의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려주는 원리들입니다. 따라서 자꾸 때리다님이 인용한 문장에서 회페는 {순수이성비판}의 원리의 분석론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간단하게 지적한 셈입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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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09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무지 자세하게 써 주셨네요. 감사 감사 ㅜ^ㅜ

저 근데 이 단어 자체의 의미는 잘 모르겠네요
1. 직관의 공리, 2. 지각의 예취, 3. 경험의 유추들, 4. 경험적 사고의 요청들

툭히 예취라는 단어는 국어 사전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네요...헐.

balmas 2006-07-0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조금 복잡한데 ...
책을 좀더 읽어가다보면 이 항목들에 대한 설명이 나올 텐데요. 아닌가? 지금
회페 책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확인해드릴 수가 없네 ...

한 가지만 말하자면, "예취"는 영어로 하면 "anticipation", 곧 "예상" 또는 "선취"라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그러니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안나올 수밖에요 ... ^^;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를 써서 외국 용어를 번역하는 건 참 문제가 있죠.

어쨌든 위의 용어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좀 어려우니까
책에 이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그냥 그런 게 있나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는 게 좋겠네요. 나중에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읽든가
아니면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본격적인 해설서들을 읽으면 이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을 겁니다. :-)

비로그인 2006-07-0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종현 선생님의 순수 이성 비판이 나왔던데 본문을 읽지는 못하더라도 주석을 참고해봐야 겠네요 발마스 님 답변 감사드려요.
 

무영님의 질문

 

사정상 저번 스터디가 해체되고, 이번에 다시 [법의 힘]을 읽고 있습니다.
1부를 다 읽었는데요. 세번째 아포리아 부분이 되게 어렵더군요;
그래서 관련 질문 드립니다.

데리다는 정당한 결정의 긴급성 혹은 환원불가능성을 "'언어 행위들'에, 그리고 정의나 법적 행위들 같은 행위 일반의 수행적 구조에 귀속"(57)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진술문과 수행문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술문 역시 정확성이라는 의미에서는 정당할 수 있지만, 정의라는 의미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한 수행문은 오직 관습들, 따라서 다른 수행문들-묻혀 있든 아니든 간에-에 기초를 둠으로써 정의라는 의미에서 정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자신 안에 모종의 파열적 폭력을 지니고 있다."(57)

여기서 어떤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두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이 문장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모순되는 건 아닌지 헷갈리네요.

 

질문에 대한 답변

 

무영님의 질문의 초점은 마지막 단락에 있는 것 같군요.

"여기서 어떤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두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이 문장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모순되는 건 아닌지 헷갈리네요. "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둔다는 말은, 우선 행위의 결정은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지식의 체계, 규범적 원칙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령 규칙의 판단중지에 관해 말하는 첫번째 아포리아에서 데리다는 판사의 판결을 예로 들고 있죠.

판사의 판결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법전이나 판례를 단순 적용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책임 아래

법의 원칙에 대한 새롭고 자유로운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죠.

따라서 판결과 같은 언어행위는 이론적, 규범적 규칙이 아니라 다른 수행문들, 다른 언어행위들에만

의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데리다가 말하는 다른 수행문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죠. 하나는

창설적인 수행문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기존의 관습, 관레와 같은 것들이 있겠죠. 데리다가

보기에 이 양자는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구별될 뿐입니다. 이 양자는

이론적인 지식, 어떤  타당한 근거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론적인 법칙이나 진리와 달리

자기 자신의 권위 부여 구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논점은

혁명과 개혁, 또는 정초와 보존의 이분법적 대립을, 수행성의 관점에서 해체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혁명적인 것이든 관례적인 것이든 수행문, 수행적인 언어 행위는  어떤 진리나 공리,

불변적인 원칙에 근거를 둘 수 없으며, 결정 주체의 행위, 결정에만 의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지식이나 계산, 또는 법적 규범의 체계를 모두 거부하지는 않죠. 이는 무엇보다도

결정의 수행적 성격은 어떤 불변적인 원리에 근거를 둘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최악의 결정, 최악의

판단, 최악의 결과를 낳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새로운 어떤 것, 창설적인 어떤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감수해야 할 위험입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위험을 최대한

축소하는 길은  결정이 낳을 수 있는 위험한 결과들, 도착들에 대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숙고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죠.

정리하자면,  수행문의 정당성은 다른 수행문들에 의존한다는 말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

 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일관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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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lesas 2006-07-0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 드릴께요. 여기서 데리다가 진술문과 수행문을 분리시키는 가정(1)에서 출발해서,그 구분을 해체(2)하고 있기에 제가 좀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1)에서 데리다는 진술문의 사실성과 수행문의 정당성이 명확하게 분리된다는 전통을 따르다가도, (2)에서는 진술문의 사실성 또한 자체 안에 이 진술은 타당하다 라는 정당성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이거든요. 그래서 다음 장에서는 "진리는 정의를 전제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즉 어떤 법, 법적 규범이나 규칙이 진술적인 형태로 사실성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정의의 정당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정당한 결정의 수행성이란 곧 법적 규범과 규칙(더 이상 진술적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의 자기 해체와 동시적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매번 규칙과 규범을 재창설 해야만한다 라는- 요컨대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궁금하네요;

balmas 2006-07-08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무영님의 이해는 옳은 것 같습니다. :-)

cplesas 2006-07-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국이 어지러운데 주변에서 계속 책 질문만 하려니 속상하네요-

[법의 힘] 68페이지의 두 문장 입니다.

(1) "게다가 벤야민은 1921년에 이미, 근원적 악과 타락(벤야민에게 이는 언어가 표상으로 타락하는 것을 의미한다)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더욱더 표상/대의의 질서에 잘 저항하는 이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과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언제든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아무리 이 문장을 뜯어 봐도 이해되지 않네요 그러니까 데리다는 벤야민이 1940년에 사망했지만, 1942년에 가결된 나치의 유대인 학살 방안인 '궁극적 해결책'을 미리 사유할 수 있었다는 맥락에서 나오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다음에 연결되는 위의 문장은, 벤야민은 과 방법은 이라는 두 가지 주어가 한 문장 내에 있는 것 같아서요. 추측하면 이 문장의 뜻은 1940년에 벤야민이 죽었더라도~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만을 생각했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있다- 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가설을 지지할 수 있는 이유는 벤야민이 언어가 표상으로 타락하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 같고요. 그래서 "근원적 악과 타락에서 ~ 잘 저항하는"은 [벤야민이 아니라]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을 수식하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수고스럽지만 확인 좀 부탁드릴께요.

(2) "우리가 그의 담론의 지속적인 논리를 신뢰한다면, 여러 징표들로 미루어 볼 때 벤야민은, [1942년에 채택된] '궁극적 해결책'이었던 게 될 이 표상 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담론 및 문학, 시가 불가능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은 제가 벤야민의 언어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대목인데요. 앞 문장에서는 궁극적 해결책이 표상적 언어에 저항한다 라고 정의했고, 그래서 "이 표상 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이름들의 언어 및 명명의 언어가 도래할 수 있다는 맥락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게는 궁극적 해결책이 타락한 언어(표상적 언어)와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게 되네요; 아니라면 아렌트가 그랬듯 악이란 "사고의 결여"라고, 그래서 생각 속에 떠올릴 수도 없는 무엇이기에 표상 불가능하다 라고 보아야 하는 건지요. 발마스님은 궁극적 해결책이 구체적으로 무슨 사건인지 역주에 달아놓으셨지만, 이것이 데리다가 벤야민을 읽는 과정에서 특히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관련해 어떻게 파악되고 있는건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 또 좌절. OTL


balmas 2006-07-1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조금 있다가 답변해드릴게요. :-)

balmas 2006-07-1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영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

(1)번 질문은 문장 전체의 주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집약되는 것 같은데, 이 문장 전체의 주어는 “방법은”입니다. 따라서 무영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겠죠.

(2)번은 사실 어려운 문제를 잘 파악한 질문이군요. 어쩌면 이 문제가 이 책에서 데리다가 제기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데리다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자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다른 글들에 담겨 있는 벤야민의 사고는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추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것은 나치가 실제로 추진하고 집행했던 역사적인 궁극적 해결책과 다른 것이고 가장 대립적인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모든 인간적인 사고와 판단의 지평을 초과하고 심지어 대학살, 대대적인 폭력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시도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것 역시 최악의 것과 공모할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데리다가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지시하는 것을 나치가 추진한 실제의 역사적 정책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타락한 언어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죠. 하지만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것을 역사의 타락, 인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방법, 예컨대 혁명적인 폭력이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일반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표상 불가능한 차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죠.

cplesas 2006-07-1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음,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 문장은 좀 수정될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2) 그렇다면 이 '공모'를 어떻게 '선별' 하느냐가 문제되는 거겠군요.. 그래도 이런 선별은 궁극적 해결책을 표상하거나 표상하지 않거나 로 단순 수렴될 행위는 아니니까, 제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다는 것에는 큰 변화가 없네요;;

balmas 2006-07-18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은 문장이 너무 복잡하죠? ^^; 한번 더 생각해보죠.
(2)가 선별의 문제라는 건 옳은 지적입니다. 어려운 문제지요. :-)

cplesas 2006-07-2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감탄으로 읽어가고 있습니다. ^-^

다름 아니라, 혹이 발마스님이 법의 힘 관련해서 남겨놓은 코멘트가 있을까 해서 뒤적였더니, 문장상이나 번역상에 약간 문제되는 부분이 있으면 리플로 올려주시라고 하길래, 물론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얘기지만 뒷북삼아 책도 읽으면서 찾아낸 거 걍 올립니다.

 

"벤야민의 글이 부분에서 괄호 속의 문장은, 전쟁-평화의 쌍에서, 전쟁 역시 비자연적인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평화의 의례라는 점을 강조한다. (91)"

- 벤야민의 글의 이 부분에서 ?

분명 우리가 사형을 공격할 때, 우리는 여러 형벌 중 중 하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기원, 법질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95)

- 중 자가 두 개 -_-

경찰 다만 그 집행자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는 법을 경찰 자신이 생산하도록 인도해온 것 바로 근대의 정치·기술적 상황에 처한 근대 경찰이다. (101)

- 선생님 이건 제가 몰라서 그러는데, 문법상 하자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이해에 되게 불편하다면 제가 좀 글을 모르는 건가요; 앞단어의 경찰은 -> 경찰이 가 된다면 더 매끄러운 듯 싶어서요-

 

참 그리고, [법의 힘] 다음으로 [에코그라피]를 읽으려고 하는데

제가 알아본 인터넷 서점은 죄다 품절이더군요ㅠ

같이 읽는 분이 책이 없으셔서 그런데

어디에 재고가 남았는지 혹시나 알고 있으신가요?

(민음사에 또 멜 보내야되나...)


balmas 2006-07-2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잘하셨어요.
지난 번 2쇄 찍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대충 몇 가지 보이는 것만 고쳐서
냈는데, 다음 번에는 좀더 꼼꼼하게 읽고 고쳐서 내야겠어요. :-)

리브로나 몇몇 서점에서는 계속 팔았는데, 이제 정말 다 떨어졌나보네요. -_-

cplesas 2006-07-2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독립 선언들]만 읽으면 [법의 힘] 다 읽겠네요!!
책을 음독해본 건 이번이 첨인 거 같네요;

후-기를 읽고 나니, 궁극적 해결책과 관련해 발마스님이 남겨주신 리플이 다시금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하여간 엄청난 책이더군요-

그렇지만 어쨌든 교열될 문장들은 올려야지요-

반대로 예컨대 어떤 슈미트는 (119)
-> 어떤?

나치즘은 자신의 한계인 '궁극적 해결책'으로 논리적으로 귀결되기 때문에(130)
-> 으로, 으로

balmas 2006-07-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수고했네요. ㅎㅎㅎ
지적해준 대목들은 나중에 고쳐보죠. :-)
 

매의 눈님이 방명록에 몇 가지 질문을 남겼는데, 질문들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제대로 답변하기가

어렵군요. 그래서 대신 한 10년 전에 제가 그 질문들과 비슷한 주제로 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진 데다가, 여러 모로 생각이 숙성되지 못했을 때 쓴 글이라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얼마간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 글을 퍼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공적인 논의나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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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캉귈렘-스피노자

[고대 대학원 신문] 1997. 5.



1. 잊혀진 물음: 역사유물론은 과학인가?


  80년대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과학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그들에게서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전제였으며, 문제는 ‘부르주아’ 과학들’(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 특히 인문, 사회과학들에 대한 그것의 우월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이 과학적 무기를 어떻게 ‘실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교조적인 정식화에 따르자면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적용’인 것처럼).반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잊혀진 담론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자명성만이 이 사태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제시될 뿐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아마도 거의 대칭적일 두 개의 자명성을 목격하게 된다. 다만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한 자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비과학성 또는 이데올로기적 본성에 대한 자명성일 뿐이다. 이러한 대칭성의 경험은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옹호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가시기는 하지만 끝내 외면해 버릴 수는 없는, 당혹감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은 위대한 비대칭성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적 독재이지만, 또한 그것은 모든 계급적 착취와 지배를 폐지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로 삼고 있으며(특히 발리바르, 「"공산당 선언"의 정정」, {역사유물론 연구} 참조),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은 모든 부르주아 인문, 사회과학들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비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회고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잊혀진 물음(또는 ‘억압된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이데올로기들(소위 ‘속류’ 정치경제학과 ‘과학적’ 정치경제학 모두를 포함하는)의 이데올로기적 본성을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 또는 비대칭적 과학이라면, 하지만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었다면, 이러한 본성과 경험, 원칙과 사실 사이의 괴리는, 그러한 괴리 자체의 설명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본성에 대한 물음을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은 과학, 더욱이 하나의 특권적인 과학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2. 역사유물론의 특수성: 토픽적 과학


  역사유물론이 하나의 과학인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어떠한 과학인가라는 또다른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역사유물론의 과학성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물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과학들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기준으로는 역사유물론에 대해 충분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유물론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학적 기준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식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자의 경우는 모든 과학들에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학이나 물리학 또는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필연적으로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엄밀한 의미에서 물리학이 ‘경험적인 것의 수학화’(A. Koyré, Etudes d'histoires de la pensée scientifique 참조)를 통해 성립될 수 있었다고 해서, 다른 과학들에게까지 그러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으며,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은 물리학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내적 기준에 따라 구성되고 분류되는 것이다(푸코의 인간과학들의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나 그 이전의 캉귈렘의 연구들은 과학적 기준들의 상대성을 보여주는 연구들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을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자와 같은 경우는 분명 역사유물론에만 고유한 현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전자의 경우처럼 보편화될 수 있는 성격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 모든 개별과학들의 성립이 과학철학 또는 인식론(바슐라르나 캉귈렘의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 영미 또는 독일적 전통에서 인식론은 인식주체의 심리적(또는 초월론적) 활동의 문제이지만,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에서 인식론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적 활동의 문제이다)의 일반적 원칙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역사유물론은 그 자체의 내재적인 과학적 기준을 통해 일반적인 인식론적 원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하나의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가장 일관되게 주장한 사람은 알튀세르였다. 알튀세르는 초기에는 세 개의 대륙(수학, 물리학, 역사과학)의 비유를 통해서(예컨대 알튀세르,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그리고 이후에는 역사유물론이 정신분석학과 함께 일종의 토픽적 과학(정확하게 말하자면 “분파적, 갈등적 과학”)을 구성한다는 테제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부단하게 주장해 왔다. 알튀세르는 우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 과학”이자 “분파적 과학”으로서 이들의 역사는 “언제나 재발되는 분열들로 표시”(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알튀세르와 라캉}(공감, 1996) 17쪽)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과학들의 역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 과학들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기존의 이론들 내지는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공격이 가해지다가, 이것들이 점차 수용되면서부터는 바로 그 과학들 내부로 침투해서 그 과학들의 과학적 핵심을 ‘수정’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수정주의적 경향들을 통해 결국은 그 과학들 자체가 갈등적 분파들로 분열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불가피한가, 그리고 그러한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우리가 과학들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알튀세르는 전자의 질문에 대해 그러한 분열과 갈등은 바로 그 과학이 분석하는 대상이며 동시에 그 과학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현실 자체가 갈등적이라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계급사회와 같은 필연적으로 갈등적인 현실 속에서는 어떤 위치에서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명한 확인이 있다. 사람들은 갈등 자체 속에서 일정한 입장 ... 을 취한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이러한 갈등적 현실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 20-21쪽.)

  그렇지만 아직도 결정적인 질문이 한 가지 더 남아있는데, 바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의 필연성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유물론이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바로 갈등과 분열 때문에,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적 객관성을 얻는다고 말해야 한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의 갈등성이 자신의 과학성, 자신의 객관성에 대하여 구성적이라는 사실”(위의 글, 20쪽)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우리에게 긍정보다는 당혹을 안겨다 준다. 갈등성이 과학성과 객관성에 ‘구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분파적 과학이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모델 또는 원칙을 다른 과학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두 과학들은 그야말로 유별난 과학들(이것의 의미는 ‘사이비과학’에서 ‘메타과학’까지 다양하게 진동한다)인가?

  알튀세르의 이러한 역설적 주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또는 과학적 활동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야말로 이론적 갈등의 원천이며, 따라서 갈등성과 객관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3.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개념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캉귈렘의 역설적인 개념, 즉 과학적 이데올로기라는 개념(Georges Canguilhem, “Qu'est-ce que l'idéologie scientifique?”, in 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 Vrin, 1988)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것이 역설적인 개념인 이유는 흔히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여기서는 서로 결합하여 모순적으로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념에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이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캉귈렘에 따르면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외재적인 방식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에 내재적이며, 과학이 갈등적이라면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서만 발전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데올로기 또는 오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전(前)과학적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이다(또는 전과학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

  전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적인 천문학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천동설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어떤 과학이 인식론적 절단(coupure)을 통해 형성되면서 폐기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에 비해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과학의 성립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다른 과학의 성립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캉귈렘은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의 다양한 진화론을 들고 있는데, 일례로 허버트 스펜서는 태양계와 동물 유기체, 생명종들, 인간, 사회, 언어 등 모든 것이 연속적인 미분화를 통해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일반화된 진화법칙을 설정한다. 이러한 일반화된 진화법칙의 문제는 한정된 영역에서 설립된 진화의 개념과 그것의 논증과 실험방식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차용해 온 과학성의 규준들을 넘어 탈선”한다는 점에 존재한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후에’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다른 과학의 규준과 위신을 존중하고 그것들을 모방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종교나 마술, 허위과학, 요컨대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한정된 영역에서 타당한 규준들을 일반화하여 총체적 지식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야말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판별적 특징이 되는 셈이며,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그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새로운 과학 또는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구성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전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는가? 또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비판되고 극복될 수 있는가? 요컨대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점에서 불가피하며, 그것은 과학적 활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두 가지 상이한 영역에서의 답변들을 요구한다. 그 하나는 과학사적인 시간성, 또는 과학적 활동에 고유한 역사성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학적․사회적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전화의 노력, 즉 고유하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윤리적 능동화의 운동에 대한 것이다.


4. 상징적 질서의 아포리아들


  첫번째 문제는 철학적 구조주의(알튀세르, 푸코, 라캉)의 고유한 기여로서 구조적 역사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주체와 역사를 제거했다는 통속적 비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이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가장 심원한 역사성에 대한 개념을 가공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들의 노력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의 역사화에서 출발한다. 칸트는 초월론적 주체의 선험적 활동(통각, 선의지)을 통해 모든 인식과 실천의 가능성이 정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초월론적 주체의 활동을 역사성을 지닌 초월론적 구조, 이를 테면 상징적 질서(라캉)(또는 담론의 질서,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전위시킨다. 이 때 상징적 질서는 모든 인식과 의미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초월론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하거나 불연속적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적 초월론이라고 할 수 있다(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이를 “역사적 선험”(a priori historique)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초월론적 구조가 역사화될 경우 진리의 상대화, 지식의 비객관화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식의 기준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면, 인식의 객관성이나 진리의 관념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적 연구들은 초월론적 구조들의 불연속성, 또는 지식체제의 정상화(normalisation) 기능들에 대한 과도한 강조 때문에, 일종의 상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인식론적 단절’ 개념」, {이론} 13호 참조).

  다른 한편으로 초월론적 구조의 역사화는 “주체” 개념의 의미 변화를 동반한다. 즉 이제 주체는 모든 인식과 활동의 토대로서 주권적 주체(subjectum) 또는 초월론적 주체가 아니라, 의미의 근거로서 상징적 질서 속에 필연적으로 포섭되어 있는 예속적 주체 또는 ‘분할된 주체’(라캉)가 된다. 하지만 예속적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되는 방식은 강제적이거나 물리적 폭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예속적 주체는 인식과 행동의 자율적 주체로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된다(특히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따라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근대 철학과 더 나아가서는 근대성 일반의 원리로서 자율적 주체의 역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율적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징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편입은 동시에 지배구조의 재생산 메커니즘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율적 주체가 모든 해방운동의 근본적인 전제로 간주되기 때문에 더욱 더 치명적인 역설이다.


5. 역사적 초월론을 넘어서: 과학-해방-교통


  이렇게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두 개의 심각한 아포리아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아포리아들 각자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계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순의 운동이다. 앞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토픽적 과학에 대한 테제가 하나의 역설, 또는 하나의 모순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알튀세르에게서 토픽적 과학의 과학적 객관성은 다름 아닌 그것의 내재적 갈등성과 그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캉귈렘의 과학적 이데올로기 개념 역시 그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초월론의 아포리아들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이러한 모순의 운동을 작동시킬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모순의 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좀더 분명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대칭적이라는 것, 또는 과학 그 자체가 정상화(normalisation)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과학적 진리/오류의 문제가 권력의 정상화 기능의 하위범주로 포섭된다는 것은 특히 {담론의 질서}에서의 푸코의 테제이다. 이 때문에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은 상대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의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기준 속에서만 인식되고 판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절단(coupure)과 단절(rupture) 내지는 개조(refont) 사이의 구분이 중요한데, 절단이 과학 자체의 설립의 사건을 의미한다면, 단절 내지는 개조는 과학 내부의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귀적 비판(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최초의 과학적 개념에 내재한 모순의 한 편향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은 항상 회귀적이다)과 전화의 작용을 의미한다(이것은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개념을 보완하고 정정해 주는 것이다. Balibar, “Coupure et refont”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참조).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의 절단을 통해 어떤 과학이 설립되는 사건은 하나의 진리의 발생사건이며, 이러한 진리는 개념 속에 물질화된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 역사유물론은 다른 어떤 과학들(이를테면 그 이전의 정치경제학들)에 의해서도 평가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자신에 고유한 진리의 공간, 과학적 객관성의 영역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장 속에서 그것들을 소재로 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비판하면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자체 내에 갈등과 모순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이후의 발전 속에서 각종의 경향들이 발생하게 되며, 이에 따라 최초의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적 계기들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적 비판과 개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조의 운동은 여전히 최초의 절단의 사건이 성립시킨 진리의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따라서 절단이라는 사건, 또는 특정한 과학적 진리의 설립 자체는 역사적으로 불연속적이지만, 이러한 과학의 역사적 구조 내부의 과정은 전진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지식의 객관성과 지식의 발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의 내재성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과학의 초월론적 구조 내에서 이데올로기화와 탈이데올로기화의 대립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Balibar, “Etre dans le vrai? Science et la vérité dans la philosophie de Georges Canguilhem”,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따라서 우리는 단지 역사유물론이나 정신분석학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의 운동 자체가 내재적인 갈등을 자신의 객관성의 조건으로 한다는 테제를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역사유물론에 고유한 범주들(모순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유물론이 과학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토픽적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은 단지 과학의 이론적 영역 안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사회적인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의 전화를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 또는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상상(imaginatio)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만이 아니라, 욕구(appetitus)의 필연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복합적인 정서들의 모방(affective imitation)의 메커니즘(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동일화(identification)와 유비적인)의 문제를 제기한다(이에 대해서는 {윤리학} 3부 전체를 참조하고, 이에 대한 주석으로는 E. Balibar, “Spinoza, l'anti-Orwell―Le crainte des masses”, in Le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참조). 즉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계급적 조건들에 따른 인식(또는 오히려 의식)의 분할의 문제이면서, 인식과 실천에 수반되는 욕망과 공포,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등과 같은 정서적 효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항상 정서적 효과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 사물에 대한 단순한 합리적 인식만으로 그 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자동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으며, 더 나아가 그것들은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방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서 작용, 정서들의 모방의 문제는 모든 사회운동과 이데올로기들(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의 은폐된 동력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초적 장애물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인식과 실천은 단지 집단적 또는 사회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관개체론적인 관점, 즉 개인들에 내재하면서 또한 개인들을 초과하는 관계들의 인식과 전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삶의 유형들(수동적/능동적)과 결부되어 있는 인식의 유형들(상상/과학적 인식/과학적 인식의 개인적 전유)의 문제로, 그리고 두 가지 유형들의 상호전화의 필요성의 문제로 분석했다(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알튀세르의 현재성}(공감, 1996) 참조). 결국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인식의 조건과 삶의 조건의 동시적인 전화의 과학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그 자체의 존재 조건들의 전화를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특수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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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7-0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97년이면, 연대항쟁 직후네요.

balmas 2006-07-03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셈~

에로이카 2006-07-04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렇겠지요? ^^), "갈등성이 과학성과 객관성에 ‘구성적’이라는 것"이라는 구절을 보며 떠오른 건데요... 옛날에 철학 세미나할 때, 그런 얘기들을 했던 게 기억나요... "변증법 - 그것이 사유의 방식이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이건 - 그 자체도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것인가"... 지금 기억하기로는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당시 우리들의 작은 머리통 속에서는 나올 수 없었는데요... (요즘은 아예 이런 질문 자체를 하지도 않으니, 뇌의 크기가 더 줄어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존재 자체의 속성의 일부라면, 그 존재는 대체 무언가요? (이게 철학적으로 말이 되는 질문인 지는 저도 전혀 모른답니다... 모순?)

그리고 또, 감히 여쭤보는 거지만, 이 잘 쓴 멋진 글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지금은 생각이 바뀌셨다고 하는 지도 궁금하네요.... 힘들고 오랜 공부를 날로 훔쳐먹을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여... 좀 죄송한 질문입니다... ^^

balmas 2006-07-0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에로이카님, 우문이 아니라 현문이고 난문입니다. ^^;;
사실 몇 가지 답변을 썼다가 다시 지웠습니다.
특히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언젠가 좀더 상세하게 논의해볼 기회가 있겠죠.
괜히 사람 궁금하게 만든다고 비난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
 
 전출처 : balmas님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singular라는 말은 자연/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죠. 그것은 자연 사물들,

유한한 실재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적용하는 단어로는 "unicus", 곧 "유일한"이라는 게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신의 유일성, 유일한 신 등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다"는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모델의 여러 가지 사례, 또는 표본에 대해

이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 우표는 지구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우표다"

라고 말할 때, 이런 의미로 쓸 수 있겠죠. 이 경우에 이 우표의 유일성은 우표의 본성에서

따라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우연적인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우표는 본성상

유일한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원인들의 결과(다른 우표들은 모두 화재로 불타

버렸다든가 하는)로 유일한 것이죠. 

반면에 신 또는 자연의 유일성은 신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결과, 또는

스피노자 자신의 용어법대로 하면 "특성"(proprietas)으로서의 유일성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유일성"이라는 것은 그밖의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또다른 신, 또다른 자연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유일성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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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6-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내가 미친 건가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 같아요^^ 착각인가

balmas 2006-06-30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니 미치긴 왜 미치십니까?
잘 이해하셨을 것 같은데 ... ^^;;
 

이 글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내는 [철학논구]라는 학술지에 실린 글입니다.

[철학논구]는 사실 뭐 엄밀한 의미로 보면 학술지라고 하기는 좀 어렵고,

대개 석박사 학위 논문의 요약문을 많이 싣는 간행물이죠.

실질적인 학술지는 [철학사상]이라는 다른 학술지구요.

이 글은 제 학위논문의 서론과 결론 내용을 대충 요약해서 만든 글입니다.

원고 마감일을 깜빡 했다가 하룻 저녁에 부랴부랴 만들었으니,

사실 독립적인 논문으로 볼 수 없는 글입니다.

그런데 왜 이걸 올리냐구요? 어떤 학생이 이 글을 돈 주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검색해보니까 KSI라는 국내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3천원 넘는 가격으로 팔고 있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혹시 비싼 돈 주고 다운 받을까봐

겁나서 여기 올립니다.

돈 주고 다운받지 마세요. ^^;

 

 

철학논구, 33권, 단일호, 시작쪽수 83p, 전체쪽수 26p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Ⅰ.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전통적 해석: 범신론


다른 모든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해석의 역사, 그 영향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 해석의 역사, 영향사 안에서만 식별되고 존립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연구, 더욱이 그의 체계를 포괄적으로 재구성해보려고 시도하는 연구는 반드시 그 해석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평가를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연구가 주장하는 관점의 독자성은 사실은 주관적인 오해와 착각에 머무르거나 아니면 이전에 제시되었던 이러저러한 해석을 진부하게 되풀이하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이 논문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을 제안하면서,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이라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해석의 흐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우리 논문의 본질적인 일부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곧 스피노자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인격적인 초월신 개념을 거부하고 그 대신 자연 중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 신을 동일시하는 철학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범신론pantheism”이라는 용어를 고안하고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규정한 것은 18세기 초 영국의 종교개혁가였던 존 톨랜드John Toland였지만1), 이러한 규정은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프리트리히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와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의 논쟁을 통해 철학사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다.2)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학 일반과 동일시하고 다시 이를 기계론적 숙명론/허무주의/무신론과 동일시함으로써, 구원을 위해서는 철학이 아닌 신앙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철학을 활용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야코비의 저서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독일 철학의 중심부로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야코비가 규정한 스피노자의 범신론과의 대결은 이후 독일 관념론의 중심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범신론으로서의 스피노자 철학이라는 관점은 독일 관념론의 영향력에 편승하여 19세기 이래 서양 철학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3)

범신론적 해석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스피노자 연구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 이론적 영향을 상당히 상실했다. 범신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내재적이고 엄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헤겔을 비롯한 몇몇 대가들의 (얼마간 편파적인) 독해에서 발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영향력의 쇠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여전히 대중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데다가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역량론적 관점은 전체적으로 볼 때 범신론적 해석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형성해왔기 때문에, 역량론적 해석의 이론적 입장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범신론적 해석의 주요 특징을 검토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범신론적 해석은 세 가지의 이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실체의 부동성

범신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실체를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절대자에 대한 사변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곧 자신과 다른 타자들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생산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 산출되는 자기원인으로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순수한 실정성positivity의 개념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실체를 절대적으로 실정적인 존재자로 제시함으로써 동시에 그 대가로, 실체를 아무런 운동도 인과작용도 수행하지 않는 정태적 존재자로 간주하게 된다. 운동은 변화를 상정하며 변화는 타자성과 부정성을 전제하고 있는 데 반해, 이러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런 타자성과 부정성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는 결국 실체를 정태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면서도 아무런 운동, 아무런 변화도 수행할 수 없는 부동적이고 불활성적인 존재자라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4)


2. 유출론적 체계인 스피노자 철학

범신론적 해석은 이처럼 실체가 태초에 정립된 부동적인 절대자이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또한 유출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한다. 이미 절대적으로 완성되고 충만한 실체가 존재하므로 남은 것은 이러한 실체로부터 내려오는 존재론적 하강의 운동뿐이라는 것이다. 가령 헤겔은 󰡔윤리학󰡕 서두에 나오는 실체(자기원인), 속성, 양태들에 대한 정의는 이러한 하강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순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곧 자기원인인 실체가 절대적으로 충만한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주관적 관점(따라서 이미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고 부차적인 관점)을 지칭하고, 양태들은 다시 이것들보다 훨씬 더 존재론적인 실재성을 결여한, 사실은 거의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들을 나타낸다.


3. 양태의 비실재성과 주체성의 부재

이처럼 양태들이 존재론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무런 주체성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비롯한 개별 존재자들은 자유는커녕 실재성을 박탈당하고 만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주체성이 부재한다. 우선 실체는 내적 부정성의 계기를 결여한 부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인간들은 자연의 필연적 질서의 일부에 불과하므로 자유의 가능성을 부정당하고 주체성도 결여하게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은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실체의 일원론을 통해 극복하려는 이론적 시도의 산물이지만, 데카르트가 확립해 놓은 주관성의 철학을 거부한 대가로 능동성과 자유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5)



Ⅱ. 범신론에서 역량론으로: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한 경향


스피노자 연구의 역사에서 20세기 후반은 매우 뜻깊은 시기로 평가할 만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피노자 저작의 고증본 전집들이 출간되면서6) 왕성하게 전개되었다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거의 고사 직전에 이르렀던 스피노자 연구는 1960년대 이후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나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 같은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이 1968년-69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잇달아 스피노자 연구에서 한 획을 긋는 대작들을 출간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이들은 각자 상이한 이론적 스타일을 지니고 있고 연구 주제에서도 차이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7), 󰡔윤리학󰡕을 비롯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같은 성숙기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독해의 전통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선구적인 작업은 1980년대 이래 좀더 심화된 문헌학적ㆍ분석적 연구들로 계승되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스피노자 고증본 전집의 출간8)의 이론적 촉매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범신론과 대비해 볼 때 이들의 이론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역동적 원인인 실체

우선 이 관점은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를 부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범신론과 달리, 실체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는 󰡔윤리학󰡕이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잘 드러난다. 더욱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1부 정리 16이나 신의 본질과 신의 역량을 동일시하는 1부 정리 34에서 신 또는 실체의 동역학적 본성은 좀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범신론적 해석은 관념론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역동적인 실체의 철학인 스피노자 철학의 잠재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의 발로이자 체계적인 왜곡이라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9)


2. 유한 양태들의 존재론적 근거인 실체의 역량

그러나 이러한 신의 절대적 역량 때문에 양태들, 특히 독특한 실재들로서의 유한 양태들은 아무런 내재적 역량이나 능동성을 지닐 수 없는 것 아닌가? 범신론적 해석은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유출론 철학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들뢰즈, 마트롱, 마슈레 등과 같은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를 유출론의 철학자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실체와 속성, 양태 사이에 상호 외재적인 관계가 성립해야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며, 그런 한에서 실체와 외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양태들은 실체 안에 존재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실체가 절대적인 인과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유한 양태들의 능동성이나 인과적 역량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의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한다. 가령 우리가 이 논문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루게 될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표현주의”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실체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역량을 아무런 제약 없이 표현하는 것이며, 각각의 양태들은 이러한 실체의 본질을 양태의 수준에서 이어받아 다시 표현한다. 곧 양태들은 각자 원인으로서 어떤 결과들을 생산해낸다(E I, p.36). 양태들이 지닌 이러한 능동성, 원인으로서의 역량은 그것들이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존재론적으로 의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의 절대적 역량, 원초적인 자기 표현은 양태들의 능동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 들뢰즈를 비롯한 역량론적 주석가들의 관점이다.


3. 윤리적ㆍ정치적 실천의 기초로서 역량

유한 양태에 속하는 인간의 윤리적ㆍ정치적 실천 역시 이러한 실체의 절대적 역량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범신론적 해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개별 실재들은 유한한 양태라는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유한) 양태는 다른 것 안에 존재하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된다는 점에서(E I D5) 존재론적으로 비자립적이다. 하지만 범신론적 해석에서 생각하듯이 존재론적 비자립성이 실존과 행위의 차원에서 양태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의 여지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존재론적 비자립성, 의존성은 양태들의 역량의 원천 자체가 된다.

들뢰즈와 마트롱을 비롯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연구자들은 스피노자의 저작, 특히 󰡔윤리학󰡕 3, 4, 5부 및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등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체계적으로 답변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의 논의의 요점은 인간은 자연적인 실존 조건 속에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원초적으로 부여받은 본질, 곧 자기 보존의 역량(스피노자의 “평행론” 또는 심신 동일성론에 따를 경우 이는 신체의 행위역량이면서 동시에 정신의 인식역량이다)에 의거하여 이러한 조건을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주석가들은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기쁨이라는 정서와 이러한 역량을 능동적인 역량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이라는 개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1960년대 말 이후 새롭게 전개된 스피노자 연구는 이전의 범신론적 해석에 맞서 스피노자는 범신론 철학자가 아니라 “역량의 철학자philosophe de la puissance”10)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들의 입장을 “역량론puissantialisme”으로 부르고자 한다. 역량론이라는 명칭은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인 앙드레 토젤André Tosel이 최근 한 논문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는 근대 초기 신학-정치론의 구도를 소묘하고 이러한 구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창성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입장을 역량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역량론은 신인동형론에 기초를 둔 인격신 개념을 해체하면서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 개념을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11) 토젤은 역량론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은 1960년대 말 이후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량론적 해석은 지난 30여년 동안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 걸쳐 매우 탁월한 이론적 성과를 배출했다. 게루와 들뢰즈, 마트롱 같은 역량론적 해석의 창시자들 이외에도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모로, 안토니오 네그리12) 같은 후배 연구자들이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이들의 작업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확장해왔으며13), 90년대 이후에도 재능 있는 신세대 연구자들이 계속 이들의 연구를 이어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14)


Ⅲ.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몇 가지 중요한 이론적 난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자신이 공언하고 있는 것과 달리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성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하게 지적해두겠다.


1. 초월성의 위험

역량론의 첫 번째 문제점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역량론은 범신론에 맞서 실체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 절대적인 역량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정리 16). 따라서 역량론이 󰡔윤리학󰡕 1부에서 자기원인(정의 1),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정의 6과 정리 11), 실체의 역량(정리 16과 정리 34) 등에 주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자기원인에서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원인이 된다고 할 때, 이 자기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러한 자기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제어하는 존재자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자기원인인 실체의 행위가 자의적이지 않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실체의 행위의 필연성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실체의 본질을 절대적 역량에서 찾을수록 더욱더 심각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체가 절대적인 역량이라면, 따라서 실체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이라면, 실체의 행위는 그만큼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체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종의 초월적 존재자가 아닌가? 스피노자의 실체, 스피노자의 신은 외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월적인 신이 아닌가? 이러한 신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 또는 데카르트의 신과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질문에 정확히 답변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피노자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그것의 용법이 스콜라철학과 데카르트의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해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실체의 역동성, 실체의 절대적 역량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실체와 속성들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역량론자들은 속성에 대한 주관적 해석가들과 달리 속성의 객관적 실재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표현과 구성의 관계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실체를 구성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표현과 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속성은 어떻게 실체를 구성하면서 또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가? 들뢰즈나 마트롱 같은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실체의 표현성, 곧 실체의 역동성을 구성적 측면보다 더 중시한다. 그러나 이 경우 실체의 자의성, 실체의 초월성이라는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2. 스피노자에게 인과관계는 이중적인가?

실체 개념에 대해 제기되는 이러한 의문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제기될 수 있다. 역량론자들은 실체에 대한 양태들의 존재론적 의존성이야말로 양태들이 지닌 능동성, 원인으로서의 역량의 근거를 이룬다고 강조한다. 1부 정리 18(“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이나 정리 25의 따름정리(“신은 자기원인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또한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는 정리 36(“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등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태들이 실체에 의존하는 존재론적 양상은 어떤 것인가? 어떤 관계,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양태들의 존재론적 의존성이 양태들의 실천적 역량을 낳는 근거가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상당히 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1부 정리 18에 나오는 두 가지 원인 개념, 곧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개념에 의지하여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을 이중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먼저 신과 양태의 본질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인과성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 양태들 사이에, 양태들의 실존 사이에서 성립하는 타동적 인과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가 양태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동적, 갈등적, 예속적 관계의 존재론적 뿌리를 이룬다면, 전자는 이러한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 기초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한편으로 너무 편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우선 이 경우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과 데카르트의 인과성 사이의 차이점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데카르트 역시 피조물들의 행위의 제일 원인은 신이며 피조물들은 신의 역량에 의해서만 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와 달리 물체들의 내재적인 인과 역량을 부정하고, 이를 오직 신에게만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피노자의 양태들, 특히 연장에 속하는 물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과 역량을 지닐 수 있는가? 신과 양태적 본질들 사이에는 내적 인과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순환논법 그 이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곧 양태들 사이의 작용 인과성)을 구분하고 양태들의 본질과 실존을 분리하는 역량론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답변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갈릴레이-뉴턴이 확립한 근대 물리학과의 이론적 관계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운동의 상대성은 순전히 타동적인 인과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에 기초를 둘 경우 운동의 동역학적 원인을 사고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나 󰡔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에 나오는 자연학에 관한 논의를 꼼꼼히 검토해보면, 스피노자는 정확히 운동의 상대성 개념에 기초를 둔 동역학적 인과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학과 단절하는 운동의 상대성 또는 외재적 인과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전제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임에도, 역량론적 관점은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난점은 개체의 개체성에 대한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들뢰즈는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외에 또다른 본질인 “역량의 정도”(신의 본질의 양태적 표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곧 전자가 본질의 양적 측면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질적 측면을 (또는 전자와 후자는 각각 외연량과 내포량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양자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들뢰즈는 “양태의 본질은 하나의 관계 속에서 영원하게 표현된다” (Deleuze 1969, p.191)고 말하고 있을 뿐, 어떻게 본질과 관계 사이에 서로 상응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3.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실체 개념에 대해, 또한 실체와 양태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역량론이 보여주는 모호성은 인간학과 윤리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점만 지적해두자.

첫째, 역량론적 해석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역량론은 이러한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 역량의 증대를 나타내는 기쁨이라는 정서와 적합한 인식의 일종인 “공통 통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점이다. 문제는 그보다 좀더 기초적인 데서 생겨난다. 우선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동과 수동 개념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피노자에서 능동과 수동은 각각 적합한/전체적 원인과 부적합한/부분적 원인으로 정의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원인의 두 양상 내지 두 측면을 가리키며, 유한 양태들은 외부 물체와 맺고 있는 변용하기/변용되기의 관계를 통해 역량을 획득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는 수동=변용되기, 능동=변용하기가 아니며, 능동과 수동은 변용을 조직하는 두 가지 관계의 양상들이다.

하지만 역량론자들의 가정에 따르면 양태들은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인과성을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으로 분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귀결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수동력은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곧 그들이 변용=수동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변용되기=수동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렇다면 능동은 외부 실재들과 아무런 변용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 또는 외부 실재들로부터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다만 우리만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외부의 규정 없이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이 경우 능동성은 자연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남 또는 그것을 초월함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동성은 스피노자가 가상 중의 가상으로 간주하는 “자유의 가상”과 어떻게 다른가? 이처럼 능동과 수동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서도 불명료함과 애매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둘째, 또한 이 때문에 역량론은 왜 스피노자에게 자유는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역량론적 해석에 따르면 각각의 개인들은 관계와 독립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개인들의 자유 역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 물론 각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촉진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자유가 각 개인의 자유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59의 주석에서 “굳건함animositas”과 “관대함generositas”을 정신의 힘, 곧 정신의 능동성의 본질적인 요소로 제기한 이래, 각 개인의 자유와 지복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지복을 수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량론적 관점에서는 왜 자유와 지복이 이러한 관계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지 충분히 해명하기 어렵다.



Ⅳ. 관계론적 해석의 요소들


이처럼 역량론적 해석은 그것이 이룩한 업적과 여러 가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러 가지 해석상의 난점들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난점들은 단지 이런저런 이론적 보충이나 정정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것들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 철학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으로서 역량론이 지닌 내적 한계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역량론이 이룩한 이론적 성과를 보존하면서 그것이 지닌 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역량론과 또다른 해석의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이러한 관점을 관계론이라는 명칭 아래 제시해보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제시한 논점들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우선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실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원인과 실체, 속성, 양태 및 인과성과 개체성 같은 스피노자 존재론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관계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1) 스피노자 존재론의 탈실체론적 성격: 자기원인, 실체, 속성

스피노자에서 존재하는 것은 신이라는 유일한 실체일 뿐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이 유일한 실체의 양태들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를 실체론의 철학자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반대로 이는 근본적인 탈실체론적 (반실체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테제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오직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체는 하나의 존재자로 간주될 수 없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 또는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실체론의 공통적인 논점, 곧 존재하는 모든 것(그것이 개체이든, 유한한 실재이든)은 실체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립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원인은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탈실체론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전통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실체론적 성격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간주되어 왔다. 범신론적 해석은 이 개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실체가 부동적이고 실정적인 절대적 일자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간주한 반면, 역량론적 해석은 여기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역동성의 근거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입장은 자기원인을 궁극적인 근거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윤리학󰡕의 텍스트를 꼼꼼히 검토해보면 이 개념은 스콜라철학이나 데카르트의 경우와는 달리 비신학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연의 인과 작용을 “자기”의 재귀적 구조와 분리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원인은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인 근거를 요구하지 않는 자연의 자립성을 넘어 있음 그 자체로서의 자연의 익명적인 인과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 역시 탈실체론적이며 비재귀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실체에 대한 해석의 근본 쟁점은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속성의 주관성과 실체의 단순성을 주장하는 범신론과 달리 역량론은 속성들의 실재성을 긍정하며, 속성들을 실체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역량론(특히 게루와 들뢰즈)은 속성들과 실체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여전히 실체를 속성들을 통합하는 일종의 기체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체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실체의 내재성은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곧 신 또는 실체는 속성들의 집합, 속성들의 관계 전체와 다르지 않으며, 속성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의 실재가 아니다. 신 또는 실체는 속성들 전체와 다르지 않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실체가 함축하는 이러한 구성적 성격 또는 관계론적 특성을 간과할 경우, 역량론이 강조하는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 실체의 자기원인적 특성은 실체의 초월성 또는 적어도 실체의 재귀성(再歸性)(따라서 실체의 주체성)의 이론적 알리바이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내재론적이라면, 이는 그것이 관계론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2) 실체와 양태의 관계: 변용과 연관의 인과이론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관계론적 특성은 관철된다. 스피노자에서 실체-양태 관계는 일의적으로 인과관계로 표현되며, 따라서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의 쟁점은 인과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을 분리하는 역량론적 해석과 달리 관계론적 해석은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을 대립시키거나 분리해서는 안되며, 양자 사이에는 이론적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은 갈릴레이가 정초한 운동의 상대성 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를 양태들의 인과 역량과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동역학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은 “연관”(connexio 또는 concatenatio)과 “변용affectio”이라는 개념이다. “연관”은 스피노자 저작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연구자들에게 별로 주목받지 못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 인과이론의 관계론적 특성을 해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연관”은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고립된 개체들 사이의 관계에 기초를 둔 인과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곧 인과계열의 최초의 항을 전제하고 있는 목적론이나 기계론과 달리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항상 이미 다수의 항들을 전제하고 있다.

“변용” 개념은 (유한) 양태들 일반을 가리키는 존재론적 명칭이면서 (유한) 양태들이 실존하고 작용하는 방식들을 가리키는 행위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변용”은 유한 양태들이 지닌 인과 역량은 “변용하기afficere”의 역량의 표현이며, 변용하기의 역량은 “변용되기affici”의 능력을 전제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에서 변용 개념의 중요성은 역량론적 관점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유한 양태들의 인과 역량은 관계와 독립적인 개체들의 내적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양태들이 다른 양태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비로소 형성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연관과 변용 또는 변용의 연관이라는 개념은 역량론적 해석에 비해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이 지닌 일의성을 좀더 정확히 보여준다.


(3) 관계로서의 개체

스피노자의 개체론 역시 관계론적 해석이 지닌 이론적 우월성을 잘 보여준다.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 및 개체화 이론의 가장 큰 특징은 (“개체”의 어원의 함축과 달리) 개체를 분할될 수 없는 원초적인 실재로 간주하지 않고 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합성체로 간주한다는 점에 있다.

역량론적 주석가들은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의 이러한 특성을 비교적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으나, 인과이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게루나 마트롱, 들뢰즈 또는 마슈레 같은 역량론의 대표자들은 한편으로 스피노자에서 개체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을 일종의 원자와 같은 실재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개체의 본질은 양적 측면(곧 “관계”)만이 아니라 또한 질적 측면(“역량의 정도”)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역량론적 주석가들은 인과성만이 아니라 개체에 대한 해석에서도 개념의 일의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에서 개체들은 부분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체들은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외의 다른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코나투스 내지 욕망으로 표현되는 인간 개인들의 본질 역시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유한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개별성, 자신의 본질을 얻으며,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실존한다.

개체들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 및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과 맺는 관계 이외에 별도의 개체의 본질을 설정하게 되면, 스피노자의 인과론과 개체론 사이의 내적 연관성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을뿐더러 개체들이 지닌 실존과 행위 역량의 원천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는 데서 실천적 동력으로 작용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간학, 윤리학 사이의 이론적 일관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체를 관계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스피노자의 인간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1부에서 전개된 이러한 논의는 자기원인과 실체에서 개체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일관되게 관계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음을 잘 보여준다. 2부에서 우리는 어떻게 관계론이 인간학의 영역에서도 관철되고 있는지 해명하려고 했다.


(1) 상상적 관계: 스피노자 인간학의 모체

상상적 관계라는 개념은 2부 전체의 논의에 대해 이론적 모체를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은 상상적 관계 또는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상상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의 윤리적 기획의 핵심을 이루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은 상상적 관계의 양면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못한 범신론적 해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학에 관한 논의에서 역량론적 해석의 맹점 중 하나는 스피노자에서 상상 개념이 지닌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은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인간의 삶 전체의 외연을 설정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과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곧 스피노자에게 상상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기능(그것도 부정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연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상상은 특정한 인지적 능력facultas을 형성하기 이전에 집합적인 관계의 의미, 곧 상상계의 의미를 가진다.

집합적인 관계로서 상상계는 이중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는 한편으로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을 구성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적론적 편견과 미신의 인간학적 뿌리를 이룬다. 상상의 자연성은 그것이 우리의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반면 상상의 가상성은 자신의 욕구는 의식하되 그러한 욕구를 산출한 원인들에는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상상이 인간의 자연적 조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상성은 단순히 오류로 치부할 수는 없으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의 조건 및 정서적 구조를 개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스피노자의 윤리적 실천의 핵심 목표가 된다.


(2) 인식과 정서: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러한 상상의 양면성 위에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스피노자에게 관념과 정서는 인간의 심리적인 활동의 두 축을 구성하며, 이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윤리적 기획에 따라 진행된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서 독립적인 인식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시도다. 스피노자에서 인식의 문제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이라는 과제, 곧 능동화라는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이행의 핵심 계기를 공통 통념들의 형성에서 발견한다는 점에 들뢰즈를 비롯한 역량론 주석가들의 공적이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논의는 이중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그는 상상과 이성의 관계, 또는 1종의 인식에서 2종의 인식으로의 이행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공통 통념들은 상상적인 지각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 통념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실재들을 동시에 지각할 수 있는 상상의 능력에 기반하여 자연의 통상적 질서에서 벗어나 실재들 사이의 일치와 대립,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둘째, 들뢰즈는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에 대한 설명에서도 난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기쁜 정념의 역할을 강조할 뿐, 사람들을 수동적인 상태 속에 고착되게 만드는 정념적 구조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놀람이라는 데카르트의 개념을 변형시켜 이러한 고착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 해석의 한계는 궁극적으로 그가 스피노자의 수동과 능동 개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스피노자에서 수동은 변용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또한 능동은 외부 물체들에 의한 변용으로부터의 탈출로 간주될 수도 없다. 수동과 능동은 모두 일종의 원인이며, 문제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원인인 수동의 상태에서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원인인 능동으로 이행하는 데 있다.


(3) 자유 개념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이렇게 해서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인 윤리적 문제에 도달한다. 자신의 필생의 저작에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에서 윤리의 문제는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라 철학적 기획 전체의 방향을 규정하는 쟁점이다. 특히 자유는   󰡔윤리학󰡕 5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윤리적 실천의 중핵을 이룬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이 해명해야 할 주요 개념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적인 윤리적 지향을 강조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량론적 해석의 중요성과 강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나 마슈레 같은 역량론 해석가들은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며,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의 관계,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개인의 주체적인 행위라는 관점으로는 충실히 설명될 수 없다. 각각의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개체는 자신의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및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성립한다는 그의 존재론적 원리에서 일관되게 따라 나오는 결과이자, 자유를 저해하고 인간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조건에 묶어두는 가상적 조건들이 상호 개인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인간학적 조건의 귀결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한 스피노자의 윤리적 기획은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우선 2종의 인식을 통해 각각의 개인들의 실존과 행위를 제약하는 상상적인 조건들을 해체하고 이를 신을 향한 사랑으로 대체하려는 운동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원인으로서의 신과 인간 사이의 분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충분치 못한 활동이다. 윤리적 기획이 온전히 완수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인의 윤리적 주체화의 활동을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 맺음의 활동과 내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3종의 인식 및 신의 지적 사랑이 필수적이다. 신의 지적 사랑은 전통적인 신비주의 신학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이러한 개인화와 사회화, 또는 주체화와 탈주체화의 이중적인 운동이다.



Ⅴ. 논문의 실천적 함의


마지막으로 우리 논문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해두기로 하자.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의 차이점은 단순히 이러저러한 주제들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환원되지 않으며, 스피노자 철학의 전체적인 성격 및 지향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함축하고 있다. 범신론적 스피노자 해석이 윤리적 실천이나 사회적 문제들에 무관심한 사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스피노자 상을 만들어냈다면, 반대로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를 (마르크스 또는 그 이외의 다른 몇몇 이단적인 철학자들과 더불어) 가장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철학자들 중 하나로 제시한다. 이 점에서는 특히 안토니오 네그리가 가장 일관적이고 철저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지만,15) 사실 그 이전에 이미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알렉상드르 마트롱 등과 같은 철학자들 역시 스피노자 철학을 혁명적인 철학으로 제시했다. 곧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보기드문 이론적 혁명을 수행한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혁명적 실천에 영감과 동력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혁명적이라는 것이다.16)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스피노자 사후 3세기에 걸친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20세기의 스피노자주의를 “정치적 스피노자주의”라고 부른 것은 일리가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17)

우리가 이 논문에서 제시한 관계론적 해석 역시 그 나름대로의 실천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물론 관계론은 역량론이 제시하는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스피노자의 상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고 수용한다. 다만 관계론은 역량론적 해석이 함축하는 막연한 낙관주의와 그것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이론적 인간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현재의 이론적 작업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이는 스피노자가 자율적인 지적ㆍ정치적 역량을 갖춘 혁명적인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든가 욕망과 기쁨의 무조건적 긍정성을 주장했다든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실체나 주체, 인과성, 개체, 상상, 합리성과 비합리성, 능동과 수동, 자유 등과 같은 근대 철학의 주요 범주들과 더불어 이러한 범주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국가, 사회계약, 주권, 대표, 복종, 지배와 예속, 시민, 민주주의 등과 같은 정치학의 개념들을 쇄신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 곧 관계론적 관점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과 현재성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묘해본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은 지난 1960년대 이래 좌파의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방향설정에 많은 영향을 끼쳐온 역량론적 해석에 대한 자기비판과 자기쇄신을 위한 이론적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관계론이 함축하는 실천적 의미들 중 몇 가지 주요 측면만을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1)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설명을 위한 한 가지 이론적 모델을 발견한다. 지난 1960년대 이래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네그리 같은 철학자들은 이미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여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독창적인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러한 작업은 많은 이론적 성과를 배출했고 현재에도 사회과학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관계론적 해석은 이들의 작업을 계승하되, 이를 좀더 일관된 관계론의 기초 위에서 정정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줄 수 있다. 가령 알튀세르의 구조 인과성 개념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의 범주들에 직접 의지하고 있는 개념이며, 󰡔자본론󰡕에 대한 이해나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분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Althusser et al. 1996 참조). 하지만 이 개념은 전체와 부분 또는 구조와 요소들 또는 구조와 정세 같은 구조주의적인 통념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과성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도 상당한 모호성을 보여주고 있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이 개념을 다시 해석하고 정련한다면, 구조인과성 개념이 지닌 이론적 잠재력을 좀더 풍부하게 드러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철학의 이론적 핵심을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2)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주요 경향 중 하나는 욕망을 결핍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맞서 스피노자를 긍정적인 욕망의 옹호자로 동원하는 데 있다. 특히 들뢰즈(ㆍ가타리)나 네그리 계열의 이론가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은 스피노자 철학을 역량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충분치 못하며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무엇보다도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또다른 주체의 철학, 관념론적 전통이나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학적 전통에 맞설 수 있는 유물론적 주체의 철학으로 간주하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스피노자 철학을 일종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이론적 전거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낳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욕망의 긍정성을 옹호했다면, 이는 원리나 전제로서가 아니라 과정이나 결과로서 그런 것이다. 곧 스피노자가 옹호하는 욕망의 긍정성이나 능동 정서는 인간, 더욱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는 실제 개인 주체일 수도 있고 집단적인 개인 주체일 수도 있다)이 선험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본질이 아니라, 개인적인 실천과 집합적인 투쟁의 상호 관계 속에서 형성하고 획득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윤리적 실천에 고유한 특징인 개성화와 사회화의 이중운동이 지닌 한 가지 형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욕망이나 정서의 긍정성 또는 능동 정서의 가능성에 대한 옹호는 욕망이나 정서 일반에 대한 관계론적 인식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욕망과 정서 개념을 이해할 경우에만, 심리적인 범주들을 개인의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제도적 관행이나 상호개인적(또는 “관개체적(貫個體的)transindividual”) 행위의 차원과 결합하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역량론은 관계론으로 대체되거나 적어도 보충되어야 한다.


(3)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의 의미는 반계약론적 정치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표현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사회계약론을 국가를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로 받아들이지 않은, 서양 근현대 정치철학 전통에서 매우 드문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특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에서 모두 나타나는 경향이지만, 특히 󰡔윤리학󰡕의 이론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정치론󰡕에서 좀더 원숙하게 표현되어 있다.18)

네그리는 이런 점에 주목하여 스피노자를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반자유주의적인 정치이론을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고자 했으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유명한 “다중multitudo”이라는 개념이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다중 개념은 독특하고 자율적인 개인들의 연합 또는 공통의 연관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제국에 맞서 해방의 정치, 혁명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신학정치론󰡕의 정치적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스피노자는 혁명적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주체(개인적 주체이든 집단적 주체이든)라는 범주를 알지 못했다. “다중” 또는 “대중들”19)이라는 개념 역시 집합적 주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국가의 법적 구성의 존재론적 한계를 가리키거나 또는 정치적으로 양가성을 지닌 국가의 자연적인 기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관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 정치학의 의미는 그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제시했다거나 국가 바깥에 존재하는 혁명적인 정치적 실천의 공간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스피노자 정치학의 중요성은 계약론에 의거하고 있는 자유주의적인 정치나 반계약론적이되 혁명적인 주체의 가능성에 의지하고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법적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계약론적 모델에 맞서 관계론적 문제설정을 제안하고 있는 미셸 푸코의 몇몇 저작20)이나 알튀세르의 몇 가지 지적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반계약론적 성격을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에 원용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좀더 보완하고 발전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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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erey, Pierre(1992), “L'actualité philosophique de Spinoza,” in Avec Spinoza, P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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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ron, Alexandre(1988), Individu et communauté chez Spinoza, Minuit(19691).

Moreau, Pierre-François(1975), Spinoza, Seuil.

Negri, Antonio(1990), The Savage Anomaly, trans. Michael Hard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Scholz, Henrich & Müller, Wolfgang Erich(2004), ed., Die Hauftschriften zum Pantheismusstreit zwischen Jacobi und Mendelssohn, Spenner.

Tosel, André(2001), “Quel devenir pour Spinoza?,” in Lorenzo Vinciguerra ed., Quel avenir pour Spinoza?, Kim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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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ysse, Jean-Marie(1994), Totalité et subjectivité, Vrin.

Zac, Sylvain(1989), Spinoza en Allemagne, Klincksieck.


1) 톨랜드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Champion 2003 참조.

2) “범신론 논쟁Pantheismusstreit”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의 주요 텍스트들을 묶은 선집으로는 Scholz & Müller 2004(초판은 1916)를 참조. 이에 관한 주석으로는 Zac 1989를 참조할 수 있다.

3)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스피노자 수용에 대한 상세한 연구로는 Vaysse 1994; Macherey 2004 등을 참조할 수 있다.

4) 독일 관념론에서 스피노자 수용이 물론 이러한 범신론적 해석으로 모두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셸링은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스피노자 철학, 특히 실체 개념을 중심으로 한 그의 존재론에 대해 훨씬 호의적이었고, 또한 훨씬 세심한 독해자였다. 이러한 경향은 초기 저작인 󰡔철학의 원리로서 자아󰡕에서부터 말년의 저작인 󰡔계시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셸링의 스피노자 해석은 우리가 뒤에서 말할 역량론적 해석의 이론적 원천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셸링과 역량론적 해석 사이의 이론적 연관성에 대한 검토는 매우 흥미있는 주제이지만, 이는 별도의 논의에서 다루어볼 생각이다. 셸링의 스피노자 해석에 대해서는 특히 Vaysse 1994를 참조할 수 있다.

5) 한편 관념론적인 입장과 달리 유물론의 노선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은폐된 유물론” 내지 무신론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유물론자들은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적인 경향을 높이 평가했다. 유물론의 역사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평가에 대한 고찰로는 Tosel 2005 참조.

6) Van Vloten & Land. ed., Benedict de Spinoza Opera quotquot reperta sunt. La Haye, 1883-1884;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Heidelberg, 1925.

7) 게루는 󰡔윤리학󰡕 1부와 2부에 대한 매우 정밀하고 풍부한 주석서 두 권을 남겼으며, 철학사 연구의 학문적 규범에 가장 충실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의 문자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독창적인 입장(“표현주의”로서 스피노자 철학)에 따라 체계 전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마트롱은 두 사람과 달리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대한 “구조주의적” 독해를 통해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철학 체계 전체의 관계를 엄밀하게 연역해내고 있다.

8) Pierre-François Moreau의 감수 아래 간행되고 있는 새로운 스피노자 전집은 8권으로 기획되었으며, 2005년 현재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2권이 출간되었다(PUF 출판사).

9)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Macherey 2004 참조.

10) 이 표현은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Moreau 1975), 이들의 공통적인 지향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11) Tosel 2001 참조.

12) 네그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지만, 프랑스 주석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그 자신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역으로 프랑스 연구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프랑스 주석가들과 한데 묶어도 무방할 것이다.

13) 물론 이들의 작업을 “역량론”이라는 명칭으로 모두 포괄하는 것은 무리다. 이들이 매우 다양한 관심과 입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일부 주석가들은 역량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량론적 관점과 관계론적 관점이 갈등 상태에서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14) 20세기 후반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의 동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1; 2004a를 참조하기 바란다.

15) 이는 네그리의 주요 스피노자 연구서의 제목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유럽의 스피노자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주저의 제목은 󰡔야생의 별종L'Anomalia selvaggia󰡕(1981)이었으며, 그 이후에 출간된 또다른 스피노자 연구서의 제목은 󰡔전복적 스피노자Spinoza sovversivo󰡕(1992)였다.

16)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1965)에서 스피노자를 “철학사에서 전례없는 이론적 혁명”을 이룩한 철학자이며, “마르크스의 직접적인 선조”로 간주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는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뒷면 소개글에서 스피노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철학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들은 스피노자에게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다. 그는 루크레티우스나 그 이후의 니체 말고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학을 근본적인 해방과 탈신비화의 기획으로 인식했으며, 파문과 증오를 불러일으킨 고독한 사상가였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제 3종의 인식에 의해 가능해진 지적ㆍ윤리적 공동체를 “현자들의 공산주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17) Macherey 1992 참조.

18) 스피노자 정치학의 반계약론적 입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4b; 2005 참조.

19) 이는 “multitudo” 개념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번역어들이다. 네그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multitudo” 개념을 “다중”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는 반면, 발리바르는 이 개념의 가장 좋은 불어번역어로 “masses,” 곧 “대중들”이라는 용어를 제시한 바 있다.

20)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특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중요한 작업이다. 또한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권󰡕의 몇몇 언급들도 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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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28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최근에 새삼, 스피노자를 읽어야 하는 중요성을 사학을 전공하는 선배와 '주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다가 다시 깨달았습니다.

瑚璉 2006-06-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렵습니다요(T.T).

청년도반 2006-06-28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배님, 이왕 올려주시는 김에(?) 이번 달에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발표하신 논문도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 발표회에 가고 싶었지만, 학기 막바지라 갈 수 없었다는;;
ㅎㅎ 기다려볼께용~ ^^;;

덧) 갑자기 이미지가 "젊은" 알튀세르로 바뀌었네요. 혹시 함의는 스피노자에게 빙의된 알튀세르? ㅎㅎ 사실 호호 할아버지 때 사진만 보다가 한번씩 저런 사진 보면 정말 적응 안됩니다. 솔직히 "The Humanist Controversy and Other Texts" 표지 사진 보고서는 기겁을 했더랬습니다. ㅎㅎ;;

cplesas 2006-06-2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행이 돈 주고 받지는 않았답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balmas 2006-06-29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호질님, 전공 분야가 아닌 건 다 어렵죠. ^^; 더욱이 이건 전체 내용을 개략적으로 축약한 거라서 더 그럴 거예요.
웅기/ 그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서 나중에 올릴게. :-)
무영님/ 잘 하셨어요. ㅎㅎ

balmas 2006-06-29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글쎄,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 ^^;;

린(隣) 2006-06-3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벌써 6월 마지막 날이군요!
저도 서양근대철학회의 두 선생님 발표문을 다 보고 싶은데..
그냥 간사한테 문의할까요? 아님 선생님이 올리시길 기다려볼까요?
그건 글쿠, 알튀세르 사진 넘 멋져요. 저는 이렇게 젊은 얼굴 첨이거든요.
들뢰즈만 멋진 줄 알았더니, 알튀세르는 색다른 맛(?)이 있군요.. ㅋㅋ

아무 소식이 없어 약간의 답답함을 양념삼아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럼, 또 들를게요.

balmas 2006-07-0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알튀세르야 꽃미남의 원조격이죠. ㅋㅋ

근대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조금 줄이고 다듬어서 나중에 [서양근대철학]
회지에 실을 예정인데, 아직 다듬지 못해서 여기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발표했던 글은 간사에게 말씀하시면 얻어보실 수 있을 거예요. :-)

그리고 후배에게 며칠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쪽에서 한번 연락을 해보겠다고
해서 제가 선생님 메일 주소를 가르쳐줬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마
연락이 갈 겁니다. :-)

헤르베르트 2006-07-1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염:-)

balmas 2006-07-13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셈~

JC 2010-01-2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 읽었습니다. 혹시 퍼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