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실텐데, 이렇게까지 긴 글을 써주시고, 게다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의 notion의 용례를 전부 열거해주시기까지 하니 참 한 편으로 감사하고 선배님의 열정이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저는 열정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도 얼마 없는 처지라서 선배님처럼 긴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군요. 한가지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관모 선생의 말씀에 관련된 부분은 제가 뭐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점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발리바르의 논문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온 문제의 그 구절에서 d'autant plus que ... davantage 관용구의 번역은 선배님의 번역이 맞습니다. 제가 조금 부주의했군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여기 저기 읽으면서 오역이 있는 것들을 모으고 있는데, 그 구절도 정오표에 포함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 지적해주신 것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이런 오역이 있는 것을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전에 이메일을 선배님께 보냈는데(엠파스 쪽) 받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책을 손에 받질 못했지만, 받게되면 한 권 보내드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벌써 주문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주문하지 않으셨으면 말씀해주십시요.^^

어쨌든 관용구 번역은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진선배님께서 그 구절에서 notion과 common notion을 각각 '통념'과 '공통통념'으로 옮긴 것이 저에게는 적절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제 판단으로 그 구절에서 common은 여러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발리바르가 쓴 것이 확실합니다. 선배님께서 발리바르의 말이 얼마간 모호하다고 말씀하신 것과 반대로 저는 발리바르의 말이 거기서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발리바르의 말을 모호하게 여기시는 것이야말로 선배님이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기 때문에, 그리고 common notion의 common을 너무 일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두 가지 정도를 간단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진선배님은 notion이란 명확히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common이 그 앞에 붙어 줌으로써 2종의 인식이 되므로, 합리성의 원인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common에서 주어져야 한다. notion은 그 자체로는 여러사람들에게 두루두루 통용되는 것으로 거기서 통용된다는 측면은 common notion의 common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조금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진선배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윤리학}은 {지성개선론}보다는 덜 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이론(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 {신학-정치론}은 좀 더 실천(주의)적인 태도를 보이지요. 최근 '보편의 외양 하에서'라는 글에서도 발리바르가 이 문제를 잠시 다루지요.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반오웰..."의 한 각주에서 이러한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 번역에서 가져옵니다.

"{지성개선론}과 {윤리학} 사이에 있는 단절에 관하여, 들뢰즈의 논증은 {윤리학}에서 “공통의념들”을 제시하는 두 가지 양식(논리적 양식과 실천적 양식)을 잘 절합하게 해 주고, 그리하여 주지주의적 독해에 종지부를 찍게 해 준다. 그러나 p. 270의 주석 6번[국역본, 393쪽 주석 6번]은 {신학-정치론}이 (인식의) “종류들을 혼합”하고 있다는 데에서, 많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느끼는 당혹감을 보여준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신학-정치론}이 인식의 종류를 "혼합"하는 듯이 보이고 이 때문에 많은 이론가들이 당혹감을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윤리학}에서 common notion은 분명 2종의 인식으로 제시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1종의 인식에 속하면서도 어떤 실천적 합리성을 갖는 것으로 논의됩니다. 그리고 더욱이 이는 대중들이 공유하는 '언어'로부터 그러한 합리성의 토대를 발견합니다. 이어서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로서는[발리바르 자신으로서는], 스피노자의 이중성이라는, 또는 그의 상대자인 기독교인들의 편견에 대한 이른바 영합이라는 나태한 논증을 배제하고, 󰡔신학-정치론󰡕의 이러한 비순수성에서 (네그리가 말하는) 체계의 “두 번째 정초(定礎, fondation)”의 원동력만이 아니라, 󰡔윤리학󰡕의 인식론과 부분적으로 모순되는, 그리고 이 인식론의 아포리아들을 비판할 수 있게 해 주는 가능한 또 다른 정초의 실마리를 보고 싶다. 이러한 비순수성은 언어(또는 기호)의 정의를 상상의 일반적 개념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을 물질적 교통, 제도적 이야기(récit), 그리고 역사적 언설(parole)의 요소 안에서 완전히 다시 사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신학-정치론}에서는 적어도 common notion의 common은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의미를 분명히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실천적인 합리적 인식'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 맥락에서의 합리성이란 이론적인 합리성을, 즉 개념의 수준에 도달한 2종의 인식의 합리성을 정확히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윤리학}에서 2종의 인식에 이미 속하는 것으로서의 common notion이라면 그것은 말하자면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개념concept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개념'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배님의 입장에서도 2종의 인식을 '통념'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확실히 어색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common notion이 그렇게 일관되게 이론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즉 common notion 자체가 통념과 개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히 문제입니다. notion 자체도 통념과 개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지요. universal notion의 다른 두 가지와 common notion이 모두 notion인 것도 이런 진동의 폭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스피노자가 notion을 단순히 오류에 가득 찬 무지한 자들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common no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예 concept 또는 다른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혼란을 유발할만한 notion이라는 말을 구태여 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notion이 {윤리학}에서  상상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무지자들의 잘못된 관념들로서의 상상적 관념으로 정의되는 예가 있다는 것이 저로 하여금 그 말을 '통념'으로 단순히 번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신학-정치론}에 더욱 잘 나타나듯이 notion은 명확히 언어의 사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의미들의 교통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실천적 합리성'을 갖는 것이며(그러고보니 '뜻 의'를 써서 '의념'이라 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군요), {윤리학}이 보여주듯이 모종의 인식론적 단절에 의해 '개념'의 수준으로까지, 즉 notion으로서의 최대의 합리성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notion에도 이를테면 역량의 최대값과 최소값이 존재한다고나 할까요?

 

둘째, 진선배님은 universal notion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스피노자에서 notio는 항상 보편적입니다. 개별적인 notio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상이한 방식, 각자의 기질과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상이한 방식이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universal notion이라는 말을 진선배님이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선배님의 의도를 맞게 읽은 건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여기서 universal을 선배님은 '다수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notion은 그러한 의미에서 universal 하기 때문에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universal은 개체들의 독특성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라는 의미로, 즉 singular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universal하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많은 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universal notion에 대해서 주는 사례들이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 말, 개" ...이것들은 모두 개체들의 독특성의 추상들의 결과로서의 보편적인 notion이지요. "개라는 관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도 여기서 함께 떠올리면 더욱 좋겠지요. 즉 저러한 notion들은 개체들의 독특성을 추상함으로써(혼동을 대가로 치루고) 얻어지는 관념이라는 점에서 universal하다는 의미이지, 모든 사람들이 같은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universal하다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notion들이 개개인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 말, 개'와 같은 것에서 모든 사람들(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말' 또는 '기호'일 것입니다. 같은 말을 가지고 상이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것이지요.

이제,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의 경우 '나는 사고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notion이 common notion이 될 수록 더 많이 사고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호함 없이 이해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저는 스피노자의 common notion이란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서는 스피노자를 '경험주의자'로 만들기 쉽지요. 스피노자에게는 다른 테제들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그 구절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처음부터 교통 속에서만 사고하며, 말을 가지고 사고하고, 말 속에서, 또는 말을 가지고 형성하는 관념들 속에서, 이를테면 '인식론적 단절'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고하는데, 이러한 맥락 안에서만 대상인 개체와의 공통성이라는 것이 이른바 '단절'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겠지요. 또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notion들을 공통된 것으로 점점 더 일치시켜 나아가고, 이를 통해 더욱 더 인식할 능력들을 배가시킬 수 있게도 되는 것일테고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것을 인식하기 위한 투쟁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어쨌든 이렇게 notion이 그 자체로 다양한 수준의 의미층에 걸쳐있거나 또는 그 사이에서 진동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단순히 통념으로, 또는 단순히 개념으로 옮길 수 없으며 '의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역능에 대해서는 좀 더 간단하게 답변드리고 싶은데, 역능 대신 문맥 따라 여러가지로 옮기자는 입장도 가능할 수 있고, 좀 더 통일성을 부여해서 역능이라고 옮기자는 것도 가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puissance 같이 논란이 되는 단어는 될 수 있으면 통일성을 부여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몇몇 용어를 번역어로 사용해도 최대한 갯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고 보고요. 역능이 어떻게 권력을 표현할 수 있는가는 사실 반복적인 사용이 정당화시켜준다고 말씀드릴 수밖에는 없네요. 이는 그 말이 아직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공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겠지요.

그리고 역능은 들뢰즈주의나 네그리주의에서만 사용되어오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윤소영 교수나 서관모 교수가 오래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용법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능동성을 강조해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알튀세르주의자들은 역량과 권력을 그렇게 외재적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역량에 해당하는 역능으로 능동성만 강조하기 위해 사용해오진 않았을테고요.

감사합니다.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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