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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단추집


장도는 흔히 비수라고도 하며 허리띠나 옷섶안에 노리개를 달아 차고 다니는 것은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속에 지니는 것은 낭도(囊刀)라 한다.
은장도는 보통 원통형이나 을(乙)자형 혹은 네모나 여덟모의 다각형 등 형태가 다양한데 칼집의 무늬가 화사한 것 뿐 아니라 매듭이나 보옥을 달아 아름답게 의장하여 노리개감으로도 훌륭하게 장식하곤 했다.
사진 상단 은장도는 전면 고리 중앙에 보상화문을 새겼으며, 첨사라는 은젓가락은 젓가락 구실과 음식물의 부패와 독성 여부를 감별하도록 했다. 은장도 뒷면에는 소나무, 해, 산, 물, 돌,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 십장생 문양을 새겨 장생불사의 희망과 꿈을 담았다.
그러나 이 땅 규방 여인들의 장신구겸 보신용의 은장도를 보면 장수를 빌고 액을 물리치고 부부의 화합을 기원하는 외에도 정절과 충절의 상징으로서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다시 그 딸에게로 대물림하면서 여자의 바람직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가르치고 계승시키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하단의 단추집은 두껍고 질기며 질좋은 조선종이로 만들었으며 시커멓게 옻칠한 뚜껑에는 오복을 상징하는 박쥐 다섯 마리가 주칠로 그려져 있다. 안에 든 단추들은 조선 말기에 옷고름 대신에 등장한 것들이다.



♣ 자료문의 053)745-5373 이무열




은장도 앞면, 은장도 뒷면.
길이 13.4cm 조선시대



단추집. 지름 11.2cm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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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개


노리개는 저고리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부녀자들의 장신구를 일컫는다. 흔히 다채로운 색상과 귀한 패물을 사용하여 단조로울 수 있는 우리 한복에 화사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구실을 했다.
그 형태는 정사각형, 원형, 나비형, 화형, 직사각형 등 다양하며 꽃문양, 불로초문양, 용문양, 쌍희자문양 등을 장식하여 각종 의식이나 경사때 혹은 간단한 것은 일상때도 차곤 했다. 재료를 보면 금이나 은 백옥 비취 산호 금패 등을 사용하곤 했다.
패물은 흔히 한 개나 세 개를 다는데 한 개로 된 노리개는 단작(또는 외작)이라 하고 세 개로 된 것은 삼작노리개라 한다.
투호는 아구리가 좁은 병인데 화살을 던져 집어넣기를 겨루는 도구이다. 그 모양이 예쁘고 행운을 뜻하고 액을 병(甁)에 넣어 막는다는 뜻을 지니고 했다.
수복문양과 만초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되었으며, 상단에는 산호를 박고 노리개위에는 구슬을 달고 아래에는 술을 달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사진 하단 귀면 형태의 노리개는 은으로 범발톱을 만들고 귀면에는 파란을 장식하여 조화를 이루었다. 이런 범발톱 노리개는 나들이나 산행(山行) 때 패용하였으며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자료문의 053)745-5373 이무열




은투호삼작노리개. 조선시대


범발톱단작노리개.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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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접시/분물연적



분은 살갗이 희어 보이도록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을 일컫는다. 분을 만드는 재료로는 활석(滑石),백토(白土),황토(黃土),조개껍질 등이 쓰였는데 그중 분꽃 씨앗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분은 분꽃의 영근 씨를 말려 절구에 찧거나 맷돌에 갈아 체에 쳐서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백분은 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부착력이 약하여 사용하기 번거로운 단점이 있었다. 백분 화장을 위해서는 분바르기 전에 안면 솜털을 족집게로 뽑거나 실면도로서 솜털을 제거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분을 접시에 덜고 적당량의 물을 붓고는 액체 상태로 곱게 반죽하였다. 이 액체 상태의 분반죽이 얼굴에서 건조되는데는 20여분 정도 걸렸으며 이 때는 누워있어야만 되었다. 수면중에는 피지 분비가 왕성하여 분이 잘 부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화장이 곱고 깨끗하게 마무리되는 예가 드물어 여염집 여자들이 화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설사 화장을 하더라도 분첩에 백분을 묻혀 토닥거리거나 백분을 물에 풀어 분세수를 하는 정도였다. 상단의 사진은 당시 금보다 귀했다는 청화안료로 풀꽃문양을 그려넣은 분접시이다. 이 분접시에 분을 덜어 놓고는 사진 하단의 분물연적이라고도 부르는 분물통의 물을 부어 잘 휘저으면 곱게 반죽이 되고, 이 것을 얼굴에 펴발랐다.

♣ 자료문의 053)745-5373 이무열





▲ 청화백자초화문분접시.
조선시대. 지름 5.2cm




▲ 청화백자파도문분물연적. 조선시대. 지름 3.2cm 높이 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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