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분각

분각은 아무래도 분갑(粉匣)의 잘못된 표기인 것 같다.예전 분을 담는 갑의 바른 표현법에 골몰하다가, 곽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보니 갑(匣)이라고 표시되어 있고 *물건을 담는 작은 상자 성냥~/담배~/빈~ 로 설명이 되어 있었다._

그러면 분합(粉盒)은 또 무엇인가? 싶어 알아 보았더니 분을 담는 작은 사합(沙盒)이라고 되어 있었다. 사합이라면 사기로 만든 합이라는 소린데, 다시 또 합에 대한 궁금증이 안 일어날 수 없었다.

합(盒)-음식을 담는 놋그릇의 하나, 운두가 그리 높지 않고 둥글넓적하며 뚜껑이 있음. 종류는 큰 합, 중합(中盒), 작은 합, 알합 등 여러 가지가 있음.
아하, 그렇구나. 사전적 해석에 따르자면 분갑이나 분곽은 흙이나 놋쇠로 만든 분합과 재료상으로 구별되면서 그 용도나 쓰임은 전부 분을 담는 통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았다.

<자개분각>이라는 잘못된 표기와 함께 인터넷 서핑중, 고미술품 네트워크상에 올라온 자개로 만든 분곽은 아름다웠다.

파르라니 때론 초록이 지쳐 아니 붉은 기 농익은 자개로 에둘러 만든 꽃잎의 바다가 이단으로 이어지고, 다시 은상감으로 띠를 두른 아랫부분이 너무 황홀했다. 분곽 윗부분엔 다섯 개의 꽃잎이 피어나고, 어질어질 잠시 아득하여 할 말을 잊었구나. 꽃술마다 피어오르듯 도드라진, 밑씨를 숨겼음직한 씨방이며.....금상감으로 감싸 안은 보랏빛이다가...청남빛이다가...금강초롱빛이다가....내 아무렇게나 잘못 살아온, 일상의 오만 잡생각 까맣게 잊고 반벙어리 되어 그냥 그렇게 좋다...참 좋구나....

한 이백년 세월은 좋이 되어 보이던, 어쩌면 그리도 잘 견뎌 주었는지 고맙고 다시 황홀한 <자개분각>과의 만남은 저 태평양박물관의 파란을 입히고 뚜껑 중앙에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이화(梨花)를 새긴 은분합이거나 박쥐 문양이 인상적인 이화여대박물관의 은분합과 그 빼어난 맵시와 자태를 겨루게 했었다.

아마 석 달은 넘었을 그 때부터 였을 것이다. 내 마음은 달뜨고 흡사 신열처럼 온 몸을 가려두르던 흥분으로 떠헤메게 했다. 수시로 고미술품 네트워크 <자개분각>을 떠올리다가 마침내 사야지, 사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는 아무런 마련도 없이 무작정 나섰던 고미술품 취급점에서 나는 잠시 절망(?)하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무렴, 그윽하고 황홀한 아름다움 만큼 내가 지불해야할 비용은 만만찮고...... 아름다운 것은 누구라도 아름다운 만큼의 값어치를 메기는 법. 녹녹찮은 세월의 무게에 어느 이름모를 여인의 섬섬옥수가 닿아 내 오늘 무슨 인연의 끈을 이어 자개분곽과 마주하랴 싶었다.

기세 좋게 나섰던 발걸음은 잠시 허둥거리고, 돌아서는 길 왜 자꾸 허리가 접혀오던 것이랴. 모든 걸 다 고백하러 갔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던 내 젊은 날의 첫사랑 그 날처럼 왜 그렇게 허전하고 아쉽기만 했던 것이랴!

팔월 초순의 어느 하루 나는 다시 계약금이라도 얼마 주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을 저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써 분곽이 놓였던 자리를 외면하며 지극히 무사무사한, 어쩌면 데면데면한, 일없어 마냥 따분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었다.

"여기 분곽 하나 보이던데..."
"분각요, 사나흘전에 팔았는데요..."
"..............."
"야, 나도 장사 삼십년에 그런 분각은 첨 봤는데...."
"............"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다고 했던가?
분곽을 사 간 눈썰미 좋은 어느 나이 든 서울 사람에게 축복있으라!
사실 조금 무리(?)했다면 구할 수도 있었을..........왼갖 세상의 푸른빛이었다가 보라빛이었다가 갈매빛이었다가......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진 깊은 바다 썰어서 붙인 금조개 껍데기가 황홀한 ..........은상감 금상감을 메기던 날의 산빛이며 물빛이며 바람소리여...새소리여......

나는 다시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는 글귀를 떠올려야 할 것 같다.
내 살아가며 두 번은 만나지 못하지 싶은........ 그리움이여....황홀한 상채기 그 빛나는 절망이여... 턱없는 미련이여...헛된 애증이여....

누구는 평생을 못잊고 살기도 하고, 평생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고 한다.
어쩌면 앞으로 그깟 분통 하나 모르는 타인처럼 스쳐 지나간, 진작에 아무렇지도 않은 ,아니 기억조차도 못하는 그런 세월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잠시 이루지 못한 꿈마냥 아픈, 그런 세월도 있을 것임을 예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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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우리네 목수들은 집터의 부름과 더불어 살았다. 연장 망태를 걸머진 채 떠도는 시간이 길어지고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목수때는 갈앉아 척박한 직업의 조건처럼 신체의 일부가 되었을 연장들.

그 쓰임과 용도에 따라 소용되는 연모의 종류와 기능 및 이름은 얼마나 다양하고 많았던가. 백 가지가 넘는다는 목수 연장 중 우선 나무집에 날을 만들어 꽂아 일정한 두께로 나무를 깍아내던 대패를 보자. 변탕,개탕대패,옆훑이,장대패,뒤대패,둥근대패,배밀이대패,목귀대패,대팻집고치기대패,살밀이대패,표주박면대패,훑이기대패......

일정한 간격으로 날을 내서 나무를 자르는 연장인 톱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쇠톱,실톱,세톱,붕어톱,등대기톱,양날톱,중걸이,두덩톱,접톱..... 이외에도 나무를 찍어서 깍는 연장으로 날이 가로로 된 자귀,손자귀와 같은 소용이지만 도끼처럼 쇠로 만들고 나무자루를 해박는 까뀌,날을 오긋하게 내 앞쪽으로 들이깍게 된 옥까귀 등등 이제는 거의 볼 수 없게 된 이런 용구들은 골동품이 된 옛가구처럼 마냥 그립기만 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굳이 가장 애착이 가는 목수 연장 하나를 든다면 나는 무엇보다 '먹통'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황당해서, 아니 첫눈에도 그것은 본때 없이 볼썽사나운 몰골을 하고 순무식으로 생겨 먹어서 외려 더욱 정감이 가도록 만들었던 것.

'먹통'은 보통 먹줄통이나 묵두라고도 불리던 것으로 목재 따위를 다듬거나 자를 때 목재 위에 줄 치는데 쓰는 기구이다. 먹솜그릇과 먹줄을 감은 도르래바퀴를 장치하고 흔히 먹통 밑바닥엔 홈을 파 끼워 보관하는 먹칼이 있다. 또한 먹칼은 대나무를 잘게 쪼개 깍은 댓개비의 한 끝에 빗살처럼 잔 칼질을 해 먹을 찍어 목재나 석재 등에 글씨를 쓰거나 표를 하는데 썼다.

혹 먹줄주는 방법을 지켜본 사람은 알 것이다.어찌 보면 신중한 것 같으면서도 너무 익숙한 탓인지 어슬렁어슬렁 때로 무심하게 보이기까지 한 그 무념의 동작을.

나무를 마름개질하여 먹줄을 치거나 톱질을 할 때 받쳐놓는 나무인 '말'위에 놓인 목재 한끝에 먹솜그릇 앞머리에 달린 조그만 송곳을 꽂아 고정시키고 눈으로 가늠하고는 먹줄을 잡아당겼다가 탁 놓는다. 그러면 잘 다듬어진 목재에 선명한 먹선이 찍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우연찮게 조선식 민대가리 모양을 연상시키는 먹통과의 만남 이후 장안평이나 예천의 출장길 혹은 애써 더듬어 본 시골 고방에서 맞닥뜨린 먹통들은 하나같이 나름대로의 재미를 갖고 있었다. 단순하게 먹물을 갈아 붓고 가는 끈으로 먹줄통 입구를 빠져나와 곧은 선을 얻도록 한 기구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개중에는 문양도 화려하게 거북이나 호랑이를 조각해 놓은 것이 있는가 하면, 더러는 허위단신 한 세상 힘이 겨워 마침내 질정 못할 그리움인 양 손때가 묻어,단순하고 질박한 모습으로 채 못다한 사연이나 곡절을 얘기하는 듯싶은 것도 있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연모의 사용방법,재질,만든 지방에 따라 독특한 형상으로 다가오곤 하던 먹통들.

내 기꺼이 책상머리에 필기구를 꽂아두고 쓰는,무작스럽고 막돼먹은 듯한 모습으로 맨처음 만난 먹통 하나 오늘 자못 새로운 모습으로 친근감을 더해 가기만 한다.

세월의 뒷켠에 버려진 채 켜켜이 먼지를 뒤집어쓴 먹통들이 그러할진대,생긴대로 나무를 마름질하고 부재를 어떻게 쓰고 어떤 법식의 건물을 세우든 튼튼하고 조화가 어우러진 모습을 연출해냈던 우리네 전통 목수들은 다 어디 갔는가. 그들에 의해 우리 건축은 잔재주나 세심함이 아닌 무심한 듯 소박한 아름다움을 빚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누구든 짬을 내어 보고자 한다면 쉬 만날 수 있고, 진정 알고자 하는 만큼 느낄 것이다. 가까운 절집이나 옛 한국의 살림집에는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네 옛 목수들은 건축을 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시작부터가 달랐다.

집은 대체로 높고 밝게 지었으며, 집터가 준비되면 기둥 세울 자리를 정했다. 그런 다음에는 서너 자 깊이로 판 기둥 세울 자리에 조선회와 잡석을 다져 넣으면서 달구질을 했다. 소리꾼의 소리매김에 맞춰 굵은 통나무나 쇠로 된 쇠달구 아니면 돌덩이로 된 돌달구를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공중 높이 들었다가 땅에 떨어뜨려 집터가 단단히 다져지도록 안간힘 했던 것이다. 달구질이 끝난 다음에는 주춧돌을 놓고 편편하게 고른 위에 고임돌을 괴고 다시 조선회를 다져 넣었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나무 다듬는 일을 시작했다. 나무 하나를 베는데 있어서도 나무가 트거나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쾌청한 길일을 택하고, 심지어 4월이나 7월, 질기고 벌레 먹지 아니하는 날을 받아 벌목한 정성 앞에서 달리 더 무엇을 얘기하랴?

그러나 잠시 눈주어 돌아보라.
100년도 못갈 집 한 채 짓기 위해 최첨단 공법의 건축술로 시멘트와 철근을 우겨 넣는 이 시대에, 갖은 풍상의 몇백 년 의연하게 견뎌온 우리의 건축물들은 어떠했는가를.

언제부턴가 귀솟음이나 배흘림,안쏠림 등 우리 전통 기법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왜끌,왜대패,플라스틱 먹통를 든 목수들이 자가용 타고 아파트 현장으로만 달려가는 오늘.

요즘 다들 비 안 새면 잘 지은 집이라던데.....

그리워라 내 진정 그리워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집터의 부름은 없어도 옛 방식의 집터 하나 다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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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는 허둥거리고, 조금은 못 미더워하다가 도착한 천주교 공원묘지 장미공원은 낯설게만 보였다. 전날 석간신문을 통해 미리 장지를 확인해 둔 터였지만 그이의 죽음이 영 실감나지 않아 허방을 디디듯 자꾸 발이 헛놓였다. 잘 닦여진 산길을 따라 채 5분도 못 가 야트막한 야산 구릉에 장례행렬이 모여 있었다.몇몇의 두건과 상복이 간단없이 이어지는 곡소리와 성가소리에 겹쳐 실루엣으로 다가서는 순간 그대로 까무룩 잠이라도 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뜩해지는 정신을 가누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아는 얼굴 한사람을 찾았다.

인사말은 없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건만 선생께서는 영 못 알아보신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예의 그 갈색톤 베레모를 쓰신 선생의 금테안경 속 두 눈은 감긴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옆에서 보기에 감히 범접 못할 분위기 탓으로 조용히 장례절차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상제들의 곡소리가 이어지고 끊기기를 여러 번, 하관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광중은 깊고 아득해 보였다. 그이의 친구 엄 선생의 모습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풍수를 대신해서 산역꾼들을 지휘하고 다시 방위를 맞추어보는 모양이었다.

다시 상제들의 곡소리가 이어지고 영구를 운구하여 하관을 했다. 공포로 영구 위를 닦고 명정을 덮고....횡대를 깔고...상주의 상복 한자락에 흙을 담아 광중에 쏟고...마침내 흙을 덮기 시작했다.

츠르르륵... 상주의 상복 끝에서 영구 위에 떨어지던 흙을 보면서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거,바람 불고 눈비 내려 잠시 돌아가는 안식의 집인지도 모르겠다. 한세상 저물고 고단하여 이제 온갖 잡다한 인간사 벗어두고 홀연히 먼 길 홀로 떠나는 일인지도 진정 모르겠다.

장지를 뒤로 하고 장미공원 식당으로 돌아오는 길 고인을 위한 교우들의 기도소리가 오래 귓전에 머물고 있었다.

항상 불쌍히 여기시고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천주여,오늘 이 세상을 떠나게 하신... 거룩한 천사들로 하여금 그를 맞아...지옥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어떻게 올 시간이 있더나?
예,서울서 근무하다 대구 내려와서도 문병 한 번 못 가 보고 부주나 좀 할까 하고...
선생님을 모시고 들어선 식당 안은 다소 분답하고 협소했지만 그런대로 소고기 국밥과 소주 한잔을 나눌 만했다.
운사께서는 어떻게 시간이 되던 모양이지?
예,총장님. 제가 평생에 세 번 싸웠는데 그 중에 한 번을 재행이와 싸워 제가 안 이겼습니까?
자랑스러운 듯 가죽장갑을 손끝에 바투 끼는 성 화백의 웃음이 대머리 조짐이 보이는 성긴 머리털에 어울리잖게 천진스러웠다.
어허, 그래...껄껄껄...재행이한테 이기는 게 보통일이가. 한번은 가보세에서 권기호 하고 붙었는데 왜 권기호 그 친구 해병대 기질이 있어 가지고...

상가는 떠들썩해야 하고, 화톳불을 마당이나 안마당에 펴고 밤샘을 하면서 술이나 음식을 들며 상주의 슬픔을 잊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건만, 장사 다 끝난 마당에 아는 얼굴이라곤 두 사람밖에 없는 공원 식당에서의 술자리는 썰렁했다.

엄지호 그 친구가 처음부터 수고가 많았더구만.
예, 저도 재행이형 쓰러졌다는 소식도 듣고 엄지호 그분이 모금운동도 펼치고 있는 것도 알았는데...
진작 살아 생전 한번 찾아뵙지 못한 죄밑이 되어 난 엉뚱한 소리나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문인들이 대봉성당에는 좀 왔던가요?
음,몇이 왔더군. 장례미사 끝나고는 안 보이더구만.
좀 그런데요. 아는 얼굴이 너무 안 보이니까.
아, 먹고 할 일 없는 놈들만 안 왔나. 운사, 니도 할 일 없제?
선생님 저는 혹시 운상할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추리닝 챙겨 입고...
성 화백은 다시 가죽장갑을 바투 꼈다.
재행이 그놈. 애증이 함께하는 놈이야.

대학총장으로 퇴임하시고 할 일(?)없는 선생님께서는 그예 말이 없이 담배를 태워 무셨다.선생님으로서는 참 많은 사랑과 미움의 시간들이 사라지는 담배연기 너머로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재행이 형의 모습은 무엇보다 붉게 술기 오른 코와 함께 왔다.그리고 격렬한 어투나 독설이 생각나곤 한다.그러면서도 일면으로는 십 년이나 틈이 지는 후배에게 각종 시집이나 잡지책을 몇 년에 걸쳐 보내주던 자상함이 있었다. 물론 내 경우에는 책을 받았다고 전화 한 통 없었는데도 형은 책 보내주는 일을 거르지 않았었다.

한번은 회사일로 출장을 갔다가 영덕의 시골 2층 다방에서 우연히 형을 만났었다. 형은 야,너 오랜만이다 어쩌구저쩌구 막무가내로 강구 바닷가 횟집까지 끌고 갔는데 거기엔 시를 쓰시는 이장희 선생님과 수필을 쓴다는 군청의 육 선생이 있었다. 불콰하게 권커니 잣커니 억병으로 취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장희 선생의 따님이 괜찮다며 선도 한번 보고 그집에서 자고 가라며 붙잡는 통에 차도 없는 그 밤에 도망치느라 애를 먹었었다. 또 언젠가는 반월당 부근에서 아침 여덟시경에 술 한잔 하고 가자고 잡는 통에 난감해 한 적이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어느해 여름 범어네거리 부근 식당 앞에서 웬 여자분과 함께 있는 형을 만났는데 괜찮다는데도 기어이 데리고 가 복어탕에 낮술을 권하는데 자리가 어색하여 꽤나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강제로 모 잡지에 글을 쓰도록 기자를 보내기도 하고, 수필을 한 편 썼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어디에 보내 당선되면 문협에 가입하라는 얘기를 하지를 않나... 하여간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는 그런 이미지들이 이제와 때로 얼마나 큰 그리움이며 정겨움인가?

따지고 보면 당신 살아 생전 몇 개의 문학상을 받고,문인협회의 부지부장을 하고 따위가 살아남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은 떠나고 떠나신 지 몇 년이나 된지도 모르고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늦은 밤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다가,아닌 밤 홀로 잠 깨어 전화기나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날 이십 년도 더 오래 전 내 대학교 2학년 시절. 대명동, 지금은 없어진 그 2층 목조건물 조기섭교수 연구실 앞 삐걱이던 계단에서 받은 형의 첫시집을 펼쳐 보면 거기 형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숨어 있는 듯하다.

마리아 에메리따 수녀가 흰 말을 타고 가버렸다. 무릇 모든 일체가 부서지고
나는 누워서 수백리 밖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문비나무의 슬픈 일엽이엽
이 지고 있었다. 아, 나의 무지도 그 끝을 내리고 속절없는 가을의 눈시울이 적셔지고 있나니.....

_이재행 시 <형용사의 가을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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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맷돌]
작정하고 나서지 않은 다음에야 쉬 짬을 낼 수 없는 우리네 일상이지만 어쩌다 시골집 우물이나 뒷마당에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어수룩하고 무딘 손끝으로 돌을 쪼아 만든 그리운 마음들이 있음을.
오랜 세월 물이끼가 덧앉고,더러는 키 낮은 채송화,맨드라미,국화 따위 아무렇게나 피고 지듯 태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것.하지만 어줍잖은 꾸밈새나 모양새로도 끝내 정겨움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
'맷돌'은 흔히 물에 불린 곡식을 갈거나 가루로 만들어 쓰던 기구이다.아래 위 두 개의 돌을 겹쳐 아랫돌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춰 사용했다. 또한 윗돌에는 손잡이 나무를 박을 구멍이 있고 갈아야 할 곡식을 넣는 주구가 뚫려 있었다.

둘러주소 둘러주소
정둥 같은 팔다지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소라 같은 주먹으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홰홰칭칭 홰홰칭칭
둘러주소 둘러주소

외할머니는 대청에 초석을 깔고,그 위에 맷돌방석을 놓고,다시 맷돌을 앉힌 다음 맷돌노래와 함께 녹두나 밀을 갈아내시곤 했다.잘 갈아져 나온 녹두가루나 밀가루는 다시 녹두전이 되고 수제비가 되어 내 입맛을 당기게 하던 그런 기억의 앙금들은 이제와 어제 일처럼 마냥 그리웁기만 하다.
가루를 곱게 내기 위해 돌돌돌돌 곡식을 애벌로 갈아,몽근가루는 받아 내고 서너 번이나 들들들들 갈아낸 다음에는,마침내 몽그라진 가루가 쌓이던 정경이 눈에 선하기만 한데......
어쩌다 빈대떡을 만들던 날은 또 어떠했던가.
맷돌에 타개어 물에 불린 녹두를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벗기고,거피한 녹두를 물을 조금 부어 맷돌에 넣고 되작하게 갈고,돼지고기는 훗추가루와 마늘 다진 것과 소금으로 양념하고,배추김치는 총총 채썰고,파는 어슷하게 썰고,고추는 동글동글 썰고,소금에 간한 녹두반죽은 갖은 양념한 돼지고기와 버무리고,뜨겁게 달구어진 조선 솥뚜껑에는 돼지기름이 둘러지고, 마침내 한 국자씩 떠낸 반죽은 파나 고추를 얹어 노릇노릇하게 지져지던 것이었다.
노릇해진 빈대떡을 뒤집어 천천히 익히기도 전에 내 마음은 지레 바빠져 외할머니 손길을 쫓기 바쁘고 진간장에 찍어먹던 그 맛이라니.....
"인석아,천천히 먹어라. 이 할미가 또 해주꾸마.목 맥히겄다.년석하고서는."
"어머니 애 버릇 나빠지겠어요. 상에 올린 뒤에 주시지요."
'괘안타.따로 챙기놓으먼 안되겄나."
"난 우리 외할매가 제일 좋더라 뭐."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이 할미가 자꾸 만들어 주꾸마."
더러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팥이나 콩,메밀,녹두를 갈아 콩국수나,메밀묵,빈대떡 같은 소박하고 조촐하지만 만드는 정성 하나만으로도 외려 더욱 풍성했던 지나간 시간의 그 성찬(盛饌)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외할머니는 하늘 길 열어 먼 길 가시고,그리운 당신의 이름도 산에 묻고, 더러 기다려주는 이 있는 시골집도 없는, 산다는 건 때로 가열한 다스림으로 홀로 겪어 나가야 하는 목숨 같은 것이나 아닌가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던가.
굽이굽이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은 인간사 그 잡다한 일상에 발목 빠뜨리고 살다가도 불현 듯 치달려간 시골집 들에는 오래 잊고 살아왔던 정겨움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참 많은 재래 농기구나 가재도구들이 사라져 갔지만 아직도 찾고자한다면 더러 남아있던 맷돌들....
윗짝이 달아나거나 깨어지고 아무렇게나 땅에 처박혀 본래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런대로 그것들과 맞딱뜨리는 순간은 쏠쏠한 재미를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맷돌은 지방마다 나름대로 특색을 갖고 있어서 가령 중부의 것은 위 아래쪽 크기가 같고, 남부의 것은 밑짝이 윗짝보다 넓고 크며 곡식가루를 흘러내리게 하는 주둥이 모양의 귀때가 있다.
또한 시대와 지역과 구실에 따라 홈만 있는 것,홈을 둘리지 않은 것,굽이 붙은 것이 있는가 하면 굽이 없는 것,귀때가 있는 것,손잡이가 옆구리에 있거나 머리쪽에 있는 것 등 저마다 화강석이나 청석,화산석 같은 돌의 질감에 따라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각종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해놓아 단순히 낟곡식을 가는 도구 이상의 장치미와 세련미가 뛰어난 것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년시절 온몸을 가려두르던 그 기쁜 먹거리를 장만했던 외할머니의 맷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더러 맷돌이 남아 있다손 그것들은 이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풍요롭던 시간의 추억속에서나 존재할 뿐이었다.
단순하고 우직하게만 보이는 맷돌.그런 것들에 눈 주어 즐겨 생활에 쓰고자 하기에는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너무 팍팍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탓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마뜩찮은, 그 무엇이 이토록 나를 아쉽고 안타깝게 하는 것이랴!
따지고 보면 각종 믹서기나 카트기와 녹즙기를 통해 5분만 하면 원하는 것을 구하는 이 좋은(?) 세월에 무어 그리 애닯아 자꾸 구태의연해지는가. 하지만 끝내 기억하고 싶다. 이제 뉘 있어 아쉽고 그리운 날의 정성과 입맛을 되돌릴 것인가?
예전,그리도 멀지 않은 예전에 어느 이름 모를 석공 있어 지극히 단순한 구실과 쓰임을 위해 무모하게 돌을 쪼아 맷돌을 만들었듯, 만드는 기쁨 하나로 왼종일 즐거운, 노동의 맛깔스럽고 정성 밴 손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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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추를 닦으며

밤늦어 매장 문을 닫고 돌아서는 길, 잔뜩 노곤하여 킬킬거리는 경유차가 마냥 미더운 건 그동안 적당히 길이 들고 차체에 익숙해진 때문일 것이다. 하긴 새로 뽑아 이 년 남짓만에 구만 킬로 탔다면 어지간히는 돌아다닌 셈이었다.

하지만 장사를 위해 몰두해온 하많은 시간동안 혹 나는 너무 많은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집에 들어 판매전표를 확인하고, 새로운 고객카드를 훑어보고, 현금과 카드를 분리해내곤 하는 반복된 일상이 오늘따라 영 마뜩찮다.

사실 박가분이란 상호를 내걸고 화장품판매업을 한 지도 어느덧 반 십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6년 전 시지동에 첫 매장을 낸 이래 하루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달려온 것은 나름대로 잘해보고자 하는 조그만 욕심 때문이었다. 어쩌다 화장품회사 영업사원이 되어 십 년 넘게 화장품 관계 일에 매달리다 개인 장사를 한 터라, 내 뒤에는 메이커 직원 출신이라는 그 쓰잘데 없는 꼬리표가 늘 따라 다녔었다.

어디 없이 그러하겠지만 장업계라고 별다르랴?

장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 라거나 오 전을 보고 십리를 간다는 말의 깊은 뜻을 되새겨야 했고, 적당히 닳고닳아야 하건만 그러지 못해 머쓱했고, 그 바닥에 내쳐지지 않고, 온전히 바로 서기 위해 늘 허위허위 안간힘 해야 했다.

그런 날. 어쩌다 마음이 한자리 못 앉아 있고 몹시 상심하고 삽삽한 날.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태무심하고 버려둔 저울추를 꺼내들곤 했다.

그게 언제던가? 벌써 십수년도 전에 내가 한 일은 대리점에 화장품을 쥐어 앵기는 일이었다. 적정물량이 요구되는데도 때론 과도한 물량을 쏟아 붓고, 시장 점유율 경쟁을 위해 리베이트를 미끼로 덤핑을 치고, 대리점 손실보전을 위해 빤한 지원을 내걸고....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면서 대리점은 조금씩 거덜나고 나는 조금씩 능력(?)있는 영업사원이 되어가고....어쩌면 그런 세월이 풍문처럼 지나가고....

아마 예천이었을 것이다.

예전 떡을 눌러 갖가지 문양을 만들어 내곤 하던 ,박달나무나 발간 대추나무로 만든 판인 김한량(?)이 떡살을 처음 본 것이. 적당히 손때묻고 녹녹치 않은 관록이 느껴지던 그것은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고기가 있고 국화나 갖가지 꽃 모양을 이중 삼중으로 속 깊이 파들어 가며 왼갖 문양을 조각한, 그 빼어난 솜씨를 우리 시대 어느 장인 있어 감당하고 견주랴 싶었다. 왜 김한량이 떡살로 부르는 지 아무도 몰랐건만, 내 즐거운 상상은 저 봉화나 법전,영주,감천,예천을 들고났던 동가식 서가숙의 김씨 성가진 한량 같은 장인 있어 내 온 가슴 지지 눌러 전율 같은 그리움조차 심어주던 것이었다.

떡살에 눈이 가자 이번에는 무쇠를 두드리거나 놋쇠로 만든 옛 자물통이 들어오고 다시 장석좋은 반닫이나 맷돌이 다가서고 먹통이 안겨오고 마침내 저울추였다.

재미있었다.
요모조모 귀때기 반질반질 윤이 나 한 세기는 족히 넘겼을 돌 저울추 우연히 하나 얻어 걸러서는, 세상살이가 아무 인연 없이 무심하게 맺어지고 이름지어지는 게 아니다 싶었다. 조선시대 이름 없는 어느 보부상 발품 팔아 오백리, 천리를 오가며 그가 등짐져 나른 삶의 무게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이 미치자 크고 작은 갖가지 저울추가 그렇게 귀하고 정겨울 수가 없었다. 우리네 삶의 이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달기 위한 수고로운 직분은 차치하고, 모든 저울추들은 그 각양각색 제가끔의 모양과 용도나 구실이 흥미를 주기에 족했다.

생각건대 저울추에 혹했던 시간들은 참 좋았다.상주,점촌,영주,안동,예천,의성을 오명가명 돌아서면 월말이던, 내 할당량의 판매목표와 발 밑에 차오르던 월말수금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단순한 흥미와 심심풀이 파적같은 시작이었지만, 그 시절 눈꼽 비비듯한 단조로움과 화장품영업이라는 엉뚱한 길을 가고있는 뜻한 외로움은 이제 은밀하게 키워나가는 병 같은 것이었다.

이제 일주일마다 행해지던 출장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막돌을 무명천으로 싸매거나, 종이로 꼰 노끈으로 돌을 감싸거나, 구멍 뚫린 돌을 이용하거나, 지극정성으로 돌 꼭지를 만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도자기나 사기나 무쇠로 만든 저울추들 앞에서 난 어떠했던가? 늘 짧은 출장비에서 여투어내는....구멍 뚫린 주머니, 허름한 여인숙에서의 잠자리나, 한 두끼로 달래곤 하던 시장끼도 간단없이 잊혀지곤 하던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조금 욕심이 생기기도 했는데 경주 옛 절터에서 나온 ,언감생심 표면에 12지상을 새긴 신라시대 청동 저울추거나 황동 또는 놋쇠로 만든 ○량 ○근이라고 무게의 수치가 새겨진 고려 저울추 하나쯤 구색으로 갖고싶다는 욕심을 갖기도 했었다.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십수년 전. 장안평 이름 모를 가게에서 만났던 이조 분원 가마에서 구웠음직한 백자 저울추 크고 작은 두 점, 못내 돌아서며 내 주머니 속으로 선선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던 그때가 가을이던가 겨울 초입이었던가? 눈에 밟히는 아쉬움을 애써 지우면서 순무식하게 생긴 대로 깍은듯한 먹통 하나 사들고 돌아서던, 때로 산다는 건 저울추를 사 모으듯 추억을 하나씩 가슴에 새기는 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박가분 매장문을 연 지 오늘로서 딱 6년.

일찍이 성경 말씀에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했건만 나는 얼마나 장사꾼의 도리에 충실하며 마음의 부자로 살기를 원했던 것일까?

비록 분원가마나 신라시대 조각이 새겨진 저울추는 못 가졌더라도, 소박하고 단순하며 조잡한 대로 목화솜이나 머리카락이나 약재를 달던 우리나라 서민들이 쓰던 대저울 같은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대나무에 눈금이 새겨진 지렛대 위에 추를 평형이 되게 움직여 눈금을 읽어 무게를 알 수 있었던 대저울의 구멍 뚫린 돌이나 실로 짠 주머니의 돌 같은, 하찮아 보이지만 공평한 돌 곧 공평한 추 같은 삶이었다면 참 좋겠다.

하루일 을 마감하고 자정 넘어 조심조심 저울추를 닦으며 나는 아무래도 저울로 물건을 다는 장사꾼이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혹 눈금반(盤)이나 저울대에 새긴 점 또는 금을 잘못 읽은 적은 없었던가. 눈금숫자를 잘못 새기거나 표준 추가 아닌 사제 추를 쓴 것은 아닌가. 내용물을 바꾸거나 무거운 것 대신 가벼운 것 주거나 정말 실수로라도 저울눈의 위치와 간격을 틀리게 한 것은 아닌가. 어쩌면 메이커 측과 적당히 짜고 협잡하거나 소비자를 속인 것은 아닌가.

알고 보면 개화기 이후 저울을 보급하고 취급하는 일은 정직하고 신용 있는 상인의 명예로 여겨졌다는데.....저울추를 닦으며 아무래도 난 많은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재물이라는 게 평등하기가 물과도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아야 하거늘 아무래도 내 지난 6 년 간 목숨의 풀무질, 화장품장사는 이제부터가 그 시작이어야 할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어느덧 수십 개나 모인 저울추를 닦다보면 장사꾼으로서 거듭나 내가 가야할 먼 길이,저울추만큼이나 무겁고 소중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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