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는 허둥거리고, 조금은 못 미더워하다가 도착한 천주교 공원묘지 장미공원은 낯설게만 보였다. 전날 석간신문을 통해 미리 장지를 확인해 둔 터였지만 그이의 죽음이 영 실감나지 않아 허방을 디디듯 자꾸 발이 헛놓였다. 잘 닦여진 산길을 따라 채 5분도 못 가 야트막한 야산 구릉에 장례행렬이 모여 있었다.몇몇의 두건과 상복이 간단없이 이어지는 곡소리와 성가소리에 겹쳐 실루엣으로 다가서는 순간 그대로 까무룩 잠이라도 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뜩해지는 정신을 가누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아는 얼굴 한사람을 찾았다.

인사말은 없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건만 선생께서는 영 못 알아보신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예의 그 갈색톤 베레모를 쓰신 선생의 금테안경 속 두 눈은 감긴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옆에서 보기에 감히 범접 못할 분위기 탓으로 조용히 장례절차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상제들의 곡소리가 이어지고 끊기기를 여러 번, 하관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광중은 깊고 아득해 보였다. 그이의 친구 엄 선생의 모습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풍수를 대신해서 산역꾼들을 지휘하고 다시 방위를 맞추어보는 모양이었다.

다시 상제들의 곡소리가 이어지고 영구를 운구하여 하관을 했다. 공포로 영구 위를 닦고 명정을 덮고....횡대를 깔고...상주의 상복 한자락에 흙을 담아 광중에 쏟고...마침내 흙을 덮기 시작했다.

츠르르륵... 상주의 상복 끝에서 영구 위에 떨어지던 흙을 보면서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거,바람 불고 눈비 내려 잠시 돌아가는 안식의 집인지도 모르겠다. 한세상 저물고 고단하여 이제 온갖 잡다한 인간사 벗어두고 홀연히 먼 길 홀로 떠나는 일인지도 진정 모르겠다.

장지를 뒤로 하고 장미공원 식당으로 돌아오는 길 고인을 위한 교우들의 기도소리가 오래 귓전에 머물고 있었다.

항상 불쌍히 여기시고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천주여,오늘 이 세상을 떠나게 하신... 거룩한 천사들로 하여금 그를 맞아...지옥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어떻게 올 시간이 있더나?
예,서울서 근무하다 대구 내려와서도 문병 한 번 못 가 보고 부주나 좀 할까 하고...
선생님을 모시고 들어선 식당 안은 다소 분답하고 협소했지만 그런대로 소고기 국밥과 소주 한잔을 나눌 만했다.
운사께서는 어떻게 시간이 되던 모양이지?
예,총장님. 제가 평생에 세 번 싸웠는데 그 중에 한 번을 재행이와 싸워 제가 안 이겼습니까?
자랑스러운 듯 가죽장갑을 손끝에 바투 끼는 성 화백의 웃음이 대머리 조짐이 보이는 성긴 머리털에 어울리잖게 천진스러웠다.
어허, 그래...껄껄껄...재행이한테 이기는 게 보통일이가. 한번은 가보세에서 권기호 하고 붙었는데 왜 권기호 그 친구 해병대 기질이 있어 가지고...

상가는 떠들썩해야 하고, 화톳불을 마당이나 안마당에 펴고 밤샘을 하면서 술이나 음식을 들며 상주의 슬픔을 잊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건만, 장사 다 끝난 마당에 아는 얼굴이라곤 두 사람밖에 없는 공원 식당에서의 술자리는 썰렁했다.

엄지호 그 친구가 처음부터 수고가 많았더구만.
예, 저도 재행이형 쓰러졌다는 소식도 듣고 엄지호 그분이 모금운동도 펼치고 있는 것도 알았는데...
진작 살아 생전 한번 찾아뵙지 못한 죄밑이 되어 난 엉뚱한 소리나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문인들이 대봉성당에는 좀 왔던가요?
음,몇이 왔더군. 장례미사 끝나고는 안 보이더구만.
좀 그런데요. 아는 얼굴이 너무 안 보이니까.
아, 먹고 할 일 없는 놈들만 안 왔나. 운사, 니도 할 일 없제?
선생님 저는 혹시 운상할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추리닝 챙겨 입고...
성 화백은 다시 가죽장갑을 바투 꼈다.
재행이 그놈. 애증이 함께하는 놈이야.

대학총장으로 퇴임하시고 할 일(?)없는 선생님께서는 그예 말이 없이 담배를 태워 무셨다.선생님으로서는 참 많은 사랑과 미움의 시간들이 사라지는 담배연기 너머로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재행이 형의 모습은 무엇보다 붉게 술기 오른 코와 함께 왔다.그리고 격렬한 어투나 독설이 생각나곤 한다.그러면서도 일면으로는 십 년이나 틈이 지는 후배에게 각종 시집이나 잡지책을 몇 년에 걸쳐 보내주던 자상함이 있었다. 물론 내 경우에는 책을 받았다고 전화 한 통 없었는데도 형은 책 보내주는 일을 거르지 않았었다.

한번은 회사일로 출장을 갔다가 영덕의 시골 2층 다방에서 우연히 형을 만났었다. 형은 야,너 오랜만이다 어쩌구저쩌구 막무가내로 강구 바닷가 횟집까지 끌고 갔는데 거기엔 시를 쓰시는 이장희 선생님과 수필을 쓴다는 군청의 육 선생이 있었다. 불콰하게 권커니 잣커니 억병으로 취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장희 선생의 따님이 괜찮다며 선도 한번 보고 그집에서 자고 가라며 붙잡는 통에 차도 없는 그 밤에 도망치느라 애를 먹었었다. 또 언젠가는 반월당 부근에서 아침 여덟시경에 술 한잔 하고 가자고 잡는 통에 난감해 한 적이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어느해 여름 범어네거리 부근 식당 앞에서 웬 여자분과 함께 있는 형을 만났는데 괜찮다는데도 기어이 데리고 가 복어탕에 낮술을 권하는데 자리가 어색하여 꽤나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강제로 모 잡지에 글을 쓰도록 기자를 보내기도 하고, 수필을 한 편 썼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어디에 보내 당선되면 문협에 가입하라는 얘기를 하지를 않나... 하여간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는 그런 이미지들이 이제와 때로 얼마나 큰 그리움이며 정겨움인가?

따지고 보면 당신 살아 생전 몇 개의 문학상을 받고,문인협회의 부지부장을 하고 따위가 살아남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은 떠나고 떠나신 지 몇 년이나 된지도 모르고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늦은 밤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다가,아닌 밤 홀로 잠 깨어 전화기나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날 이십 년도 더 오래 전 내 대학교 2학년 시절. 대명동, 지금은 없어진 그 2층 목조건물 조기섭교수 연구실 앞 삐걱이던 계단에서 받은 형의 첫시집을 펼쳐 보면 거기 형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숨어 있는 듯하다.

마리아 에메리따 수녀가 흰 말을 타고 가버렸다. 무릇 모든 일체가 부서지고
나는 누워서 수백리 밖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문비나무의 슬픈 일엽이엽
이 지고 있었다. 아, 나의 무지도 그 끝을 내리고 속절없는 가을의 눈시울이 적셔지고 있나니.....

_이재행 시 <형용사의 가을 >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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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맷돌]
작정하고 나서지 않은 다음에야 쉬 짬을 낼 수 없는 우리네 일상이지만 어쩌다 시골집 우물이나 뒷마당에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어수룩하고 무딘 손끝으로 돌을 쪼아 만든 그리운 마음들이 있음을.
오랜 세월 물이끼가 덧앉고,더러는 키 낮은 채송화,맨드라미,국화 따위 아무렇게나 피고 지듯 태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것.하지만 어줍잖은 꾸밈새나 모양새로도 끝내 정겨움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
'맷돌'은 흔히 물에 불린 곡식을 갈거나 가루로 만들어 쓰던 기구이다.아래 위 두 개의 돌을 겹쳐 아랫돌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춰 사용했다. 또한 윗돌에는 손잡이 나무를 박을 구멍이 있고 갈아야 할 곡식을 넣는 주구가 뚫려 있었다.

둘러주소 둘러주소
정둥 같은 팔다지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소라 같은 주먹으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홰홰칭칭 홰홰칭칭
둘러주소 둘러주소

외할머니는 대청에 초석을 깔고,그 위에 맷돌방석을 놓고,다시 맷돌을 앉힌 다음 맷돌노래와 함께 녹두나 밀을 갈아내시곤 했다.잘 갈아져 나온 녹두가루나 밀가루는 다시 녹두전이 되고 수제비가 되어 내 입맛을 당기게 하던 그런 기억의 앙금들은 이제와 어제 일처럼 마냥 그리웁기만 하다.
가루를 곱게 내기 위해 돌돌돌돌 곡식을 애벌로 갈아,몽근가루는 받아 내고 서너 번이나 들들들들 갈아낸 다음에는,마침내 몽그라진 가루가 쌓이던 정경이 눈에 선하기만 한데......
어쩌다 빈대떡을 만들던 날은 또 어떠했던가.
맷돌에 타개어 물에 불린 녹두를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벗기고,거피한 녹두를 물을 조금 부어 맷돌에 넣고 되작하게 갈고,돼지고기는 훗추가루와 마늘 다진 것과 소금으로 양념하고,배추김치는 총총 채썰고,파는 어슷하게 썰고,고추는 동글동글 썰고,소금에 간한 녹두반죽은 갖은 양념한 돼지고기와 버무리고,뜨겁게 달구어진 조선 솥뚜껑에는 돼지기름이 둘러지고, 마침내 한 국자씩 떠낸 반죽은 파나 고추를 얹어 노릇노릇하게 지져지던 것이었다.
노릇해진 빈대떡을 뒤집어 천천히 익히기도 전에 내 마음은 지레 바빠져 외할머니 손길을 쫓기 바쁘고 진간장에 찍어먹던 그 맛이라니.....
"인석아,천천히 먹어라. 이 할미가 또 해주꾸마.목 맥히겄다.년석하고서는."
"어머니 애 버릇 나빠지겠어요. 상에 올린 뒤에 주시지요."
'괘안타.따로 챙기놓으먼 안되겄나."
"난 우리 외할매가 제일 좋더라 뭐."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이 할미가 자꾸 만들어 주꾸마."
더러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팥이나 콩,메밀,녹두를 갈아 콩국수나,메밀묵,빈대떡 같은 소박하고 조촐하지만 만드는 정성 하나만으로도 외려 더욱 풍성했던 지나간 시간의 그 성찬(盛饌)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외할머니는 하늘 길 열어 먼 길 가시고,그리운 당신의 이름도 산에 묻고, 더러 기다려주는 이 있는 시골집도 없는, 산다는 건 때로 가열한 다스림으로 홀로 겪어 나가야 하는 목숨 같은 것이나 아닌가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던가.
굽이굽이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은 인간사 그 잡다한 일상에 발목 빠뜨리고 살다가도 불현 듯 치달려간 시골집 들에는 오래 잊고 살아왔던 정겨움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참 많은 재래 농기구나 가재도구들이 사라져 갔지만 아직도 찾고자한다면 더러 남아있던 맷돌들....
윗짝이 달아나거나 깨어지고 아무렇게나 땅에 처박혀 본래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런대로 그것들과 맞딱뜨리는 순간은 쏠쏠한 재미를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맷돌은 지방마다 나름대로 특색을 갖고 있어서 가령 중부의 것은 위 아래쪽 크기가 같고, 남부의 것은 밑짝이 윗짝보다 넓고 크며 곡식가루를 흘러내리게 하는 주둥이 모양의 귀때가 있다.
또한 시대와 지역과 구실에 따라 홈만 있는 것,홈을 둘리지 않은 것,굽이 붙은 것이 있는가 하면 굽이 없는 것,귀때가 있는 것,손잡이가 옆구리에 있거나 머리쪽에 있는 것 등 저마다 화강석이나 청석,화산석 같은 돌의 질감에 따라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각종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해놓아 단순히 낟곡식을 가는 도구 이상의 장치미와 세련미가 뛰어난 것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년시절 온몸을 가려두르던 그 기쁜 먹거리를 장만했던 외할머니의 맷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더러 맷돌이 남아 있다손 그것들은 이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풍요롭던 시간의 추억속에서나 존재할 뿐이었다.
단순하고 우직하게만 보이는 맷돌.그런 것들에 눈 주어 즐겨 생활에 쓰고자 하기에는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너무 팍팍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탓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마뜩찮은, 그 무엇이 이토록 나를 아쉽고 안타깝게 하는 것이랴!
따지고 보면 각종 믹서기나 카트기와 녹즙기를 통해 5분만 하면 원하는 것을 구하는 이 좋은(?) 세월에 무어 그리 애닯아 자꾸 구태의연해지는가. 하지만 끝내 기억하고 싶다. 이제 뉘 있어 아쉽고 그리운 날의 정성과 입맛을 되돌릴 것인가?
예전,그리도 멀지 않은 예전에 어느 이름 모를 석공 있어 지극히 단순한 구실과 쓰임을 위해 무모하게 돌을 쪼아 맷돌을 만들었듯, 만드는 기쁨 하나로 왼종일 즐거운, 노동의 맛깔스럽고 정성 밴 손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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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추를 닦으며

밤늦어 매장 문을 닫고 돌아서는 길, 잔뜩 노곤하여 킬킬거리는 경유차가 마냥 미더운 건 그동안 적당히 길이 들고 차체에 익숙해진 때문일 것이다. 하긴 새로 뽑아 이 년 남짓만에 구만 킬로 탔다면 어지간히는 돌아다닌 셈이었다.

하지만 장사를 위해 몰두해온 하많은 시간동안 혹 나는 너무 많은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집에 들어 판매전표를 확인하고, 새로운 고객카드를 훑어보고, 현금과 카드를 분리해내곤 하는 반복된 일상이 오늘따라 영 마뜩찮다.

사실 박가분이란 상호를 내걸고 화장품판매업을 한 지도 어느덧 반 십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6년 전 시지동에 첫 매장을 낸 이래 하루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달려온 것은 나름대로 잘해보고자 하는 조그만 욕심 때문이었다. 어쩌다 화장품회사 영업사원이 되어 십 년 넘게 화장품 관계 일에 매달리다 개인 장사를 한 터라, 내 뒤에는 메이커 직원 출신이라는 그 쓰잘데 없는 꼬리표가 늘 따라 다녔었다.

어디 없이 그러하겠지만 장업계라고 별다르랴?

장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 라거나 오 전을 보고 십리를 간다는 말의 깊은 뜻을 되새겨야 했고, 적당히 닳고닳아야 하건만 그러지 못해 머쓱했고, 그 바닥에 내쳐지지 않고, 온전히 바로 서기 위해 늘 허위허위 안간힘 해야 했다.

그런 날. 어쩌다 마음이 한자리 못 앉아 있고 몹시 상심하고 삽삽한 날.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태무심하고 버려둔 저울추를 꺼내들곤 했다.

그게 언제던가? 벌써 십수년도 전에 내가 한 일은 대리점에 화장품을 쥐어 앵기는 일이었다. 적정물량이 요구되는데도 때론 과도한 물량을 쏟아 붓고, 시장 점유율 경쟁을 위해 리베이트를 미끼로 덤핑을 치고, 대리점 손실보전을 위해 빤한 지원을 내걸고....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면서 대리점은 조금씩 거덜나고 나는 조금씩 능력(?)있는 영업사원이 되어가고....어쩌면 그런 세월이 풍문처럼 지나가고....

아마 예천이었을 것이다.

예전 떡을 눌러 갖가지 문양을 만들어 내곤 하던 ,박달나무나 발간 대추나무로 만든 판인 김한량(?)이 떡살을 처음 본 것이. 적당히 손때묻고 녹녹치 않은 관록이 느껴지던 그것은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고기가 있고 국화나 갖가지 꽃 모양을 이중 삼중으로 속 깊이 파들어 가며 왼갖 문양을 조각한, 그 빼어난 솜씨를 우리 시대 어느 장인 있어 감당하고 견주랴 싶었다. 왜 김한량이 떡살로 부르는 지 아무도 몰랐건만, 내 즐거운 상상은 저 봉화나 법전,영주,감천,예천을 들고났던 동가식 서가숙의 김씨 성가진 한량 같은 장인 있어 내 온 가슴 지지 눌러 전율 같은 그리움조차 심어주던 것이었다.

떡살에 눈이 가자 이번에는 무쇠를 두드리거나 놋쇠로 만든 옛 자물통이 들어오고 다시 장석좋은 반닫이나 맷돌이 다가서고 먹통이 안겨오고 마침내 저울추였다.

재미있었다.
요모조모 귀때기 반질반질 윤이 나 한 세기는 족히 넘겼을 돌 저울추 우연히 하나 얻어 걸러서는, 세상살이가 아무 인연 없이 무심하게 맺어지고 이름지어지는 게 아니다 싶었다. 조선시대 이름 없는 어느 보부상 발품 팔아 오백리, 천리를 오가며 그가 등짐져 나른 삶의 무게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이 미치자 크고 작은 갖가지 저울추가 그렇게 귀하고 정겨울 수가 없었다. 우리네 삶의 이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달기 위한 수고로운 직분은 차치하고, 모든 저울추들은 그 각양각색 제가끔의 모양과 용도나 구실이 흥미를 주기에 족했다.

생각건대 저울추에 혹했던 시간들은 참 좋았다.상주,점촌,영주,안동,예천,의성을 오명가명 돌아서면 월말이던, 내 할당량의 판매목표와 발 밑에 차오르던 월말수금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단순한 흥미와 심심풀이 파적같은 시작이었지만, 그 시절 눈꼽 비비듯한 단조로움과 화장품영업이라는 엉뚱한 길을 가고있는 뜻한 외로움은 이제 은밀하게 키워나가는 병 같은 것이었다.

이제 일주일마다 행해지던 출장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막돌을 무명천으로 싸매거나, 종이로 꼰 노끈으로 돌을 감싸거나, 구멍 뚫린 돌을 이용하거나, 지극정성으로 돌 꼭지를 만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도자기나 사기나 무쇠로 만든 저울추들 앞에서 난 어떠했던가? 늘 짧은 출장비에서 여투어내는....구멍 뚫린 주머니, 허름한 여인숙에서의 잠자리나, 한 두끼로 달래곤 하던 시장끼도 간단없이 잊혀지곤 하던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조금 욕심이 생기기도 했는데 경주 옛 절터에서 나온 ,언감생심 표면에 12지상을 새긴 신라시대 청동 저울추거나 황동 또는 놋쇠로 만든 ○량 ○근이라고 무게의 수치가 새겨진 고려 저울추 하나쯤 구색으로 갖고싶다는 욕심을 갖기도 했었다.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십수년 전. 장안평 이름 모를 가게에서 만났던 이조 분원 가마에서 구웠음직한 백자 저울추 크고 작은 두 점, 못내 돌아서며 내 주머니 속으로 선선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던 그때가 가을이던가 겨울 초입이었던가? 눈에 밟히는 아쉬움을 애써 지우면서 순무식하게 생긴 대로 깍은듯한 먹통 하나 사들고 돌아서던, 때로 산다는 건 저울추를 사 모으듯 추억을 하나씩 가슴에 새기는 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박가분 매장문을 연 지 오늘로서 딱 6년.

일찍이 성경 말씀에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했건만 나는 얼마나 장사꾼의 도리에 충실하며 마음의 부자로 살기를 원했던 것일까?

비록 분원가마나 신라시대 조각이 새겨진 저울추는 못 가졌더라도, 소박하고 단순하며 조잡한 대로 목화솜이나 머리카락이나 약재를 달던 우리나라 서민들이 쓰던 대저울 같은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대나무에 눈금이 새겨진 지렛대 위에 추를 평형이 되게 움직여 눈금을 읽어 무게를 알 수 있었던 대저울의 구멍 뚫린 돌이나 실로 짠 주머니의 돌 같은, 하찮아 보이지만 공평한 돌 곧 공평한 추 같은 삶이었다면 참 좋겠다.

하루일 을 마감하고 자정 넘어 조심조심 저울추를 닦으며 나는 아무래도 저울로 물건을 다는 장사꾼이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혹 눈금반(盤)이나 저울대에 새긴 점 또는 금을 잘못 읽은 적은 없었던가. 눈금숫자를 잘못 새기거나 표준 추가 아닌 사제 추를 쓴 것은 아닌가. 내용물을 바꾸거나 무거운 것 대신 가벼운 것 주거나 정말 실수로라도 저울눈의 위치와 간격을 틀리게 한 것은 아닌가. 어쩌면 메이커 측과 적당히 짜고 협잡하거나 소비자를 속인 것은 아닌가.

알고 보면 개화기 이후 저울을 보급하고 취급하는 일은 정직하고 신용 있는 상인의 명예로 여겨졌다는데.....저울추를 닦으며 아무래도 난 많은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재물이라는 게 평등하기가 물과도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아야 하거늘 아무래도 내 지난 6 년 간 목숨의 풀무질, 화장품장사는 이제부터가 그 시작이어야 할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어느덧 수십 개나 모인 저울추를 닦다보면 장사꾼으로서 거듭나 내가 가야할 먼 길이,저울추만큼이나 무겁고 소중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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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잡는 아저씨


캄캄한 밤중입니다.
대장간이라고 불리는 공방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지하에 있습니다. 남들 다 자는데
아저씨 혼자 깨어 있는 중입니다.
찡겅찡겅 쇳덩이를 두들기는 메질 소리가 요란합니다. 모루위에 놓인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가 조금씩 펴지면서 맛있는 빈대떡 모양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바디기’라고 불리는 빈대떡모양의 쇠판 세 개를 모아 쥐고 다시 달구고 두드려 가장자리를 오긋하게 오그려 나갑니다. 비로소 이제 모양이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놋쇠로 만든 냉면 그릇을 크게 부풀려 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이름하여 ‘이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가리를 만드는 데는 ‘바디기’의 빛깔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이 괄하게 핀 화덕 속에서 바디기의 빛깔이 처음에는 잿빛이었다가 점차 붉은 빛을 띠다, 마침내 분홍빛이 되면 메질을 합니다. 바디기가 분홍색이 되지 않았을 때 메질을 하게 되면 단박에 깨져 어머 뜨거라! 지금껏 한 일이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저씨가 하는 일은 예로부터 한밤에 깨어나 해뜨기 전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싸개질’할 차례입니다. 싸개질이란 ‘이가리’를 불에 달궈서 집게로 잡은 채 계속 돌려 가며 메질하는 걸 말합니다. 비로소 가장자리의 둥근 바퀴가 반반해지고 바닥 살도 얇게 펴지는 것 같습니다. 싸개질이 끝난 뒤에는 물에 담가 강도를 높여 가는 일을 하는데, ‘담금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턱과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허리에 척 걸쳐 둔 수건을 꺼내 땀을 닦습니다. 흘러내린 머리칼은 자꾸 눈알을 찔러 오고, 조개탄 불빛과 단쇠냄새와 뜨거운 열기가 뒤엉킨 풀무 소리가 공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지금 징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부터 자꾸 어깨 힘이 빠지는 것만 같습니다. 징 만드는 일은 전메꾼, 앞메꾼, 선메꾼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박자를 맞춰 가며 해야되는 일입니다. 언제부턴가 불 다루는 일과 메꾼이 해야 될일을 기계가 대신한 뒤로는 도무지 신명이 나지 않습니다.
잠시 하던 일 멈추어 두고, 길게 뿜어내는 담배 연기 너머로 사십 년 저쪽의 일이 그림처럼 떠오르고 있습니다.
“야, 이놈아야. 부채질 그 따우로밖에 몬하겄나. 화덕은 인자부터 니 책임이란 말이다. 불이 그래 시원찮아 갖고는 어디 써먹겠노, 마 치아뿌라.”
열세 살 때 불을 다루는 불메꾼이 된 것은 배곯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도부(행상)꾼으로서 장이 서는 곳을 찾아 다니며 난전을 폈습니다. 아저씨 밑으로는 올망졸망한 동생들이 많았습니다.
아저씨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아침은 굶고 점심은 물 배 채우고 저녁은 건너뛰거나 국수나 수제비로 때우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외삼촌예, 조개탄 더 여까예. 자꾸 꺼질라 캄니더.”
“아따 이놈아야. 손 뒀다 뭐 할끼고. 후딱후딱 부채질 안하고 뭐하는 기고. 등신이맨쿠로.”
더러 퉁바리를 맞고 꿀밤도 먹었지만, 한 주일씩 일해주고 받은 용돈으로 쌀도 팔고 학용품도 사 쓰던게 어제 일만 같습니다.
쩡겅 쩡 쩡거렁 쩡겅 풀무질 소리가 요란할 때마다 공방 안에는 징, 꽹과리, 대야, 요강...등 놋쇠로 만든 그릇들이 그득그득 쌓여 갔습니다.
놋쇠로 만든 그릇은 유기라고 하는데, 구리와 상납이라고도 하는 주석을 섞어 만들었습니다. 예전에 안성 지방에서 일정한 형틀에 주물을 부어 만든 그릇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까 안성맞춤, 안성 유기란 말까지 생겼습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징이나 꽹과리 같은 타악기는 두들겨서 만든 것이라 해서 방짜 유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저씨에게 징만드는 일을 가르쳐 주신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방짜 유기는 함양이 유명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고생은 되었지만 참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징, 꽹과리, 밥그릇, 숟가락, 양푼, 세숫대야, 심지어 요강까지 유기로 못 만드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광경이 있습니다.
마을화관 앞 넓은 공터에는 온 마을 사람이 다 나온 듯 합니다. 일찍 지어먹은 저녁밥 탓으로 아랫배가 더부룩합니다.
지지직직직 석유 먹은 솜방망이 횃불이 기세 좋게 타오릅니다. 가만히 있어도 얼쑤얼쑤 어깨춤이 절로 나옵니다. 에헤에헤야 얼싸 좋구 좋다. 열두 발 상모가 돌아가고, 꽤갱 꽹꽤갱 요란하게 꽹과리 소리가 울립니다. 움찔움찔 자신도 모르게 흥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날 재간이 없습니다. 벌렁 벌러덩거리는 가슴으로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온 동네 사람이 어우러져 돌아가고,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들쩍지근한 땀 기운을 식히노라면, 마을 고사때마다 막걸리를 닷 말씩이나 먹던 오래된 느티나무에는 어느덧 휘영청 대보름달이 걸렸습니다. 그 대보름달 만큼이나 밝고도 맑고 환한 징지징 징소리는 언제까지고 밤하늘로 퍼져 나갔습니다.
꼭 기쁜 일에만 징소리가 울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덩덩덩더쿵 밤이 깊도록 푸닥거리는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한밤의 굿마당에서도 아저씨가 만든 징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시름과 슬픔을 달래 주었습니다.
“니도 내일부터는 메 잡거라.”
“외삼촌예, 정말입니꺼. 인자부터는 화덕에 숯불 피우는 거 안 해도 됩니꺼. 정말입니꺼?”
“무거바서 힘은 좀 들끼다. 인자 좀 배워 봐야제.”
비로소 삼 년만에 이글거리는 화덕 앞에서 쇠를 다루는 메꾼이 되었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쇠방망이가 힘겨웠지만, 웬지 힘이 불끈불끈 솟는 듯했습니다.
다시 또 한 대의 담배를 태워 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건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세월이란 놈 같습니다. 열세 살 어린 소년의 등을 떠밀어 쉰을 넘긴 나이로 만들었습니다.
놋그릇과 방짜 유기가 신나게 팔려 나갔던 것은 6.25 전쟁이 일어난 뒤였습니다. 놋그릇을 판 돈이 모이고 다시 모여 집이 되고 논이 되고 밭이 되었습니다.
신나는 것도 잠시뿐, 연탄 시대가 열리면서 놋그릇들은 연탄 가스에 맥을 못추고 외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값싸고 녹 안스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만 갔습니다.
징이나 꽹과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촌을 춤추고 노는 곳으로 만든다는 이유로 나라에서 농악을 금지시켰습니다.
“야야 이놈아야. 내사 인자 나이도 묵을 만큼 묵꼬, 힘도 부치고 몬 해먹겠데이. 천날 만날 맹글어 봤자 사주는 사람도 없고...”
“외삼촌예. 암만 그렇다케도 우예 징 만드는 걸 치아 뿔깁니꺼. 내사 그래는 몬 하겠심더. 계속 만들김니더.”
“하기사 내도 니가 내 뒤를 잇겠다카이 정말 고맙데이. 그래 인자 이 공방은 니 해뿌라.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다 니끼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불메꾼이 된 지 이십 수년 만이었습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장장이의 우두머리인 대장이 되는 동시에, 외가 쪽으로 이백 년 가까이 내려오던 유기 만드는 전통이 이저씨에게 물려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담배를 피워 문 아저씨의 입술이 가늘게 떨려 오고 있습니다. 참 바람같고 눈 깜짝할 사이인 것 같은데, 벌써 네 번이나 강산이 바뀌었습니다. 유기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아저씨 밑에서 일 배우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결국 열 군데가 넘던 유기 공방이 김천과 함양에 하나씩만 남게 되었습니다.
좋은 시절에 모아 둔 돈도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는 이 없던 징 만드는 일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꾸 집안은 기울어져 갔습니다. 오로지 좋은 징 하나 만들기 위해 깨고 주무르고, 눈으로 쇠를 살펴보고 손으로 느끼고 귀로 분별하는 데 밭이 사라졌습니다. 논이 사라졌습니다. 집이 사라졌습니다.
“아부지예, 내일꺼정은 공납금 내야 함니더. 자꾸 미루키만 미루코 인자 참말로 챙피해서 학교 안 갈랍니더...”
“이놈의 자슥아, 누가 그따우 소리하라 카더나. 이 애비가 우야든지 니를 공부시킬끼니까...”
“보이소 인자 우리도 징 맹그는 거 치아 뿌고 남의 땅이나 붙이 먹읍시더.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못 가르칠 짓 무에 그리 미련이 많은교...”
“이놈의 여편네가 무신 소리 해쌌고 있노. 내사 우야란 말이고...배운 도둑질이라고 내사 할 줄 아는 기 징 맹그는 거밖에 더 있겄나. 내사 마 빌어먹더라도 끝을 볼끼다 마. 열씸이만 하모 우째 궁리가 안 생기겄나.”
“아이고 이양반요.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랬다 케씸더. 누가 맹글어 돌라카는 사람도 엄는데 자꾸 미련도가 우야겠단 말인교. 참말 억장이 무너지고 답답심더...”
정말 옛말처럼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고,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나라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촌도 이제는 잘 살아 보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땀 흘리며 마을 길도 넓히고 오래된 집들도 편리하게 고쳐 나갔습니다. 자연스럽게 농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농악을 통해 사람들은 힘든 일을 잠시 잊었으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덕분에 아저씨의 징이나 꽹과리도 막 팔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담배 맛이 너무 씁니다. 필터까지 타들어 온 모양입니다.
‘담금질’이 끝난 징을 갖고 아직도 거쳐야만 될 과정이 남았습니다. 징이라고 했지만 바르게 얘기하면 징으로서의 형태만 갖추었지 아직 징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사십 년 이상을 징 만드는 일에 바쳐 왔지만 아저씨는 늘 부끄러웠습니다. 징 소리가 마음에 쏙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각 지방마다 징소리가 달랐습니다. 사는 고장에 따라 산 모양이 틀리고 풍습이 다르고 말씨가 차이나듯, 징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달랐습니다.
중부 지방의 징소리는 경쾌하고 흥겹게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가냘픈 뒷소리가 굽이굽이 출렁이며 길게 이어졌습니다.충청도 징 소리는 괄괄거리면서도 엷고 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민속 경연대회에 어울리는 전라도 징 소리는 육중하되 짧게 끌리다 땅으로 잦아드는 운치 있는 소리였습니다. 또한 경상도 징 소리는 태산같이 육중한 소리가 길게 밀려가다가 하늘로 치솟는 황소 울음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경상도 징 소리를 제일로 쳤습니다. 얼룩빼기 황소 울음이 경상도 징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메에에 울다가 뒤끝을 쳐 올라가는 황소 울음속에서 자신의 징 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저씨는 김천의 장날을 찾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일장이 서면 시 전체가 장바닥이 되곤 했지만, 가장 활기를 띠는 곳은 단연 쇠전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우시장만큼 사람이 들끓는 곳도 없었습니다. 많을 때는 하루 거래되는 소가 오백 마리에 이르곤 했습니다. 예전에 횡성 쇠전과 수원 쇠전이 크다고 했지만, 그 역사와 규모 면에서 김천 쇠전이 으뜸으로 꼽혔습니다.
아저씨는 눈에 불을 켜고 소장수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당신 자신이 만든 징 소리를 황소 울음에서 찾고자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쇠전을 누비고 온 날은 날밤을 꼬박 새우며 징을 만들었습니다.
징만드는 마지막 공정은 ‘울음잡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길쭉하게 튀어나온 독특한 모양의 곰 망치라는 것으로 담금질이 끝난 징 모양의 바닥을 계속 쳐 나갔습니다. ‘살을 편다’는 것으로서 징 바닥의 두께가 고르게 되도록 골고루 펴 나갔습니다. 살이 잘 펴진 다음에는 다시 징의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 울음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울음잡기’는 연륜이 깊은 대장장이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아저씨는 곰 망치로 셀 수 없이 징 바닥을 쳐 가며 소리를 듣고 다시 징 바닥을 두들겨 나갔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소리가 잡히면 그것을 ‘풋울음’이라고 불렀습니다. 풋과일, 풋고추, 풋사랑...이라는 말처럼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어설픈 상태인 것입니다.
아저씨의 곰망치질은 다시 셀 수없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징을 쳐보고는 다시 곰 망치질을 하고 다시 쳐 보아도 아저씨가 바라는 황소 울음은 끝끝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저씨의 징 만드는 일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우리 것을 찾자는 움직임들이 아저씨 같은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옛 소리를 다듬는다. 징 만들기 40년...’
‘징 제작 국내 일인자. 깊고 긴 여운이 징소리의 생명...’
‘구리와 주석을 160(16냥)대 45(4냥 5돈)의 비율로 섞어...불순물 조금만 섞여도 제소리가 안 나...’
“징의 조율사, 김천 방짜 유기의 마지막 장인OOO씨....”
자고 나니까 유명해졌다는 말은 아저씨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전국의 신문에 아저씨 이야기가 굵직굵직한 기사로 나고, 아저씨의 얼굴은 다투어 대문짝만하게 실리곤 했습니다.
방송국 프로듀서들도 뒤질세라 카메라 기자와 함께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캬, 그림좋구만. 그걸 ‘이가리’라고 했던가요. 집게로 잡고 돌리면서 그만 할 때까지 계속 치세요. 자, 이번에는 불구덕이라고 합니까. 거기 화덕 앞에서 천장 쪽을 쳐다보면서...예, 그렇게 동작을 취해서...좋습니다. 좋아요...”
“이번에 아까 했던 얘기 있지요. 그 왜 열세 살 때 배고파서 불메꾼이 되었다는...그리고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큐 사인이 떨어지면 카메라 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어느덧 아저씨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날 쇠전에 가게 되면 텔레비전에서 봤다고 악수를 청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시에서는 우리 것을 지킨 점을 칭찬하여 문화상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문화재 관계 일을 하는 사람들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도 지정 받았습니다.
다 타 버린 꽁초를 손끝으로 퉁겨 화덕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제 잠시 곰망치질을 멈추고 징 바깥쪽에 보기 좋게 ‘상사’라고 하는 나이테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습니다.
징의 굽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맨 다음 다시 곰 망치로 두들겨 ‘제울음’을 잡으면 마침내 하나의 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닌데, 사실은 이게 아닌데...아저씨는 자꾸 도리질을 칩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징을 두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들면 떠들수록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신문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장인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징을 자꾸 만들다 보니까 우리꺼라는 애착이 생겨서...”
“이 시대 장인으로 사명감이나 긍지 같은 게 있다면...”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전수를 해야 할 낀데 배울라카는 사람도 없고 사명감과 긍지를 가지고 징을 죽을 때까지 만들어야...”
아, 그러나 아저씨는 자꾸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끝내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장인 정신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소리는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귀동냥한 얘기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동안 아저씨 자신은 먹고 살기에 허겁지겁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 이즈음입니다.
얼마 전 아저씨는 김천의 직지사라는 천 년이나 된 절에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예불 시간에 맞춰 울려대던 그 웅숭깊은 종소리를 들으며 아저씨는 자꾸 반성을 했습니다.
아저씨가 만든 징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던 소리였습니다. 산사에서 우연히 들은 직지사의 종소리에는 꾸미지 않은 자연의 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의 온갖 소망과 믿음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아니 그 소리는 모든 인간의 더러운 욕심과 다툼을 꾸짖으면서 어쩔 수 없는 근심거리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커다란 힘이 있는 듯했습니다.
직지사 종을 만든 천 년 전의 어느 장인은 지금의 아저씨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시에서 문화상을 받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울음을 잡아가는 아저씨 얼굴이 잠시 조개탄 불빛에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쉼 없이 곰망치질을 해 가면서 징을 쳐 보지만 징소리가 아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이럴까. 오늘 따라 정말 왜 이럴까?
갑자기 일전에 어느 교수님한테 들은 얘기가 벼락치듯 생각났습니다. 이름은 잊었지만 중국에 살던 옛사람 누군가는 바른 가야금 소리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대꼬창이로 찔러 버렸다고 했습니다. 간사하고 악하며 헛된 것을 보는 눈을 포기해 버리자 소리를 듣는 귀가 밝아져 가야금의 달인이 되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하, 그걸 왜 진작 몰랐던가?
아저씨도 마음의 눈을 수도 없이 찌르고 또 찔렀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오르내리며 잠시 우쭐했던 마음을 찔렀습니다. 문화상을 받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고 으쓱했던 자만심도 찔렀습니다. 이제 비로소 아저씨의 울음잡기는 끝나고 처음 듣는 듯한 징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징지징 징징 직지사의 종소리처럼 맑고 밝고도 힘찬 그 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밤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자다가 부시시 눈을 비비며 한밤중에 듣게 된 그 소리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벅찬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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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 있는 풍경


땡땡땡 땡땡땡땡... 요란하게 울려대는 타종소리가 귓전을 파고듭니다.
곧 열차가 지나갈 모양입니다. 왠지 오늘따라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동작이 굼떠 보이기만 합니다. 굳이 나이를 따지지 않더라도 허리가 굽어지는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긴 이십 년 가까이 건널목을 지켜 오다 보니까 어지간히 이력이 붙은 탓도 있지만 곧 건널목을 떠나야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심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단기의 길고 야윈 팔이 서서히 내려와 턱하니 선로의 건널목을 막아 섭니다. 요즈음 들어 철로와 도로가 엇갈린 이곳에 멈춰서는 차량들이 꽤나 많아졌습니다. 선로 아래쪽 마을에 입을 쩍 벌릴 정도로 많은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는 탓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사자재를 실은 덤프트럭이나 포크레인, 레미콘 차량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땡땡땡 땡땡땡땡... 연이어 귓전을 때리던 타종소리가 멎고 수평으로 놓였던 차단기의 야윈 팔이 힘겹게 들려져 하늘 쪽을 향해 곧추 섭니다. 이제 다음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한동안 건널목은 분주하기만 합니다. 자장면이 든 철가방이나 가스통을 실은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재생 재질로 만든 종이박스를 잔뜩 싣고 숨이 턱에 찬 누군가의 리어카가 힘겹게 굴러갑니다. 등교길의 아이들은 몇 명씩 무리지어 가볍고도 힘찬 발걸음으로 학교로 향합니다. 개중에는 출근 시간을 맞추느라 허둥거리는 직장인의 모습도 보이고 다소 낡은 영업용 택시의 클클거리는 엔진소리가 친숙하게 끼어들곤 합니다.
하루 예닐곱 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많은 열댓 번 상하행선 열차가 지나가는 건널목이지만 이곳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어느 오후였습니다. 그 날도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사람들의 얼굴은 저마다의 일로 골똘한 표정이었고 더러는 심심해 죽겠는지 선 하품을 하기도 하고, 넘쳐나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주리를 틀다가 그것도 아닌 사람은 똥마려운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열차가 지나갈 시각에 맞춰 위험을 알리는 타종소리가 요란하게 땡땡거렸습니다. 아마 봄비에 젖어 그 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렸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금씩 물기를 머금고 땅바닥으로 낮게, 낮게만 깔렸나 봅니다. 뒤뚱거리며 천천히 차단기가 내려지고 봉고차 한 대가 선로 위에 사정없이 얼굴을 들이민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무엇이 그리고 급했던지, 열차와 부딪친 봉고는 오십 여 미터나 끌려가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학원에 갔다 오던 아홉 명의 아이들은 이제 다시는 해맑게 웃거나 조잘거리거나 깔깔거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사고 후 돌아오는 봄마다 건널목 길을 따라 노란 개나리꽃이 시샘하듯 피고 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 흩어진 책가방이며 신발주머니, 실내화, 몽당연필의 주인공 얼굴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서 지위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도 안타까운 일은 꼬리를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누구나 아픈 상처에 붕대를 동여매듯 지나간 일은 쉽게 잊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사고 소식은 불쑥불쑥 얼굴을 드러내곤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엔 먼 객지로 아들과 손녀들을 떠나 보내고 그 외로움을 술로 달래던 할아버지가 술 취한 채 철로를 베고 잠들었다가 생명을 앗긴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곧 온다고 하더군. 날 데리러 온다고 했다니깐 그래. 이번엔 며늘아기와 손녀들도 온다고 했지. 암 오고말고......"
아래윗동네 누구를 만나건 아들 자랑에 신명나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장례는 아들과 손녀 없이 동네 사람들에 의해 치러지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사업에 실패한 어느 가장이 열차 난간에 기대어 시름하다가 떨어져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슬픔에 지쳐 있던 어느 누나는 열차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렇게 안타까운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중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로 나갔던 것입니다.
"야야, 부디 편지 자주 하고 선상님 말씀 잘 듣그래이. 그라고 이담에 훌륭한 사람이 될라카몬 부디, 제발 정직하고 씩씩해야 하는기라. 니 밑으로는 뽄보일 동상들이 있다카는 것도 잊지 말그래이......"
이불 보따리와 가방을 꾸려 메고 어른들 손을 잡고 새로운 고장을 향해 떠나가던 그 늠름함과 자랑스러움이라니.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마을의 누군가는 고등학생이 되고 아니 더 커서는 온 마을 어른들의 축복 속에 대학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따, 이놈아가 누구고? 쩌기 삼거리 떡집 아들 아이가. 내사 몰라 보겠데이. 니가 하마 이만큼 컸더나. 길가다 만나도 인사 안 하고 그냥 가뿌몬 정말 모리겠데이."
그들 중 몇 몇은 알게 모르게 부쩍 커버려 나라를 지키는 군인아저씨가 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누군가는 하늘나라로 가고 다치고 하루가 다르게 부쩍 키가 크고 보다 넓은 도시로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생활은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했습니다.
그래도 십 년도 훨씬 전에는 아저씨의 하루 하루가 마냥 심심하고 밋밋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 아저씨의 일이라는 게 기차 들어올 시각에 맞춰 사람이나 차량을 단속하는 일보다는 아이들과의 싸움이 주된 일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철로 위에 못을 놓아두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아저씨가 아무리 말려도 아이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덜컹거리며 열차바퀴가 지나간 레일 위에서 납작하게 눌린 못들은 예리한 칼이 되고는 했습니다. 대개는 육중한 열차 무게에 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잔뜩 눌린 못들이 만들어 내는 형태들은 아이들의 재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보기에는 그런 놀이 자체가 너무 위험한 일이라 기겁을 하고는 했습니다.
'이 녀석들, 게 섰거라, 어딜 도망가느냐......"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혼쭐을 내면서 철로 가까이에서 노는 것을 말렸지만 아이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또 한 번은 멀리 산모롱이로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이는데도 레일에 귀를 갖다대고는 뗄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너무 놀란 나머지 오줌을 다 쌀 지경이었습니다.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붉은 나무깃대를 흔들며 쫓아갔지만 세상에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다는 얼굴로 낄낄거리며 달아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에게 있어 열차는 막연하기만 하고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기대나 희망 같은 것을 실어 나르는 도구였습니다. 아니 장차 커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무작정 열차가 좋았습니다. 어쩌면 열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그 언젠가가 좋아 아이들은 무엇인지도 모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나날이 커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서로에게 묻고는 했습니다.
"니, 저 열차 타고 끝까지 가면 어디 나오는지 아나?"
"몰라. 아마 바다가 안 나오겄나. 바다 위로는 갈 수 없을 거 아이가."
"아이다. 니는 모른데이. 떠났던 자리 다시 오는기라. 지구는 둥글다 안카더나"
가만있으면 질세라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아이고, 이놈아들아. 우예 그리 모르노. 휴전선 안 나오나. 북쪽땅으론 못 가는기라. 와 언젠가 텔레비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 카는 거 못 봤더나?"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판결은 늘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몫이었습니다.
"아저씨예, 이 기차가 어디꺼정 갑니꺼?"
이제 아저씨는 어느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습니다. 무슨 대답이 나올까 맑은 눈동자를 굴리는 아이들 앞에서 가장 어리석은 말이 때로는 가장 현명한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가고 싶은 만큼 가는 거란다. 꿈꾸는 만큼 갈 수 있을거야. 음......,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외가댁까지 갈테고 나중에 커서 선생님이 되고 싶은 아이는 선생님 되는 공부를 가르치고 학교가 있는 도시까지 갈테고......"
뚱딴지 같은 대답에 아이들은 피! 하고 무신 말이 그렇노 어른이 그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도 잠시뿐 구태여 기차가 닿는 곳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곤 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열차를 타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것이어서 먼 남의 나라 일 같이만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열차를 타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을 몰래 가슴에 키우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먼 곳의 친척어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기다리거나, 불현듯 먼 곳에 사시는 외삼촌이나 이모님댁이 그리워 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길고 야윈 팔의 차단기는 내려지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어디로 그렇게 떠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 열차가 지나갈 동안 건널목 앞에 멈추어 서 있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야 씽씽한 얼굴을 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속마음은 열차를 타고 지나가며 누군가 치켜올린 손 인사에 양손을 힘차게 마주 흔들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그런 속마음은 허구한 날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손 흔들어도 마주보고 손 흔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생겨난 궁리입니다.
마침내 아이들 중 누구 누군가는 언젠가는 저놈의 열차를 타리라, 반드시 잡아타고 멋지게 손 흔들어 보이리라. 혼자 결심 아닌 결심을 하면서 이빨을 앙다물어 보곤 했습니다. 건널목을 열차 타고 지나며 여유롭게 가슴도 쫙 펴보고 입가엔 미소도 지어 보여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해 보지만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쉬 오는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저씨는 그런 생각도 안 드는지 늘 여유로운 모습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건널목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잘 다림질한 제복을 입고 금빛 단추가 달린 모자를 쓰고 반질거리는 구두를 신은 모습이 멋있다는 느낌은 모든 아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의 하루하루가 제복처럼 멋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늘 햇빛 좋고 맑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억수 장마지려는지 장대비가 뿌리는 날이면 차단기 앞을 지켜 선 아저씨의 몰골은 금세 후줄근하게 젖어 볼품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은 그대로 살아있는 눈사람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어쩌면 아저씨에게 있어 건널목지기 일이란 건널목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열차와의 충돌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약속이며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날을 하루같이 오고 가는 열차와 함께 보내면서 하루가 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아저씨건만 이제는 조금 쉬셔야 할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꼭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장난을 치던 선로가엔 개나리 노란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 커버려 소식 없지만 오래 전에 보았던 아이들 중의 하나가 불쑥 물음을 던지는 듯합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
"응, 본역에서 차량정비 하다 조금 다쳤단다, 건널목 일은 할 수 있겠더라. 그래서 너희 개구쟁이들 지키려고 왔지. 너희들 잘 커서 열차 타고 가고 싶은 곳 갈 수 있을 때까지 말야."
"얼마나 커야 되는데요."
"사실은 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 커져야 하는 거란다. 마음이 큰 사람은 멀리까지 볼 수 있고 넓은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거란다."
"마음이 커진다는 건 어떤 거예요."
" 음!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낸 나무들 몸에 돋는 초록 이빨 같은 것이라고 할까? 날마다 푸르게 되고 무성하게 자라는 잎사귀 같은 거란다."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는 아저씨의 두 눈이 자꾸 침침해 오고 있습니다. 예전 그 좋던 시력으로 칙칙폭폭 증기 폭발음을 내며 먼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증기 기관차의 모습을 발견해 내곤 맘 설레던 일도 이제는 한갓 추억이 되었나 봅니다. 육중한 몸체로 기적소리와 흰 수증기를 뿜어내던 증기 기관차도 이제는 철도박물관이나 어린이 대공원에 전시용으로나 보관되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디젤 기관차에 밀려난 증기 기관차처럼 아저씨의 건널목지기 일도 이제는 끝내야 할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안경을 벗어 몇 차례 안경알을 닦고 써보지만 흐릿해지는 눈앞은 좀처럼 맑아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철도 일에 몸담은 지 사십여 년이 되었지만 정년퇴직까지의 마지막 이십여 년을 건널목지기로서 보내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혹 동네 사람 누군가는 그렇게 얘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색이 그래도 철도밥을 사십 년이나 먹었는데 하다 못해 역장은 못하더라도 건널목지기로 마쳐서야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아저씨로서는 오히려 그래서 더욱 스스로에게 대견한 생각을 품게 된 요즈음입니다. 보다 건강하고 젊은 후배에게 이 건널목 지키는 일을 넘기면서 그래도 자신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덧 아저씨로서는 마지막으로 건널목지기 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밤 열 시. 마지막 열차를 보내고 나면 다음 날엔 본역에 정년퇴임 신고를 하러 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아저씨가 지켜 선 가운데 차단기가 내려지고 땡땡땡 땡땡땡땡... 변함없이 타종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고 이윽고 열차가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까부터 자꾸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끔벅거리던 아저씨는 마침내 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 예전의 장난꾸러기들이 이제는 당당한 청년이 되어 창마다 하나씩의 등불을 켜들고 보란 듯이 마구 흔들어 대는 것을.... 그 하나씩의 등불은 오롯이 아저씨의 몫으로 쏟아지는 지상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같이만 보였습니다.
스치는 불빛에 드러난 안경테 속에 언뜻 물기가 비쳤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저씨의 환한 미소가 오랫동안 피어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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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17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어릴 적 동네에 이런 건널목이 있었어요. 지금도 있더군요.
옛날 생각에 잠시 젖었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