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추를 닦으며

밤늦어 매장 문을 닫고 돌아서는 길, 잔뜩 노곤하여 킬킬거리는 경유차가 마냥 미더운 건 그동안 적당히 길이 들고 차체에 익숙해진 때문일 것이다. 하긴 새로 뽑아 이 년 남짓만에 구만 킬로 탔다면 어지간히는 돌아다닌 셈이었다.

하지만 장사를 위해 몰두해온 하많은 시간동안 혹 나는 너무 많은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집에 들어 판매전표를 확인하고, 새로운 고객카드를 훑어보고, 현금과 카드를 분리해내곤 하는 반복된 일상이 오늘따라 영 마뜩찮다.

사실 박가분이란 상호를 내걸고 화장품판매업을 한 지도 어느덧 반 십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6년 전 시지동에 첫 매장을 낸 이래 하루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달려온 것은 나름대로 잘해보고자 하는 조그만 욕심 때문이었다. 어쩌다 화장품회사 영업사원이 되어 십 년 넘게 화장품 관계 일에 매달리다 개인 장사를 한 터라, 내 뒤에는 메이커 직원 출신이라는 그 쓰잘데 없는 꼬리표가 늘 따라 다녔었다.

어디 없이 그러하겠지만 장업계라고 별다르랴?

장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 라거나 오 전을 보고 십리를 간다는 말의 깊은 뜻을 되새겨야 했고, 적당히 닳고닳아야 하건만 그러지 못해 머쓱했고, 그 바닥에 내쳐지지 않고, 온전히 바로 서기 위해 늘 허위허위 안간힘 해야 했다.

그런 날. 어쩌다 마음이 한자리 못 앉아 있고 몹시 상심하고 삽삽한 날.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태무심하고 버려둔 저울추를 꺼내들곤 했다.

그게 언제던가? 벌써 십수년도 전에 내가 한 일은 대리점에 화장품을 쥐어 앵기는 일이었다. 적정물량이 요구되는데도 때론 과도한 물량을 쏟아 붓고, 시장 점유율 경쟁을 위해 리베이트를 미끼로 덤핑을 치고, 대리점 손실보전을 위해 빤한 지원을 내걸고....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면서 대리점은 조금씩 거덜나고 나는 조금씩 능력(?)있는 영업사원이 되어가고....어쩌면 그런 세월이 풍문처럼 지나가고....

아마 예천이었을 것이다.

예전 떡을 눌러 갖가지 문양을 만들어 내곤 하던 ,박달나무나 발간 대추나무로 만든 판인 김한량(?)이 떡살을 처음 본 것이. 적당히 손때묻고 녹녹치 않은 관록이 느껴지던 그것은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고기가 있고 국화나 갖가지 꽃 모양을 이중 삼중으로 속 깊이 파들어 가며 왼갖 문양을 조각한, 그 빼어난 솜씨를 우리 시대 어느 장인 있어 감당하고 견주랴 싶었다. 왜 김한량이 떡살로 부르는 지 아무도 몰랐건만, 내 즐거운 상상은 저 봉화나 법전,영주,감천,예천을 들고났던 동가식 서가숙의 김씨 성가진 한량 같은 장인 있어 내 온 가슴 지지 눌러 전율 같은 그리움조차 심어주던 것이었다.

떡살에 눈이 가자 이번에는 무쇠를 두드리거나 놋쇠로 만든 옛 자물통이 들어오고 다시 장석좋은 반닫이나 맷돌이 다가서고 먹통이 안겨오고 마침내 저울추였다.

재미있었다.
요모조모 귀때기 반질반질 윤이 나 한 세기는 족히 넘겼을 돌 저울추 우연히 하나 얻어 걸러서는, 세상살이가 아무 인연 없이 무심하게 맺어지고 이름지어지는 게 아니다 싶었다. 조선시대 이름 없는 어느 보부상 발품 팔아 오백리, 천리를 오가며 그가 등짐져 나른 삶의 무게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이 미치자 크고 작은 갖가지 저울추가 그렇게 귀하고 정겨울 수가 없었다. 우리네 삶의 이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달기 위한 수고로운 직분은 차치하고, 모든 저울추들은 그 각양각색 제가끔의 모양과 용도나 구실이 흥미를 주기에 족했다.

생각건대 저울추에 혹했던 시간들은 참 좋았다.상주,점촌,영주,안동,예천,의성을 오명가명 돌아서면 월말이던, 내 할당량의 판매목표와 발 밑에 차오르던 월말수금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단순한 흥미와 심심풀이 파적같은 시작이었지만, 그 시절 눈꼽 비비듯한 단조로움과 화장품영업이라는 엉뚱한 길을 가고있는 뜻한 외로움은 이제 은밀하게 키워나가는 병 같은 것이었다.

이제 일주일마다 행해지던 출장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막돌을 무명천으로 싸매거나, 종이로 꼰 노끈으로 돌을 감싸거나, 구멍 뚫린 돌을 이용하거나, 지극정성으로 돌 꼭지를 만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도자기나 사기나 무쇠로 만든 저울추들 앞에서 난 어떠했던가? 늘 짧은 출장비에서 여투어내는....구멍 뚫린 주머니, 허름한 여인숙에서의 잠자리나, 한 두끼로 달래곤 하던 시장끼도 간단없이 잊혀지곤 하던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조금 욕심이 생기기도 했는데 경주 옛 절터에서 나온 ,언감생심 표면에 12지상을 새긴 신라시대 청동 저울추거나 황동 또는 놋쇠로 만든 ○량 ○근이라고 무게의 수치가 새겨진 고려 저울추 하나쯤 구색으로 갖고싶다는 욕심을 갖기도 했었다.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십수년 전. 장안평 이름 모를 가게에서 만났던 이조 분원 가마에서 구웠음직한 백자 저울추 크고 작은 두 점, 못내 돌아서며 내 주머니 속으로 선선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던 그때가 가을이던가 겨울 초입이었던가? 눈에 밟히는 아쉬움을 애써 지우면서 순무식하게 생긴 대로 깍은듯한 먹통 하나 사들고 돌아서던, 때로 산다는 건 저울추를 사 모으듯 추억을 하나씩 가슴에 새기는 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박가분 매장문을 연 지 오늘로서 딱 6년.

일찍이 성경 말씀에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했건만 나는 얼마나 장사꾼의 도리에 충실하며 마음의 부자로 살기를 원했던 것일까?

비록 분원가마나 신라시대 조각이 새겨진 저울추는 못 가졌더라도, 소박하고 단순하며 조잡한 대로 목화솜이나 머리카락이나 약재를 달던 우리나라 서민들이 쓰던 대저울 같은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대나무에 눈금이 새겨진 지렛대 위에 추를 평형이 되게 움직여 눈금을 읽어 무게를 알 수 있었던 대저울의 구멍 뚫린 돌이나 실로 짠 주머니의 돌 같은, 하찮아 보이지만 공평한 돌 곧 공평한 추 같은 삶이었다면 참 좋겠다.

하루일 을 마감하고 자정 넘어 조심조심 저울추를 닦으며 나는 아무래도 저울로 물건을 다는 장사꾼이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혹 눈금반(盤)이나 저울대에 새긴 점 또는 금을 잘못 읽은 적은 없었던가. 눈금숫자를 잘못 새기거나 표준 추가 아닌 사제 추를 쓴 것은 아닌가. 내용물을 바꾸거나 무거운 것 대신 가벼운 것 주거나 정말 실수로라도 저울눈의 위치와 간격을 틀리게 한 것은 아닌가. 어쩌면 메이커 측과 적당히 짜고 협잡하거나 소비자를 속인 것은 아닌가.

알고 보면 개화기 이후 저울을 보급하고 취급하는 일은 정직하고 신용 있는 상인의 명예로 여겨졌다는데.....저울추를 닦으며 아무래도 난 많은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재물이라는 게 평등하기가 물과도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아야 하거늘 아무래도 내 지난 6 년 간 목숨의 풀무질, 화장품장사는 이제부터가 그 시작이어야 할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어느덧 수십 개나 모인 저울추를 닦다보면 장사꾼으로서 거듭나 내가 가야할 먼 길이,저울추만큼이나 무겁고 소중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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