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
작정하고 나서지 않은 다음에야 쉬 짬을 낼 수 없는 우리네 일상이지만 어쩌다 시골집 우물이나 뒷마당에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어수룩하고 무딘 손끝으로 돌을 쪼아 만든 그리운 마음들이 있음을.
오랜 세월 물이끼가 덧앉고,더러는 키 낮은 채송화,맨드라미,국화 따위 아무렇게나 피고 지듯 태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것.하지만 어줍잖은 꾸밈새나 모양새로도 끝내 정겨움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
'맷돌'은 흔히 물에 불린 곡식을 갈거나 가루로 만들어 쓰던 기구이다.아래 위 두 개의 돌을 겹쳐 아랫돌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춰 사용했다. 또한 윗돌에는 손잡이 나무를 박을 구멍이 있고 갈아야 할 곡식을 넣는 주구가 뚫려 있었다.

둘러주소 둘러주소
정둥 같은 팔다지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소라 같은 주먹으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홰홰칭칭 홰홰칭칭
둘러주소 둘러주소

외할머니는 대청에 초석을 깔고,그 위에 맷돌방석을 놓고,다시 맷돌을 앉힌 다음 맷돌노래와 함께 녹두나 밀을 갈아내시곤 했다.잘 갈아져 나온 녹두가루나 밀가루는 다시 녹두전이 되고 수제비가 되어 내 입맛을 당기게 하던 그런 기억의 앙금들은 이제와 어제 일처럼 마냥 그리웁기만 하다.
가루를 곱게 내기 위해 돌돌돌돌 곡식을 애벌로 갈아,몽근가루는 받아 내고 서너 번이나 들들들들 갈아낸 다음에는,마침내 몽그라진 가루가 쌓이던 정경이 눈에 선하기만 한데......
어쩌다 빈대떡을 만들던 날은 또 어떠했던가.
맷돌에 타개어 물에 불린 녹두를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벗기고,거피한 녹두를 물을 조금 부어 맷돌에 넣고 되작하게 갈고,돼지고기는 훗추가루와 마늘 다진 것과 소금으로 양념하고,배추김치는 총총 채썰고,파는 어슷하게 썰고,고추는 동글동글 썰고,소금에 간한 녹두반죽은 갖은 양념한 돼지고기와 버무리고,뜨겁게 달구어진 조선 솥뚜껑에는 돼지기름이 둘러지고, 마침내 한 국자씩 떠낸 반죽은 파나 고추를 얹어 노릇노릇하게 지져지던 것이었다.
노릇해진 빈대떡을 뒤집어 천천히 익히기도 전에 내 마음은 지레 바빠져 외할머니 손길을 쫓기 바쁘고 진간장에 찍어먹던 그 맛이라니.....
"인석아,천천히 먹어라. 이 할미가 또 해주꾸마.목 맥히겄다.년석하고서는."
"어머니 애 버릇 나빠지겠어요. 상에 올린 뒤에 주시지요."
'괘안타.따로 챙기놓으먼 안되겄나."
"난 우리 외할매가 제일 좋더라 뭐."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이 할미가 자꾸 만들어 주꾸마."
더러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팥이나 콩,메밀,녹두를 갈아 콩국수나,메밀묵,빈대떡 같은 소박하고 조촐하지만 만드는 정성 하나만으로도 외려 더욱 풍성했던 지나간 시간의 그 성찬(盛饌)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외할머니는 하늘 길 열어 먼 길 가시고,그리운 당신의 이름도 산에 묻고, 더러 기다려주는 이 있는 시골집도 없는, 산다는 건 때로 가열한 다스림으로 홀로 겪어 나가야 하는 목숨 같은 것이나 아닌가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던가.
굽이굽이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은 인간사 그 잡다한 일상에 발목 빠뜨리고 살다가도 불현 듯 치달려간 시골집 들에는 오래 잊고 살아왔던 정겨움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참 많은 재래 농기구나 가재도구들이 사라져 갔지만 아직도 찾고자한다면 더러 남아있던 맷돌들....
윗짝이 달아나거나 깨어지고 아무렇게나 땅에 처박혀 본래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런대로 그것들과 맞딱뜨리는 순간은 쏠쏠한 재미를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맷돌은 지방마다 나름대로 특색을 갖고 있어서 가령 중부의 것은 위 아래쪽 크기가 같고, 남부의 것은 밑짝이 윗짝보다 넓고 크며 곡식가루를 흘러내리게 하는 주둥이 모양의 귀때가 있다.
또한 시대와 지역과 구실에 따라 홈만 있는 것,홈을 둘리지 않은 것,굽이 붙은 것이 있는가 하면 굽이 없는 것,귀때가 있는 것,손잡이가 옆구리에 있거나 머리쪽에 있는 것 등 저마다 화강석이나 청석,화산석 같은 돌의 질감에 따라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각종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해놓아 단순히 낟곡식을 가는 도구 이상의 장치미와 세련미가 뛰어난 것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년시절 온몸을 가려두르던 그 기쁜 먹거리를 장만했던 외할머니의 맷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더러 맷돌이 남아 있다손 그것들은 이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풍요롭던 시간의 추억속에서나 존재할 뿐이었다.
단순하고 우직하게만 보이는 맷돌.그런 것들에 눈 주어 즐겨 생활에 쓰고자 하기에는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너무 팍팍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탓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마뜩찮은, 그 무엇이 이토록 나를 아쉽고 안타깝게 하는 것이랴!
따지고 보면 각종 믹서기나 카트기와 녹즙기를 통해 5분만 하면 원하는 것을 구하는 이 좋은(?) 세월에 무어 그리 애닯아 자꾸 구태의연해지는가. 하지만 끝내 기억하고 싶다. 이제 뉘 있어 아쉽고 그리운 날의 정성과 입맛을 되돌릴 것인가?
예전,그리도 멀지 않은 예전에 어느 이름 모를 석공 있어 지극히 단순한 구실과 쓰임을 위해 무모하게 돌을 쪼아 맷돌을 만들었듯, 만드는 기쁨 하나로 왼종일 즐거운, 노동의 맛깔스럽고 정성 밴 손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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