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는 허둥거리고, 조금은 못 미더워하다가 도착한 천주교 공원묘지 장미공원은 낯설게만 보였다. 전날 석간신문을 통해 미리 장지를 확인해 둔 터였지만 그이의 죽음이 영 실감나지 않아 허방을 디디듯 자꾸 발이 헛놓였다. 잘 닦여진 산길을 따라 채 5분도 못 가 야트막한 야산 구릉에 장례행렬이 모여 있었다.몇몇의 두건과 상복이 간단없이 이어지는 곡소리와 성가소리에 겹쳐 실루엣으로 다가서는 순간 그대로 까무룩 잠이라도 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뜩해지는 정신을 가누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아는 얼굴 한사람을 찾았다.
인사말은 없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건만 선생께서는 영 못 알아보신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예의 그 갈색톤 베레모를 쓰신 선생의 금테안경 속 두 눈은 감긴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옆에서 보기에 감히 범접 못할 분위기 탓으로 조용히 장례절차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상제들의 곡소리가 이어지고 끊기기를 여러 번, 하관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광중은 깊고 아득해 보였다. 그이의 친구 엄 선생의 모습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풍수를 대신해서 산역꾼들을 지휘하고 다시 방위를 맞추어보는 모양이었다.
다시 상제들의 곡소리가 이어지고 영구를 운구하여 하관을 했다. 공포로 영구 위를 닦고 명정을 덮고....횡대를 깔고...상주의 상복 한자락에 흙을 담아 광중에 쏟고...마침내 흙을 덮기 시작했다.
츠르르륵... 상주의 상복 끝에서 영구 위에 떨어지던 흙을 보면서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거,바람 불고 눈비 내려 잠시 돌아가는 안식의 집인지도 모르겠다. 한세상 저물고 고단하여 이제 온갖 잡다한 인간사 벗어두고 홀연히 먼 길 홀로 떠나는 일인지도 진정 모르겠다.
장지를 뒤로 하고 장미공원 식당으로 돌아오는 길 고인을 위한 교우들의 기도소리가 오래 귓전에 머물고 있었다.
항상 불쌍히 여기시고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천주여,오늘 이 세상을 떠나게 하신... 거룩한 천사들로 하여금 그를 맞아...지옥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어떻게 올 시간이 있더나?
예,서울서 근무하다 대구 내려와서도 문병 한 번 못 가 보고 부주나 좀 할까 하고...
선생님을 모시고 들어선 식당 안은 다소 분답하고 협소했지만 그런대로 소고기 국밥과 소주 한잔을 나눌 만했다.
운사께서는 어떻게 시간이 되던 모양이지?
예,총장님. 제가 평생에 세 번 싸웠는데 그 중에 한 번을 재행이와 싸워 제가 안 이겼습니까?
자랑스러운 듯 가죽장갑을 손끝에 바투 끼는 성 화백의 웃음이 대머리 조짐이 보이는 성긴 머리털에 어울리잖게 천진스러웠다.
어허, 그래...껄껄껄...재행이한테 이기는 게 보통일이가. 한번은 가보세에서 권기호 하고 붙었는데 왜 권기호 그 친구 해병대 기질이 있어 가지고...
상가는 떠들썩해야 하고, 화톳불을 마당이나 안마당에 펴고 밤샘을 하면서 술이나 음식을 들며 상주의 슬픔을 잊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건만, 장사 다 끝난 마당에 아는 얼굴이라곤 두 사람밖에 없는 공원 식당에서의 술자리는 썰렁했다.
엄지호 그 친구가 처음부터 수고가 많았더구만.
예, 저도 재행이형 쓰러졌다는 소식도 듣고 엄지호 그분이 모금운동도 펼치고 있는 것도 알았는데...
진작 살아 생전 한번 찾아뵙지 못한 죄밑이 되어 난 엉뚱한 소리나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문인들이 대봉성당에는 좀 왔던가요?
음,몇이 왔더군. 장례미사 끝나고는 안 보이더구만.
좀 그런데요. 아는 얼굴이 너무 안 보이니까.
아, 먹고 할 일 없는 놈들만 안 왔나. 운사, 니도 할 일 없제?
선생님 저는 혹시 운상할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추리닝 챙겨 입고...
성 화백은 다시 가죽장갑을 바투 꼈다.
재행이 그놈. 애증이 함께하는 놈이야.
대학총장으로 퇴임하시고 할 일(?)없는 선생님께서는 그예 말이 없이 담배를 태워 무셨다.선생님으로서는 참 많은 사랑과 미움의 시간들이 사라지는 담배연기 너머로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재행이 형의 모습은 무엇보다 붉게 술기 오른 코와 함께 왔다.그리고 격렬한 어투나 독설이 생각나곤 한다.그러면서도 일면으로는 십 년이나 틈이 지는 후배에게 각종 시집이나 잡지책을 몇 년에 걸쳐 보내주던 자상함이 있었다. 물론 내 경우에는 책을 받았다고 전화 한 통 없었는데도 형은 책 보내주는 일을 거르지 않았었다.
한번은 회사일로 출장을 갔다가 영덕의 시골 2층 다방에서 우연히 형을 만났었다. 형은 야,너 오랜만이다 어쩌구저쩌구 막무가내로 강구 바닷가 횟집까지 끌고 갔는데 거기엔 시를 쓰시는 이장희 선생님과 수필을 쓴다는 군청의 육 선생이 있었다. 불콰하게 권커니 잣커니 억병으로 취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장희 선생의 따님이 괜찮다며 선도 한번 보고 그집에서 자고 가라며 붙잡는 통에 차도 없는 그 밤에 도망치느라 애를 먹었었다. 또 언젠가는 반월당 부근에서 아침 여덟시경에 술 한잔 하고 가자고 잡는 통에 난감해 한 적이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어느해 여름 범어네거리 부근 식당 앞에서 웬 여자분과 함께 있는 형을 만났는데 괜찮다는데도 기어이 데리고 가 복어탕에 낮술을 권하는데 자리가 어색하여 꽤나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강제로 모 잡지에 글을 쓰도록 기자를 보내기도 하고, 수필을 한 편 썼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어디에 보내 당선되면 문협에 가입하라는 얘기를 하지를 않나... 하여간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는 그런 이미지들이 이제와 때로 얼마나 큰 그리움이며 정겨움인가?
따지고 보면 당신 살아 생전 몇 개의 문학상을 받고,문인협회의 부지부장을 하고 따위가 살아남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은 떠나고 떠나신 지 몇 년이나 된지도 모르고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늦은 밤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다가,아닌 밤 홀로 잠 깨어 전화기나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날 이십 년도 더 오래 전 내 대학교 2학년 시절. 대명동, 지금은 없어진 그 2층 목조건물 조기섭교수 연구실 앞 삐걱이던 계단에서 받은 형의 첫시집을 펼쳐 보면 거기 형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숨어 있는 듯하다.
마리아 에메리따 수녀가 흰 말을 타고 가버렸다. 무릇 모든 일체가 부서지고
나는 누워서 수백리 밖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문비나무의 슬픈 일엽이엽
이 지고 있었다. 아, 나의 무지도 그 끝을 내리고 속절없는 가을의 눈시울이 적셔지고 있나니.....
_이재행 시 <형용사의 가을 >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