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家粉 時節의 香氣"와 "婚俗百景"은 일찌기 서양화가이면서 신문삽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행인(杏仁) 이승만 화백이 1970년대 중반 월간중앙에 연재한 <生活歲時記>의 일부를 옮겨온 것임.

 

假拂世上(가불세상)의 七夕

날로 각박해져가는 세상인심을 반영이나 하는 듯이 지금 사람들의 생리는 살아가는 날마저앞을 당겨서 사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 그래서 저마다의 인생도 미리미리 가불해서 살아가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 중에서는 특히 다달이 책을 펴내는 잡지사의 경우, 으레 새달의 잡지가 그 일자보다 보름이나 한달을 앞질러서 서점에 그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오늘 실정임에랴. 그래서 이제 계절은 삼복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판에 이 글은 음7월 칠석날 이야기를 견주게 되나보다.

음7월 7석이면 성하의 무더위도 한풀 꺾여들어 아무래도 계절의 갈림길에 놓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전날의 고로(古老)들은 칠석날이면 동구밖에 있는 오동나무를 눈여겨 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 나무 가지에서 한 잎의 잎새가 뚝 떨어져 나풀나풀 땅위로 잦아들면 "아 이제사 천하의 가을이 돌아 오는구나"하여 절계(節季)를 일깨웠다고 한다. 이처럼 철바뀜을 눈앞에 둔 칠석날의 이야기인지라 이 글이 한여름 끈끈하고 무더운 여름날의 더위가심으로 그런대로 색다른 청취쯤 자아냈으면 싶다. 이날 밤(7夕夜) 만리창공은 말끔히 부셔낸 듯 맑기만 한데 늙은이의 보따리처럼 축 늘어진 형상을 한 북두칠성이 한켠에 슬쩍 앵돌아져 빗겨있고 천만폭의 흰비단을 줄줄이 드리운듯한 은하수에는 깨알같은 뭇별이 보석처럼 빛을 뿜고 사람들의 눈길을 매혹케 하리라. 이러한 은하수를 사이로 동편에는 직녀성이 흡사 수태한 여인이 지아비를 기다리듯 이 밤을 맞이하고 그 서편에는 1년내 그리운 아내(직녀성)를 목타게 부르던 견우성이 해후의 부푼 가슴으로 이 밤을 맞게 된다는 애끓는 사연을 지닌 두별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날 밤하늘에는 축하의 연화(煙花)인양 긴 꼬리를 느리우며 이따금 밤하늘을 스치고 흐르는 별똥(流星)이 한결 이 밤의 정경을 돋보이게 한다. 한편 지상의 풀숲에서는 벌레들의 일대 교향악이 울려퍼지고 이러한 풀숲의 사이사이를 반딧불(螢)떼가 간단없이 날아 다니면서 미로에서 헤매는 나그네의 길잡이처럼 보이는 것이 반갑기만 하다. 본래 직녀는 베를 잘 짜는 하늘 상제님 손녀요 견우는 하고(河鼓)라는 일잘하고 부지런한 목동인 바 평소 이들을 좋게 보아온 상제는 이 한 쌍이야말로 천상 배필이라 여겨서 부부의 연을 맺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젊은 부부는 그날부터 신정(新情)에 홈빡 빠져 단꿈만을 즐기기에 전 일의 부지런함을 다 잊어버린 채 해가 중천에 높다랗게 뜨도록 자빠져서 게으름만 피우는지라 이에 대노한 상제는 이들 한쌍의 부부에게 죄를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부부에게 그 벌로 은하수를 사이로 해서 동,서편으로 떼어놓고 일년에 단 하루밤(陰 7월7일밤)만을 만나보도록 했다는 퍽 훈화(訓話)적인 냄새를 풍기는 전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날 밤이면 인간세상의 모든 까마귀와 까치들이 이들 부부(견우, 직녀)의 해후를 도와서 은하수에 이르러 그몸으로 다리를 놓으니 그 다리의 이름을 오작교라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이르기를 칠석 전날에 비가 내리면 이들 부부가 서로 만나는 길에 타고 나서게 될 수레에 쌓인 먼지를 털고 씻어내느라고 흘리는 물이 인간세계에 비로 뿌려졌다는 뜻으로 세차우(洗車雨)라 하고 또한 칠석날의 그 밤이 새어서 새벽녘에 비가 뿌리면 이들 부부가 서러운 이별길에 오르면서 흘리는 눈물이 비로 화했다고들 하여 여루우(여 漏雨)라고 이름지어 부르기도 한다. 한편 칠석날의 절속(節俗)으로 내려오는 풍습으로는 집집의 주부들이 여름 장마에 눅눅해진 장롱속의 옷가지와 광속에 비치해둔 곡물따위, 습기찬 이부자리, 책 등속을 집안에서 모두 끌어내어 햇볕에 내다들 말린다. 이처럼 칠석날에는 절계(節季)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좋은 풍습을 정해 갖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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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신구의 기본재료


1)옥 류
옛 사람들은 옥을 천지지정(天地之精), 양지지순(陽之至純)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장신구의 기본적인 중요 재료로서 몸차림에 옥을 가장 먼저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천하석으로 만든 곡옥이다. 더욱 경옥제의 곡옥 잔결이 발견되었고, 청동기 시대의 석총에서 곡옥이 발견됨으로써 곡옥의 사용이 확실해졌다.


특히 곡옥이 석상분이나 적석총에서 발견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더욱 응회암제의 작은 관옥이 나왔으며, 백마노제 관옥이 발견되어 옛부터 선사인들이 곡옥과 함께 사용하였다고 믿어진다. 뿐만 아니라 천하석제의 둥근옥, 환옥 등이 선사시대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특히 유리제의 옥 즉 유리옥을 선사인들이 목걸이로 만들고 옷에 꿰매고 귀에 달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것은 한에서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시대, 즉 신라 고분에서 추토된 옥류를 보면 곡옥이 수없이 많다. 이것은 선사시대의 곡옥과는 달리 거의 비취제의 곡옥들이다. 때로는 마노, 수정, 벽옥, 유리 등의 재료로써 곡옥을 만든 것도 있다. 이 외에 환옥, 즉 구옥과 규옥이라고 호칭되는 고옥, 긴 원통형의 관옥, 타원형의 대추옥, 더욱 수정으로 만든 다면옥등이 장신구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2)순 금
장신구의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금속은 순금이다. 이 금은 녹은 것을 어떤 주형에 부어서 굳힌 다음 장신구 재료로 많이 사용하였다. 특히 수축성과 전연성이 많고 나아가서 색깔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영원히 변색되지 않으므로 장신구 제작에 가장 많이 쓰였다. 다른 금속하고 합금하는데 가장 쉬웠다. 그 뿐만 아니라 금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이용하여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 수 있고, 또한 변형이 용이하므로 이것을 가장 애호하고 즐겨 사용하였다.



3)은
은의 특색은 다른 금속과는 달리 녹이 슬지않고 공기중에서 색이 변하지 않아 삼국시대 사람들은 매우 즐겨 사용했고 순금 다음으로 전연성이 커서 여러 가지 제공이 가능하므로 장신구 재료로써 애용되었다. 금보다 산출량이 많으므로 옛부터 장신구 등에 많이 쓰였다는 은은 그은은한 색과 광택이 특출나다.

4)구 리
구리는 금이나 은보다 색상이 언제나 붉고 그 질이 연하다. 그러므로 전연성이 다른 금속보다 커서 단조, 주조의 재료로 가장 적당한 금속이다. 공기 중에서든 바다속에서든 부식에 저항력이 매우 강하다. 그러므로 금속공예에 있어서 그 용도가 넓고 삼국시대부터 장신구 또는 장식용에 애용되었다. 또 구리는 다른 금속과 합금이 용이하다.
순금과 구리의 합금은 적동이 되고 착색 여하에 따라 흑색으로 되며, 이것을 오금이라고 선사시대부터 청동이 많았는데 이것은 동과 주석의 합금으로 나타난다. 이 청동은 청동기 제작에 가장 필요한 유일한 재료였으며 황동, 즉 진유는 구리와 아연의 합금이다. 구리는 단조, 조금용에 매우 적합하므로 장신구 이외에 불상의 제작에도 많이 사용되어 왔다.

5)쇠
쇠는 금속가운데에서 가장 쓸모있는 금속이지만 장신구용에 그렇게 적합하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통틀어 쇠로 만든 장신구는 별로 찾아 볼 수 없으며 다만 띠의 교구에는 쇠를 사용하였다.

6)보 패
장신구에 사용된 보패류는 그 수가 많으며 바다와 산속에서 체취되는 것이므로 금속만큼 얻기가 힘든 재료였다.
삼국시대 장신구에 사용한 보패물로서 가장 많이 쓰인 것으로는 산호가 있다. 산호는 산호중의 군체의 중추 골격을 말하는 것으로 괴상 또는 수지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산호는 바깥쪽이 무르고 속은 단단하므로 장신구에 사용할 때 겉은 깍아버리고 속부분만 사용하였다. 장신구 가운데 산호잠과 산호구슬이 있는데, 산호 구슬은 붉은색, 담홍색, 흰색이 있어 가장 적합한 재료 중의 하나이다.
진주는 조개의 체내에서 형성되는 분비물로 된 구슬 모양의 덩어리로서 그 색이 은빛으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광택이 나므로 옛부터 장신구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더욱 금패는 빛깔이 누렇고 투명한 호박의 한가지이다. 그러므로 삼국시대보다 고려 말기와 이조시대에 사대부들이 많이 애용하였다.
특히 호박은 제 3기의 송백과 수목의 수지가 화석으로 된 것으로서 대체적으로 황갈색이 많다. 호박이 장신구용으로 사용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호박제의 평옥같은 것은 이에 속하나 특히 고려말부터 조선 일대에 걸쳐 선비들 사대부들이 많이 애용한 보배였다.
그 다음 중요한 장신구용으로는 대모가 있다 대모는 바다 거북의 한 종류인 대모의 등과 배를 싸고있는 껍데기를 잘라 구슬과 번갈아 꿰어 만들어 여름에 사대부나 선비, 관원들이 흔히 갓끈으로 사용했고 관자로 썼다. 또한 대모풍잠 같은 것은 중요한 장신구의 하나였다.

崔銀水(국립민속박물관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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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개화기 이후의 장신구


개화기에는 의생활면에서도 그 합리주의적인 면을 강조하여 우리의 의생활도 간소화되어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많이 사용하였던 향낭, 침낭, 장도등의 장신구는 점점 그 필요성이 줄게 되어 차츰 우리의 의복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다만 장성할 때 노리개 정도가 사용되었다.
1910년대에 신교육을 받은 여학생들 사이에서부터 검은 우산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우산은 쓰게 치마와 삿갓 대용으로 고안되어 내외(內外)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유행은 일반 부녀자에게로 옮겨가 한때 검정우산은 부녀자의 필수품이 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양산(우산)의 유행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여자의 외출이 가능하게 되면서 원래는 남자의 전용물이던 토시를 여자들도 하게 되었다. 등나무,말총으로 만든 것은 여름용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동물의 털을 넣어 만든 것은 방한용으로 겨울에 사용하였다. 토시는 실용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요소를 갖추었고, 점차 장갑이 들어오면서 1930년대에 자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주머니만은 꽤 오래 애용되었는데, 그것도 1930년대 이후 핸드백이 나오게 되자 젊은층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노인층에서만 해방전까지 패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920년대까지는 학생들간에도 주머니를 차고 있었고, 주머니 끝에는 색색이로 과불들을 만들어 주렁주렁 다는 학생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梨花七十年史, 후편) 여기에서 학생들이 차고 다니던 주머니를 가지고 그 모양도 겸하여 알 수 있고, 여자의 한복에는 주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없어 실용적인 면에서도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애용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1940년대 이후에는 저고리에 고름대신 단추를 이용하게 되면서 부로우치 등 우리 의복의 새로운 액세서리가 등장하는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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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아 장신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특히 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상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사용 습관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금, 은의 사용을 막았던 정책은 찬란하였던 우리의 금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켰다. 그러나 머리장식이나 노리개 등은 다양하게 발달하여 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성을 이루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말기의 것을 그대로 습용하다가 제 4대 세종 8년에 조관 제복을 제정한 후 점차 정리 되었다. 관모류에 있어서도 그 종류와 형태가 많아졌고 따라서 거기에 부착되는 그 장신용구도 많아지고 유교정책으로 인해 한층 규제되어 장신구를 만드는 장(匠)도 생기게 되었다. 관모를 만드는 입자장(笠子匠), 금박장(金箔匠), 패물장(佩物匠), 신을 만드는 화장(靴匠) 등이 생겨 여러 가지 장신구를 만드는 업이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몸을 단장하고 그 입은 옷의 맵시를 더한층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꾸미고 가진 수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머리를 수식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각종 비녀와 여러 가지 형태의 뒤꽂이,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첩지와 떨잠, 그리고 머리를 수발하기 위한 댕기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중기부터 거의 자취를 감춘 귀걸이와 가락지가 있다. 이밖에도 패물의 하나인 노리개, 향갑, 향낭, 침낭, 장도 등과 각종 주머니가 있었고, 원삼이나 여름철 적삼 등에 단 단추도 그 일종이라 할 수 있다.

1)비녀
조선시대 여인은 쪽진머리의 부녀자 수식의 하나로 누구나 다 비녀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비녀가 다양하게 발건한 것은 영조(英祖)의 발제개혁(髮制改革) 이후의 일이다.
비녀는 신분에 따라 재료와 모양이 많이 달랐는데, 금 은 진주 비취 산호 비녀는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했으며, 일반 서민은 나무 뿔 백동 놋쇠 비녀를 주로 사용했다. 비녀 머리 부분의 형태도 신분에 따라 차이를 두어 왕비는 용(龍) 봉(鳳) 등의 형태를, 서민은 민자비녀 또는 버섯모양의 비녀를 착용하였다. 비녀머리 모양에 따라 재료를 달리하여 계절에 맞추어 사용했는데 순화궁(順和宮) 첩초(帖草)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비녀도 계절에 맞추어 직금당의(織金唐衣)에는 봉잠이나 옥모란잠을 꽂고, 평시(平時) 문안에는 십월 초일일부터 용잠(龍簪), 2월에는 모란잠, 4월, 8월, 9월에는 매죽잠도 좋고 옥모란잠도 꽃는다. 원삼을 입고 큰머리에는 칠보수식을 하고 금박 당의에는 옥봉잠, 원앙잠 또는 니사연잠(泥絲蓮簪)을 꽂는다. 옥칠보(玉七寶)가 무거울 때는 금칠보를 하여도 좋으나 원칙인즉 옥칠보는 젋어서 하는 것이 좋고 금칠보는 노년(老年)에 사용하는 것이 좋다. 조짐머리에는 10월부터 정월까지 도금용잠(鍍金龍簪)을 꽂고, 2월에는 옥모란잠(玉牧丹簪)을 꽂는 것이 좋으나 조심스러울 때에는 은모란잠을 꽂아 대신하여도 좋고, 옥모란잠은 호사할 때 꽂으면 더욱 좋다. 5월에 백광사 당의를 입을 때 는 민옥잠에 떨잠을 꽂고, 용잠에도 떨잠을 꽂는다. 춘,추(春秋) 에는 모란잠, 매죽잠을 꽂으면서 니사(泥絲)떨잠을 꽂아 수식한다."
그런데 비녀의 자체의 재료 및 수식면에서 높고 얕고 좋고 그르고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식은 궁중이나 일반상류층에서나 모두 이와 비슷하였다.

2)머리장식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에는 뒤꽂이, 떨잠, 머리꽂이, 화관, 족두리, 첩지, 비녀, 댕기, 비치개등이 있다.


첩지는 부인이 예복(禮服)을 입을 때 머리 위에 꾸며 품위를 돋보이게 하던 장식품의 하나인데,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 얹은 머리 대신 쪽진머리를 하게 하고 여기에 족두리를 하게 한데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장식의 목적과 족두리나 화관같은 것을 쓸때에 걸려서 고정시키게 하기 위한 역할을 겸하였다. 도금으로 만든 봉황첩지와 도금, 은, 흑색으로 만든 개구리 첩지가 있었는데, 봉황첩지는 왕비만 사용하였고, 기타의 것은 계급에 따라 내명부 또는 상류층 외명부들이 사용하였다.
떨잠은 일명 '떨철반자'라고도 한다. 의식(儀式)때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계급에 한해서 큰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원형, 각형, 나비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으며, 칠보, 진주, 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들었다.
뒤꽂이는 쪽진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장식을 말하는데, 끝이 뾰족한 단순한 뒤꽂이 이외에 실용적인 면을 겸한 귀이개, 빗치개 뒤꽂이 등이 있었다. 국화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 연꽃 봉오리 모양을 한 것, 매화, 나비, 천도, 봉황 등의 모양을 장식한 것들이 있었으며 산호, 비취, 보석, 칠보, 진주 등을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게 만들었다.
빗치개는 가리마를 갈라 머리를 정제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밀기름을 바르는 도구도 되었다. 대개 빗이나 빗접, 면경, 쪽집개, 살쩍밀이, 분통 등과 함께 경대에 간직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쪽진머리에 꽂아 머리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댕기는 머리를 묶는데 사용되는 헝겊으로 금박을 찍거나 수를 놓았고, 옥이나 석웅황 등의 보석을 붙여 화려하게 만들었다.

3)귀걸이
귀고리는 귓볼을 뚫어 작은 고리를 꿰던 것으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많이 유행하였다. 그 후에 이 풍속이 오랑캐 풍습이라는 이유로 선조(宣祖)때 고치게 하였으며, 귀고리를 다는 풍습은 또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 윤리와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의 귀고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여자는 귓바퀴에 거는 것을 많이 사용했다. 장식은 극히 단조로와 오색술을 달았고, 의식때만 주로 착용하였다.

4)지 환
반지와 가락지는 노리개와 더불어 조선시대때 가장 일반적인 장신구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모양은 매우 단순했다. 가락지는 2개를 쌍으로 하여 금, 은, 비취 등으로 만들며 기혼부인이 사용했다. 반지는 기혼, 미혼에 관계없이 일반 여인들간에 사용되었다.


남아있는 유물로서는 칠보, 옥, 마노, 호박, 비취, 동 등이 있으며 계절에 맞춰 끼는 멋이 있었다. 순화궁 첩초(帖草)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10월부터 정월까지, 즉 겨울에는 금지환을 끼고 2월부터 4월까지는 파란 지환을 낀다. 5월 단오날이 더워 초사 당한삼( 紗 唐汗衫)을 입을때에는 옥(玉)지환이나 자마노 지환을 끼고 8월 중순 광사 당고의를 입을 때에는 다시 파란 지환을 껴서 9월의 공단 당고의를 입을때까지 끼게 된다."
겨울에는 금지환, 여름에는 옥지환, 봄,가을에는 파란 지환 등을 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가락지는 여름이라도 직금(織金)된 옷을 입을 때에는 낄수 있었고 겨울에도 옥지환 말고는 모두 낄 수 있으며, 봄,가을에는 아무것이나 때와 옷에 맞추어 끼어도 좋았다.

5)노리개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부녀자들의 장신구로 다채로운 색상과 귀한 패물(佩物)을 사용하여 단조로운 우리 나라 의상에 화려하고도 섬세한 미를 더해준다. 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로서 전(全) 시대에 많이 애용하던 목걸이나 귀걸이가 쇠퇴한 대신 가장 다양하게 발달한 장신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언제부터 패용(佩用)되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신라시대에는 요대(腰帶)에 갖가지 장식품, 즉 요패(腰佩)를 달았다. 고려시대에도 요패를 착용했는데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의 귀족계급 부녀들은 허리띠에 금방울, 금향낭을 패용하였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후기를 지나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옷고름이 보편화되면서, 고름이나 치마에 차는 노리개로 전환 되었다.
노리개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주체(主體)가 되는 패물을 중심으로 띠돈, 다회(多繪:끈), 매듭, 술로 구성된다. 이들 요소가 색상이나 형태, 크기 면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노리개라는 장식품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낸다.
노리개는 궁중은 물론 상류사회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이 아끼고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경사시에는 물론 일상시에도 즐겨 패용하였다. 그리고 재료와 크기에 따라 패용하는 계절이나 위치, 사용법이 달랐는데, 금,은 노리개는 주로 가을, 겨울에 사용하였고, 5월 단오날부터는 옥노리개, 비취노리개 또는 옥장도와 같은 한 개짜리 단작 노리개를 찼으며, 8월 보름이 되면 3개짜리 삼작노리개를 찾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가례, 탄일 등 특별한 축의일에는 왕비를 비롯하여 그날 참례하는 귀부인들까지 삼작노리개를 찼으며, 평상시에도 왕비가 대비 전에 문후를 드릴 때는 금박스란치마에 당의를 입고 삼작노리개를 찼다고 한다. 왕비만이 찰 수 있었다는 삼천주 노리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주 큰 진주를 셋씩 꿰었다고 한다. 또 대례복의 봉띠에 차는 대삼작 노리개는 손바닥 크기가 넘는 산호가지와 백옥나비, 밀화불수 등 조형미와 진귀성을 보여주는 패물들을 기품있게 쭉쭉 뻗은 낙지발술 위에 달았다.


노리개는 세 개를 함께 패용하는 삼작노리개가 대표적이며, 하나만을 패용하는 단작노리개,또는 두 개,다섯개를 함께 패용하는 이작노리개와 오작노리개가 있다.또한 다는 패물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 예복용과 평복용으로 구분되며, 패물의 종류, 형태, 술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양하다.
재료로는 금, 은, 동 등의 금속류와 백옥, 비취옥, 자마노, 홍옥, 청강석, 진옥, 금강석, 공작석 등의 옥석류, 밀화, 산호, 진주, 금패, 대모, 호박 등의 보패류, 색사, 주단, 금은사 등이 사용된다.
형태에는 동자, 박쥐, 거북, 나비, 오리, 붕어, 매미, 자라, 해태 등의 동물형태와 가지, 고추, 포도송이, 목화송이, 천도, 연화, 석류 등의 식물형태, 호로병, 주머니, 종, 표주박, 북, 장구, 자물쇠,안경집, 도끼, 방아다리, 방울, 투호, 장도, 석등, 벼루 등 생활주변에서 얻은 형태, 또 불수, 염주 등의 형태가 있다. 따라서 길상(吉祥)적인 문양을 보편적으로 택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다남(多男), 부귀(富貴), 복(福), 장수(長壽)를 뜻하는 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다남을 상징하는 노리개로는 고추, 가지, 도끼, 박쥐,투호의 형상을 패물로 장식한 것들이다.
이와같이 노리개는 하나의 호사스런 장식품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 안정된 조화를 이루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여성의 지혜와 소망이 담겨 있다. 노리개는 혼인 때의 예물로 시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였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위엄과 자존을 지키며, 집안을 두호(斗護)하는 믿음으로 노리개를 소중히 간직하였다.
노리개는 여러 가지 문양, 덕담의 문자를 새겨 장수와 복을 빌거나 액을 피하는 것으로 어떤 염원을 위해 차기도 했고 향갑, 향낭, 침낭, 장도와 같이 실용적인 면에서 찬 것도 있었다. 이 중 향갑, 향낭은 사향등을 담은 주머니로 평소에는 향내음을 은근히 풍기고 급할 때에는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침낭은 바늘을 꽂아 두던 바늘집으로 부녀자들이 늘 사용하는 바늘을 손쉽게 찾아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일반 부녀자가 가장 많이 사용한 노리개 중의 하나였다.
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護身用)으로도 사용하였으며, 또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有無)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
1498년(연산군4)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90년(현종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 존비,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명나라에 금, 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여인들의 은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장도끈목의 고리를 꿰어서 차고, 여자의 경우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기도 한다.



6)주머니
주머니의 역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경덕왕조에 "왕이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때까지 항상 부녀(婦女)의 짓을 하여 비단주머니(錦囊)를 차기를 좋아했다."는 금낭의 기록가 함께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며, 고려시대에도 <고려도경>귀부조(貴婦 )에 "요대(腰帶)에 채조(采 )로 금탁(金鐸)을 달고 금향낭을 찼는데 많은 것을 귀히 여겼다."라는 기록으로 고려인들이 주머니를 찼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주머니의 패용은 여전했으며, 우리 의복에는 주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따로 만들어 차던 것이 장식품으로도 사용되었다. 노리개에 다는 주머니로는 수향낭(繡香囊)이 대표적이며, 주머니 둘레가 둥근 염낭(두루주머니)과 양옆에 모가 나 있는 귀주머니는 단독으로 찼다.
그리고 염랑이나 귀주머니에는 오색의 술을 달아 모양을 아름답게 꾸몄고, 그 사용한 천과 색,부금(付金) 여부에 따라 신분의 존귀, 귀천, 상하를 나타내기도 했다.궁중발기(宮中撥記)에 나타난 궁낭(宮囊)을 살펴보면 염랑과 귀주머니 두가지로 구분되며, 그 놓은 수(繡)의 문양에 따라 황룡자낭(왕을 상징), 봉낭(왕비 상징), 십장생줌치, 오방낭, 연화향낭 등이 있다. 오방낭, 오방줌치의 오방은 오행(五行)에서 나온 것으로 동, 서, 남, 북, 중앙을 나타내는 5방위를 뜻하며 청, 백, 홍, 흑, 황색의 비단을 모아 만든다.
낭(囊) 발기에서 보면 가례시(嘉禮時) 외에도 새해의 첫 번째 돼지날에 대내(大內)에서는 물론 종친들에게까지 주머니를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액을 면하고 한 해를 잘 지내라는 뜻으로 홍지(紅紙)에 볶은콩 한알을 싸서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는 곡식이 잘 여물어 풍년과 평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곡식을 태운 재를 넣은 주머니를 임금이 신하들에게 주었으며 이것은 하나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7)단 추
단추는 원래 원삼 등 예복에만 사용하였던 것이며, 저고리나 여름철 적삼에도 옷고름을 달고 단추는 사용하지 않았었는데 개화기가 되면서 단추의 간편함을 쫓아 여름철 적삼에 옷고름 대신으로 이용하게 되었고 마고자 등에 고름 대신 사용하였다.


단추에는 예장용(禮裝用)에 사용하던 것으로 금은(金銀), 옥석(玉石) 단추와 끈으로 맺은 단추가 있었다. 예장용 단추는 나비, 박쥐, 국화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본따기도 하였으며, 사각형에는 문양을 새기기도 하였다.
궁중발기(宮中撥記)에 나타난 단추의 이름을 보면 "적의(翟衣)단추, 다홍 원앙 로의(多紅 鴛鴦 露衣) 단추, 볼기단추"라고 있어 그 용도를 알 수 있다.
맺은 단추는 끈으로 매듭을 맺은 것인데 그 모양이 야무지고 보통 입는 옷에 많이 사용되었다. 유물로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자의(紫衣)와 중의(中衣)에 맺은 단추가 달려있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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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된 사회였으므로 장신구의 사용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신라, 가야와 달리 후장(厚葬)을 하는 관습이 없었으므로 출토된 유물이 적어 그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고려시대 장신구는 전시대에 비하여 기법은 쇠퇴하였으나, 장신구에 시문(施紋)하는 기술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송, 원, 명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에서도 신분에 따라 장신구가 각기 달랐는데 고려시대에는 더욱 금제(禁制)가 많았고 따라서 조복, 상복, 공복, 편복, 제복에 따라 장신구 착용이 각각 달랐다 왕과 왕비, 왕세자들의 장신구도 역시 규제가 있어 매우 복잡하였다.

1)비녀 : 비녀 머리부분에 봉황을 조각한 것과 닭머리 모양을 조각한 것이 있다. 봉황은 왕비가 사용했던 것 같고, 은비녀는 비녀머리에 옥으로 만든 꽃모양을 붙여 장식하였다.
2)동곳 : 고려시대 말기의 것으로 알려진 금동곳은 크기와 형상이 각각 달라 조선시대 때보다 휠씬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동곳 부분에 당초문을 음각한 것과 수정을 맨 것은 현재 보존된 고려의 금제 동곳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이다. 이 밖에 운작문음각(雲雀紋陰刻), 족부엽상문음각(足部葉狀文陰刻), 동곳머리에만 조각한 것, 동곳머리에 운문을 음각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3)귀걸이 :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금으로 만든 것인데, 구형소주(球刑小珠) 3개를 연속시킨 것과 구형소주가 장식된 것이 있다.
4)반지 : 금반지에 마노상 보석이 감장되어 있는 것과 녹색보석이 박힌 것이 있다. 이외에 당초문을 양각한 금 반지, 톱니문을 새긴 은 반지와 일부를 세조(細彫)한 은반지, 무늬없는 동반지 등이 있다.
5)과대( 帶) : 고려의 과대는 금, 은, 동 등을 합금하여 여러 가지 형태를 상감하였으며, 특히 그 중에서 대모, 마노, 상아, 오서(烏犀), 백옥, 미석(美石) 등을 사용하여 과판에 감입시킨 것은 신라보다 우수하다. 그 형태는 금동으로 된 방형(方形)의 과판이 여러개 붙어 있는 모양인데, 과판 하나하나에는 서조인 봉황과 꿩, 서수인 용 등이 음각 또는 양각되어 있다. 또 교구가 붙어있는 과판에는 당초문 등의 수목문이 양각 되어 있으며, 과판 이면은 민자판인데 이는 포대(布帶) 표면에 붙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6)갓끈 : 이밖에 중앙박물관 소장의 유리옥으로 만든 갓끈 1줄, 대모로 만든 빗 1개, 도금한 순은에 연화문을 음각하여 만든 머리장식 등이 전하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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