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아 장신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특히 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상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사용 습관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금, 은의 사용을 막았던 정책은 찬란하였던 우리의 금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켰다. 그러나 머리장식이나 노리개 등은 다양하게 발달하여 조선시대 장신구의 특성을 이루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말기의 것을 그대로 습용하다가 제 4대 세종 8년에 조관 제복을 제정한 후 점차 정리 되었다. 관모류에 있어서도 그 종류와 형태가 많아졌고 따라서 거기에 부착되는 그 장신용구도 많아지고 유교정책으로 인해 한층 규제되어 장신구를 만드는 장(匠)도 생기게 되었다. 관모를 만드는 입자장(笠子匠), 금박장(金箔匠), 패물장(佩物匠), 신을 만드는 화장(靴匠) 등이 생겨 여러 가지 장신구를 만드는 업이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몸을 단장하고 그 입은 옷의 맵시를 더한층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꾸미고 가진 수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머리를 수식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각종 비녀와 여러 가지 형태의 뒤꽂이,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첩지와 떨잠, 그리고 머리를 수발하기 위한 댕기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중기부터 거의 자취를 감춘 귀걸이와 가락지가 있다. 이밖에도 패물의 하나인 노리개, 향갑, 향낭, 침낭, 장도 등과 각종 주머니가 있었고, 원삼이나 여름철 적삼 등에 단 단추도 그 일종이라 할 수 있다.
1)비녀
조선시대 여인은 쪽진머리의 부녀자 수식의 하나로 누구나 다 비녀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비녀가 다양하게 발건한 것은 영조(英祖)의 발제개혁(髮制改革) 이후의 일이다.
비녀는 신분에 따라 재료와 모양이 많이 달랐는데, 금 은 진주 비취 산호 비녀는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했으며, 일반 서민은 나무 뿔 백동 놋쇠 비녀를 주로 사용했다. 비녀 머리 부분의 형태도 신분에 따라 차이를 두어 왕비는 용(龍) 봉(鳳) 등의 형태를, 서민은 민자비녀 또는 버섯모양의 비녀를 착용하였다. 비녀머리 모양에 따라 재료를 달리하여 계절에 맞추어 사용했는데 순화궁(順和宮) 첩초(帖草)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비녀도 계절에 맞추어 직금당의(織金唐衣)에는 봉잠이나 옥모란잠을 꽂고, 평시(平時) 문안에는 십월 초일일부터 용잠(龍簪), 2월에는 모란잠, 4월, 8월, 9월에는 매죽잠도 좋고 옥모란잠도 꽃는다. 원삼을 입고 큰머리에는 칠보수식을 하고 금박 당의에는 옥봉잠, 원앙잠 또는 니사연잠(泥絲蓮簪)을 꽂는다. 옥칠보(玉七寶)가 무거울 때는 금칠보를 하여도 좋으나 원칙인즉 옥칠보는 젋어서 하는 것이 좋고 금칠보는 노년(老年)에 사용하는 것이 좋다. 조짐머리에는 10월부터 정월까지 도금용잠(鍍金龍簪)을 꽂고, 2월에는 옥모란잠(玉牧丹簪)을 꽂는 것이 좋으나 조심스러울 때에는 은모란잠을 꽂아 대신하여도 좋고, 옥모란잠은 호사할 때 꽂으면 더욱 좋다. 5월에 백광사 당의를 입을 때 는 민옥잠에 떨잠을 꽂고, 용잠에도 떨잠을 꽂는다. 춘,추(春秋) 에는 모란잠, 매죽잠을 꽂으면서 니사(泥絲)떨잠을 꽂아 수식한다."
그런데 비녀의 자체의 재료 및 수식면에서 높고 얕고 좋고 그르고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식은 궁중이나 일반상류층에서나 모두 이와 비슷하였다.
2)머리장식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에는 뒤꽂이, 떨잠, 머리꽂이, 화관, 족두리, 첩지, 비녀, 댕기, 비치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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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지는 부인이 예복(禮服)을 입을 때 머리 위에 꾸며 품위를 돋보이게 하던 장식품의 하나인데, 영조의 발제개혁 이후 얹은 머리 대신 쪽진머리를 하게 하고 여기에 족두리를 하게 한데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장식의 목적과 족두리나 화관같은 것을 쓸때에 걸려서 고정시키게 하기 위한 역할을 겸하였다. 도금으로 만든 봉황첩지와 도금, 은, 흑색으로 만든 개구리 첩지가 있었는데, 봉황첩지는 왕비만 사용하였고, 기타의 것은 계급에 따라 내명부 또는 상류층 외명부들이 사용하였다.
떨잠은 일명 '떨철반자'라고도 한다. 의식(儀式)때 왕비를 비롯하여 상류계급에 한해서 큰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원형, 각형, 나비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으며, 칠보, 진주, 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들었다.
뒤꽂이는 쪽진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장식을 말하는데, 끝이 뾰족한 단순한 뒤꽂이 이외에 실용적인 면을 겸한 귀이개, 빗치개 뒤꽂이 등이 있었다. 국화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 연꽃 봉오리 모양을 한 것, 매화, 나비, 천도, 봉황 등의 모양을 장식한 것들이 있었으며 산호, 비취, 보석, 칠보, 진주 등을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게 만들었다.
빗치개는 가리마를 갈라 머리를 정제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밀기름을 바르는 도구도 되었다. 대개 빗이나 빗접, 면경, 쪽집개, 살쩍밀이, 분통 등과 함께 경대에 간직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쪽진머리에 꽂아 머리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댕기는 머리를 묶는데 사용되는 헝겊으로 금박을 찍거나 수를 놓았고, 옥이나 석웅황 등의 보석을 붙여 화려하게 만들었다.
3)귀걸이
귀고리는 귓볼을 뚫어 작은 고리를 꿰던 것으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많이 유행하였다. 그 후에 이 풍속이 오랑캐 풍습이라는 이유로 선조(宣祖)때 고치게 하였으며, 귀고리를 다는 풍습은 또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 윤리와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의 귀고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여자는 귓바퀴에 거는 것을 많이 사용했다. 장식은 극히 단조로와 오색술을 달았고, 의식때만 주로 착용하였다.
4)지 환
반지와 가락지는 노리개와 더불어 조선시대때 가장 일반적인 장신구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모양은 매우 단순했다. 가락지는 2개를 쌍으로 하여 금, 은, 비취 등으로 만들며 기혼부인이 사용했다. 반지는 기혼, 미혼에 관계없이 일반 여인들간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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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유물로서는 칠보, 옥, 마노, 호박, 비취, 동 등이 있으며 계절에 맞춰 끼는 멋이 있었다. 순화궁 첩초(帖草)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10월부터 정월까지, 즉 겨울에는 금지환을 끼고 2월부터 4월까지는 파란 지환을 낀다. 5월 단오날이 더워 초사 당한삼( 紗 唐汗衫)을 입을때에는 옥(玉)지환이나 자마노 지환을 끼고 8월 중순 광사 당고의를 입을 때에는 다시 파란 지환을 껴서 9월의 공단 당고의를 입을때까지 끼게 된다."
겨울에는 금지환, 여름에는 옥지환, 봄,가을에는 파란 지환 등을 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가락지는 여름이라도 직금(織金)된 옷을 입을 때에는 낄수 있었고 겨울에도 옥지환 말고는 모두 낄 수 있으며, 봄,가을에는 아무것이나 때와 옷에 맞추어 끼어도 좋았다.
5)노리개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부녀자들의 장신구로 다채로운 색상과 귀한 패물(佩物)을 사용하여 단조로운 우리 나라 의상에 화려하고도 섬세한 미를 더해준다. 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로서 전(全) 시대에 많이 애용하던 목걸이나 귀걸이가 쇠퇴한 대신 가장 다양하게 발달한 장신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언제부터 패용(佩用)되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신라시대에는 요대(腰帶)에 갖가지 장식품, 즉 요패(腰佩)를 달았다. 고려시대에도 요패를 착용했는데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의 귀족계급 부녀들은 허리띠에 금방울, 금향낭을 패용하였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후기를 지나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옷고름이 보편화되면서, 고름이나 치마에 차는 노리개로 전환 되었다.
노리개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주체(主體)가 되는 패물을 중심으로 띠돈, 다회(多繪:끈), 매듭, 술로 구성된다. 이들 요소가 색상이나 형태, 크기 면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노리개라는 장식품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낸다.
노리개는 궁중은 물론 상류사회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이 아끼고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경사시에는 물론 일상시에도 즐겨 패용하였다. 그리고 재료와 크기에 따라 패용하는 계절이나 위치, 사용법이 달랐는데, 금,은 노리개는 주로 가을, 겨울에 사용하였고, 5월 단오날부터는 옥노리개, 비취노리개 또는 옥장도와 같은 한 개짜리 단작 노리개를 찼으며, 8월 보름이 되면 3개짜리 삼작노리개를 찾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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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는 가례, 탄일 등 특별한 축의일에는 왕비를 비롯하여 그날 참례하는 귀부인들까지 삼작노리개를 찼으며, 평상시에도 왕비가 대비 전에 문후를 드릴 때는 금박스란치마에 당의를 입고 삼작노리개를 찼다고 한다. 왕비만이 찰 수 있었다는 삼천주 노리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주 큰 진주를 셋씩 꿰었다고 한다. 또 대례복의 봉띠에 차는 대삼작 노리개는 손바닥 크기가 넘는 산호가지와 백옥나비, 밀화불수 등 조형미와 진귀성을 보여주는 패물들을 기품있게 쭉쭉 뻗은 낙지발술 위에 달았다.
노리개는 세 개를 함께 패용하는 삼작노리개가 대표적이며, 하나만을 패용하는 단작노리개,또는 두 개,다섯개를 함께 패용하는 이작노리개와 오작노리개가 있다.또한 다는 패물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 예복용과 평복용으로 구분되며, 패물의 종류, 형태, 술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양하다.
재료로는 금, 은, 동 등의 금속류와 백옥, 비취옥, 자마노, 홍옥, 청강석, 진옥, 금강석, 공작석 등의 옥석류, 밀화, 산호, 진주, 금패, 대모, 호박 등의 보패류, 색사, 주단, 금은사 등이 사용된다.
형태에는 동자, 박쥐, 거북, 나비, 오리, 붕어, 매미, 자라, 해태 등의 동물형태와 가지, 고추, 포도송이, 목화송이, 천도, 연화, 석류 등의 식물형태, 호로병, 주머니, 종, 표주박, 북, 장구, 자물쇠,안경집, 도끼, 방아다리, 방울, 투호, 장도, 석등, 벼루 등 생활주변에서 얻은 형태, 또 불수, 염주 등의 형태가 있다. 따라서 길상(吉祥)적인 문양을 보편적으로 택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다남(多男), 부귀(富貴), 복(福), 장수(長壽)를 뜻하는 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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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남을 상징하는 노리개로는 고추, 가지, 도끼, 박쥐,투호의 형상을 패물로 장식한 것들이다.
이와같이 노리개는 하나의 호사스런 장식품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 안정된 조화를 이루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여성의 지혜와 소망이 담겨 있다. 노리개는 혼인 때의 예물로 시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였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위엄과 자존을 지키며, 집안을 두호(斗護)하는 믿음으로 노리개를 소중히 간직하였다.
노리개는 여러 가지 문양, 덕담의 문자를 새겨 장수와 복을 빌거나 액을 피하는 것으로 어떤 염원을 위해 차기도 했고 향갑, 향낭, 침낭, 장도와 같이 실용적인 면에서 찬 것도 있었다. 이 중 향갑, 향낭은 사향등을 담은 주머니로 평소에는 향내음을 은근히 풍기고 급할 때에는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침낭은 바늘을 꽂아 두던 바늘집으로 부녀자들이 늘 사용하는 바늘을 손쉽게 찾아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일반 부녀자가 가장 많이 사용한 노리개 중의 하나였다.
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護身用)으로도 사용하였으며, 또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有無)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
1498년(연산군4)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90년(현종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 존비,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명나라에 금, 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여인들의 은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장도끈목의 고리를 꿰어서 차고, 여자의 경우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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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머니
주머니의 역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경덕왕조에 "왕이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때까지 항상 부녀(婦女)의 짓을 하여 비단주머니(錦囊)를 차기를 좋아했다."는 금낭의 기록가 함께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며, 고려시대에도 <고려도경>귀부조(貴婦 )에 "요대(腰帶)에 채조(采 )로 금탁(金鐸)을 달고 금향낭을 찼는데 많은 것을 귀히 여겼다."라는 기록으로 고려인들이 주머니를 찼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주머니의 패용은 여전했으며, 우리 의복에는 주머니 역할을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따로 만들어 차던 것이 장식품으로도 사용되었다. 노리개에 다는 주머니로는 수향낭(繡香囊)이 대표적이며, 주머니 둘레가 둥근 염낭(두루주머니)과 양옆에 모가 나 있는 귀주머니는 단독으로 찼다.
그리고 염랑이나 귀주머니에는 오색의 술을 달아 모양을 아름답게 꾸몄고, 그 사용한 천과 색,부금(付金) 여부에 따라 신분의 존귀, 귀천, 상하를 나타내기도 했다.궁중발기(宮中撥記)에 나타난 궁낭(宮囊)을 살펴보면 염랑과 귀주머니 두가지로 구분되며, 그 놓은 수(繡)의 문양에 따라 황룡자낭(왕을 상징), 봉낭(왕비 상징), 십장생줌치, 오방낭, 연화향낭 등이 있다. 오방낭, 오방줌치의 오방은 오행(五行)에서 나온 것으로 동, 서, 남, 북, 중앙을 나타내는 5방위를 뜻하며 청, 백, 홍, 흑, 황색의 비단을 모아 만든다.
낭(囊) 발기에서 보면 가례시(嘉禮時) 외에도 새해의 첫 번째 돼지날에 대내(大內)에서는 물론 종친들에게까지 주머니를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액을 면하고 한 해를 잘 지내라는 뜻으로 홍지(紅紙)에 볶은콩 한알을 싸서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는 곡식이 잘 여물어 풍년과 평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곡식을 태운 재를 넣은 주머니를 임금이 신하들에게 주었으며 이것은 하나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7)단 추
단추는 원래 원삼 등 예복에만 사용하였던 것이며, 저고리나 여름철 적삼에도 옷고름을 달고 단추는 사용하지 않았었는데 개화기가 되면서 단추의 간편함을 쫓아 여름철 적삼에 옷고름 대신으로 이용하게 되었고 마고자 등에 고름 대신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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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에는 예장용(禮裝用)에 사용하던 것으로 금은(金銀), 옥석(玉石) 단추와 끈으로 맺은 단추가 있었다. 예장용 단추는 나비, 박쥐, 국화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본따기도 하였으며, 사각형에는 문양을 새기기도 하였다.
궁중발기(宮中撥記)에 나타난 단추의 이름을 보면 "적의(翟衣)단추, 다홍 원앙 로의(多紅 鴛鴦 露衣) 단추, 볼기단추"라고 있어 그 용도를 알 수 있다.
맺은 단추는 끈으로 매듭을 맺은 것인데 그 모양이 야무지고 보통 입는 옷에 많이 사용되었다. 유물로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자의(紫衣)와 중의(中衣)에 맺은 단추가 달려있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