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화기 이후의 장신구
개화기에는 의생활면에서도 그 합리주의적인 면을 강조하여 우리의 의생활도 간소화되어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많이 사용하였던 향낭, 침낭, 장도등의 장신구는 점점 그 필요성이 줄게 되어 차츰 우리의 의복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다만 장성할 때 노리개 정도가 사용되었다.
1910년대에 신교육을 받은 여학생들 사이에서부터 검은 우산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우산은 쓰게 치마와 삿갓 대용으로 고안되어 내외(內外)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유행은 일반 부녀자에게로 옮겨가 한때 검정우산은 부녀자의 필수품이 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양산(우산)의 유행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여자의 외출이 가능하게 되면서 원래는 남자의 전용물이던 토시를 여자들도 하게 되었다. 등나무,말총으로 만든 것은 여름용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동물의 털을 넣어 만든 것은 방한용으로 겨울에 사용하였다. 토시는 실용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요소를 갖추었고, 점차 장갑이 들어오면서 1930년대에 자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주머니만은 꽤 오래 애용되었는데, 그것도 1930년대 이후 핸드백이 나오게 되자 젊은층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노인층에서만 해방전까지 패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920년대까지는 학생들간에도 주머니를 차고 있었고, 주머니 끝에는 색색이로 과불들을 만들어 주렁주렁 다는 학생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梨花七十年史, 후편) 여기에서 학생들이 차고 다니던 주머니를 가지고 그 모양도 겸하여 알 수 있고, 여자의 한복에는 주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없어 실용적인 면에서도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애용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1940년대 이후에는 저고리에 고름대신 단추를 이용하게 되면서 부로우치 등 우리 의복의 새로운 액세서리가 등장하는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