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 - 무너지지 않는 마음 공부
홍자성 지음, 최영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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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은 꽤 많이 들었고, 읽었고, 또 들었고, 또 읽었다.

그래도 읽을 때마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느 시기에 읽어도 좋다. 그때그때 다 다르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채근담도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다. 

어느 출판사의 책을 읽어도 상관없다. 

원문을 읽으면, 언제든 나의 상황에 대입이 가능하다.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서, 

해석을 어떻게 달아놓았느냐, 

엮은 이의 철학과 어떻게 어우러지느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다.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무너지지 않는 마음 공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는 

채근담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현대인의 삶의 방향을 찾고, 

소박하고 검소한 삶의 가치를 강조하며,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현대인에게 필요한 다양한 삶의 지혜와 가르침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채근담의 문장 중에서 자신에게 와닿는 문장을 발견한다면

그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내 나이 오십에 다시 채근담을 읽으며, 

내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이 책의 구성은 7개 파트, 356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운명과 시련을 대하는 자세,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마음을 비우는 공부, 

세상을 비추는 눈, 

자연과 하나된 삶이라는 7개 파트가 있다. 


저자의 생각을 담은 글과 함께 채근담을 소개한다. 

나는 저자가 단 제목들에서 그 내용을 읽었다.


잠깐의 외로움이 들려준 평온의 비밀 명각본 전집 001


棲守道德者, 寂寞一時

依附權勢者, 淒涼萬古。

故達人觀物外之物, 思身後之身, 

寧受一時之寂寞, 毋取萬古之淒涼。


도덕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한때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기대어 사는 사람은 영원히 쓸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눈앞의 이익 너머를 바라보고, 

죽은 뒤의 삶까지 생각합니다. 

차라리 잠깐의 외로움을 감수할지언정, 

영원한 쓸쓸함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가르침의 거리, 꾸짖음의 무게 명각본 전집 023​


攻人之惡, 毋太嚴, 要思其堪受

教人之善, 毋過高, 當使其可從。


남의 잘못을 꾸짖을 때는 너무 심하게 하지 말고,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지를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또한, 남에게 선한 길을 가르칠 때는 

너무 높은 이상을 제시하지 말고, 

그가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고요는 준비된 마음 위에 온다 명각본 전집 182​


忙裏要偷閑, 須先向閒時 討個把柄

鬧中要取靜, 須先從靜裏立個根基

不然, 末有不因境而遷, 隨時而靡者。


바쁜 와중에도 여유를 누리려면, 

미리 한가한 시간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고요함을 지키려면, 

미리 고요한 순간 속에서 그 뿌리를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라도 환경에 휘둘리고 

순간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바쁨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 명각본 후집 004


歲月本長。而忙者自促。

天地本寬, 而鄙者自隘。

風花雪月本閒, 而勞攘者自冗。


세월은 본래 넉넉하게 흐르건만 

바쁘게 사는 사람은 스스로 그 시간을 좁히고, 

하늘과 땅은 본래 넓고도 크건만 

속좁은 이는 스스로 그 공간을 막습니다. 

바람, 꽃, 눈, 달은 본래 한가한 풍경이건만 

분주한 사람은 스스로 복잡하게 만듭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리 바쁠 수 있나 싶을만큼 바쁘게 지냈다.

늘 입에다 바쁘다는 불평을 달고 살았다.

어쩌면 스스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항상 다른 이에게 불편을 해댔다.

모르진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오랫만에 채근담을 다시 읽는 시간을 가졌다.

역시 읽을 때마다 내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은 달라진다.

가끔 한번씩 다시 꺼내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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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놀아도 사계절 중학년문고 42
김민경 지음, 모루토리 그림 / 사계절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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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릴 때, 작은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도서관 프로그램으로 전통놀이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도, 아니, 이게 왜 전통놀이야? 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매일 하던 놀이인데..

게다가 아이들은, 이 놀이의 규칙도 몰라서 배워야 할 수 있었다.


사실, 내 기억도 그리 신통치는 못했다.

그렇게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던 놀이의 세세한 규칙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이 놀이는 이렇게 한다기보다 그때그때 적당하게 바꿔가며 했던 것 같다. 

동생들은 언니 오빠들 옆에서 자연스레 배웠다.

그때는 골목마다 아이들이 나와 놀던 시절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이 생각났다. 


"솔직히 그동안 건우 달고 다니면서 힘든 적 많았단 말이야. 이 년이 짧아? 내가 엄마한테 힘들다고 말한 적 있었어? 올해부터는 안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불안해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근데 쟤, 정말 걱정 하나도 안 해도 돼. 운동장에서 얼마나 잘 노는지 알잖아. 휴대폰도 사 줬고." (p.17)


지우는 동생을 데리고 다니느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계속 신경을 쓰느라 힘들었던 사실을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예전같으면, 학교 운동장이나 집 근처 골목에서 

또래들과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런 모습이 사라진지도 몇 십년이 되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맞벌이를 하느라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줄었다.

어쩌면 마을 전체가 아이들을 함께 키워야 한다는 

그 말이 가장 필요한 시기지만,

현실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김순례 할머니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 놀던 꿈을 꾼 후

다니는 일을 그만 두고, 

제대로 놀아보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경로당엘 가도, 집에서 혼자 놀아도, 노는 것이 힘들다. 


할머니는 집에 있는 책 중에서 한 권을 골라 읽어보는데,

다행히 책은 재미가 있었다. 

결국 가까운 도서관에 찾아가본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도서관 카드를 만든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이 아직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기 위해 애쓰지만,

어느 누구 하나 마음 편한 사람이 없다.

할일 없이 운동장에서 누나를 기다려야 하는 건우와

제대로 놀지 못해 아쉬운 할머니가 

만나 함께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얼마전에 읽은 '모모의 여름방학'이 떠올랐다.


이 책 속 김순례 할머니는 건우에게 노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물론 함께 논다.

사방치기를 하기도 하고 땅따먹기를 하기도 한다. 

경로당에서 할매 할배들하고 놀려고 했던 할머니는 

맨날 앉아서만 노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 학교 운동장에서 건우를 만난 건 서로에게 다행인 일이다.

건우는,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다.

놀이를 '경쟁'이라는 눈으로만 보는 세대,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보고 배우지 못한 세대이다.

"그날이야 좋겠지. 근데 맨날 놀아야 하는데, 니 뜻대로만 되면 누가 니하고 놀겠노? 지금도 애들이 니하고 잘 안 놀려고 한다며?"


할머니는 그런 건우에게, 놀이를 통해 알려준다. 

규칙을 지키면서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이기지 않아도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온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오해가 쌓인 친구와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도 알려준다.


"때를 기다려야지. 그다음엔 용기를 내야지. 칠십 먹은 내가 니한테 놀자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p.104)


진심이 전해지면 우리 마음은 풀리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옛날부터 인간은 놀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왔다.

물론 그때가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우리 아이들이 잃어버린 그 감성들을 다시 일깨워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함께 하면 좋겠다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도 좋고, 어르신들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놀이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어르신들이라고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든 어르신이든 모두 처음은 어려운 법이다.

판을 깔아주고, 함께 할 수 있게 도와주자.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미래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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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 보면 알지 - 호랑수박의 전설 웅진 모두의 그림책 74
이지은 지음 / 웅진주니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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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될 때마다, 기대하게 되는 그림책 작가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그림책은 '먹어보면 알지, 호랑수박의 전설'. 

표지를 보면, 그동안 계속해서 출연(?)했던 호랑이와 할머니가 보인다. 

그리고 줄줄이 쌓아올린 동물탑... 살짝 숨겨진 수박. 

동물들의 표정은 먹고싶어하며 혀를 내밀고 있지만, 뭔가 으스스한 기분도 든다.


먹어보면 알지.... 

여름을 겨냥한 시원한 서스펜스인가??


여름 밤, 수박을 먹고 싶은 생각에 줄줄이 걸어가는 좀비 같은 동물들이 보인다. 

수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시원하게 잘라내어 오면 하나쯤은 먹게 되는 과일, 수박. 

여름의 무더위를 날려주는 과일이다.

맨 뒤에 따라가는 저 호랑이는 

이지은 작가의 그림책을 봐왔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바로 그 호랑이다. 


수박을 찾아가던 호랑이의 눈에 떡하니 나타난 수박. 

마치 날 잡아잡소 하고 수박 하나가 있다.

수박 앞에 선 호랑이의 모습은 오싹 그 자체이다.

아마도 수박은 벌벌 떨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수박은 말한다. 

"난 수박이 아니야. 

날 먹으면 큰일이 벌어진다."


원래 하지 마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호랑이는 '먹어보면 알지' 이러면서 수박을 먹어버린다.

먹어보면 알지... 무서운 말이다.


옛날 전설의 고향이란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때 '내 다리 내놔라'가 가장 임팩트 있는 대사였던 것처럼

호랑수박의 전설 속에선 '먹어보면 알지'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맛있게 수박을 먹은 호랑이는...

갑자기...몸이 변하면서 수박이 되고 만다. 

하지 말라는 건 왜들 그렇게 못해 안달인지... 

겪어봐야 아냐고~


수박이 된 호랑이는 핫...귀. 엽. 다.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모습으로, 수박의 형상을 한 호랑이.

누군가가 호랑이를 아니 호랑수박을 발견한다면, 

또 그렇게 먹으려고 덤벼들겠지.

결국 수박이 된 호랑이는 다른 동물들에게 쫓긴다.

다들 수박을 먹고 싶어 쫓아오는데,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호랑수박을 구해준다.

그렇지만, 할머니도, 어느새 수박 한 입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과연 호랑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림책 후반부에 보면, 만화 형식으로 그려진,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전에 부록 처럼, 삽지처럼 끼워져 있던 그 형식인데

그림책 안에 같이 자리를 잡았다.

앞의 이야기의 에피소드, 뒷 이야기같은 느낌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 같은 상황도 다르게 해석된다.


아이들과 함께 읽는다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책의 내용을 함께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아, 작가가 마지막에 남긴 둘 머리 용을....

한참만에야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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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탈출기 북극곰 꿈나무 그림책 124
김미소진 지음 / 북극곰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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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소재가 '똥'이다. 까르르 까르르 잘도 웃는다. 그래서일까? 똥을 소재로 많은 책이 나왔다.


이번에 본 이 그림책에는 변기 아래 마을에서 살던 덩이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뛰쳐나온다. 변기에서 똥이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막힌 변기를 뚫을 때이다. 


작가는 그 순간을 캐치한 것일까? 변기가 막힐 땐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그림책에서는 아저씨가 볼일을 보면 막힌다. 그런데, 이 아저씨, 누군가와 꽤 닮았다. 이미지도 그렇지만, 사건을 만드는 당사자로서도 그렇다. (북극곰 출판사의 이루리작가님^^)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체력을 기르고,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않은 덩이는, 변기 아래 마을에 살땐, 꽤 자신감 넘치는 존재였다. 뭐든 해내고야마는 불굴의 의지까지 지닌. 


그렇지만, 덩이가 세상에 나왔을땐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때 공책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되는데, 그때 날아온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책 대회에 나가기로 한다. ​


덩이는 결국 가장 재미있는 책을 써서 상을 받는데, 신문에서 이 모습을 본 다른 똥들이 자극을 받아 덩달아 세상으로 나온다.


누군가에게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된다. 심심하고, 누구도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회복력 강한 덩이의 모습을 본다.


처음에 이 그림책에 왜 가름끈이 붙어있을까 생각했는데, 그림책을 다 덮고나서야 눈치를 챘다. 

세상이 원치 않고, 쓸모없다 생각했던 두 존재가 만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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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농장
성혜령 지음 / 창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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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이라서, 며칠 동안 하나씩 하나씩 읽었다. 

이 책은, 클럽창비 웰컴박스에 포함되어 온 소설집이라서 읽게 되었다. 

에픽, 계간지 문학동네와 창작과비평 등에서 한번씩 읽었던 소설도 있었다. 

8편의 작품 중에서, 마음에 남은 작품은 '윤 소 정', '간병인'이다.

표제작인 '버섯농장'은 내게 감흥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성혜령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작품만으로 상상하기를, 외로움에 대해 아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아팠거나 아픈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이겠다고 생각했다. 


"모두 나진의 어머니가 돌보던 것들이었다. 작년 겨울, 어머니가 5년간 세번 재발한 유방암으로 죽고 난 뒤에는 모두 나진이 맡았다. 나진은 화분마다 물 주는 주기를 외우고 있었고 분갈이가 필요한 시기도 알았지만 몇개월 만에 대부분의 꽃들은 봉오리째 떨어져 내렸고 나뭇잎은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말라갔다. 어떤 화분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어떤 화분에선 벌레가 알을 낳았다. 그래도 나진은 물 주기를 멈추지 않았다.


-중략-


그제야 나진은 아버지구나, 생각했다. 언젠가 정리해야 하긴 했다. 화분이 너무 많긴 했다. 항상 그랬듯이 아버지는 혼자 결정하고 혼자 처리했다. 그 뒷정리는 원래 어머니의 몫이었는데 이제 자연스럽게 나진의 일이 되었다. 쪼그려 앉은 채 맨손으로 흙을 쓸어 담으면서 나진은 40년이 넘는 결혼생활이 어머니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유방 절제술을 받기로 결정했다."(간병인, p.185)


"나진은 마지막으로 치료를 더 받아보자고 떼쓰듯 울던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새까만 아버지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고 난 뒤, 힘 빠진 팔을 던지듯 자기 무릎에 내려놓고 어머니는 그렇게 해라고 말했다. 하자,가 아니라 해라고. 어머니에게는 처음부터 결정권이 없었다. 아버지는 생존에 관해서라면 무자비했다."(간병인, p.191)


나진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봤다. 

저 부부도 참 재미없게 살았겠구나. 

부부라는 껍데기를 쓰고 각자의 삶을 살았겠구나.


나진은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채근에 유전자검사를 하고, 암에 걸릴 수 있는 유전자라는 결과를 받고, 예방 차원에서 유방절제술을 하기로 한다. 예방 차원의 유방절제술을 내가 처음 들었던 것은 안젤리아 졸리가 수술을 했을 때였다. 유방암과 난소암의 위험이 높은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진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더이상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고 매달렸다. 어머니는, '하자'가 아닌 '해'라고 답을 한다. 그 치료는 누구를 위한 치료였을까? 


20년쯤 전에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수술을 위해 개복했지만, 수술을 하지 못하고 덮었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수술을 하기 전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암이 자라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일상 생활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수술을 하지 않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살 수 있는데까지 사는 게 어떨까 했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가 끝까지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왜냐면, 돌아가시고나면 그 수술 한번 안해준게 마음에 남을거라고... 


그랬을까? 아픈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을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만큼 다 해줬다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한 치료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진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매달려 마지막 치료를 더해보자고 하는 저 장면이, 어머니가 '해'라고 말한 저 장면이 바로 그때를 연상시켰다. 


나진이, 암을 예방하기 위해 절제술을 하고 병원에 있는 동안 간병인인 미형을 만난다. 미형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다고 한다. 나는 모르는 회사의 파산에 대해서도 미형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산 40년이 아버지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함께 산다는 것이, 가족이라는 것이, 남보다 더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가족의 의미 같은 걸 되새겨볼 생각은 없다. 나 역시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서로를 걱정하고, 신경 쓰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소설을 읽다가, 그런 내 모습이 같이 읽혀졌다. 


외로움, 고독, 그리고 소외. 이제는 이런 것들이 누군가에게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게 뭐 그리 대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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