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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 문학 강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이 책은 나보코프가 강의실에서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작성한 메모와 자료들을 글로 묶어낸 책이다. 우선 우리는 나보코프가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나보코프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7세에 자비로 시집을 발간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조국을 떠나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스위스 등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는 소설 『롤리타』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다. 나보코프는 20년 가까이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 중에서 7개의 명작에 대한 강의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좋은 독자와 좋은 작가
예술 작품은 언제나 새로 창조된 세상이다. 평범한 작가는 평범한 것에 장식을 덧붙일 뿐 굳이 세상을 재창조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훌륭한 독자, 좋은 독자는 상상력, 기억력, 사전, 약간의 예술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보코프는 "훌륭한 독자, 중요한 독자, 활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책을 다시 읽는 사람"(p.47)이라고 말한다. 그림을 처음 접할 때는 특별한 방식으로 눈을 움직일 필요가 없고 시간이라는 요소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책을 읽을 때는 시간을 들여 친해져야 하고 두번, 세번 네번, 책을 읽고 난 뒤에야 그림을 볼 때와 같은 태도로 책을 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책을 손에 쥐고 읽으려고 애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다양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예술의 대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창조해낸 책인만큼, 이 책의 소비자도 당연히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공정하다."(p.48) 그러나 상상력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단순한 감정에 의지하며 개인적인 성격을 띄는 수준이 낮은 상상력이다. 나보코프는 독자가 책 속의 등장 인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우를 최악의 독자로 본다. 우리는 대부분 이 수준의 독자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두번째 상상력은 개인적인 특성과는 관계없는 상상력과 예술적인 기쁨을 말한다. 독자는 작가가 자유자재로 사용한 구체적인 세상을 명확히 파악하려고 애써야 한다. 책 속에 나오는 것들과 인물들의 행동을 눈으로 보듯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은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며, 네안데르탈의 계곡에서 커다란 회색 늑대에게 쫓겨 뛰어나온 그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문학은 소년이 뒤에 늑대가 없는데도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친 날 태어났습니다." (p.49~50)
작가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야기꾼, 교사, 마법사. 뛰어난 작가는 이 세가지를 조합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작가를 가장 뛰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은 마법사이다.
제인 오스틴(1775~1817)
『맨스필드 파크』(1814)
패니는 작가가 아끼는 인물이자, 이야기의 축이 되는 인물이다. 패니는 수양딸이고, 무일푼의 조카이며, 얌전한 피후견인이다.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에 이러한 피후견인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1. 기본적으로 낯선 집의 미지근한 식구들 사이에 자리한 그녀의 위치가 페이소스를 꾸준히 만들어낸다. 2. 낯선 집의 이 이방인이 그 집 아들과 낭만적인 감정을 주고받는 상황을 쉽게 만들 수 있고, 그 결과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갈등이 빚어진다. 3. 한 걸음 떨어져 있는 관찰자이면서도 식구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참여하는 이중적인 지위 때문에 작가의 뜻을 전달하는 편리한 대변인이 될 수 (p.54)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제인 오스틴의 작품 뿐만 아니라 디킨스, 도스토에프스키, 톨스토이의 작품에도 이런 인물은 등장한다. 이 아가씨들의 원형을 나보코프는 '신데렐라'라고 말한다. 혼자 살아갈 수 없고, 무기력하고, 친구도 없고, 방치된 채 잊혀진 존재였다가 남자 주인공과 결혼(p.54)을 하는.
나보코프는 제인 오스틴이 책의 첫머리에서 네 가지 방법으로 인물 설정을 설명한다며 직접적인 묘사, 인물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것, 남에게 전해 듣는 말, 자신이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의 말투를 흉내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보코프는 플롯을 "미리 생각해 둔 이야기"로, 테마를 "소설 속 여기저기에서 반복되는 이미지 또는 생각"으로, 구조는 "책의 구성, 사건 전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야기하는 것, 한 테마에서 다른 테마로의 이행, 인물을 교묘하게 등장시키는 것, 새로운 행동 묶음이 시작되거나다양한 테마가 서로 연결되거나 소설을 진행시키는 데 이용 되는 것"이며 문체는 "저자의 특별한 어조, 어휘, 독자가 어떤 문장을 보았을 때 이건 디킨스가 아니라 오스틴의 문장이라고 외치에 만드는 어떤 것"이라고 메모해두었다. (p.64)
나보코프의 강의는 플롯, 테마, 구조, 문체 등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식이다. 책을 한번만 읽고 다시 읽지 않는 사람이라면 발견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닐까 싶다. 나보코프는 문체가 작가의 개성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제인 오스틴처럼 경력이 쌓일수록 작가의 문체가 더 정밀하고 인상적으로 변해갈 수는 있지만, 재능이 없는 작가는 가치 있는 문제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천재성은 작가의 영혼 속에 깃들어있다. 나보코프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 소설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젊은 작가만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적확한 단어를 찾아내고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나 소설을 써보겠다고 습작을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내게는 그런 재능이 없음을 알고 일찌감치 그만 두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보코프가 내 앞에 있었다면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조금은 노력해봐도 되지 않을까?
찰스 디킨스(1812~1870)
『황폐한 집』(1852~1853)
나보코프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구식 가치관을 매력적으로 재배열한 작품이라면 디킨스의 작품에는 새로운 가치관이 나온다고 말한다. 『황폐한 집』에는 주목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아이들과 관련된 테마, 챈서리-안개-광기 테마, 등장인물의 속성, 이야기에 참여하는 사물들, 셜록 이전의 탐정 스타일, 선과 악으로 구현된 이원론 등이 그것이다. 이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테마는 챈서리 법원 테마(안개, 새), 비참한 생활을 하는 아이, 그리고 미스터리테마이다.
디킨스가 챈서리의 안개를 다룰 때는 마법사이자 예술가의 면모를, 아이들 테마에서는 예술가와 사회운동가가 합쳐진 모습을, 미스터리 테마에서는 이야기에 방향을 제시하고 추진력을 제공하는 아주 영리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인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은 예술가의 면모입니다.(p.149)
이야기의 형식이란 이야기의 구조(예술 작품의 미리 계획된 패턴), 문체(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을 말한다. 작가가 등장인물을 선택해서 이용하는 것, 인물들 사이의 상호작용, 그들의 다양한 테마, 테마의 가닥과 그 가닥들이 교차하는 부분, 작가가 이런저런 직간접적 효과를 내기 위해 도입하는 다양한 움직임, 효과와 인상을 남기기 위한 준비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 후자의 문체에는 작가의 특징, 작가의 버릇, 여러 특별한 트릭들이 있다.
디킨스의 문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음과 같다. 비유의 사용 여부와 상관없는 생생한 감각적 표현, 상세한 묘사의 무뚝뚝한 나열, 비유:직유와 은유, 반복, 수사학적인 질문과 답변, 칼라일의 돈호법, 형용어구, 의미를 연상할 수 있는 이름, 두운과 유운, 그리고-그리고-그리고 장치, 유머러스하고 괴상하고 암시적이고 변덕스러운 표현, 말장난, 말(言)의 간접적인 묘사 등이다.
이런 것들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원서'를 읽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번역 문학에서 작가의 문체를 눈치채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빙 영화보다 자막 영화가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나 할까? 나보코프의 문학 강의를 읽어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그리고 두번 세번 계속해서 다시 읽는 동안 그 작품이 내게 좀더 친절하게 다가올 것 같다. 처음에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인오스틴과 디킨스의 작품 강의까지 읽기가 가장 힘들었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나보코프가 강의 사용하는 것들, 테마, 문체, 구조와 같은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세번째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의 『보바리 부인』(1856)에 이르면 나보코프의 강의 방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그래서 훨씬 더 이해가 빨리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해설을 따로 붙여 문체, 이미지, 말(馬) 테마를 따로 소개한다. 문체를 보면 플로베르의 소설은 산문시와 같으며 세미콜론 다음에 and를 사용한 방식을 사용한다. "세미콜론은 한 숨 쉬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and'는 문단을 정리하면서 최절정의 이미지나 생생한 세부 묘사로 이어주는 역할"(p.322)을 한다. 그런가 하면 점층법(시각적인 세부 묘사를 연달아 펼치는)을 즐겨 썼으며, 의미없는 대화를 통해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플로베르가 프랑스어의 불완전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면 그가 시간의 흐름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알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부분까지 느끼거나 찾아내려면 번역본에 의지해서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이 책에서도 번역가들이 플로베르의 글을 번역하면서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
『지킬 박사와 하이드 시』(1885)
나보코프는 이 책을 미스터리 소설이나 범죄 소설, 영화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조상 중 하나라는 말은 사실이지만 스티븐슨은 "악령소설"이라고 외쳤다. 나보코프는 1. 지킬은 선한 사람이아니라 복잡한 존재이다. 2. 지킬은 하이드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순순한 악의 결정체인 하이드를 밖으로 쏘아보낸다. 3. 지킬의 인격은 세 개이다. 지킬, 하이드, 그리고 하이드가 전면에 나섰을 때 뒤에 남은 지킬로 구성된 제3의 인격이 있다고 말한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스완네 집 쪽으로』(1913)
문체는 작가의 버릇, 다른 작가와 구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특정한 버릇을 말한다. 나보코프는 프루스트 문체의 특징을세가지로 설명한다. 1. 은유적인 이미지가 풍부해서 비유가 층층히 겹쳐져 있다. 2. 문장의 폭과 길이를 최대한 늘리고 채우는 경향, 문장 안에 기적적으로 많은 수의 절, 삽입구, 종속절, 종속절의 종속절을 꽉꽉 밀어넣는 경향. 3. 대화가 묘사의 융합. 작가의 문체를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면 그 작품들이 나에게 정말 다르게 다가왔을텐데. 왜 이런 작품들이 칭송받는지 의아했던 내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문체만이 그 작품을 특징지을 수는 없지만.
나보코프의 문학 강의를 통해 나는 새로이 '문체'를 이해하고, 구조와 테마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일곱 개의 소설은 이미 읽은 책들인데도 나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읽게 된다. 그래서, 책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