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싶어진 건 영화 때문이다. 레아 세이두님^^주연의 영화가 얼마 전 개봉했는데 우리 집 앞 극장에선 상영을 안했고, 차일피일하다가 영화를 놓쳤다.
레아 세이두! 그녀를 처음 본 건 (그 전에도 봤겠지만 가장 강렬한 기억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였다. 그 영화는 사실 내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고(너무 충격적이라) 그녀도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그 후 묘하게 계속 그녀에게 끌렸다. 심지어 앞니도 조금 벌어졌는데 이뻐보이는거다.
암튼 그녀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원작이 1890년대의 소설이라길래 호기심이 더욱 발동했다. 벨 에포크 시대! 드레스를 입고 살롱에서 사교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니까.
옥타브 미르보는 프랑스 문학의 문외한인 내게는 당연히 생소하다. 책 표지에 있는 작가 소개를 보니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와 함께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앞장 서 행동하는 `정의의 사도`였다고 한다. 맘에 든다^^ 그가 어떻게 프랑스 사회의 위선을 풍자할지 짐작이 간다. 그럼 읽기 시작해볼까?
근데..응? 이게 1890년대에 씌여진 소설 맞아? 올드한 느낌은 없고 너무 재밌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고 싶었구만. 책이 생각보다 두꺼워서 시작할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어느새 책 속으로 빠져든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발칙한 하녀 셀레스틴. 심지어 이름도 너무 고급지다. 주인님들은 고급진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아무 이름이나 부른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우아한 마님과 주인님들. 그들은 짐작했듯이 환상을 여지없이 깨버리고 온갖 추태를 보여준다. 어쩌면 하나같이 다들 위선적인지!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 모든 예술가들이 흠모해 마지 않았던 벨 에포크 시대가 이런 인간 군상의 집합이었다니, 마치 증권가 찌라시를 읽듯 `어머, 어머, 이게 웬일이야!!`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의 셀레스틴도 결코 만만치 않은 여자라서 주인님의 세상을 동경하면서도 결코 자존심 굽히지 않고 당차게 주인들을 휘두른다.
한참 재밌게 읽고 있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하인은 정상적인 존재도 아니고, 사회적인 존재도 아니다. 하인은 서로 맞춰질 수도 없고 포개질 수도 없는 잡다한 토막들과 조각들로 만들어진 누군가다. 하인은 그보다 더 나쁜 그 무엇, 인간과 괴물의 잡종이다. 그는 서민출신이지만, 그 계급에서 빠져나왔다. 또 그는 부르주아들 속에서 살고 부르주아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는 아니다. 그는 자기가 버린 서민들의 그 관대한 피와 소박한 힘을 잃어버렸다. 또한 그는 부르주아지로부터는 수치스러운 방탕함을 얻어냈으나 그것을 만족시킬 수단을 획득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비열한 감정, 비겁한 두려움, 범죄적 취향. 이 점잖은 부르주아 사회를 통과하는 가운데 그의 영혼이 완전히 더러워지며, 이 썩어가는 시궁창에서 올라오는 치명적인 악취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그는 정신의 안정은 물론 심지어 자아의 형태까지 영원히 잃어버린다. (226쪽)
아!! 이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만을 쫓다가 영혼이 썩어가고 자아를 잃어버리는 현대인의 모습. 하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구나. 우리가 지금 하녀의 삶을 살고 있는거구나. 상류 1%의 삶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도 알고, 뒤에선 그들을 한없이 비판하지만 그들처럼 될 수 있다면 영혼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있지않은가.
나는 책속의 마님들과 그들을 살살 이용하는 하녀들 모두 위선적이라 비웃었지만 이게 바로 내 모습일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뒷골이 서늘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더 읽기를 관두고 잠깐 생각에 잠긴다.
소설은 아직 한참 남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위선적인 일들이 벌어질런지 사실 두렵기까지 하다. 이 가식과 위선에 질릴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게 내모습일수도 있다는 사실에 좀 떨린다.
사실 이쯤에서 영화를 보고 싶은 욕구를 참을수가 없다. 찾아보니 IPTV로 나왔든데, 책을 끝까지 읽고 보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레아 세이두가 눈앞에서 왔다갔다하고 `이 장면이 영화에 나왔을까? 영화에선 어떻게 그려졌을까?` 확인하고 싶어진다. 영화를 봐? 책을 계속 읽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