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를 보았다. 역시 이준익 감독이다! 최근에 사극을 영화화한 <역린>이나 <간신>(최악이다ㅠㅠ)과 비교해보자면 화면이 훨씬 정갈하면서도 기품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잘 살아났다. (그리고 영화의 깜놀 포인트는 바로 성인 정조역할! 그가 나올 줄 상상도 못했다 ㅋㅋ)
영화를 보고나니 전에 읽었던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을 다시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갔는데 이미 대출중이고 예약도 다 차있었다. 헉! 전엔 도서관에 가면 항상 있는 책이었는데 요즘은 영화 덕에 인기가 많은가보다.
아쉬운대로 집에 있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뒤져보았다. 무슨일이 있어도 1권부터 차례차례 순서대로 읽겠다고 다짐해놓고 8권 중종실록 이후 아직 진도를 못나가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건너 뛰어서 15권 경종•영조 편을 펼쳤다.
여러 차례의 환국을 거치며 왕권을 강화한 숙종 시절과 경종의 짧은 재위기간을 거치며 존재 자체가 불안하고 역모를 상징하던 영조가 어떻게 살아남아서 탕평을 주장하게 되는지, 나름 자세하게 나와서 배경을 이해하기 쉬웠다.

—어미가 죽일 것을 청하고, 아비가 죽이라 명하고, 장인이 앞장서서 집행한 이 사건의 진실에 완전히 접근하기란 어렵다. 영빈 이씨의 청은 <실록>에 실려 있지 않고, 나경언의 고변서는 불태워졌으며,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승정원 일기>는 뒤에 세손의 청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200쪽)

사도세자에 대한 부분은 이런 저런 해석들을 소개하며 마지막에 저자의 시각에서 본 비극을 재구성하는데 정병설 교수의 견해와 비슷하다. 결국 비극의 기본 요인은 왕과 세자에게서 찾는게 맞는 듯 하다.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영조는 자신이 어렵게 이룬 정치적 안정과 튼튼한 왕권을 유지해 나갈 후계자를 원했고 그럴수록 더욱 세자가 마음에 안들고 실망스러웠다. 세자는 두려움이 마음의 병이 되어 현실을 도피하게 되었다. 그래도 대안이 없었다면 비극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을테지만 ( 무섭게 야단쳤다가도 대안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마음을 다스려 칭찬하는 모습도 실록엔 제법 있다 한다) 영조 앞에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이상형의 후계자감이 나타났다. 세손! 뒷날의 정조다.
저자는 감정적으로 눈물도 많고 `지나친 거조`를 일삼으며 신하들을 휘두르던 영조가 사실은 치밀한 정치가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왕위가 세손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안전하게 세자를 제거하는 치밀한 프로젝트를 꾀한 것이라고 본다.

처음엔 정병설 교수가 왜 책제목을 <권력과 인간>이라고 했을까 궁금했는데 (제목만 들었을 땐 사도세자에 대한 내용인줄 전혀 몰랐다) 영화를 보고나니 그 의미가 더 와닿았다. 영화 마지막에 영조와 세자가 서로 독백으로 대화하는 부분에서 가슴이 찡해지는 것도 그래서였나보다. 왕과 세자로 만나지않았더라면 더 잘 지낼 수 있었을텐데... 평범한 아버지로, 아들로 살아가지 못했던 것이 권력을 쥐어야만 했던 그들의 운명이었다.

영화 속에서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추궁하는 영조의 모습에서 현대의 부모들은 많이들 따끔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 [권력과 인간]을 읽고 엄청 충격을 받았다. 영조의 모습에서 나를 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미 나는 내 죄를 뉘우치고^^ 독서로 심신을 수양하던 때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고, 우리 아들은 사도세자가 될 운명에서 벗어낫지만.ㅎㅎ(왕이 아닌게, 권력이 없는게 얼마나 행복한가)
영화 속에서 과녁을 향해 활을 쏘던 세자가 허공으로 화살을 날리며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고 할때 나는 눈물이 흘렀다. 떳떳하냐고 슬프게 말하던 유아인을 와락 끌어안고 등 두드려 주고 싶은 마음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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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10-13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영화 <사도>를 보고 역사적 사실 같은 것들을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읽고나니 뒤엉켰던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네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만화였군요? 이렇게 보니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을듯하네요. 안그래도 조선왕조실록 한 번 보고싶었는데 만화로 도전해봐야겠네요ㅎㅎ

덕분에 좋은 책 소개받고 가고 좋네요^^ 감사합니다ㅎ

살리미 2015-10-14 00:24   좋아요 1 | URL
영화를 보고 뭔가 생각이 많았는데 막상 글로 쓰려니 정리가 잘 되지 않네요.
저도 그 당시 상황을 더 알고 싶은 생각에 조선왕조실록도 찾아보고 이참에 <한중록>도 읽어볼까 생각중이에요....(생각만 ㅋ)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도서정가제 시행 전에 얼른 구입해놓고 한권씩 천천히 읽고 있는 중인데, 만화라서 쉽게 볼수 있는 장점도 있고 그렇다고 결코 가볍지만도 않은 책이에요. 실록에 서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서 좋은 듯 해요. 제가 전에 거의 원본 그대로의 조선왕조실록 읽다가 지루해서 미쳐버릴뻔 했었거든요 ㅎㅎ 이 책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해피북 2015-10-14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시백 조선왕조 실록 저두 비슷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요. ㅋ 곰곰히 생각해보니 반복적인 패턴에 새로움을 느끼지못해 좀 질렸던거 같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날때 한 권씩 꺼내읽는것두 참 좋을거같아요 ㅎㅎ
벌써 영화를 보셨군요.오로라님이세요 ^~^

살리미 2015-10-14 13:53   좋아요 0 | URL
왕실의 일이란게 워낙 이 편 저 편 나눠서 싸우고 모함하고 엎고... 그런 일의 연속이라 ㅋㅋ 등장인물도 엄청 많아서 유명한 사건이 아니면 지루하기도 해요^^ 그나마 박시백 화백이라 계속 따라갈 수 있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