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가게를 시작, 했습니다 - 여성 오너 15인의 창업 이야기
다카와 미유 지음, 김희정 옮김 / 에디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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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면 선뜻 혼자 힘으로 가게를 차리겠다는 계획이 쉽지는 않다. 점포를 알아보는 일부터 물건을 매입하고 컨셉을 정하며 손님을 상대하는 일에 경영과 회계등등, 가게라는 왠지 허름해보이는 이름과 달리 하고 싶다는 마음만 먹고 섣불리 시작하기 힘든 것이 바로 자기 사업이다. 게다가 여자가 하겠다는 일은 일단 얕잡고보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바로 자기 가게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 속, 15명의 여성오너가 들려주는 자기 가게의 운영노하우는 의외로 쉽고 간단했다. 어쩌면 20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의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고객과의 조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뚜렷하게 자기 가게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이 공통적이었다.
 

나 역시 여성 오너들이 자신의 가게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던 시기를 오래전부터 겪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들과 확연하게 다른 건 바로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데 장애물이 되었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불확실했던 20대보다 갖춰진 게 더 많은 지금도 가게를 갖고 싶다는 꿈만 부풀린 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도 두려움이었다. 오너들 모두 입을 모아 불끈했던 시작과 달리 고비를 맞고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지만 슬기롭게 극복해나간다. 그들은 이미 가게를 시작하기전 겪어야 했던 두려움이란 큰 산을 넘었기 때문에 더 큰 위기도 넘길 수 있는 용기와 끈기,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유행을 쫓지 않으며 확고한 컨셉을 가지고 인내했던 부분은 내가 가게를 하더라도 마음속에 새겨두기로 했다. 
 




 

 

 

 

 
잡화 전문점-vanilla chair                         일본 동화풍 잡화점-라무네 저택  
 

"가게를 열고 싶다는 상담도 꽤 많이 받는데, 이상으로 그리는 가게를 이것 저것 상상하는 시간은 아주 즐거운 것이에요. 그렇지만, 실천으로 옮기려면 상상대로는 되지 않아서, 큰 노력과 각오가 필요하죠."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결정하는 것도 자신, 움직이는 것도 자신이다.  -p.74


최근 우리나라에서 급격히 늘어난 소규모 까페나 음식점들은 대형 체인점화되버린 까페나 패스트푸드점에 식상해진 사람들에게 관대한 칭찬과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개인의 취미나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이런 작은 가게들을 통해 사람들은 진정 소통하는 느낌을 받는 듯하다. 이 책에 소개된 컨셉 가게들도 모두 가게 주인을 닮아있다. 주인의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주인의 취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가게 주인들 역시 손님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그래서 대형 까페나 음식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형성과 감성교류는 이런 작은 가게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가게라는 것이 하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거은 아니에요. 너무 높은 장애물이라고 생각해서 결국 하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많은 거죠. 가게를 만드는 것보다 시작하고 나서가 더 힘들지만, 정말로 하고 싶은 거라면 과감히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p.93 
  

 

 

 

 

 

 

 서양과자 전문점-machilda 
 

20대에 가게를 시작했다는 거창한 타이틀은 15인의 여성오너들을 대단한 존재라고 믿게 만들지만, 사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얼떨결에 시작한 사람부터 뒤늦게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다고 생각해 일단 저지른 사람들도 많았다. 단지 손님들로부터 '귀엽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밤낮으로 케이크모양의 오르골을 만드는 일본동화풍 잡화점의 24살 오너 아오키 메구미씨까지. 사연은 가지각색이지만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자신만의 색을 입힌 가게의 어린 오너들은 당당하고 멋졌다. 아무래도 일본의 가게들이다보니 점포를 오픈하는 과정부터 개업자금까지 우리나라 현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것 같지만 물가비싸기로 소문난 일본의 개업자금치고는 소자본이었다 생각하니, 일을 벌여도 충분할 것 같아 나의 계획을 앞당겨보는 건 어떨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 때까지 오너들의 초심을 두고 두고 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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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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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수많은 매니아를 거느린 미야베 미유키의 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만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만큼 소설 화차는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파헤친 수작이었다 말하고 싶다. 또한 여작가이기 때문에 더 밀도있게 그려지는 여자들의 심리묘사는 순간 순간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무엇보다 지금으로부터 15년정도 더 거슬러 올라갔지만 책에서 보여주는 다중채무자나 개인파산, 대출, 사채로 인한 폐해는 현재 우리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요목조목 집어주는 듯해 매우 놀라웠고, 일본의 신용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우리나라의 현실때문인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근무중 총상으로 휴직하게 된 형사 혼마에게 죽은 아내의 사촌인 가즈야의 느닷없는 방문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부모의 반대에도 강행한 약혼이었기에 가즈야는 말이 새나갈 염려가 없는 혼마를 찾아와 자신의 사라진 약혼녀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가즈야의 부탁을 받을 때만해도 일이 커질 줄 몰랐던 혼마는 단순한 가출이나 실종으로 판단하며 약혼녀인 세네키 쇼코의 행방을 쫓게 된다. 개인파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가즈야가 쇼코에게 사실을 물은 뒤,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찾던 중 세네키 쇼코가 전혀 다른 인물임을 알게 된다. 그 이후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고 빠른 속도로 그녀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난 책을 읽은 후 조금 장황하고 디테일하게 설명된 신문의 사회부 한귀퉁이를 본 듯 했다. 만일 내가 이 책을 출간한 당시였던 2000년도에 보았다면 이 놀라움은 나에게 신용카드 한 장 만들지 못하게 할만큼 무시무시했을 것이다. 돈이 없어도 원하는 물건을 마음껏 사고, 현금을 주며, 대출까지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무절제한 신용카드의 남발은 우리나라에서도 IMF위기를 초래하며 수많은 노동자들과 실직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나 역시 신용카드인 줄 모르고 만든 월급카드가 신용카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현금서비스나 할부구매로 많은 카드값을 지불하며 비싼 교훈을 얻었다. 카드사용을 줄여가고 있지만 이미 습관이 된 카드사용은 좀처럼 줄지 않는 것이 현실이고보니, 책 속의 쇼코이야기는 비단 남의 일이 아니라는 변호사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제가 드린 말씀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세키네 쇼코 양은 특별히 형편없는 여성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어요.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바람의 방향만 조금 바뀌었어도 혼마씨나 저한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상황을 항상 머릿속에 넣어 두시기 바랍니다. 안 그러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할 수 있으니까요.    -p.148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 만난 동료에게 이런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급하게 취직하게 된 친구였는데 취직하게된 계기를 설명하다 카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카드를 사용하고 다닐 때는 당장 내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가지 않아 좋았는데, 그것이 고스란히 다음달 청구서에 찍혀 빚이 되어 날아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참 철없는 친구라며 혀를 찼는데 나 역시 카드사용이 늘면서 결제일이 다가올 때마다 수십번을 돌이켜봐도 쉽게 쓴 돈은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일이 늘어나자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보일 수가 없었다. 변호사의 말마따나 이 사회에서 신용카드는 사회의 필요악인 존재다. 


쇼코 양이 돌오와서 왜 개인파산을 해야만 했는지 해명을 해야한다면 제가 얼마든지 협력하겠습니다. 그런 일이 반드시 그녀만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현대사회에서 카드빚으로 인한 파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공해와 다름없는 것이죠.    -p.67
 

제목인 화차는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라고 한다. 그녀는 신용카드를 -혹은 신용사회를- 여러사람을 지옥으로 빠뜨린 화차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이런 제목을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 화차를 타버린 두 여자의 삶을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하고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조차 사정을 헤아리자 감히 함부로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건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녀는 강한 반기를 들기 위해 이 작품을 쓴 것 같다. 특히 변호사가 교통사고를 예로 들어 개인의 파산을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충고하는 부분은 설득력있게 전해진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려는 기업의 일방적 태도와 국가의 방관도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1인당 개인부채가 총소득의 80%를 넘었다는 최근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이 지경이 되도록 개인을 부추겨온 사람들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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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최수연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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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동 태극마을, 다음 촬영지로 정해놓은 곳이었다. 색색깔의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예쁜 풍경이 되는 그 곳은 사진찍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출사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풍경 가운데 저자가 운영하는 [우리누리 공부방]이 있다. 1988년 7평 남짓의 작은 단칸방에서 시작해 동네에 홀로남은 아이들과 주민들을 위해 열린 [우리누리 공부방]은 20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많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다.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느낀 거지만 수많은 사진 속 풍경에서, 집만 볼 줄 알았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놓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공부방의 큰이모이자 저자인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과 방치된 아이들을 품은 그 풍경을 진짜 사랑한 사람이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카메라를 먼저 들이대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4장으로 구성된 책에는 [우리누리 공부방]의 20년 역사와 공부방을 거쳐간 아이들과 이모, 삼촌의 이야기, 그리고 공부방을 통해 배움의 기쁨을 함께 나눈 부모님들과 소외된 이웃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부모를 잃고 돌봐주시던 조부모마저 떠나보내 홀로 남게 된 아이들과 자신마냥 가난했던 자식에게 기대기 싫어 외롭게 사시던 아랫집 할머니의 쓸쓸한 죽음앞에서는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한글을 모르던 어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들에게 영어수업을 하고, 중학생이 되어 받아줄 수 없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공간마저 허물어 도서원을 만들어주는 장면에서는 슬며시 미소짓게 되었다. 무엇보다 원래 동네사람이 아니었기에 체감할 수 없었던 이웃들의 가난을 그들과 똑같이 일하고 겪으며 배우려했던 저자의 노력에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무엇보다 가난의 가장 큰 문제는 되물림이다. 특히 먹고사는 일이 빠듯한 부모들은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버리기까지 한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쉽게 탈선하거나 나쁜 길로 빠지기도 한다. [우리누리 공부방]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이런 아이들을 올바르게 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데 있다.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돌보고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아이들에게 문화적 혜택과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사회나 국가가 해야할 일을 개인이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론 저자의 종교인 카톨릭 단체에서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과 힘든 고비를 넘기며 끝까지 공부방을 지켜온 큰이모와 공부방 자원교사를 자처한 수많은 이모와 삼촌들의 노고를 높게 사고 싶다. 무엇보다 공부방을 통해 잘 자라준 아이들이 큰이모마냥 그렇게 대견할 수 없었다. 


작고 좁은 단칸방에서 시작한 [우리누리 공부방]은 현재 단란한 2층으로 장소를 옮겨, 오늘도 여전히 부모의 빈자리때문에 텅빈 집을 지키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열려있다. 그리고 공부방을 통해 어엿한 성인이 되고 한 집안의 구성원이 된 아이들은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공부방은 진정 희망이라는 단어를 구체적 현실로 만들어주는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방치된 아이들과 소외된 이웃들에게 공부방이 없었다면 그들은 오늘도 내일도 불안한 미래와 막막한 현실에 분노하고 주저앉으며 사회적 약자나 그늘이 되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진정 행복하게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작은 관심과 애정,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건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배움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용기라 말하고 싶다. 아무리 일회성 기사일지라도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훈훈한 이야기거리를 읽을 때마다 사람들은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말을 한다. 나 또한 [우리누리 공부방]같은 곳이 있기에 부산은, 그리고 세상은 살맛나는 곳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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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 지음, 노익상·박여선 사진 / 월간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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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쓰기 전까지 잊고 있었는데 나 역시 언제부턴가 마흔살이 되면 꼭 전국일주를 하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유혹에도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 마흔,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우리땅 구석구석에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지난한 삶의 모습은 확고부동한 그녀의 신념마저 뒤흔들었을까. 왠지 그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책표지의 늙고 주름진 손이 말해주듯 작가 공선옥이 걸었던 길은 그 손만큼이나 거칠고 척박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저 보고 느끼기 위한 떠남이 아니라, 진정 무언가를 얻고 배우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녀와 사람들 사이의 공감은 그저 여유부리는 여행에서 찾을 수 없는 고단한 삶의 여정이 녹아있다.

 

이제 더 이상 관광지에 가서, 고상하고 멋진 것만 보려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임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고상한 것 보려고하는 사람들에게 멋진 풍경이 되어 주는 것들이 사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p.201


서른셋에 집을 떠나 팔십세까지 천지사방을 돌아다니며 약을 팔았다는 지복덕 할머니, 순창고을에서 만난 정노인 내외, 참 얘기하기 껄끄러웠을 강원도 화천에서 만난 군인들, 여수에 2년넘게 살았지만 처음 와봤다는 화양의 김용득 할머니, 가리봉에서 만난 중국인 노동자 우씨와 최씨, 경북 봉화의 화전민 마을사람들, 양주에서 만난 효순이, 미선이의 가족, 한참을 헤매고 다녔다던 인사동과 낙원동, 수마가 닥친 무주 무풍면의 풍경, 안동 하회마을에서 흔쾌히 단감을 건네주던 류전하 할아버지, 휑한 슬픔으로 덮힌 강원도 평창, 공고출신 노동자 배달호씨가 다니던 창원의 공장. 마흔에 그녀가 보기로 작정한 풍경은 오래된 과거같았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 알았지 들여다 볼 생각조차 못한 곳, 혹은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곳이었다.
 

막상 이렇게 적고 보니 꽤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을텐데 세 아이를 떼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발길 닿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때론 정열적이고 때론 수더분하고 때론 정의감에 불타며 그녀는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피력하고 주로 만난 어르신들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의 값진 교훈, 혹은 덧없는 인생의 간단명료한 답을 듣는다. 간접적이지만 그녀가 보고 배운 것들은 내게도 막연하지만 실질적인 의미가 되어주었다. 공 것을 바라지 않는 그들의 노동과 견고한 삶,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저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게 만드는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봐도 눈물과 회한으로 얼룩질 것 같은 날의 사람들, 그들에게는 착실히 인생을 살아왔고 인내해왔다는 느낌이 든다. 비루하고 가난한 삶 속에서 순간을 살고 오늘을 말하며 욕심없는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욕심과 허영으로 하루를, 또 몇 년을 되돌아봐도 켜켜이 쌓인 인생같은 것이 없다면 매순간 산다는 건 사치일 뿐이라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또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매정한 사회나 국가앞에 좌절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더 또렷하게 그녀를 각성시킨 듯 했다. 한량같이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인생을 배우는 여행, 그녀의 마흔여행길은 더없이 값지고 풍성하다. 


인생은 이렇게 걷는 거야. 두려워할 것 없어. 걷다 보면 당도하는 곳이 있게 마련이지. 우리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오직 걷는 것, 누구의 힘도 빌릴 것 없이 오로지 내 튼튼한 두 발로 내 앞에 떨어진 인생길을 타박 타박 걸어가는 것, 거기에서 힘이 나오는 거라구. 그 흔한 탈것 한 번을 안타고, 말 그대로 누구의 도움 하나도 구하지 않고 의연하게, 당당하게. 공 것은 원하지도 않고 그저 내 한발 내딛는 딱 그만큼씩만 얻으며.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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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오식당
이명랑 지음 / 시공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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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한창 폼잡으며 거들먹거리고 남들 눈 의식해가며 번듯한 간판의 '레스토랑'이니 '돈가스'집을 당연한 외식코스로 삼고, 음식점들을 평가하고 다니던 때가 이제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진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찾는 곳은 다름아닌 허름한 간판의 식당, 정겨운 이름의 식당들이었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이타령하긴 싫지만 나이가 들고보니 그런 번지르르한 레스토랑들이 애들 장난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렴한 가격에 적당한 반찬과 찌개, 국이 나와 주린 배를 뜨뜻하게 채워줄 수 있고,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훈훈한 인심으로 밥한공기 더 퍼다줄 수 있는 그 곳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손님인 내게도 생생한 삶의 일부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식당이라는 단어자체가 그리운 과거를 불러일으키듯 친근하고 푸근하다. 여기 책 속, 영등포 시장통에서 '삼오식당'을 하고 있는 홀어머니의 둘째딸인 나(지선)는 푸지게 차린 상차림처럼 시장 속 사람들의 생활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밤낮으로 커피구루마를 끌고 다니는 차씨아줌마와 그녀의 박복한 딸이자 친구인 정희, 삼오식당의 새벽설겆이에 고물장수까지 겸하고 있는 악착같은 박씨아줌마, 공중화장실 앞을 가로막고 돈을 내야 들여보내주는 똥할매, 호랑이새끼를 키운 0번 과일가게 아줌마, 삼오식당의 여주인인 자신의 어머니까지 어디 하나 굴곡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없고, 구구절절한 사연하나씩 꿰지 않은 이 없는 삼오식당의 풍경은 애달프다. 변변한 남자구실하나 제대로 하는 이 없고 보니, 시장통 여인들의 한많은 세월을 보상해줄 자식들조차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은 되물림되고 장사꾼의 고생은 더께더께 얹혀 있다.


언젠가 빚쟁이들이 몰려와 식당을 난장판으로 뒤집고 가버린 뒤에, 뽑혀져 나온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으며 엄마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서 젤로 무서운 건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게 없다는 거라고.    -p.25 

 

시끄럽고 구질구질한 삶의 한가운데, 그들은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고, 서로 잘났다며 얕잡아보고, 악을 쓰며 험한 말을 헤대지만 그런 그들이 싫지 않았다. 진짜 사람사는 것처럼 리얼했다. 그저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나 뚫어져라 보며 머리싸움을 헤대는 사람들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그 곳은 직접적인 시장경제의 단순한 논리를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곳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이 보여주는 삶, 그 속에는 작가가 말하는 진짜 생활이 자리잡고 있다. 돈에 욕망하고 솔직한 사람들에겐 거짓이 없다. 그 욕망을 숨기려는 사람들의 속내가 더 구린법이다. 마치 욕쟁이 할머니 수십명을 만난 듯 거침없고 질펀한 대사와 욕에 잠시 당황하면서도 기분나빠하지 않는 것처럼, 이 책의 인물들은 그런 욕쟁이 할머니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히 역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른이 아니어서 할 수 없는 거, 그건 대체 뭐냐고 물었더니 현미는 눈물자국마저 깨끗이 닦아낸 얼굴로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 그거? 우리 작은 언니가 그러는데, 그건 생활이래."    -p.78

 

또한 작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기에 그 시장통에 더 애착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뒤늦게 진짜 식당의 매력을 알았듯 작가도 벗어나고 싶었다던 시장통에서 뒤늦게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글에서 이렇게 애정이 듬뿍 묻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삼오식당을 오랫동안 지켜온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같기도 했다. 제대로 무릎 펼 날 없이 세 딸을 위해 밤낮으로 식당에서 밥을 짓는 어머니를 통해, 시장사람들을 달리 보게 됐고 그들의 등 뒤에 그늘진 현실대신 후광을 보게 된거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오른쪽 무릎이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무릎 안쪽에 솜뭉치를 쑤셔넣은 듯했다. 아니다, 그건 솜뭉치가 아니었다. 엄마가 버텨온 세월이 거기, 당신의 무릎 안쪽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가난 앞에 주먹질 한번 할 수 없었던 세월의 막막함이 거기 한줌의 응어리가 되어 박혀 있었다. 스스로 한 마리 우매한 소가 되어 그저 묵묵히 현재만을 일궈야 했던 늙은 어미의 무르팍엔 열매 대신 염증이 맺혔고 어미는 자신이 곷 피워낸 그 흉한 꽃이 못내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른 무릎을 감싸쥐었다. 무릎을 감싸쥔 엄마의 손등 위엔 벌겋게 부어오른 무릎보다 더 붉고 더 깊은 주름이 그어져 있었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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