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오식당
이명랑 지음 / 시공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려서 한창 폼잡으며 거들먹거리고 남들 눈 의식해가며 번듯한 간판의 '레스토랑'이니 '돈가스'집을 당연한 외식코스로 삼고, 음식점들을 평가하고 다니던 때가 이제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진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찾는 곳은 다름아닌 허름한 간판의 식당, 정겨운 이름의 식당들이었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이타령하긴 싫지만 나이가 들고보니 그런 번지르르한 레스토랑들이 애들 장난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렴한 가격에 적당한 반찬과 찌개, 국이 나와 주린 배를 뜨뜻하게 채워줄 수 있고,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훈훈한 인심으로 밥한공기 더 퍼다줄 수 있는 그 곳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손님인 내게도 생생한 삶의 일부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식당이라는 단어자체가 그리운 과거를 불러일으키듯 친근하고 푸근하다. 여기 책 속, 영등포 시장통에서 '삼오식당'을 하고 있는 홀어머니의 둘째딸인 나(지선)는 푸지게 차린 상차림처럼 시장 속 사람들의 생활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밤낮으로 커피구루마를 끌고 다니는 차씨아줌마와 그녀의 박복한 딸이자 친구인 정희, 삼오식당의 새벽설겆이에 고물장수까지 겸하고 있는 악착같은 박씨아줌마, 공중화장실 앞을 가로막고 돈을 내야 들여보내주는 똥할매, 호랑이새끼를 키운 0번 과일가게 아줌마, 삼오식당의 여주인인 자신의 어머니까지 어디 하나 굴곡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없고, 구구절절한 사연하나씩 꿰지 않은 이 없는 삼오식당의 풍경은 애달프다. 변변한 남자구실하나 제대로 하는 이 없고 보니, 시장통 여인들의 한많은 세월을 보상해줄 자식들조차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은 되물림되고 장사꾼의 고생은 더께더께 얹혀 있다.


언젠가 빚쟁이들이 몰려와 식당을 난장판으로 뒤집고 가버린 뒤에, 뽑혀져 나온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으며 엄마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서 젤로 무서운 건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게 없다는 거라고.    -p.25 

 

시끄럽고 구질구질한 삶의 한가운데, 그들은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고, 서로 잘났다며 얕잡아보고, 악을 쓰며 험한 말을 헤대지만 그런 그들이 싫지 않았다. 진짜 사람사는 것처럼 리얼했다. 그저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나 뚫어져라 보며 머리싸움을 헤대는 사람들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그 곳은 직접적인 시장경제의 단순한 논리를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곳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이 보여주는 삶, 그 속에는 작가가 말하는 진짜 생활이 자리잡고 있다. 돈에 욕망하고 솔직한 사람들에겐 거짓이 없다. 그 욕망을 숨기려는 사람들의 속내가 더 구린법이다. 마치 욕쟁이 할머니 수십명을 만난 듯 거침없고 질펀한 대사와 욕에 잠시 당황하면서도 기분나빠하지 않는 것처럼, 이 책의 인물들은 그런 욕쟁이 할머니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히 역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른이 아니어서 할 수 없는 거, 그건 대체 뭐냐고 물었더니 현미는 눈물자국마저 깨끗이 닦아낸 얼굴로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 그거? 우리 작은 언니가 그러는데, 그건 생활이래."    -p.78

 

또한 작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기에 그 시장통에 더 애착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뒤늦게 진짜 식당의 매력을 알았듯 작가도 벗어나고 싶었다던 시장통에서 뒤늦게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글에서 이렇게 애정이 듬뿍 묻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삼오식당을 오랫동안 지켜온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같기도 했다. 제대로 무릎 펼 날 없이 세 딸을 위해 밤낮으로 식당에서 밥을 짓는 어머니를 통해, 시장사람들을 달리 보게 됐고 그들의 등 뒤에 그늘진 현실대신 후광을 보게 된거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오른쪽 무릎이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무릎 안쪽에 솜뭉치를 쑤셔넣은 듯했다. 아니다, 그건 솜뭉치가 아니었다. 엄마가 버텨온 세월이 거기, 당신의 무릎 안쪽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가난 앞에 주먹질 한번 할 수 없었던 세월의 막막함이 거기 한줌의 응어리가 되어 박혀 있었다. 스스로 한 마리 우매한 소가 되어 그저 묵묵히 현재만을 일궈야 했던 늙은 어미의 무르팍엔 열매 대신 염증이 맺혔고 어미는 자신이 곷 피워낸 그 흉한 꽃이 못내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른 무릎을 감싸쥐었다. 무릎을 감싸쥔 엄마의 손등 위엔 벌겋게 부어오른 무릎보다 더 붉고 더 깊은 주름이 그어져 있었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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