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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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영국의 한 백화점에서 2살 여아가 실종되었다. 몇시간 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의 살해범은 당시 나이 10살의 소년이었다. 영국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왜 그렇지 않을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미숙한 10살 소년이 겨우 2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죽였다는 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만큼 잔혹한 살인이다. 이 끔찍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은 형무소에서 15년을 보낸 후 사회에 복귀한 소년의 시선으로 쓰여진 독특한 구성의 글이다.


A-Z까지 26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며 진짜 이름을 버리고 소년A가 잭이라는 가명으로 행복을 맛보며 사는 과정과 안젤라(소설에서는 소년과 같은 또래가 피해자로 나온다)를 살해하기 전까지 소년 B를 만나며 보낸 시기를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다. 우울과 방황으로 점철된 시기의 소년A(안젤라를 살해하기 전의 소년)와 살인으로 씌워진 오명과 죄책감때문에 자신에게 찾아온 평범한 행복이 늘 위태한 잭의 상반된 모습에 과연 살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용서와 관용을 베풀어야하는건지 책을 읽은 후 사유해보게 되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성경구절이 있지만, 누구도 가장 흉악한 살인이란 범죄에 대해서는 결코 관대해질 수 없게 된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거나 위협이 될 경우의 살인은 정상참작이라는 법의 관용이 뒷따르지만, 이유없는 살인은 인간의 악함을 바닥까지 비추며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동의를 하고 있다. 감옥에서 15년을 보낸 뒤 사회에 나와 또래와 다름없이 일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친구를 만들어 평범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잭은 자신의 죄가 과거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수록 좌절하고 힘들어한다. 어린 소년이 저지른 못된 과거라고 덮어두기에 죄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가 아이를 구한 선행따위는 묻혀질만큼.


나 역시 잭의 친구들처럼 차갑게 돌아설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고민해봤다. 여자친구인 미셸의 갈등속에서도 질문은 계속된다. 소년A가 악인의 본성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보다 큰 사람들의 따가운 질시와 냉대를 친구나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견디기에 벅차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감옥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10년이 넘는 세월을 반성으로 보냈다하더라도, 잭에게 살인이란 꼬리표는 끈질긴 파파라치처럼 언제 어디서나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는 게 소설의 결말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은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저지른 죄와 함께. 그렇기에 나는 돌변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이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되었다. 잭 자신도 자신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건지, 그럴 자격이 있는건지 죄책감의 무게와 굴레를 스스로도 벗어날 수 없었듯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씌어진 소설이지만 잔인한 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해자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켜 악인이기전에 평범해지고 싶어하는 그의 내면을 세심하게 드러낸다. 거기서 이 책의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인생은 죄를 짓기 전과 짓고 난 후로 양분되고 살인을 저지르기 전 따돌림에서 벗어나 해방감과 즐거움을 느꼈던 소년A의 입장과 사회에 복귀해 잠시나마 행복을 맛보았던 잭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잭의 주변인이 되어 그를 바라볼 수도 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는 소설이었다. 2007년 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어떻게 그려졌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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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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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십권의 신간들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쏟아진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모든 독자에게 펼쳐지길 기다리는 수많은 책들이 온사방에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홍수처럼 범람하는 책, 급변하는 시류 속에서 다독하지 않고는 독서가 취미라는 말을 함부로 뱉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애석하지만 나 역시 철저히 시대에 편승하는 다독을 위한 속독의 책읽기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글자를 장면으로 상상하며 읽고, 습관화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의 목표는 속독(讀)과 다독(讀)이었다. 어느 날 대형서점에서 운명적으로 이 책과 만나기 전까지, 나는 타인과 경쟁하듯 많은 책을 읽고 양으로나마 독서가 취미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려 했다. 또한 책꽂이에 읽지 못한 채 꽂혀있는 책을 두고도 신간에 눈독들이는 버릇이 그릇된 과시욕을 부채질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꼬집어주는 책을 만났다. 거침없는 산업화를 추구해 온 우리에게 '슬로라이프'와 '슬로푸드'가 맹위를 떨치며 제동을 걸고 있는 지금, 작가가 권하는 '슬로 리딩'은 속독을 부추겨 온 시대를 역행하며 '슬로리더'로서 질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 슬로리딩의 비법을 소개하고 있다.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독서습관때문에 괴로웠는데 알고보니 더 많은 책을 읽기 위해 속독을 한 게 아니었다. 속독을 하기 위해 많은 책을 수박 겉핡기식으로 읽었던 것이었다. 작가가 짚어주는대로 나는 책 속의 의미심장한 장치와 수수께끼를 찾지 못하고, 전체적인 플롯만으로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엮어 책을 멋대로 평가해왔던 것이다. 그동안 읽은 책이 머리와 가슴에 껍데기만 남은 채 수북히 쌓여있는 듯 했다. 작가는 여러가지 슬로리딩의 방법을 소개했는데 그 중 크게 와닿은 몇가지만 소개하겠다. 

 
첫째,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읽는 방법이었는데 국어시험의 예를 들어 쉽고 정확하게 풀어놓았다. 물론 책을 읽는 독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책의 해석을 유연하게 만들어주지만 역시 작가의 의도를 무시한다면 올바른 슬로리딩이라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둘째, 창조적인 오독(讀)의 힘이다. 작가의 의도 이상으로 흥미로운 내용을 찾을 수 있는 오독의 창조성을 지지하고 있는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놓고 서로 다른 해석으로 원본을 뛰어넘는 독서의 확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셋째,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내면과 만나게 되는 재독(讀)의 가치발견이다. 어느 정도의 숙성기간을 거쳐 다시 읽게 되는 책은 첫느낌과는 사뭇 달라져 인생에 소중한 일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항상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책을 읽으며 '왜'라는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다. 그런데 작가의 말대로 '왜'라는 의문을 품자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라는 암호문이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듯이 왜라는 물음이 굳게 닫힌 작가의 성벽을 열어주는 것만 같았다.


'오독'에도 종류가 있다. 단순히 말뜻을 잘못 이해하거나 논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빈곤한 오독'이요, 슬로 리딩을 통해 심사숙고한 끝에 '작가의 의도' 이상으로 흥미 깊은 내용을 찾아내는 것은 '풍요로운 오독'이다. 확실히 사람들이 제멋대로 착각을 할 때에는, 의외의 창조성이 발휘되는 법이다.   -P.63


좋은 책에는 어느 것에나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그것을 푸는 기술은, 독자 개개인이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항상 '왜'라는 의문을 갖고 읽을 것. 이것이 깊이 있는 독서 체험을 위한 첫번째 방법이다. 또한 독자가 책을 선택하듯 책 또한 독자를 선택한다.    -P.67


책 속에 여러 고전과 책의 일부가 인용되어 슬로리딩의 방법을 대입해 설명하는데 작가가 일본인이라 일본책이 많아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나라 작가의 책도 이런 식으로 슬로리딩해본다면 다양한 해석과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너무 깊이 파고들다보면 오래 전에 잊고 지낸 수능의 언어영역문제나 국어시험이 떠오를 것 같긴 하지만-이 책의 지문해설이 마치 그랬다- 그 때 공부했던 내용들이 10년이 넘은 지금도 생생히 묘사되는 걸 보면 슬로리딩의 장점은 충분히 설명된다. 정작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직접적으로 슬로리딩이 실행됐다. 작가의 꿍꿍이를 끊임없이 왜라는 의문으로 파고들게 만들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한템포 느리게 한박자 쉬어가며 읽을 수 있는 여유를 부리면 책은 무한한 해석의 자유로움을 안겨줄 것이다. 느긋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슬로리딩의 기쁨을 누리며 한 권의 책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진짜 독서란 그런게 아닐까. 요즘 부쩍 개인의 독서취향에 관한 책이 많이 출간되는데 그 중 내 맘에 쏙 드는 독서예찬론이었다. 

 
한 권의 책을 뼛 속 깊이까지 완전하게 맛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독자 자신의 창조적인 글읽기이다.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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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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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은 슬로리딩의 정곡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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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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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할 듯 꽉 조여진 허리부분과 과장스럽게 강조된 엉덩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부채처럼 층층이 퍼지는 드레스. 1837년부터 1901년 사이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빅토리아 시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의상스타일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를 비롯 근현대를 아우르는 시기와 맞물리며, 급변하는 영국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빅토리아 시대를 1966년생 작가 세라 워터스는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레즈비언이라는 불편한 소재를 밑바탕에 깔고 있지만, 큰그림을 그려보자면 당시 영국의 양지와 음지를 살아간 한 여성의 변화무쌍한 인생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스토리의 전개를 더욱 극적이며 풍부하게 만들었다. 

 
국내에서 먼저 번역된 <핑거스미스>가 입소문이 꽤 좋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진가를 재확인하고자 이제서야 번역되었던지, 아니면 레즈비언들의 적나라한 성적묘사때문에 번역을 미뤄왔던지 분명 둘 중 한가지 이유때문에 데뷔작의 번역이 늦어졌을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핑거스미스>를 먼저 봤기에 데뷔작이라는 책의 수위가 이 정도로 노골적일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핑거스미스에서는 미스테리에 열을 올린 탓인지 레즈비언 이야기는 소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소위 이반문학이라고 터부시될 뻔 했던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제 발로 당당히 벽장속에서 걸어나온(커밍아웃) 사람들 덕분에 조금은 누그러진 사람들의 인식변화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 학창시절 동성에게 한 번쯤 풋풋한 감정을 품어본 기억이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덜 불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바닷가 근처 영국 윗스터블 지방의 굴식당에서 일하는 낸시 애슬리는 어느날 언니 앨리스와 간 연애장(코미디언이나 배우들이 노래와 춤, 연기를 공연하는 곳)에서 남장여자로 분한 키티 커틀러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어 한 눈에 사랑에 빠진다. 점점 그녀의 연기와 눈빛, 몸짓에 애달아 하며 공연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특별석에서 그녀의 모습에 황홀해한다. 그러던 중 키티는 자신의 열렬한 팬인 낸시를 직접 만나길 청하고, 고아나 다름없는 키티에게 낸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키티를 알아갈수록 낸시는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되고 런던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된 키티를 따라 의상담당자격으로 둘은 런던행기차를 탄다. 둘은 우연찮게 남장을 한 채 한 무대에 서게 되고 런던에서 크게 히트해 대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어느새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지만 키티의 배신으로 낸시는 좌절과 상실감에 키티를 떠난다.


여기까지가 1부의 줄거리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2부에서 키티를 잃고 방황하는 낸시가 여자임에도 남장으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남창이 되었다가 막대한 부를 가진 다이애나라는 여인을 만나며 쾌락과 허영에 허우적된다. 3부에서는 다이애나에게 버림받은 후 낸시가 자선단체에서 일하는 플로랜스(물론 여자다)를 만나며 키티의 굴레에서 벗어나 혼란스러워하던 성정체성에 해답을 찾고 당당해진다. 빅토리아라는 특수한 시대상을 빼면 사실 스토리만으로는 진부해질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한 여인의 굴곡많은 삶이라는 식상한 껍데기밖에 남는 게 없을텐데 작가는 자신이 공부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해 세심하게 녹여냈다. 또한 당시에만 통용되던 레즈비언 사이에 쓰이던 은어나 속어를 끄집어내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했다.(벨벳 애무하기도 그런 표현 중 하나다.) 분명 번역자가 의도적으로 그런 표현을 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당시에 했을 거라고 믿기지 않는 파격적인 표현에 당황하고 놀라기도 했다.


그 시대의 변화를 표출하는 레즈비언들의 은밀한 욕망, 화려함과 허영속에 가려졌지만 다이애나를 통해 드러나는 상류사회의 퇴폐적 문화, 적은 비중으로 비춰지지만 거세게 일어나던 노동운동과 여성인권보호의 움직임들이 이야기를 쉽고 가벼운, 혹은 자극적인 비주류소설로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류의 동성애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던지 호기심만으로 접근하려 했다가는 낭패를 볼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꽤 적나라한 성적표현이 19금정도의 수준이고(내 생각으로 많지는 않다), 낸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면 사방 1.5cm정도 좁은 여백과 빽빽한 글자수에 압도당해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의 이 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스토리의 전개에 집중하며 읽었다. 작가가 고스란히 독자에게 남겨준 '상상하며 읽기의 즐거움'을 100%누리면서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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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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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무진시를 휘감은 안개처럼 마음이 눅눅해졌으며 숨이 막힐 듯 갑갑해졌다. 지독한 어른들에게 상처입고 짓밟혀지는 아이들을 위해 그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진실을 말할 때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손이 떨려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가 않을 때도 많았다. 그 모든 분노와 떨림은 내가 그 치욕스런 어른들의 행태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외면하고 모른 체 눈감아주었던 사람 중 하나가 되었던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인호는 사업실패로 아내에게 등떠밀려 서울에서 무진시까지 청각장애아들이 다니는 자애학원의 기간제교사로 내려오게 된다. 비록 기간제교사긴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수화까지 배워온 인호에게 첫출근한 학교의 인상은 기괴하고, 자신을 경계하는 주변사람들은 서먹하다. 아니나다를까 첫수업부터 민호라는 아이의 동생이 기차길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문이 잠긴 여자화장실에서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낮은 절규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연두가 윤자애라는 생활지도교사에게 린치를 당하는 장면도 목격한다.


수화를 배워오긴 했지만 선생님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졌다거나 장애아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품었던 건 아니었기에, 인호는 자신이 자애학원의 비밀을 알게 될수록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에 맞서야 한다는 걸 직감으로 알게 된다. 하지만 무진에서 만난 대학선배이자 무진인권운동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서유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자애학원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며 이야기는 치열한 법정공방으로 치닫는다.


청각장애아들 중 대부분은 말까지 하지 못하는 중복장애를 가졌는데  이런 아이들의 집안환경은 가난하고 불우하기까지 하다. 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숙식까지 해결해주는 자애학원은 겉으로는 그럴듯한 자선교육기관인 양 위선을 떨고 있지만 아이들의 입을 통해 듣는 진실은 너무도 추잡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장애아라는 약점을 이용해 성추행과 성폭행을 일삼는 교장과 행정실장은 자애학원의 권력을 남용해 그동안 저질러온 부정을 은폐했다. 학연, 지연, 혈연을 이용해 권력을 세습하고 비리를 숨겨왔다. 이 일이 매스컴을 타며 세상에 알려지고 재판에서는 유죄가 확실한 그들에게 무거운 형량이 내려질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또 다시 강자편이었음에 나는 폭발하려는 이성을 진정시켜야했다. 게다가 변한 줄 알았던 인호의 마지막 결정은 너무도 실망스러웠고 약간의 적의와 배신감까지 느꼈다. 악한들은 모두 반성하지 않더라도 인호만은 끝까지 아이들의 편이 되주길 바랬던 개인적인 바램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진실이 이토록 잔인할 수 없었다. 마주보기 불편했고 눈감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달아날수록 발을 휘감는 무진의 흐린 안개처럼 불편한 진실은 마음 속을 휘저었다. 연두와 유리, 민호의 비명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똑바로 바라봐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앞에 당당하게 맞서싸울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광란의 도가니속에서는 같이 미치지 않고서는 밖으로 튕겨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읽는 동안 그 도가니속에서 허우적댔다.  그러나 싸늘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속물스런 장경사도 아니고 마지막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인호도 되기 싫었다. 그들이 자신을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싸운다는 서유진처럼 그녀의 생각을 오래 오래 품고 싶었다. 진실을 개에게 던져줄 수 없다는 호쾌한 문장이 마지막까지 위로가 되었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에요.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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