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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진실은 불편하지 않아요. 진실은 아름다워요."
불편하기 때문에 외면하려했던 진실은 사실 아름답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난 지금 이 순간도 그렇지만 나는 카밀라, 혹은 희재처럼 엄마 지은의 과거를 함께 따라가며 아름답다기보다 고통스럽고 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한창 민감한 사춘기 시절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하고, 친구들과 지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며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날개라 말한 아이를 품었던 지은의 심정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희재는 과거의 엄마와 조우하며 누구보다 엄마를 이해하고 그녀의 슬픔에 닿았던 것 같다. 자식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은 파도가 바다의 일인 것처럼 당연하게도 비극의 공간으로 카밀라를 운명인듯 이끌었고, 모두가 외면한 불편함에서 진실을 찾고는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25년 입양된 삶의 흔적이 담긴 여섯박스분량의 과거에서 동백꽃이 배경이 된,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아이를 안고 있는 앳된 여인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 사진에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코멘트가 붙지 않은 그 사진의 진실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그녀는 남자친구인 유이치와 함께 사진의 배경이 된 한국의 진남으로 오게 된다. 엄마가 다녔던 진남여고에서 교장인 신혜숙은 열일곱에 아이를 낳은 미혼모인 지은의 존재를 부인하고 졸업앨범에도 나오지 않는다며 잘라말한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지역 신문사에 사진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기사로 싣는다. 그 기사를 보고 자신이 묵는 호텔에 찾아온 김미옥에게 뜻 밖의 진실을 듣게 되고 다시 신혜숙을 찾아가게 된다.
그들의 욕망은 진실의 부력일 뿐이다.
바다에 던진 시신처럼, 모든 감춰진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 드러나려는 속성이 내재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부력으로도 숨은 것들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진실은 개개인의 욕망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 밝혀질 뿐이다.
-p.101
저자는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사실과 진실이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은 과거때문에 혹은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때문에 엄마의 친구들은 희재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지은의 친구 유진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놓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는 타인에게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날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거 자신에게 낙태를 강요하러 온 유진에게 뱃 속의 희재를 가리키며 희재가 자신에게는 날개같은 존재라고 지은은 말했었다. 타인에게 함부로 상처주고 자신에게 쉽게 상처받기 쉬운 십대의 위태로운 지은의 친구들은 서로의 불편한 진실을 숨긴 채 살아왔지만, 지은의 날개였던 희재를 통해 뒤늦게 지은을 죽음으로 내몬 자신들의 철없는 이기심을 바로 보게 되고 25년이 지난 후에야 그들 사이에 놓인 심연을 조심스럽게 건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심연을 결코 건널 수 없다. 우리가 날개라고 착각하는 꿈과 건너려는 부질없는 노력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의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p.274
거기 고통과 슬픔이 있었따면, 그것은 그 아이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은 고통스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우리와 그 아이의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는 건 불편함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럴 수 밖에. 그때 우리는 고작 열여덟 살, 혹은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최고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p.286
입양아의 과거 진실을 찾아가는 줄거리가 처음엔 꽤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딸을 이끄는 비극적인 공간과 인물들의 연결고리가 쉽게 밝혀지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겉은 그리 보이지 않으나 뜨거운 맛을 감추고 있는 진남의 매생이국처럼 의뭉스러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의 과거를 따라가다보니 이야기의 실마리가 보였다. 실제 이야기의 배경이 된 진남이라는 곳은 저자가 만든 허구의 공간인 듯 하다. 지리상으로는 경상남도에 그런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는 양관의 비극적 전설과 배경은 지은과 희재의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꾸미기에 충분해보인다. 그러나 짐작조차 되지 않는 미스테리한 부분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저자인 김연수 스타일의 글은 매력적이다. 책장을 덮고 난 뒤 여운이 오래간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쉽게 짐작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생각하게 되는 탓이다. 그리고 독자인 내가 저자의 본심에 가닿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생각할수록 진실이 뭘까 곱씹게 되는 면에서 그의 전략은 반쯤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