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무비 소울 푸드
하라다 사치요 지음, 장한라 옮김 / 영림카디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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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당신이 만든 음식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

18세기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정치가, 저술가이며 <미각의 생리학>저자이기도 한 브리야 사바랭의 말이다. 음식에 관한 격언은 많지만 그의 말처럼 음식과 사람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음식을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소개된 음식의 레시피를 담았는데, 브리야 사바랭의 말처럼 작품 속에서 만드는 음식과 먹는 음식이 인물들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작품들은 화려한 미식의 정수를 담고 있지 않지만, 정갈하고 소박한 차림의 밥과 반찬, 일본인이라면 매일 먹고 매일 만드는 일상의 음식들을 정성들여 만드는 과정까지 보여준다. 이러한 음식을 먹은 상처받고 지친 이들은 깊은 위로를 받고, 만드는 사람도 조금씩 성장한다. 작품 속에서 그 과정은 때론 지루할 만큼 더디게 흘러가고 집요할만치 세밀하게 묘사된다.

책은 정식의 기본이 되는 밥과 다시를 시작으로 찜과 튀김, 국과 조림, 생선과 조개류, 고개와 달걀, 디저트와 차까지 코스요리처럼 가벼운 것에서 묵직한 요리, 달콤한 디저트로 마무리되는 모양새다. 각 코스의 재료와 요리법을 선보인 작품을 간단히 설명하고 레시피를 자세히 기록했다. 대부분 일본 요리지만 집에서 간단한 재료로 충분히 만들어 볼 수 있는 레시피이며, 과정도 복잡하지 않다. 나는 일부 음식을 자주 해먹기도 하고 사먹을 때도 있다. 내가 이 음식에서 기대하는 바는 담백함이다. 고춧가루 음식에 길들여진 한국 사람 입맛이라 자주 먹기 힘들지만, 자극에 부대낀 속을 달래거나 심신의 안정을 추구할 때는 일부러 찾아 먹는 음식들이다. 내게는 타국의 음식이지만 음식의 본질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푸드테라피는 음식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자연치료법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책 속 레시피와 작품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푸드테라피에 가깝다. 영양학적 의미가 아니다. 작품 속 사람과 사람, 그 접점에 음식이 있고 그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이들은 정신건강학적 의미의 치유를 경험한다. 값싸고 접근하기 쉬운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창조적 행위이다. 이를 통해 만든 이는 수동적 객체에서 능동적 주체가 되고, 먹는 이는 결핍에서 충만함으로 감정이 고양되는 것이다. 요리가 완성되고 형태가 사라지는 과정은 만드는 이와 먹는 이 모두에게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만화 <바텐더>에는 바텐더인 주인공 사사쿠라 류가 영혼을 치유하는 한 잔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나온다. 만화 속에서 "어떤 한 잔이라도 사람의 인생이 필요로 하기에 태어난다. 그 한 잔을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영혼이 있고, 그 한 잔에 어떻게든 응하고 싶은 영혼이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책 속의 음식도 그런 필사적인 노력과 영혼들의 결과물이다. 책에 소개된 작품 속 음식이, 먹고 싶은 것을 넘어 만들어 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귀찮고 어려운 과정일지라도 결과물은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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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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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번거롭지만 먹고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가장 간단한 진실이 담겨 있다.
노작가의 일상을 통해 사는 게 뭐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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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쓰정류장
김비 지음 / 가쎄(GASSE)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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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곳, 수많은 행인이 스치고 정차하거나 출발을 서두르는 버스들, 정해진 시간때문에 때론 그 곳을 향해 뛰기도 하고 새로 보게 될 풍경에 미리부터 가슴설레이는 내게 버스정류장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소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버스정류장에서 아프고 쓰라린 기억의 샘을 끌어올렸다. 자신의 기억이 시작된 버스정류장을 찾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 과거의 상처를 되짚으려는 한 여인과 불편한 다리로 힘겹게 현실을 버티는 그녀의 남편, 부부사이에서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아슬하게 오가는 이방인의 불안한 동행이 시작된다. 오로지 기억속에 존재하는 빠쓰정류장이란 간판과 그 곳의 풍경에 의지해 버스정류장을 찾기 위한 버스정류장 순례길.

 

남편의 다리가 사고로 절단되어 그가 절망에 빠졌을 때, 희망으로 밤잠을 설치며 시작했던 가게를 정리해야 했을 때도 순옥은 남편이 이야기한, 피안(彼岸)의 경지에 이르는 행복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죽게 된다는 의사의 암선고에 그녀는 돌연 여행을 결심한다. 평온하게 웃기 위한 마지막 결행을 각오한 듯, 죽음이란 낯설고 두려운 과정을 준비하기 위한 듯 자신이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기 위해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버스정류장을 찾아헤맨다. 그녀가 찾아헤맨 장소, 그 곳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 엄마, 그녀가 자신을 버린 순간부터 순옥의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었다.

 

꿈이란 원래 그런 것. 날개 없는 것들은 하늘을 날고,
사랑을 잃은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그런 것이 바로 꿈 속. 팍팍하고 칙칙한 현실을  살고 있는 것들에게는 언제나
보드랍고 환한 희망이던 것이, 그런 꿈 속.     -p.19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 '빠쓰정류장'을 찾아헤매는 긴 여정동안 묵직하게 자신을 눌러왔던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긴 터널의 끝에 소화되지 않는 불량식품처럼 차고 넘쳤던 '희망'의 비타민으로 밝게 웃을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이 여정에서 순옥을 비로소 웃게 만들어준 '리브'의 존재에 대해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기 위해  순옥처럼 녹록치않은 인생을 살아온 이방인 '리브'. 남편보다 더 큰 덩치에 원피스와 하이힐을 신고, 거칠은 수염자국과 특유의 웃음소리로 순옥과 독자인 나조차 혼란에 빠뜨린 존재. 나는 그(혹은 그녀)를 이방인이라 칭했다. 다른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악의 존재가 아님에도 순옥처럼 자연스레 거부반응이 먼저 일어나는 '리브'의 존재는 낯섬 그 자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좀 다르다. 이제 트렌스젠더라 부르는 이들을 음지로만 내몰던 구시대적 고정관념은 어느 정도 포용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리브'가 더 낯설게 다가오는 건 거친 외모와 눈치없이 던지는 불편하고 직설적인 대사와 행동탓이었다. 그러나 최근 저자의 말을 들으니 '리브'는 실제 트랜스젠더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고 했다. -'리브'와 같은 입장의 저자를 생각했을때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리브'를 이방인이라 칭한 것조차 그들을 인정하는 관용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한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생각에 따라 삶의 모양은 바뀔 것이다. 냉수는 블루마운틴이 되고,
비명은 노래가 될 것이다. 희망의 미덕이란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함이라고.
......(중략) 그러나 그건 우는 아이를 달래는 막대사탕 같은 것에 불과하다.
새빨간 단물을 쪽쪽 빨며 그걸 집어삼키리라 기대하겠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내가 받아든 불량식품 같은 희망은 이미 자루 하나에 차고 넘쳤다.    -p.32

 

동행내내 '리브'를 이해할 수 없어 냉소적이었던 순옥의 태도는 조금씩 누그러든다. 곪은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지녀 자기방어적일 수 밖에 없었던 자신과 '리브'의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인 듯 했다. 순옥의 남편 주열 역시 순옥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리브'를 거부하며 밀쳐내려 한다. 하지만 순옥의 웃음으로 인해 희망을 꿈꾸기 시작하면서 '리브'를 향해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연다. 그러자 위태롭게만 보이던 셋의 동행이 꽤나 재미있는 장면들을 연출했다. 버스정류장을 이동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풍경들이 정겨웠다. 그래서 이 책을 보고 나니 모두 엇비슷하고 을씨년스럽게 보이던 버스정류장들이 마치 거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다가왔고, 저자가 찍은 수십장의 버스정류장 사진을 통해 그런 생각이 뚜렷해졌다. 모두 어딘가로 떠나는 듯 보이는 정류장의 모습. 하지만 반대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버스정류장 순례길을 떠난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의 끝에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그들의 삶도 조금은 평온해진 것 같았다.

 

또다시 우리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아무리 먼 데를 보면서 걷고
또 걸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시간.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삶이고, 시간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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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테이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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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할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처럼 성공한 사람이 겸손하기까지한(?) 예는 매우 드물다. 당장 눈 앞에 벌어진 성공에 취하고 비틀거릴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공의 기준을 어떻게 판단해야하는 것일까. 철저한 자본주의의 논리로 보자면 돈과 명예, 권력까지 쥐게 되었을때를 성공이라고들 한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순간의 그들이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겠는가.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성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성공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변하게 되고, 당연히 변하게 된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건 일종의 보상심리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하기까지하면 그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에게 찾아온 유혹의 순간, 그는 유혹앞에 영혼을 팔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성공하면 삶이 편해질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성공하면 삶은 어쩔 수 없이 더 복잡해진다. 아니, 더욱 복잡해지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더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한 갈증에 자극을 받으며 더욱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바라던 걸 성취하면 또 다른 바람이 홀연히 나타난다. 그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우린 또 다시 결핍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시 완벽한 만족감을 얻기 위해 모든 걸 걸고 달려든다. 그때껏 이룬 것들을 모두 뒤엎더라도 새로운 성취와 변화를 찾아 매진한다.  -p.121

 

여기 인생의 성공과 실패, 좌절이 뭔지 보여주는 헐리우드식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이 있다. 데이비디 아미티지, 11년동안 서점에일하며 변변한 데뷔작하나 없는 시나리오 작가인 그에게 어느날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자신이 쓴 <셀링 유>의 시트콤 대본이 텔레비전 방송국에 팔리면서 시트콤으로 제작되고 그 시트콤의 성공으로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셀링 유>는 시청자와 평단의 호평으로 시즌3까지 제작되는 기염을 토하고 데이비드의 몸값도 나날이 치솟는다. 그러던 중 자신의 투자상담가인 바비를 통해 영화광인 백만장자 필립 플렉이 자신이 예전에 쓴 <세 불평꾼>이란 대본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제안을 전해듣게 되고, 자신은 손해볼 게 없다는 생각에 플렉의 제안을 받아들여 플렉소유의 섬으로 찾아가 그가 없는 동안 섬에서의 부유한 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비틀린 욕망과 그릇된 가치관으로 꼬일대로 꼬인 플렉과의 만남 이후 그에게 인생최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작가로서 치명적인 표절의혹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가 쥐고 있던 성공한 작가로서의 부와 명예는 모래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함께 일했던 모두가 그에게 철저하게 등을 돌린다. 

 

여기까지의 줄거리만봐도 뒷이야기가 몹시 궁금해질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데이비드가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이나 진부한 결말때문에 뒷부분에선 다소 실망하였다. 저자의 유명한 전작인 <빅피쳐>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왠지 이 책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빅피쳐>에 대한 기대가 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빠른 전개나 몰입도가 높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짧은 시간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눈부신 성공과 좌절, 배신과 음모라는 롤러코스터같은 이야기에 빨려들어가기 때문이다. 비유하긴 그렇지만 TV재연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1시간짜리 에피소드처럼 헐리우드식으로 고급스럽게 포장했으나 스토리자체가 진부하기 때문에 신선하다는 느낌은 없다. '저건 정말 막장이다'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리모컨의 채널을 돌리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이 드라마의 뻔한 유혹에서 쉽게 눈을 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진부함, 나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누구나 그렇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줄거리가 식상할 망정 성공을 바라보는 저자 나름의 사유는 그나마 이 책이 '사랑과 전쟁'보다 막장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플렉과 데이비드의 파시즘과 인간본질에 대한 대화, 성공으로 인해 변하는 데이비드와 그의 돈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의 속물근성에 대한 반성들이 그것이다. 그런 교훈마저 가볍다고 느껴지지만 뭐 이런 소설을 보며 철학적 깊이를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므로 쉽게 접근해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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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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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은 불편하지 않아요. 진실은 아름다워요."

불편하기 때문에 외면하려했던 진실은 사실 아름답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난 지금 이 순간도 그렇지만 나는 카밀라, 혹은 희재처럼 엄마 지은의 과거를 함께 따라가며 아름답다기보다 고통스럽고 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한창 민감한 사춘기 시절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하고, 친구들과 지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며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날개라 말한 아이를 품었던 지은의 심정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희재는 과거의 엄마와 조우하며 누구보다 엄마를 이해하고 그녀의 슬픔에 닿았던 것 같다. 자식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은 파도가 바다의 일인 것처럼 당연하게도 비극의 공간으로 카밀라를 운명인듯 이끌었고, 모두가 외면한 불편함에서 진실을 찾고는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25년 입양된 삶의 흔적이 담긴 여섯박스분량의 과거에서 동백꽃이 배경이 된,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아이를 안고 있는 앳된 여인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 사진에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코멘트가 붙지 않은 그 사진의 진실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그녀는 남자친구인 유이치와 함께 사진의 배경이 된 한국의 진남으로 오게 된다. 엄마가 다녔던 진남여고에서 교장인 신혜숙은 열일곱에 아이를 낳은 미혼모인 지은의 존재를 부인하고 졸업앨범에도 나오지 않는다며 잘라말한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지역 신문사에 사진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기사로 싣는다. 그 기사를 보고 자신이 묵는 호텔에 찾아온 김미옥에게 뜻 밖의 진실을 듣게 되고 다시 신혜숙을 찾아가게 된다.

 

그들의 욕망은 진실의 부력일 뿐이다.
바다에 던진 시신처럼, 모든 감춰진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 드러나려는 속성이 내재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부력으로도 숨은 것들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진실은 개개인의 욕망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 밝혀질 뿐이다.
-p.101

 

저자는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사실과 진실이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은 과거때문에 혹은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때문에 엄마의 친구들은 희재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지은의 친구 유진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놓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는 타인에게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날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거 자신에게 낙태를 강요하러 온 유진에게 뱃 속의 희재를 가리키며 희재가 자신에게는 날개같은 존재라고 지은은 말했었다. 타인에게 함부로 상처주고 자신에게 쉽게 상처받기 쉬운 십대의 위태로운 지은의 친구들은 서로의 불편한 진실을 숨긴 채 살아왔지만, 지은의 날개였던 희재를 통해 뒤늦게 지은을 죽음으로 내몬 자신들의 철없는 이기심을 바로 보게 되고 25년이 지난 후에야 그들 사이에 놓인 심연을 조심스럽게 건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심연을 결코 건널 수 없다. 우리가 날개라고 착각하는 꿈과 건너려는 부질없는 노력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의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p.274

 

거기 고통과 슬픔이 있었따면, 그것은 그 아이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은 고통스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우리와 그 아이의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는 건 불편함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럴 수 밖에. 그때 우리는 고작 열여덟 살, 혹은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최고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p.286

 

입양아의 과거 진실을 찾아가는 줄거리가 처음엔 꽤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딸을 이끄는 비극적인 공간과 인물들의 연결고리가 쉽게 밝혀지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겉은 그리 보이지 않으나 뜨거운 맛을 감추고 있는 진남의 매생이국처럼 의뭉스러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의 과거를 따라가다보니 이야기의 실마리가 보였다. 실제 이야기의 배경이 된 진남이라는 곳은 저자가 만든 허구의 공간인 듯 하다. 지리상으로는 경상남도에 그런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는 양관의 비극적 전설과 배경은 지은과 희재의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꾸미기에 충분해보인다. 그러나 짐작조차 되지 않는 미스테리한 부분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저자인 김연수 스타일의 글은 매력적이다. 책장을 덮고 난 뒤 여운이 오래간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쉽게 짐작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생각하게 되는 탓이다. 그리고 독자인 내가 저자의 본심에 가닿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생각할수록 진실이 뭘까 곱씹게 되는 면에서 그의 전략은 반쯤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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