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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 지음, 노익상·박여선 사진 / 월간말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서평을 쓰기 전까지 잊고 있었는데 나 역시 언제부턴가 마흔살이 되면 꼭 전국일주를 하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유혹에도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 마흔,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우리땅 구석구석에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지난한 삶의 모습은 확고부동한 그녀의 신념마저 뒤흔들었을까. 왠지 그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책표지의 늙고 주름진 손이 말해주듯 작가 공선옥이 걸었던 길은 그 손만큼이나 거칠고 척박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저 보고 느끼기 위한 떠남이 아니라, 진정 무언가를 얻고 배우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녀와 사람들 사이의 공감은 그저 여유부리는 여행에서 찾을 수 없는 고단한 삶의 여정이 녹아있다.
이제 더 이상 관광지에 가서, 고상하고 멋진 것만 보려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임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고상한 것 보려고하는 사람들에게 멋진 풍경이 되어 주는 것들이 사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p.201
서른셋에 집을 떠나 팔십세까지 천지사방을 돌아다니며 약을 팔았다는 지복덕 할머니, 순창고을에서 만난 정노인 내외, 참 얘기하기 껄끄러웠을 강원도 화천에서 만난 군인들, 여수에 2년넘게 살았지만 처음 와봤다는 화양의 김용득 할머니, 가리봉에서 만난 중국인 노동자 우씨와 최씨, 경북 봉화의 화전민 마을사람들, 양주에서 만난 효순이, 미선이의 가족, 한참을 헤매고 다녔다던 인사동과 낙원동, 수마가 닥친 무주 무풍면의 풍경, 안동 하회마을에서 흔쾌히 단감을 건네주던 류전하 할아버지, 휑한 슬픔으로 덮힌 강원도 평창, 공고출신 노동자 배달호씨가 다니던 창원의 공장. 마흔에 그녀가 보기로 작정한 풍경은 오래된 과거같았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 알았지 들여다 볼 생각조차 못한 곳, 혹은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곳이었다.
막상 이렇게 적고 보니 꽤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을텐데 세 아이를 떼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발길 닿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때론 정열적이고 때론 수더분하고 때론 정의감에 불타며 그녀는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피력하고 주로 만난 어르신들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의 값진 교훈, 혹은 덧없는 인생의 간단명료한 답을 듣는다. 간접적이지만 그녀가 보고 배운 것들은 내게도 막연하지만 실질적인 의미가 되어주었다. 공 것을 바라지 않는 그들의 노동과 견고한 삶,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저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게 만드는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봐도 눈물과 회한으로 얼룩질 것 같은 날의 사람들, 그들에게는 착실히 인생을 살아왔고 인내해왔다는 느낌이 든다. 비루하고 가난한 삶 속에서 순간을 살고 오늘을 말하며 욕심없는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욕심과 허영으로 하루를, 또 몇 년을 되돌아봐도 켜켜이 쌓인 인생같은 것이 없다면 매순간 산다는 건 사치일 뿐이라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또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매정한 사회나 국가앞에 좌절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더 또렷하게 그녀를 각성시킨 듯 했다. 한량같이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인생을 배우는 여행, 그녀의 마흔여행길은 더없이 값지고 풍성하다.
인생은 이렇게 걷는 거야. 두려워할 것 없어. 걷다 보면 당도하는 곳이 있게 마련이지. 우리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오직 걷는 것, 누구의 힘도 빌릴 것 없이 오로지 내 튼튼한 두 발로 내 앞에 떨어진 인생길을 타박 타박 걸어가는 것, 거기에서 힘이 나오는 거라구. 그 흔한 탈것 한 번을 안타고, 말 그대로 누구의 도움 하나도 구하지 않고 의연하게, 당당하게. 공 것은 원하지도 않고 그저 내 한발 내딛는 딱 그만큼씩만 얻으며. -p.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