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만찬 - 공선옥 음식 산문집
공선옥 지음 / 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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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를 친친감고 새끼손톱만한 꽃망울을 터트리던 강낭콩, 노란 속내를 하늘로 활짝 드러낸 배추, 연푸른 이마를 빼족 내민 무우, 나무기둥을 타고 오르던 뽀얀 머루송이... 그녀의 행복한 만찬을 먹자고 덤비니 20년도 더 지난 아빠의 공터텃밭이 생각난다. 텃밭 머루나무 곁에서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장난감 기타를 메고 있던 남동생의 사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딸 셋의 홀어머니곁에서 가난한 생활로 근근히 끼니를 연명한 듯 보였지만, 그녀는 산과 들의 모든 풀과 열매, 채소를 재료로 잊지 못할 만찬을 차렸던 추억을 행복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만찬에 초대된 나는 먹는내내 산으로 들로 쑥과 달래를 캐러 다니던 작가의 모습에서 나의 유년을 재생하게 되었다. 

수십가지 먹거리에 얽힌 작가의 기억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떨치고 싶은 지긋지긋함이 아닌 꿈에라도 그리운 맛이었다. 나는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부각, 머위, 초피같은 식물부터 감자, 고구마, 호박같은 흔하디 흔한 채소들이 읽는내내 자라는 풍경과 음식을 상상하게 만들며 허기질 때는 입에 침을 고이게 만든다. 시래기 다발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생존과 직결되있었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겪어보지 못한 배고픔의 설움에 가슴이 아려오고, 토란탕을 끓이며 어린시절 엄마의 토란탕을 떠올리게 될 때는 작가처럼 엄마의 음식과 닮아가는 나의 음식을 발견한다. 그녀 특유의 구수한 내음과 맛깔스러운 글이 회상을 부채질한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음식을 만들면서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내가 토란탕을 끓이며 서둘러 세상 떠난 엄마를 야속하리만치 그리워 했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명절에 내가 끓여준 토란탕을 끓여보려고 노력하다가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나를 그리워할는지는 모르겠다.   -P.117

그러고보면 내가 시래기 다발을 보고 아름답다 느꼈던 것은 '배곯을 염려'가 덜어진대서 온 감정일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봐도 그것이 내 생존과 직결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가 없을 것이므로. 그러니, 아름다움은 다른 말로 여유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128

주변의 모든 식물들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제 몸을 주고 누군가의 행복한 기억을 지배한다는 건 참 벅찬 일이다. 열매부터 줄기, 잎까지 무농약 친환경에서 제멋대로 자라 더 향긋한 내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식물과 채소들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는 건 그런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더불어 살아갔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가방을 벗어던진 가시내들이 봄이면 캐온 쑥으로 쑥국과 쑥떡, 쑥버무리를 해먹고, 쓴뿌리를 잘근 잘근 씹으면서도 그게 좋아 연신 텃밭 담장아래를 파내게 만든 고들빼기, 늘 잡풀과 헷갈려 산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며 뽑아제낀 달래. 글을 읽으며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감겨있던 강원도 산골, 나의 일상을 떠올리며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의 그리움과 회한이 겹친다. 그 일상이 특별함이 될거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작가의 선명한 기억의 재구성과 현실적인 사진들이 오감을 자극한다. 하지만 지금도 지천으로 널린 먹거리들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재료의 근본과 성장이 다르니 옛날 엄마가 해주던 손맛도 좀체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엄마 손맛에 가까운 음식들을 찾아다니고 인심을 그리워하며 분위기에 젖고 싶어한다. 순수했던 그 시절, 필요한 것 이상을 만들지 않고 먹을만큼만 자급자족하며 행복해하고 남이 가진 것에 질투하지 않으며 나눌 줄 알았던 사람들에겐 서로에 대한 배려가 넘쳐난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을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될 때 행복한 기억으로 떠올리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땅에서 나는 먹거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줬으면 좋겠다. 

꿈에 본 것 같이나 귀한 쌀, 날마다 먹는 쌀밥.
그러나 그 쌀밥을 조금이라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나는 눈물이 난다.
쌀밥 한 그릇, 목구멍에 넣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숱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한테서 쌀을 빼놓고서 사실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쌀은 단순히 입 안으로만 들어갔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을 이루고 정신을 이룬다. 쌀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처음과 끝이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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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집을 나가다 - 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
언니네트워크 엮음 / 에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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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를 훌쩍 뛰어 오른 사뿐한 여자의 발걸음. 초록이 물든 스커트자락이 돋움에 풀썩이며 흔들리고, 그와 함게 잔디밭 저편의 하얀꽃을 피운 나뭇가지도 사정없이 휩쓸린다. 때론 안정적이고 때론 불안하게 기우는 가족이란 울타리를 가뿐하게 타넘은 스물여덟명 언니들의 도발적인 고백이 담긴 책이다. '독립'이란 말로 떳떳하게 타지에서 5년을 살아오며 여자들의 부러움과 남자들의 아니꼬움을 한 몸에 받아온 나에게 이 책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멀쩡한 집놔두고 친구랑 집나와서 삽니다!'... '왜??' 몇 번이나 그 의도를 되물어오는 이들에게 나는 뒷말을 흐리며 어영부영 대답을 회피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설명하지 못한 답답함을 한 방에 떨쳐버릴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꿈꿔왔기에 경제적으로 독립해산다는 사실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1부에 나오는 그녀들처럼 끈끈한 혈육의 정이나 가족의 품을 떠나며 눈물흘리고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내겐 오로지 창창한 앞길만 있었고 핑크빛으로 물든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남들이 한번쯤 생각한 반전은 없었다. 나는 현재도 정말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고 있다. 가끔 손녀 볼 나이라며 가뭄에 콩나듯 통화하는 엄마가 하소연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엄마를 위해 결혼할 생각은 없으므로 소 귀에 경읽기다. 엄마도 내 확고함을 눈치챘는지 명절에 마주봐도 결혼얘기는 잘 하지 않으신다. 대신 혼자 외롭게 감당해야할 노후를 생각하라며 체념어린 대안들로 과년한 딸년의 마음을 휘젓곤 하신다. 그렇기에 스물여덟명의 신념이 자명한 나의 현실로 다가와 대책없이 솟아나던 마음의 잡초들을 뿌리뽑아 주었다. 

3부로 나뉘어 들려주는 이들의 이야기는 1부에서 가족들 곁에서 힘겹게 홀로서기를 시도하거나 이별을 준비하는 그녀들의 다양한 사연이 실려있다. 2부에서는 비혼으로 살아가는 그녀들에게 실제로 제기되는 문제들과 그에 맞서 대안을 찾고, 다양한 방식으로 비혼만의 현실적인 난관을 헤쳐가려는 굳은 의지와 노력이 엿보인다. 특히 비혼들이 가장 걱정하는 노후나 사후에 관한 리얼한 고찰과 실천이 담겨있어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준비에 놀라기도 했다. 아무리 혼자를 부르짖어도 인간이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이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야기는 크게 공감했다. 3부에서는 비혼이기에 감수해야하는 은근한 비난과 무시에도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쾌활한 인생살이로 좀 더 구체적인 희망의 모습을 비춘다.  

때론 당당하게 비혼을 외치는 언니에게도 한순간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근심이 있다. 내가 현실적으로 와닿았던 건 나이듦으로써 '의존적'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심적으로 나약해져 누구에게 기대고 싶어진다거나 행여 팽팽한 긴장을 풀어버릴까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니들의 고백에 용기백배해서 나는 내 신념에 불을 지피고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끝까지 부채질해 줄 생각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생활하며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대안가족과 무덤까지 따라와 줄 수 있는 든든한 친구를 지원군으로 끊임없이 나를 발견하고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결혼으로 행복을 찾은 사람에겐 결혼만큼 좋은 제도가 없겠지만, 결혼으로 불행해진 사람에겐 족쇄일 뿐이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한다면 해보고 후회하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난 후회에 대해 회의적이고 30대 아직도 방황을 끝내지 못한, 어쩌면 방황하다 끝내 길을 잃을 지라도 나를 위해 살고 싶은 행복한 이기주의자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림을 멈추지 못한 나와 같은 언니의 속마음엔 동병상련의 기쁨을 느꼈다. 집을 뛰쳐 나온 그녀들이 가장 몰매를 많이 맞는 과도기가 30대이다. 준비되지 않은 비혼에겐 10년 뒤의 미래도 불안하지만 나에겐 당장 중요한 30대의 현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절실하다. 비혼자를 향한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참견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길 바래본다. 아직도 철들지 않았다며 혀를 쯧쯧 차더라도 한 번 생각해보라.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정말 행복한 지...속보이는 걱정이나 비꼬는 눈초리 대신 용기있는 그녀들의 선택에 쿨하게 박수쳐주자.

30대의 방황은 20대만큼 적나라하거나 당당하지 못한 채로, 모호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30대에 들어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만 가끔 그런 얘기가 나오곤 했다. 30대 중반이 되면 뭔가 안정되어 있을 것 같다는 얘긴 정말 뭘 모르고 하는 소리야. 진정한 질풍노도의 시기는 30대라고.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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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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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가면 친환경인증을 한 제품들이 많다. 친환경제품 코너도 따로 있으며 가격이 보통 제품보다 비싸도 건강을 생각해 구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람들의 구매심리를 이용해 친환경스티커를 위조한다는 내용의 고발프로그램도 있었으니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웰빙바람이 거세다. 이렇듯 친환경제품들이 많아지다보니 사실 무비료,무농약으로 키운 사과라고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난 후 무농약 사과나무를 키운 기무라 아키노라씨가 얼마나 바보같고 지독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노력과 좌절, 인내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자연이 키운 기적의 사과를 맛볼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기무라씨의 사과나무 이야기는 2006년 12월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었다. 그 이후 시청자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기무라씨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보자는 제작팀에 의해 논픽션 저자인 이시카와 다쿠지씨가 기무라씨의 인터뷰와 이론적인 설명을 덧붙여 완성했다. 눈물나게 맛있는데다 세포가 환호하며 심까지 먹어버리게 된다는 이 사과, 기무라씨를 통해 재현된 재배과정은 과연 기적이라 할 만했다. 사과는 일년에 12번 정해진 시기와 방법으로 농약을 뿌리지 않으면 제철에 수확하기가 힘들 정도로 농약없이는 키울 수 없는 작물이라고 한다. 그가 재배한 많은 채소와 벼들도 무농약 재배가 가능했지만, 사과나무만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6년이 넘는 시간동안 벌레를 잡고 거름을 주었던 그의 바보같은 노력과 끈기가 무색하게 말라 죽어갔다고 한다. 저자가 말하길 오늘날의 사과는 처음 발견된 캅카스 산맥의 작고 신맛이 강했던 사과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단맛이 강하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먹는 사과는 농약을 쓰고 나서 개량된 품종들이라는 얘기다. 

사과는 농약에 크게 의존하는 현대 농업의 상징적 존재다. ...(중략)
사과 재배의 역사는 벌레나 병과의 절망적인 싸움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 전장에 비친 한 줄기 빛이 바로 농약이었다.    -p.38

이렇게 농약에 길들여진 사과나무를 농약없이 키우려는 기무라씨를 주변 농가 사람들은 당연히 미친놈 취급했으며 가족들까지 빈궁한 처지로 몰아가는 모습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한 번 미치면 끝까지 해내고야마는 기무라씨 특유의 악착같은 근성으로 6년이란 시간을 버텼고 긴 시간동안 자신을 가장 원망해야할 가족들의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온갖 병충해로 잎을 떨구고 미친꽃을 피우며 한 알의 사과도 맺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과나무를 보며 자살을 결심하게 된 기무라씨는 보름달이 형형한 밤에 이와키산을 오르게 된다. 밧줄을 잘못 던져 어둠을 바라보던 순간, 알알이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의 환영을 보게 된다. 도토리나무를 보고도 사과나무라고 착각할만큼 그는 사과나무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그렇지만 천우신조라고 그 순간을 통해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현재 기무라씨의 사과나무 밭에는 허리까지 오는 잡초와 풀들이 무성하다고 한다. 개구리가 뛰놀고 온갖 곤충과 동물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과나무밭.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오래전 캅카스 산맥에서 발견된 야생의 사과나무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짐작하게 만들 뿐이다. 그 나무에 맺힌 사과를 먹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사람들조차 멀고도 가까운 나라에 있는 나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이가 다 빠진 채 사람좋은 웃음으로 사과나무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 책을 읽는 나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는 꼬장꼬장한 농부 기무라씨의 노력이 기적의 사과맛만큼이나 눈물겹다.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감사하고  자연을 지킬 줄 아는 한 농부의 진심어린 고백에 숙연해지고 만다. 

병이나 벌레 때문에 사과나무가 약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것만 없애면 사과나무가 건강을 되찾을 거라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벌레나 병은 오히려 좋은 결과였다. 사과나무가 약해졌기 때문에 벌레와 병이 생긴 것이었다. 도토리나무 역시 해충이나 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토록 건강한 것은 식물은 본래부터 농약 같은 게 없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의 본모습이다. 그런 강력한 자연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과나무는 벌레와 병으로 고통받았던 것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자연을 되찾아 주는 일이었다.    -p.159

그의 노력을 농업적 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쉽게 설명해주었던 저자 이시카와 다쿠지 덕분에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기무라씨의 상황을 볼 수 있었고 그의 행동에 따른 근거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반복되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사과나무를 향한 애정과 포기할 수 없는 신념으로 9년이 넘는 인고의 시간을 견딘 기무라씨의 성공스토리만큼 극적인 소재가 없었을텐데 최대한 과장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일본에는 남의 이목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많은 분야의 장인들이 있다. 나무로 깎은 빗과 빗자루가 30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팔린다는 건 그만큼 그들의 정신을 높이사는 일본인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가 되면 좋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기무라씨를 통해 내게 일어날 기적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길 바래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무분별하게 개발되고 초토화될수록 자연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더 혹독한 댓가를 요구한다는 걸 알아야 할 것 같다. 선과 악이 없는 자연의 순환논리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지도 깨닫게 된다. 필요한만큼만 거두고 자연으로 되돌려줄 줄 아는 옛사람들의 미덕이 그리워지는 현실이다. 썩지않는 기적의 사과가 이제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사과나무 재배방법을 알려주고 자연농법을 설파한다고 한다. 자연이 보여준 진심을 몸소 체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사과맛을 보고 아련한 향기를 맡았으면 좋겠다.

자연 속에서는 해충도 익충도 없다. 기무라 씨는 너무나 당연한 그 진리에 눈을 뜬 것이다. 인간이 해충이라 부르는 벌레가 있기 때문에 익충도 살아갈 수 있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있기 때문에 자연의 균형은 유지된다. 거기에 선악은 없다. 병이나 벌레의 극심한 창궐만 하더라도 균형을 회복하려는 자연의 활동이 아니던가.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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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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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손에서 놓고도 한참을 생각했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겠는데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난감했다. 평소 사회 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뭐라 말해야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비난해야한다면 그 대상은 무관심으로 일관한 일인으로서 손가락질을 면하기 어려웠다. 일부러 모른 척 했다면 자괴감때문에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무거운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건 그런 비난과 자책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뿌리박힌 잘못된 인식과 선입견의 바로잡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피하지 않고 바라봐주길 바랬을 것이다.


주인공 정원은 I시의 변두리 공부방에서 만난 정아가 네팔 이주노동자 자히드의 아이를 가졌고 결혼할 거라는 말에 모진 충고를 하게 된다. 정아의 서러운 반박에 어릴 적 고향이었던 동두천을 떠올리며 20년동안 잊고 지낸 줄 알았던 그 곳을 찾아간다. 미군기지 주변에서 어려운 시절을 나고 자랐던 정원은 변해버린 동두천에서 자신의 첫사랑 재민을 만난다. 미군과의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재민은 동네에서 튀기로 놀림받고 외면당하며 모진 세월을 견뎠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재민이와의 대화속에서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의 괴로움이 그제서야 조금씩 현실감을 띄었다. 흑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은 사촌 윤희언니의 아이를 안아주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일이며, 친구들과 조금씩 어긋났던 재민이를 보듬어주지 못했던 일, 양색시들의 포주노릇을 하던 부모님밑에서 자라 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있던 친구 해자, 외국인에게 입양되는 걸 자랑스러워하던 경숙이까지 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으로 버거워하며 동두천에서의 시간을 견뎌낸 그들의 고통이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며 끼니를 채우고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나, 미군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나 결국 미군부대로 인해 먹고 사는 건 매한가지인데 혼혈아들과 양색시에게 가해지는 멸시적인 눈초리나 거친 입방아는 다분히 모순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그들을 자신과 별개인 이방인 취급하는 것만큼 천박한 것은 없는데도 그 당시 동두천의 주민들과 지금의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나마 성공한 혼혈아들에겐 끝없는 찬사와 부러움이 따르지만 가슴 한 켠으로는 반쪽짜리 핏줄일 뿐이라는 은근한 멸시와 반발도 따른다. 도대체 근거없는 질투심의 발로이다.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주인공 정원처럼 잊고 지낸 줄 알았던 어두운 터널을 제대로 다시 걷게 만드는 글이었다.


이 책을 덮은 후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부분에서 뿌리깊은 자각이 생겼다. 나와는 관계없는 소수의 이야기일 뿐이니 귀담아듣지 못하고 나 역시 그들을 외면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똑같이 상처주지 않았을까하는 조심스런 후회였다. 이 거대한 뿌리 밑에서 나는 일개 잔뿌리밖에 안되는 인간인데 다른 뿌리와 섞였다고 그들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썼던 건 아닌가 싶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두운 역사속에서 묻어두고 싶었던 실패작처럼 조용히 스러지고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보다 더 꿋꿋히 그 시절을 견뎠고 고단한 삶을 메마른 땅에 뿌리내렸다.


주말 TV다큐멘터리에서 쓸쓸함이 묻어난 이태원거리가 비춰진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거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5년이상 거주해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있었고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편안해져야 할 그 곳에서도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을 먼저 경계한다고 한다. 한 때 알아주는 외국인 거리 명소였지만 장사가 안 돼 하나둘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제 거리는 활기참보다는 휑한 느낌이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는 많은 외국노동자들에게 우리나라의 인심은 얼마나 각박할까. 월급을 떼먹는 사장, 열악한 근무환경, 복지혜택이라고는 받을 수 없는 그들을 사실 나조차 동정으로 바라보거나 한 때 배타적인 마음에 외면하기도 했었다. 이제와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속좁은 인간인지 되새기게 되었다. 나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방관했을 우리 모두가 지금이라도 그들을 인정하고 더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는 한 명 한명의 인식이라도 바꿔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작가가 바라던 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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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둑 1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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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고 대단한 책이라는 찬사를 등에 업은 책을 이제야 만났다. 도둑이라는 좋지 않은 명사를 붙였음에도 주인공 리젤이 흡족해할만큼 책도둑이란 말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묵직한 두께의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책도둑으로 등장하는 리젤의 이야기를 죽음의 신이 화자가 되어 풀어간다. 독특한 구성과 해석이 자꾸만 앞장을 되짚어 읽게 만드는데 사신이 모든 사물과 형상을 의인화해 묘사하면서 여러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국내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의인화 묘사때문에 중간 중간 옆 길로 새면서 이야기의 쉼표가 되어준다. 

배경은 독일의 작은 마을 헴멜, 히틀러가 독일을 점령한 후 세계제2차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수용소로 보내고 있다. 그 거리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덤을 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란 책을 훔치고 남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이별한 열살소녀 리젤 메밍거가 후버만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리젤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아코디언을 멋지게 연주하는 아빠 한스 후버만과 엄하지만 따뜻한 엄마 로자 사이에서 전쟁과 나치의 억압으로 위태롭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한스에게 아코디언을 가르쳐준 에릭 판덴부르크의 아들 막스(유대인)가 나타나면서 리젤의 집안은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된다. 가족의 비밀이 되어버린 막스는 지하실에서 2년이란 긴시간을 보내는동안 리젤과 가족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스가 길거리를 행진하는 유대인에게 빵을 주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막스는 리젤의 가족을 떠나게 되고, 시간이 흘러 유대인 행렬에 합류해 거리를 걷는 막스와 리젤은 다시 한 번 마주친다. 작가가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들었던 장면이 리젤의 이야기속에서 재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로자에게 빨래를 맡기는 시장집의 부인과 몇 번의 교류끝에 친해진 리젤은 부인의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게 되고 후에는 서재의 책을 훔치게 된다. 부인의 암묵적인 동의와 배려하에 책을 훔치는 리젤을 단순히 도둑이라고 몰아버릴 수 없다. 그 책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힘멜이라는 공간에도 패전의 그늘이 짙어지며 폭격의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화자가 된 죽음의 신은 전쟁통에서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거둬들인다. 등장인물들이 죽을 것을 미리 예고하는 사신에겐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죽음은 당연다는 듯한 비난섞인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과연 이런 경우엔 어느 쪽이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똑같이 한 인간의 일그러지고 그릇된 욕망때문에 희생된 재물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그 시절에 관해 끊임없이 시험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일제치하의 시대나 전쟁의 폐해에 아직도 몸서리치고 이를 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악몽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우리의 뇌리에 각인될 것이고 힘을 잃은 영혼들에게 묵념하고 있을 것 같다.  

이들이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 사람들이?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의 눈길에 냄새에 취해 그의 문장, 문단, 책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을까? 로자 후버만이 책임을 져야 할까? 유대인을 숨겨준 사람인데? 아니면 한스가? 이들 모두가 죽어 마땅할까? 아이들도? ....(중략)
인간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책도둑의 언어로 그들의 관해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을 동정했다. 물론 그 당시 여러 수용소에서 내가 퍼나르던 사람들에게 느끼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지하실에 있던 독일인들은 물론 동정할 만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지하실은 샤워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샤워를 하라고 그곳에 보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에게 삶은 여전히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p.109

그리고 리젤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시절에 가장 상처받기 쉽고 예민한 유년의 시간을 견뎠다. 훔친 책과 선물받은 책을 통해 위로받고 사랑하고 행복해했다. 죽음은 늘 책도둑의 가까이 있었지만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고 갈기갈기 찢었지만 책도둑은 살려주었다. 안네의 일기가 유대인의 불안한 삶을 대변하고 어른들을 반성하게 했다면, 리젤의 이야기가 바른 생각을 가진 독일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자 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동안 리젤 또래의 경계에 있는 아이들의 삶을 많이 보아왔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렇다고 질풍노도의 청소년으로 분류하기도 모호한 나이의 아이들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인생이란 날카로운 가시에 할퀴우고, 감당하기 벅찬 현실에 맞닥드리면서도 아이같은 순수함을 마지막 보루로 간직한 채, 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시기의 자아를 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되돌아 봤을 때 야생마처럼 함부로 날뛰며 치고 박았지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리젤의 아름다운 순간을 엿볼 수 있어 나조차 순수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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