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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평점 :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가면 친환경인증을 한 제품들이 많다. 친환경제품 코너도 따로 있으며 가격이 보통 제품보다 비싸도 건강을 생각해 구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람들의 구매심리를 이용해 친환경스티커를 위조한다는 내용의 고발프로그램도 있었으니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웰빙바람이 거세다. 이렇듯 친환경제품들이 많아지다보니 사실 무비료,무농약으로 키운 사과라고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난 후 무농약 사과나무를 키운 기무라 아키노라씨가 얼마나 바보같고 지독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노력과 좌절, 인내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자연이 키운 기적의 사과를 맛볼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기무라씨의 사과나무 이야기는 2006년 12월 NHK의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었다. 그 이후 시청자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기무라씨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보자는 제작팀에 의해 논픽션 저자인 이시카와 다쿠지씨가 기무라씨의 인터뷰와 이론적인 설명을 덧붙여 완성했다. 눈물나게 맛있는데다 세포가 환호하며 심까지 먹어버리게 된다는 이 사과, 기무라씨를 통해 재현된 재배과정은 과연 기적이라 할 만했다. 사과는 일년에 12번 정해진 시기와 방법으로 농약을 뿌리지 않으면 제철에 수확하기가 힘들 정도로 농약없이는 키울 수 없는 작물이라고 한다. 그가 재배한 많은 채소와 벼들도 무농약 재배가 가능했지만, 사과나무만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6년이 넘는 시간동안 벌레를 잡고 거름을 주었던 그의 바보같은 노력과 끈기가 무색하게 말라 죽어갔다고 한다. 저자가 말하길 오늘날의 사과는 처음 발견된 캅카스 산맥의 작고 신맛이 강했던 사과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단맛이 강하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먹는 사과는 농약을 쓰고 나서 개량된 품종들이라는 얘기다.
사과는 농약에 크게 의존하는 현대 농업의 상징적 존재다. ...(중략)
사과 재배의 역사는 벌레나 병과의 절망적인 싸움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 전장에 비친 한 줄기 빛이 바로 농약이었다. -p.38
이렇게 농약에 길들여진 사과나무를 농약없이 키우려는 기무라씨를 주변 농가 사람들은 당연히 미친놈 취급했으며 가족들까지 빈궁한 처지로 몰아가는 모습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한 번 미치면 끝까지 해내고야마는 기무라씨 특유의 악착같은 근성으로 6년이란 시간을 버텼고 긴 시간동안 자신을 가장 원망해야할 가족들의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온갖 병충해로 잎을 떨구고 미친꽃을 피우며 한 알의 사과도 맺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과나무를 보며 자살을 결심하게 된 기무라씨는 보름달이 형형한 밤에 이와키산을 오르게 된다. 밧줄을 잘못 던져 어둠을 바라보던 순간, 알알이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의 환영을 보게 된다. 도토리나무를 보고도 사과나무라고 착각할만큼 그는 사과나무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그렇지만 천우신조라고 그 순간을 통해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현재 기무라씨의 사과나무 밭에는 허리까지 오는 잡초와 풀들이 무성하다고 한다. 개구리가 뛰놀고 온갖 곤충과 동물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과나무밭.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오래전 캅카스 산맥에서 발견된 야생의 사과나무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짐작하게 만들 뿐이다. 그 나무에 맺힌 사과를 먹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사람들조차 멀고도 가까운 나라에 있는 나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이가 다 빠진 채 사람좋은 웃음으로 사과나무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 책을 읽는 나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있는 꼬장꼬장한 농부 기무라씨의 노력이 기적의 사과맛만큼이나 눈물겹다.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감사하고 자연을 지킬 줄 아는 한 농부의 진심어린 고백에 숙연해지고 만다.
병이나 벌레 때문에 사과나무가 약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것만 없애면 사과나무가 건강을 되찾을 거라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벌레나 병은 오히려 좋은 결과였다. 사과나무가 약해졌기 때문에 벌레와 병이 생긴 것이었다. 도토리나무 역시 해충이나 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토록 건강한 것은 식물은 본래부터 농약 같은 게 없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의 본모습이다. 그런 강력한 자연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과나무는 벌레와 병으로 고통받았던 것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자연을 되찾아 주는 일이었다. -p.159
그의 노력을 농업적 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쉽게 설명해주었던 저자 이시카와 다쿠지 덕분에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기무라씨의 상황을 볼 수 있었고 그의 행동에 따른 근거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반복되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사과나무를 향한 애정과 포기할 수 없는 신념으로 9년이 넘는 인고의 시간을 견딘 기무라씨의 성공스토리만큼 극적인 소재가 없었을텐데 최대한 과장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일본에는 남의 이목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많은 분야의 장인들이 있다. 나무로 깎은 빗과 빗자루가 30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팔린다는 건 그만큼 그들의 정신을 높이사는 일본인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가 되면 좋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기무라씨를 통해 내게 일어날 기적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길 바래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무분별하게 개발되고 초토화될수록 자연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더 혹독한 댓가를 요구한다는 걸 알아야 할 것 같다. 선과 악이 없는 자연의 순환논리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지도 깨닫게 된다. 필요한만큼만 거두고 자연으로 되돌려줄 줄 아는 옛사람들의 미덕이 그리워지는 현실이다. 썩지않는 기적의 사과가 이제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사과나무 재배방법을 알려주고 자연농법을 설파한다고 한다. 자연이 보여준 진심을 몸소 체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사과맛을 보고 아련한 향기를 맡았으면 좋겠다.
자연 속에서는 해충도 익충도 없다. 기무라 씨는 너무나 당연한 그 진리에 눈을 뜬 것이다. 인간이 해충이라 부르는 벌레가 있기 때문에 익충도 살아갈 수 있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있기 때문에 자연의 균형은 유지된다. 거기에 선악은 없다. 병이나 벌레의 극심한 창궐만 하더라도 균형을 회복하려는 자연의 활동이 아니던가.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