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둑 1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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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고 대단한 책이라는 찬사를 등에 업은 책을 이제야 만났다. 도둑이라는 좋지 않은 명사를 붙였음에도 주인공 리젤이 흡족해할만큼 책도둑이란 말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묵직한 두께의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책도둑으로 등장하는 리젤의 이야기를 죽음의 신이 화자가 되어 풀어간다. 독특한 구성과 해석이 자꾸만 앞장을 되짚어 읽게 만드는데 사신이 모든 사물과 형상을 의인화해 묘사하면서 여러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국내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의인화 묘사때문에 중간 중간 옆 길로 새면서 이야기의 쉼표가 되어준다. 

배경은 독일의 작은 마을 헴멜, 히틀러가 독일을 점령한 후 세계제2차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수용소로 보내고 있다. 그 거리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덤을 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란 책을 훔치고 남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이별한 열살소녀 리젤 메밍거가 후버만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리젤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아코디언을 멋지게 연주하는 아빠 한스 후버만과 엄하지만 따뜻한 엄마 로자 사이에서 전쟁과 나치의 억압으로 위태롭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한스에게 아코디언을 가르쳐준 에릭 판덴부르크의 아들 막스(유대인)가 나타나면서 리젤의 집안은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된다. 가족의 비밀이 되어버린 막스는 지하실에서 2년이란 긴시간을 보내는동안 리젤과 가족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스가 길거리를 행진하는 유대인에게 빵을 주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막스는 리젤의 가족을 떠나게 되고, 시간이 흘러 유대인 행렬에 합류해 거리를 걷는 막스와 리젤은 다시 한 번 마주친다. 작가가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들었던 장면이 리젤의 이야기속에서 재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로자에게 빨래를 맡기는 시장집의 부인과 몇 번의 교류끝에 친해진 리젤은 부인의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게 되고 후에는 서재의 책을 훔치게 된다. 부인의 암묵적인 동의와 배려하에 책을 훔치는 리젤을 단순히 도둑이라고 몰아버릴 수 없다. 그 책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힘멜이라는 공간에도 패전의 그늘이 짙어지며 폭격의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화자가 된 죽음의 신은 전쟁통에서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거둬들인다. 등장인물들이 죽을 것을 미리 예고하는 사신에겐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죽음은 당연다는 듯한 비난섞인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과연 이런 경우엔 어느 쪽이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똑같이 한 인간의 일그러지고 그릇된 욕망때문에 희생된 재물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그 시절에 관해 끊임없이 시험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일제치하의 시대나 전쟁의 폐해에 아직도 몸서리치고 이를 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악몽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우리의 뇌리에 각인될 것이고 힘을 잃은 영혼들에게 묵념하고 있을 것 같다.  

이들이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 사람들이?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의 눈길에 냄새에 취해 그의 문장, 문단, 책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을까? 로자 후버만이 책임을 져야 할까? 유대인을 숨겨준 사람인데? 아니면 한스가? 이들 모두가 죽어 마땅할까? 아이들도? ....(중략)
인간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책도둑의 언어로 그들의 관해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을 동정했다. 물론 그 당시 여러 수용소에서 내가 퍼나르던 사람들에게 느끼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지하실에 있던 독일인들은 물론 동정할 만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지하실은 샤워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샤워를 하라고 그곳에 보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에게 삶은 여전히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p.109

그리고 리젤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시절에 가장 상처받기 쉽고 예민한 유년의 시간을 견뎠다. 훔친 책과 선물받은 책을 통해 위로받고 사랑하고 행복해했다. 죽음은 늘 책도둑의 가까이 있었지만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고 갈기갈기 찢었지만 책도둑은 살려주었다. 안네의 일기가 유대인의 불안한 삶을 대변하고 어른들을 반성하게 했다면, 리젤의 이야기가 바른 생각을 가진 독일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자 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동안 리젤 또래의 경계에 있는 아이들의 삶을 많이 보아왔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렇다고 질풍노도의 청소년으로 분류하기도 모호한 나이의 아이들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인생이란 날카로운 가시에 할퀴우고, 감당하기 벅찬 현실에 맞닥드리면서도 아이같은 순수함을 마지막 보루로 간직한 채, 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시기의 자아를 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되돌아 봤을 때 야생마처럼 함부로 날뛰며 치고 박았지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리젤의 아름다운 순간을 엿볼 수 있어 나조차 순수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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