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만찬 - 공선옥 음식 산문집
공선옥 지음 / 달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울타리를 친친감고 새끼손톱만한 꽃망울을 터트리던 강낭콩, 노란 속내를 하늘로 활짝 드러낸 배추, 연푸른 이마를 빼족 내민 무우, 나무기둥을 타고 오르던 뽀얀 머루송이... 그녀의 행복한 만찬을 먹자고 덤비니 20년도 더 지난 아빠의 공터텃밭이 생각난다. 텃밭 머루나무 곁에서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장난감 기타를 메고 있던 남동생의 사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딸 셋의 홀어머니곁에서 가난한 생활로 근근히 끼니를 연명한 듯 보였지만, 그녀는 산과 들의 모든 풀과 열매, 채소를 재료로 잊지 못할 만찬을 차렸던 추억을 행복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만찬에 초대된 나는 먹는내내 산으로 들로 쑥과 달래를 캐러 다니던 작가의 모습에서 나의 유년을 재생하게 되었다. 

수십가지 먹거리에 얽힌 작가의 기억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떨치고 싶은 지긋지긋함이 아닌 꿈에라도 그리운 맛이었다. 나는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부각, 머위, 초피같은 식물부터 감자, 고구마, 호박같은 흔하디 흔한 채소들이 읽는내내 자라는 풍경과 음식을 상상하게 만들며 허기질 때는 입에 침을 고이게 만든다. 시래기 다발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생존과 직결되있었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겪어보지 못한 배고픔의 설움에 가슴이 아려오고, 토란탕을 끓이며 어린시절 엄마의 토란탕을 떠올리게 될 때는 작가처럼 엄마의 음식과 닮아가는 나의 음식을 발견한다. 그녀 특유의 구수한 내음과 맛깔스러운 글이 회상을 부채질한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음식을 만들면서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내가 토란탕을 끓이며 서둘러 세상 떠난 엄마를 야속하리만치 그리워 했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명절에 내가 끓여준 토란탕을 끓여보려고 노력하다가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나를 그리워할는지는 모르겠다.   -P.117

그러고보면 내가 시래기 다발을 보고 아름답다 느꼈던 것은 '배곯을 염려'가 덜어진대서 온 감정일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봐도 그것이 내 생존과 직결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가 없을 것이므로. 그러니, 아름다움은 다른 말로 여유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128

주변의 모든 식물들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제 몸을 주고 누군가의 행복한 기억을 지배한다는 건 참 벅찬 일이다. 열매부터 줄기, 잎까지 무농약 친환경에서 제멋대로 자라 더 향긋한 내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식물과 채소들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는 건 그런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더불어 살아갔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가방을 벗어던진 가시내들이 봄이면 캐온 쑥으로 쑥국과 쑥떡, 쑥버무리를 해먹고, 쓴뿌리를 잘근 잘근 씹으면서도 그게 좋아 연신 텃밭 담장아래를 파내게 만든 고들빼기, 늘 잡풀과 헷갈려 산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며 뽑아제낀 달래. 글을 읽으며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감겨있던 강원도 산골, 나의 일상을 떠올리며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의 그리움과 회한이 겹친다. 그 일상이 특별함이 될거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작가의 선명한 기억의 재구성과 현실적인 사진들이 오감을 자극한다. 하지만 지금도 지천으로 널린 먹거리들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재료의 근본과 성장이 다르니 옛날 엄마가 해주던 손맛도 좀체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엄마 손맛에 가까운 음식들을 찾아다니고 인심을 그리워하며 분위기에 젖고 싶어한다. 순수했던 그 시절, 필요한 것 이상을 만들지 않고 먹을만큼만 자급자족하며 행복해하고 남이 가진 것에 질투하지 않으며 나눌 줄 알았던 사람들에겐 서로에 대한 배려가 넘쳐난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을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될 때 행복한 기억으로 떠올리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땅에서 나는 먹거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줬으면 좋겠다. 

꿈에 본 것 같이나 귀한 쌀, 날마다 먹는 쌀밥.
그러나 그 쌀밥을 조금이라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나는 눈물이 난다.
쌀밥 한 그릇, 목구멍에 넣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숱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한테서 쌀을 빼놓고서 사실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쌀은 단순히 입 안으로만 들어갔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을 이루고 정신을 이룬다. 쌀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처음과 끝이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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