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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집을 나가다 - 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
언니네트워크 엮음 / 에쎄 / 2009년 6월
평점 :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를 훌쩍 뛰어 오른 사뿐한 여자의 발걸음. 초록이 물든 스커트자락이 돋움에 풀썩이며 흔들리고, 그와 함게 잔디밭 저편의 하얀꽃을 피운 나뭇가지도 사정없이 휩쓸린다. 때론 안정적이고 때론 불안하게 기우는 가족이란 울타리를 가뿐하게 타넘은 스물여덟명 언니들의 도발적인 고백이 담긴 책이다. '독립'이란 말로 떳떳하게 타지에서 5년을 살아오며 여자들의 부러움과 남자들의 아니꼬움을 한 몸에 받아온 나에게 이 책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멀쩡한 집놔두고 친구랑 집나와서 삽니다!'... '왜??' 몇 번이나 그 의도를 되물어오는 이들에게 나는 뒷말을 흐리며 어영부영 대답을 회피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설명하지 못한 답답함을 한 방에 떨쳐버릴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꿈꿔왔기에 경제적으로 독립해산다는 사실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1부에 나오는 그녀들처럼 끈끈한 혈육의 정이나 가족의 품을 떠나며 눈물흘리고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내겐 오로지 창창한 앞길만 있었고 핑크빛으로 물든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남들이 한번쯤 생각한 반전은 없었다. 나는 현재도 정말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고 있다. 가끔 손녀 볼 나이라며 가뭄에 콩나듯 통화하는 엄마가 하소연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엄마를 위해 결혼할 생각은 없으므로 소 귀에 경읽기다. 엄마도 내 확고함을 눈치챘는지 명절에 마주봐도 결혼얘기는 잘 하지 않으신다. 대신 혼자 외롭게 감당해야할 노후를 생각하라며 체념어린 대안들로 과년한 딸년의 마음을 휘젓곤 하신다. 그렇기에 스물여덟명의 신념이 자명한 나의 현실로 다가와 대책없이 솟아나던 마음의 잡초들을 뿌리뽑아 주었다.
3부로 나뉘어 들려주는 이들의 이야기는 1부에서 가족들 곁에서 힘겹게 홀로서기를 시도하거나 이별을 준비하는 그녀들의 다양한 사연이 실려있다. 2부에서는 비혼으로 살아가는 그녀들에게 실제로 제기되는 문제들과 그에 맞서 대안을 찾고, 다양한 방식으로 비혼만의 현실적인 난관을 헤쳐가려는 굳은 의지와 노력이 엿보인다. 특히 비혼들이 가장 걱정하는 노후나 사후에 관한 리얼한 고찰과 실천이 담겨있어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준비에 놀라기도 했다. 아무리 혼자를 부르짖어도 인간이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이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야기는 크게 공감했다. 3부에서는 비혼이기에 감수해야하는 은근한 비난과 무시에도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쾌활한 인생살이로 좀 더 구체적인 희망의 모습을 비춘다.
때론 당당하게 비혼을 외치는 언니에게도 한순간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근심이 있다. 내가 현실적으로 와닿았던 건 나이듦으로써 '의존적'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심적으로 나약해져 누구에게 기대고 싶어진다거나 행여 팽팽한 긴장을 풀어버릴까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언니들의 고백에 용기백배해서 나는 내 신념에 불을 지피고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끝까지 부채질해 줄 생각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생활하며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대안가족과 무덤까지 따라와 줄 수 있는 든든한 친구를 지원군으로 끊임없이 나를 발견하고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결혼으로 행복을 찾은 사람에겐 결혼만큼 좋은 제도가 없겠지만, 결혼으로 불행해진 사람에겐 족쇄일 뿐이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한다면 해보고 후회하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난 후회에 대해 회의적이고 30대 아직도 방황을 끝내지 못한, 어쩌면 방황하다 끝내 길을 잃을 지라도 나를 위해 살고 싶은 행복한 이기주의자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림을 멈추지 못한 나와 같은 언니의 속마음엔 동병상련의 기쁨을 느꼈다. 집을 뛰쳐 나온 그녀들이 가장 몰매를 많이 맞는 과도기가 30대이다. 준비되지 않은 비혼에겐 10년 뒤의 미래도 불안하지만 나에겐 당장 중요한 30대의 현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절실하다. 비혼자를 향한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참견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길 바래본다. 아직도 철들지 않았다며 혀를 쯧쯧 차더라도 한 번 생각해보라.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정말 행복한 지...속보이는 걱정이나 비꼬는 눈초리 대신 용기있는 그녀들의 선택에 쿨하게 박수쳐주자.
30대의 방황은 20대만큼 적나라하거나 당당하지 못한 채로, 모호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30대에 들어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만 가끔 그런 얘기가 나오곤 했다. 30대 중반이 되면 뭔가 안정되어 있을 것 같다는 얘긴 정말 뭘 모르고 하는 소리야. 진정한 질풍노도의 시기는 30대라고.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