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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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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먹고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마음속에 늘 품고 있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삶은 죽음을 먹는 것이다" 라는, 살기 위해 살아있는 것을 죽여 먹는 것이 바로 밥이니, 밥벌이가 치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은 하루 하루 죽음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지루할 수 없고, 빚지지 않은 적이 없고,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이다. 나이가 들고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회의가 들고 사직서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마다 난 이 말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기술이 고도화되고 심화되는 경기침체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몇십년째 제자리인 급여로 인해 먹고 산다는 것은 모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죽음을 먹고 살기 때문에 치열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치열함에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인간성을 포기하면서 버거워하고 있다.

 

여기 직장에서 정리해고된 후 어둡고 긴 터널의 실직생활에 빠진 남자가 있다. 그의 아내는 적금통장을 깼고 자기 대신 동네 마트에 취직을 했다. 그는 돼지엄마라는 사람을 통해 마늘까기 부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울고 싶은 날이면 마늘을 깐다는 그는 인형눈알 붙이기, 바비인형 속눈썹붙이기, 학과 공룡알 만들기등 다양한 부업을 하게 된다. 그 사이에 인형눈알을 붙이다 본드를 흡입하게 된 그는 환각에 빠지며 헤어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돼지엄마를 통해 준공무원에 해당한다는 동물원 취업 제안을 받고서 한 달동안 체력단련에 매진한다. 생각보다 낮은 경쟁률로 바로 합격하여 출근하게 된 그는 자신이 동물원의 동물로 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한순간 자괴감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동물탈을 쓰고 동물흉내를 내며 일하는 그 곳에서 때때로 괴롭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통해 진한 동료애로 울고 웃으며 인간성을 회복해나간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보았을 때 정말 기발한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의 전개를 머리속으로 그리자 그렇게 슬프고 비통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과 함께 고릴라사에서 일하는 만딩고나 앤, 조풍년의 과거사를 통해 그려지는 현실의 단면이 애처로웠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남을 배신하고 짓밟아야하고 아등바등 하루를 살았지만, 결국 동물이 되어서야 인간답게 살게 된 그들을 보며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르게 보였다. 늘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보다 쉽게 일하는 사람들만 비교하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단할까 한숨지은 날이 많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쉽게 돈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회는 사람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그 돈보다 높은 효율과 가치를 기대하며 숫자로 모든 것을 재단해왔다. 사람들은 사회가 기준한 대열에서 낙오되었고 대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잔인하고 독해졌다. 독해진 그들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했고 모든 가치의 잣대가 돈으로 환산되었다. 

 

모든 게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 시대의 비참함을 저자는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때론 아픈 곳을 살짝씩 건드리기도 하고 비틀기도 하고 진지한 날카로움으로 폐부를 후벼파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을 보며 나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내가 사는 방식이 맞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소설을 보며 나 자신을 버리며 일했다고 억울해했던 시간과 보상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하루들이 먹고 사는 것의 위대함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고릴라탈을 써야 한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고릴라탈을 쓰고 일하면서도 인간성을 버리지 않는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더럽고 치사한 직장생활도 하루에 열두번도 더 써내려간 사직서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열심히 일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생활고때문에 오는 상실감과 허탈함은 그들을 좌절의 늪에 빠뜨리고 소설의 말미에 동물원의 동물들은 아프리카 원시림의 동물이 되는 길을 택하게 되는데 사람으로 살 때보다 행복하다고 말한다. 먹고 산다는 것 이상으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가혹한 현실속에 '세렝게티 동물원'은 어디에도 없지만 나는 동물원에 갈 때마다 치열하게 사는 그들을 마주하게 될 것 같다.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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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N을 위하여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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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어려운 감정이 없다. 그리고 사랑만큼 기쁘고 행복한 감정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 사랑이란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는 건 물론이요, 순수함을 일깨우며 한 사람의 근본을 뿌리째 흔들어놓기도 한다. 궁극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 살인사건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고백을 통해 새롭게 정의된다. 각자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은폐했다. 그리고 10년 뒤 그들은 그 때의 사건을 떠올리며 진실은 무엇이었나 고민한다.

 

도쿄의 초고층 고급맨션에서 대기업의 간부인 노구치와 그의 부인 나오코가 살해됐다. 현장에 있던 네 명의 젊은이(스기시타 노조미, 안도 노조미,니시자키 마사토, 나루세 신지)는 니시자키 마사토가 범인임을 증언하고 그는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10년 뒤 6개월의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스기시타 노조미에 의해 살인사건의 진실이 하나 둘 밝혀지고, 그들의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이 이야기하고픈 진실은 무엇이었나, 책장을 넘길수록 그것이 몹시 궁금해 끝까지 책을 놓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모조리 읽었다. 하지만 이건 마치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만들기 위한 허술한 트릭처럼 그들 개개인의 현재와 과거까지 억지스럽게 꾸며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개연성이 없다고 해야할까. 어차피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억지스런 과거나 고백때문에 -혹은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될수록- 그들이 말하고자하는 궁극적인 사랑은 설들력을 잃어갔다.

 

 그리고 제목의 N이 등장인물 모두를 지목하고 있는 걸로 보아 N이란 자신이 사랑한 상대방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보다 N은 바로 본인 자신들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자신이 사랑이라 주장하는 상대방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양방향이 아니다. 상대가 알지 못했던 일방적 감정이었고 그것은 교류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가 N을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사랑은 서로에게 진실조차 말하지 못한채 묻히고 만다. 결국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키려고 했던 니시자키 마사오의 감정 역시 상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누구를 위한다는 말은 위선이 되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현실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견고했으며 나아가 서로를 몰랐던 것처럼 남이 되어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궁극적인 사랑이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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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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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고 가슴에 품어본게 언제였던가. 이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되짚어보았다. 너무도 까마득했다. 건드리기만해도 온 몸에 가시가 돋을 만큼 예민했고, 파란 하늘만 봐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이유없이 슬프고 쓸쓸했던 고등학생때였다. 그건 마치 오래전 앨범을 들여다보며 '아, 그 때 정말 이랬었지'라고 그리워할만큼 아련한 기억이었다. 비록 교과서에서만 읽었던 시였으나 지금도 선명하게 읊을 수 있는 시들... 그 시를 마음에 새기며 설레했었다. 책을 읽는 동안 오랜 사회생활에 피폐해지고 삭막해진 내게 윤동주의 시와 지고지순한 삶도 조금씩 걸어들어왔다. 그 때처럼 마음을 뒤흔들만큼 격렬하게 저항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이키는 무언가, 그건 바로 시의 내재된 힘이었다.

 

후쿠오카 형무소, 배치된지 얼마되지 않은 어린 일본인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는 감옥안에서 일어난 잔혹한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피해자는 자신과 같은 일본인 간수 스기야마 도잔. 형무소장은 그에게 스기야마의 살인사건을 전담해 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살해된 스기야마의 간수복 주머니에서 발견한 시 한 편의 단서, 그리고 스기야마의 삶을 추적하는동안 점점 감옥안에서 일어나는 미스테리한 사건에 휘말리고 진실이 아니길 바랬던 거대한 음모의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 스기야마의 과거행적을 쫓다보니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한 인물. 유이치 역시 조선인만 수감된 제 3수용동의 시인 윤동주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소설은 실제 윤동주가 독립운동으로 인해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28살에서 죽기 전 29살까지 1년간의 밝혀지지 않은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허구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 윤동주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살려냈다. 윤동주가 형무소에서 보냈던 짧지만 고통스런 날들을 바탕으로 신비롭기만했던 한 시인의 생애를 생생하게 그려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나는 그의 숨겨진 시간을 읽는 기쁨만큼이나, 살아남아 비루하고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슬픔 또한 배가되었다. 그는 시를 남겨 몇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한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며 하루를 살고 있는가하는 자책도 생겼으며, 그를 죽게 만든 인간의 악랄함을 목도하고 유이치가 속죄했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겁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한편으론 책 속에 "문장은 영혼을 구한다"는 말처럼 그의 시를 읽고 내 영혼도 바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윤동주가 교과서에서나 만날 수 있는 고리타분한 시인이 아닌,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을 믿고 끝까지 절망하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읽기 힘들만큼 슬퍼서 휘청거리기도 했으나 끝내는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읽은 기억만큼 거슬러 올라간 과거에 별을 바라보며 그의 시를 생각하던 때가 불현듯 스쳤다. 인간이 얼마만큼 잔인하고 얼마큼 아름다울수 있는가를 역설하는 이 책, 귀뚜라미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이 밤에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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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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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의 줄거리를 보고는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파리의 밤거리에서 사라진 여인, 그리고 며칠뒤 작은 새장안에서 발견된 그녀는 사라져버리고 끔찍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 무엇보다 표지를 장식한 어둠 속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이 불길한 인상을 남겼다. 젊고 가녀린 여인들이 희생되는 살인사건 이야기인가하고 지레짐작하며, 그래도 읽고 싶다는 마음과 읽고 싶지 않다는 불편함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다. 갈등사이에서 결국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울었지만 책을 읽기도 전부터 마치 암흑 속에 발을 담그는 것처럼 몹시 불안한 전율이 일었다. 그 느낌이 미스테리한 음악의 전조처럼 음산했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난 뒤에는 그보다 더 지독한 분노와 슬픔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 무거운 내용과 잔인한 살인, 과연 나는 얼마만에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무척 걱정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긴 순간 그런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날은 종일 굵은 빗줄기가 바람을 따라 흩날리고 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띄엄 띄엄 정적을 깨는 그런 날이었다. 이런 날에 읽는 책은 무엇보다 '알렉스'와 같이 음침하다면 더없이 머리속의 상상을 자극하게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빗소리는 마치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스릴러 영화들이 그렇듯 살인이나 사건이 일어나기전, 긴장감을 고조시켜 주었으며 책 속에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더해졌다. 첫 장을 펼친 순간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책에만 집중하게 되었으며 중간에 책을 덮을수도 없었고 마지막장까지 그악스럽게 책을 붙들고 있는 내 자신과 마주해야했다.

 

이 책에는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비롯해 145cm의 최단신 형사반장 카미유, 그리고 훤칠한 미남에 부자인 형사 루이와 구질구질한 구두쇠 형사 아르망까지 극적 재미를 더한 비범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때론 웃음을 주기도 하고 칼같은 지성으로 허를 찌르며 사건을 하나 하나 해결하는 부분이 감탄을 자아낼 정도는 아니지만 카미유 반장의 감성적 접근법이 마음에 들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지만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는게 그런 이유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다소 무겁고 슬프다는 걸 생각하면 자극적인 재미만을 쫓을 수 없었다는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도 가족이 등장한다. 앞서 읽었던 'Dinner'만큼이나 비틀리고 일그러진 모습의 가족구성원들이 진실을 외면한 채 서로 상처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사회에 어떠한 관계보다 가족이 갖는 폐쇄성과 보수성은 매우 치명적이라고 봐야한다. 책장을 덮으며 또 한 번 가족을 생각하게 됐다. 세상에 태어나 선택의 결정권도 없이 가장 먼저 맺게 되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그늘을 이제 서서히 거두고 변화하지 않으면,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지금의 현실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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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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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머리를 맞대고 저녁을 먹어본게 언제였던가? 난 이 책을 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애썼다. 가장 가깝게는 올해 설날이었던가. 함께 살지 않기 때문에 그 풍경은 너무도 먼 과거가 됐다. 비단 나라는 개인의 극단적인 예는 아닐지라도 아이들이 커갈수록 한자리에서 가족들 얼굴을 보며 밥먹는 기회가 점점 줄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 보통의 월급쟁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액수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예약한 두 가족이 있다. 형과 동생 그리고 두 여자, 이 두 부부 사이에 있는 서로의 자식들로 인해 모인 두 가족은 힘든 결정을 앞두고 지루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잊혀진 줄 알았던 오래된 과거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 사건의 발단이 무엇이었는가를 짚어간다. 이 시대 가족의 의미란 무엇인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은 어디까지 도덕적 잣대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를 심도깊게 들여다보고 있다.

 

자식들의 우발적인 사고로 인해 모인 두 가족이지만 저녁식사내내 결정적인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한채 이야기는 겉돌고 긴 식사자리는 껄끄러워진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한마디로 자식들의 인생이 결정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 하나 고르기조차 신중할 수 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소설을 읽는 입장에서는 너무도 지루했다. 긴호흡으로 읽어야하는 소설이었지만 특별한 긴장감이 없는 탓인지 중간 중간 흐름이 끊겼던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섬세한 심리묘사와 다루기힘든 부모자식간의 특별한 감정선을 매우 잘 살린 것, 그리고 도덕적 딜레마라는 민감한 주제를 잘 풀어간 것 같았다. 지금 한 아이의 부모가 이 책을 읽는다면 파울과 같은 감정이입으로 공감하고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난 이 책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 파울과 아들 미헬의 관계를 보며 어딘지 모르게 일그러진 느낌을 받았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 영화 '마더'가 떠올랐다. 이 영화에도 정신지체로 나오는 아들과 그 아들을 향한 엄마의 집요한 모성애가 둘의 관계를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는데 부모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디까지 사랑이라고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더랬다. 부모가 알지 못하는 자식, 자식이 알지 못하는 부모. 지금의 가족들은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으면서도 애써 가족이라는 굴레로 인해 타인으로 부터 사회로부터 애써 서로를 끌어안으려 하지 않았나 싶었다. 누구나 자식이었고 부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언젠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한 번쯤 되짚어보게 될 것이고 깊이 사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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