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꽃
이인화 지음 / 동방미디어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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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긴 주절거림을 썼다가 또 지우고, 또 지운다. 이 소설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하여야 할까. 수많은 이야기가 내 속에서 앞다투어 머리를 내밀지만 문자로 옮겨 놓으면 쓸모없는 말같다.

중편 《하늘꽃》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떨림이었다. 가느다란 떨림. 전율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으면 너무 기계적이고 자극적으로 느껴질만큼 그 가느다란 떨림은 예민한 것이었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소설의 말미에 보이던 꽃잎의 가느다란 하늘거림. 그것이 내가 느낀 떨림이었다.

역사와 상상의 절묘한 조화, 라는 둔탁한 말로 설명을 하기에는 이 소설만의 섬세함에 대한 위해가 될 것 같다.

이 소설은 섬세하고 예민하다.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도 하르르 떨리는 꽃잎처럼, 그런 섬세하고 예민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물론 섬세하고 예민하다고 해서 감상주의로 빠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감상주의로 빠지기에는 '이인화'라는 작가가 너무 지성적이다. 이 소설의 예민함과 섬세함은 튼튼한 구성력 덕분에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이인화 특유의 구성능력은 그의 탐미적 문체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뒤로 이어지는 소설들, 고려의 팔만대장경 조판을 배경으로 하는 《려인》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이었던 《시인의 별》현대와 과거가 교차되는 《초원을 걷는 남자》와 《말입술꽃》.

아직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늘 조심스럽다. 앞으로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이 얼마든지 더 나올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나온 이인화 소설중 가장 절창이라고.

책을 덮으며 내가 느낀것은 한없는 떨림이었고, 내가 중얼거린 말은 '아름답다' 한마디였다. 2002년 하반기 최고의 소설.

「삼생의 인연이 지중하여 지난날 아름다운 그대를 만나 카란에서 언약을 맺고 달 아래 인연을 이루었습니다. 젊은 날의 따뜻한 봄빛, 꿈속에 시들어보리고 오늘 바람 맞으며 그대를 영결하니 이 몸의 한스러움 끝없기만 합니다. 일찍이 고운 언약 이루지 못하고 일평생 그대를 마음에 품어 파계(破戒)하는 큰 죄를 짓고 괴로운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아름다운 그대는 진정 불이(不二)의 하얀 꽃을 얻으셨나요? 어리석은 이 몸은 지난날이 그리워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세세생생 이 진세를 여의지 못하고 삼계의 아득한 길을 외로운 혼으로 걸어갑니다.」
이인화, 《하늘꽃》, 동방미디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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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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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치를 내걸고 쓰는 소설은 재미의 측면에서 일부분 포기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존재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어떠한 '사상'을 이마에 달고 있는 소설을 손에 드는 것은 조금 걱정스럽다. '재미'를 소설의 최고 가치로 치는 나로서는.

이 책은 '페미니즘' 이라는 사상으로 나를 압도하더니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질식시킬 듯 덤벼왔다. 과연 읽을 수 있을까.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아 다 읽어 내렸다. 과연, 재미있는 소설이란 분량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사실은 길수록 좋다.)

소설은, "우리는 한 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체육관이라는 비상식적 공간을 침실로 써야 하는 상황, 감시자의 존재, 아주머니, 아내, 시녀, 하녀, 사령관, 수호자 등등의 평범하고 일반적인 단어에 씌워진 꺽쇠 표시로 독자는 그 평범한 보통명사가 더 이상은 평범하지 않은 고유명사, 다시 말해 어떤 계급의 호칭이 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럼, 그 평범한 단어가 계급의 호칭이 되는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은 책의 2/3에 해당하는 전반부의 지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특별한 사건이 터지지 않아도, 억압된 상황하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는 여주인공의 생활만으로도 박진감 넘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상황의 특수성을 이용한 긴장감이 아니라면, 소설의 전반부는 썩 잘 짜인 편은 아니다. 여주인공의 독백으로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는데, 화자는 끝도없이 현재의 이야기에서 과거로, 그 과거에서 다시 과거로,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현재에서 상상으로 워프를 해가며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야기의 줄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여기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로 볼 때,
1. 여주인공 "오브프레드"의 어린 시절과 그녀의 엄마에 대한 추억.
2. 모이라와 여주인공 "오브프레드"의 대학시절
3. "오브프레드"의 졸업이후 짧은 직장생활과 남편 루크와의 연애, 결혼생활
4. "오브프레드"가 루크와 딸을 데리고 도망을 치던 시기
5. <라헬과 레아 재교육 센터(레드 센터)>에서의 추억
6. 현 <사령관>의 집에서의 생활-현재 진행형-
이 정도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주인공의 서술은 6-5-1-6-2-3-5-6-4…… 이런 식으로 일관성 없이 얽히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중심 줄기는 6번의 현재 생활이지만 이 속으로 너무 많은 회상장면이 일관성 없이 개입되어 어떤 부분, 악재로 작용한다. 호기심과 긴장감을 유발, 유지시킨다는 측면에서는 꽤나 성공적이지만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들고, 현재의 상황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는 단면과, 조금은 명쾌하게 설명이 되어 이야기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독자를 꽤나 조바심나게 만드는 단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봤을 때, 소설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이 소설은 훌륭하다. 숨길 것은 끝까지 숨겨 마지막 반전을 일으키고 있으며, 복선으로 깔아두었던 몇가지 요소들을 마지막에 그러모아 정리하는 방식도 꽤 깔끔한 편이다. 뭐, 마지막까지도 남편 루크의 생사와 딸의 행방은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읽고 있으면 꽤나 우울해지는 소설이다. 외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남자 독자들이 제대로 따라오고 있을까를 걱정하지만. 남성의 입장에서도 과히 기분 좋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겠지만 여자의 입장에서는 읽는 내내 우울해지기만 하는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계층의 여인들중 행복한 여인은 누구도 없고, 심지어 남자들도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의 이야기이다.

헐리우드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디스토피아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지막의 해피엔딩을 거의 본능적으로 기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네오)의 각성을 보고, 여주인공과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그런 해피엔딩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끝까지 그럴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소설가들이 으레 빠지게 되는 "그들은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는 동화의 결말을 보여주는 대신 약 200년 후의 상황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덧붙이는 것으로

이 소설의 화자인 여주인공의 행복에 대한 확답은 주지 않으나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는 등불을 밝혀준다. 철저하게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탐구해가는 화자의 화법과 작가의 서술태도로 미루어보아 마지막의 에필로그를 덧붙여 준 것에도 큰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꽤나 오랫동안 우울해 했을 것 같은 소설이다.

신이 인간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었다. 그것을 부정하는 사회는 어떤 조건이 갖추어진다한들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것이, 자궁과 아이를 담보로 잡힌 여자의 독백으로 그려지는 사회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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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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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셋째 딸에 대해 만들어 놓은 통념조차 일종의 위안 장치거나 거짓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셋째 딸은 인물 좋고, 재주 많고, 알뜰해서 선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그 오래된 거짓말에 내포된 진실이 보였다. 부모들은 셋째 딸의 출생을 반기지 않았던 미안함을 씻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하고, 셋째 딸은 가족 속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사랑 받기 위해 피나게 재주를 연마하고 착하게 행동하고 부지런한 아이로 자라나는 그 오래된 거짓말의 고리 말이다.」

잘 모르겠다. 원래 말이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인 법, 나는 셋째 딸이지만 나의 마음 속에 '가족 속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사랑 받기 위해 피나게 재주를 연마하고 착하게 행동하고 부지런한 아이로 자라나'려는 노력이 있었는지는, 진심으로, 잘 모르겠다.  나는 딸 넷 중, 성적이 가장 나았지만 그것이 노력의 결과였느냐고 묻는다면 아니, 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구절이 참, 참…….

가끔. 그런 경험이 있었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네 방구석을 맴돌며 울컥울컥 울던 때, 또 하나의 냉정한 나는 "너 왜 그러니."하고 나를 관찰하고 있는 듯한 기분. 도대체 외로울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외로워외로워 중얼대며 짐승처럼 울먹일 때, 또 하나의 말간 정신을 가진 내가 나를 보고있는 기분. 미친 거 아닐까, 이미 미쳐버린 건 아닐까. 싶던 순간순간들. 왜 그랬을까. 싶은.

그런 순간순간들을 조근조근 간지러운 손가락으로 위무하는 소설이었다. 위로를 받은 건지 상처를 헤집기만 한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어쩌면 없던 상처를 만든 소설인지도 모르고 잊고 지내면 편했을(또, 잊고 지내도 아무렇지도 않은 상처를) 상처를 일없이 헤집은 소설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읽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이 책을 30대 중반의 결혼하지 않은 선배에게 보내주었고,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는 큰언니에게도 보내 주었다. 이 책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필요한' 책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교과서가 아닌 다음에야 필요하고 필수적인 소설이란, 얼마나 위대한 소설인가.

소설이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메타포가 되어준다. 타인으로 인해 내가 상처입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겠으나 최소한 내가 입는 상처와 동일한 상처를 타인에게 주지는 말아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아니다. 인간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결국,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 나아가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로, 나는 나를 얼마나 들여다보았고, 얼마나 이해하였을까. 그것이, 이 지긋지긋하도록 통속적인 결말을 가진 소설의 최대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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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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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을 어떤 보증서로 여긴다는 발상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각자의 문학상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를 것이고 그 추구하는 바에 어울리는 작품에만 상을 줄 터이니 그 문학상이 추구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란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수식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문학상 수상 작품집이나 수상작가의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기 마련인 것을 보면 문학상이란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할만한 장점들을 두루 가지고 있는 작품들에게 주어지는 모양이다. 물론, "문학상 수상 작품(또는 작가)"라는 말이 판매고를 높여준다는 것도 인정한다.

이 책은 2002년 동인문학상(조선일보주관)을 수상하기 전에 이미 2001년 제1회 황순원 문학상(중앙일보주관-박완서 《그리움에 대하여》수상)의 후보작품에 올랐던 작품이다. 여기저기 문학상에 많이 불려 다니는 걸 보면 좋은 소설이긴 한가보다. ^^

성석제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가치는 비 일상성에 있다. 이 책의 언어는 생동감 있다. 재치있고, 유머러스 하며, 한편으로 비애감도 깔려있다. 화려한 수사법을 쓰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맛깔스러운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성석제의 재능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언어의 향연, 잔치, 축제다.

향연이든 잔치든 축제든, 일상 생활과는 유리되어있다. 소설의 인물들도 일상과는 유리되어있는 비범한 인물들이다. 황만근, 천하제일 남가이, 쾌활냇가의 증경회장 정만기, 천애윤락의 동환 등등, 이들은 모두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이들의 비범함이 성석제의 언어의 축제와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인물이든 문장이든 어느 한쪽이라도 리얼리즘 쪽으로 움직였다면 이 소설집은 실패할 뻔했다.

잔치라는 것은 늘, 즐길 때는 즐겁고 신나는 법이요, 돌아서면 곧 잊고 본래의 생업에 매진해야 하는 인생의 짧은 이벤트와 같은 것, 생업에 매진하는 동안에도 잠시잠깐 생각하며, "그땐 즐거웠지."라고 씨익 웃을 수 있는 휴식이 되어주는 것- 이 소설의 가치도 그러한 데서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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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양장본
김중미 지음, 송진헌 그림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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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으면서도 내가 느낀 것은 작위성이었다. 본디, 신파랑 가장 만만하게 잘 팔리는 재료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신파를 만들기 위한 작위성이 지나치다. 집을 나간 엄마, 일하러 가서 자식들을 버린 아버지, 부두 하역일 중에 죽어버린 아버지, 암으로 죽은 어머니, 본드를 부는 형, 점심도 먹지 못하는 아이들,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아들, 피자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가난한 청년……. IMF로 망가진 서민의 생활을 보여주겠다는 야심찬 기획은 좋은데 이런 불행의 나열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기획'에 의해 쓰여진 소설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을 처음 쓰게 된 동기야 어쨌건, 소설은 잘 쓰여지고 재미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이 소설은 별로 재미도 없고 잘 쓰여지지도 않았다.

이야기 구조는 엉성하고, 각각의 인물과 그 인물에 따른 에피소드는 일종의 옴니버스 소설을 모아놓은 것처럼 따로 놀고 있으며, 아이들을 책임지게 되는 영호의 행동에는 타당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스물 여남은 살의 청년이 문제아 남자아이를 셋이나 거둔다,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터인데 작가는 '감동'을 창출하기에 골몰한 나머지 그런 억지는 그냥 휘-익- 넘어가고 만다.

문장은 설익었다. 어설픈 수기의 문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이 짧은 분량의 소설 안에서 숙희, 숙자, 동준, 동수, 명환, 영호, 명희 그리고 숙희 숙자의 어머니 이야기까지 모두 담으려 하다보니 소설은 중심 줄기를 잃고 더욱 산만해지게 된다. 문체도 산만하고 이야기는 식상한데 구성까지 산만하면 도대체 이 소설에서 무엇을 얻어야 한단 말인가?

소설이 줄 수 있는 감동은 억지스런 신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참한 사람만이 고귀해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비참해지는 길로만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청준이 2002년 동인문학상 제 3차 독회에서 한 이야기. 조선일보 02.1.7일자 발췌)이 이야기를 작가에게 꼭 해주고 싶다. 좀 더 묵힌 다음에 오래오래 고민해서 글을 쓰시라고. (그런데 괭이부리말 아이들 2까지 나왔다고 하더군. 차암...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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