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어떤 기치를 내걸고 쓰는 소설은 재미의 측면에서 일부분 포기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존재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어떠한 '사상'을 이마에 달고 있는 소설을 손에 드는 것은 조금 걱정스럽다. '재미'를 소설의 최고 가치로 치는 나로서는.

이 책은 '페미니즘' 이라는 사상으로 나를 압도하더니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질식시킬 듯 덤벼왔다. 과연 읽을 수 있을까.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아 다 읽어 내렸다. 과연, 재미있는 소설이란 분량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사실은 길수록 좋다.)

소설은, "우리는 한 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체육관이라는 비상식적 공간을 침실로 써야 하는 상황, 감시자의 존재, 아주머니, 아내, 시녀, 하녀, 사령관, 수호자 등등의 평범하고 일반적인 단어에 씌워진 꺽쇠 표시로 독자는 그 평범한 보통명사가 더 이상은 평범하지 않은 고유명사, 다시 말해 어떤 계급의 호칭이 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럼, 그 평범한 단어가 계급의 호칭이 되는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은 책의 2/3에 해당하는 전반부의 지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특별한 사건이 터지지 않아도, 억압된 상황하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는 여주인공의 생활만으로도 박진감 넘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상황의 특수성을 이용한 긴장감이 아니라면, 소설의 전반부는 썩 잘 짜인 편은 아니다. 여주인공의 독백으로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는데, 화자는 끝도없이 현재의 이야기에서 과거로, 그 과거에서 다시 과거로,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현재에서 상상으로 워프를 해가며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야기의 줄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여기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로 볼 때,
1. 여주인공 "오브프레드"의 어린 시절과 그녀의 엄마에 대한 추억.
2. 모이라와 여주인공 "오브프레드"의 대학시절
3. "오브프레드"의 졸업이후 짧은 직장생활과 남편 루크와의 연애, 결혼생활
4. "오브프레드"가 루크와 딸을 데리고 도망을 치던 시기
5. <라헬과 레아 재교육 센터(레드 센터)>에서의 추억
6. 현 <사령관>의 집에서의 생활-현재 진행형-
이 정도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주인공의 서술은 6-5-1-6-2-3-5-6-4…… 이런 식으로 일관성 없이 얽히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중심 줄기는 6번의 현재 생활이지만 이 속으로 너무 많은 회상장면이 일관성 없이 개입되어 어떤 부분, 악재로 작용한다. 호기심과 긴장감을 유발, 유지시킨다는 측면에서는 꽤나 성공적이지만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들고, 현재의 상황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는 단면과, 조금은 명쾌하게 설명이 되어 이야기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독자를 꽤나 조바심나게 만드는 단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친절한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봤을 때, 소설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이 소설은 훌륭하다. 숨길 것은 끝까지 숨겨 마지막 반전을 일으키고 있으며, 복선으로 깔아두었던 몇가지 요소들을 마지막에 그러모아 정리하는 방식도 꽤 깔끔한 편이다. 뭐, 마지막까지도 남편 루크의 생사와 딸의 행방은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읽고 있으면 꽤나 우울해지는 소설이다. 외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남자 독자들이 제대로 따라오고 있을까를 걱정하지만. 남성의 입장에서도 과히 기분 좋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겠지만 여자의 입장에서는 읽는 내내 우울해지기만 하는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계층의 여인들중 행복한 여인은 누구도 없고, 심지어 남자들도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의 이야기이다.

헐리우드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디스토피아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지막의 해피엔딩을 거의 본능적으로 기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네오)의 각성을 보고, 여주인공과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그런 해피엔딩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끝까지 그럴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소설가들이 으레 빠지게 되는 "그들은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는 동화의 결말을 보여주는 대신 약 200년 후의 상황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덧붙이는 것으로

이 소설의 화자인 여주인공의 행복에 대한 확답은 주지 않으나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는 등불을 밝혀준다. 철저하게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탐구해가는 화자의 화법과 작가의 서술태도로 미루어보아 마지막의 에필로그를 덧붙여 준 것에도 큰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꽤나 오랫동안 우울해 했을 것 같은 소설이다.

신이 인간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었다. 그것을 부정하는 사회는 어떤 조건이 갖추어진다한들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것이, 자궁과 아이를 담보로 잡힌 여자의 독백으로 그려지는 사회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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