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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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인엄마, 우리 아파트에 귀신있다는 거 알아?" 
"어머, 진짜요? 진짜진짜진짜? 어떤 귀신인데요? 어디서 나온대요?"
"아이고... 다인엄마도 참. 애들처럼. 귀신 이야기 좋아해?" 

뭐... 어른은 귀신이야기 좋아하면 안되나. 내가 이사온지 3개월이 좀 넘은 이 아파트에 오래 살았던 그 분은 귀신 이야기의 서두만 꺼내놓고 뒷말을 흐렸다. 덕분에 밤마다 좀 으스스하긴 하다. 어차피 밤엔 나다닐 일도 없지만.  

난 귀신은 싫어하는데, 정확히는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귀신 이야기는 좋아한다. 저승으로 가거나 새로운 생을 받아 태어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귀신의 이야기는 그만큼 절절한 사연을 가진 것이라 정확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 사연과 이야기이다. 나는 그래서 사연없는 귀신은 무서워하는 것만큼이나 싫어라한다. 그 사연이 모두에게 잊혀진 뒤에도 남아서 떠도는 귀신은 구질구질해 보인다.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만한 영혼의 사연이란 미련이 되었건 원한이 되었건 비범을 넘어선 임팩트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귀신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일테다. 단순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원한과 미련과는 도저히 대적이 되지 않는 강도니까. 죽음으로도 끝내지 못한 원한 또는 사랑이라니. 오오오오.  

이 책에 실린 아홉편의 이야기는 한편을 제외하곤 모두 귀신이야기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난 미야베 미유키를 읽다보면 종종 쓸쓸하면서도 따스한 무언가를 느낀다. 미야베 미유키는 삶과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인정을 잃지는 않는데, 그 인정이라는 것이 소설, 나아가 사회 전체를 따뜻하게 데울 무언가는 절대 되어주지 않고, 이 차갑고 쓸쓸한 세상의 아주 작은 위로가 되어주는 정도다. 오히려 그 인정이라는 것, 인간성이라는 것이 존재함으로 해서 세상의 쓸쓸함이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랄까. 

미야베 미유키의 그런 분위기는 귀신이야기에서도 여전히 이어진다. 일본의 에도시대, 작은 상가와 그 상가의 고용일꾼들의 이야기인 이 책에서도 미미여사 특유의 냉정한 세계관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그 속의 따스함도 여전하다. 아. 그녀 소설의 따스함은 너무 미약한데도 너무 따뜻해서 참 눈물겹다.  

그리고, 여전히, 재미있다. 

재능이라는 것도 유전되는 것일까. 그녀의 아버지는 일본의 굉장히 유명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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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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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에서 교고쿠도의 장광설을 읽다가, 이건 데자뷰도 아닌 것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뜬금없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한 구절이 있었다.  

"언제나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밤을 꼬박 새고 남들처럼 살겠다고 다짐한다면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처음엔 일본소설쪽 쳅터를 뒤졌고(일본소설을 읽다 생각난 구절이니 당연히.) 하루키를 뒤지다가 피츠제럴드와 레이먼드 챈들러를 거쳐 드디어 찾아냈다. 김연수였다. 헐. 도대체 김연수와 나츠히코는 무슨 연관을 가지는 걸까. -_-;;; 신기하여라 대뇌피질이여.

물론 저 위의 구절이 정확하게 떠올랐던 건 아니고, 저와 비슷한 구절이 있었는데, 하며 뒤진거였다. 저 구절은 이 소설의 정확히 33페이지 중간쯤에 등장해주신다. 덕분에 이 재미있는 소설을 다시 읽었다. 얌얌. 다시 읽어도 역시나 재미있다. 역시 김연수, 기가 막힌다.  

<굳빠이 이상>은 나름 김연수의 출세작이라 할 만한데, 이 소설 덕에 김연수는 적어도 나와 내 주변의 몇몇에게 좋고 잘 쓴 소설이지만 약간 현학적이고 어려운 글이라고 낙인찍힌지 오래였다. 이 소설은 그 낙인을 휘익 날려줬다. 사실 실제로 읽어보면 김연수의 소설은 분명 지적 유희를 즐기고 인문학적 지식의 폭이 넓게 펼처져 있긴 하지만, 읽기가 어렵지는 않다. 그의 소설은 무척 재미있다. 선입관이란 무섭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진우는, <우부메의 여름>에서의 교고쿠도와는 다르지만 역시나 장광설이라는 면에서는 일치하는, 굉장한 변설가다. 깐족깐족 어찌나 얄미운지 한대 콕 쥐어박았으면 딱 좋겠다 싶은 점이 전혀 다르지만.  

그리고 세상엔 의외로 진우같은 놈이 많은가보다. 

내 친구 K양은 고전적이게도 집안이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이건 선하고는 또 달랐다. 선에도 집안 어른들이 개입하기는 하지만(주로 엄마) 결정권은 당사자에게 있다(... 음. 아닌가.) 대부분의 선은 일단 몇가지 조건에 의해 선발된 두 남녀가 만나 두 남녀의 의견이 일치되고 나면 양가의 부모에게 '형식적인' 추후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친다.  

그러나 내 친구 K양은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정해준 남자를 만나러 나갔다. 이건 부모가 결정을 본 다음 자녀에게 지시(통보도 아니고.)를 내린 거니까 선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좀 심드렁하게 거의 끝이 보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연애중이었던 K양, 펄쩍펄쩍뛰며 내가 사네 못사네 아빠땜에 죽네 사네 (그렇다, 선은 주로 엄마가 개입하고 정혼은 주로 아빠가 개입한다. 보통 태내 혼사는 아부지 친구의 딸또는 아들하고 한다.) 나가서 보기 좋게 걷어차주고 올테니 너희는 내가 나가있는 동안 30분마다 한번씩 전화를 하라는 둥 어쩌는 둥 하고는 나가서는, 그날로 홀딱 반해서(이건 반전인가 아닌가 -_-;;;) 그 남자를 만난 그 주 주말에 남자친구를 정리해 버리고는(주말까지 기다린것도 그 남자와 만날 시간이 주말밖에 없었기 때문이고...) 5-6개월 불타는 연애하더니 휙 결혼해 버렸다. 내 친구들 중엔 가장 진부하고도 가장 어이없는 결혼이었으나 가장 잘 어울리고 가장 행복한 결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아는 그녀 결혼의 뒷이야기가 또 하나 있으니,  

K양의 남편인 L씨는 친구가 무척 많은 사람인데, P는 L의 가장 친한 친구 그룹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었다. 앞서 말한바, 집안의 정혼(-_-;;;)이 이루어 진 상태의 여자친구였으니 P에게 K는 가장 친한 친구의 예비 신부였음에도 불구하고, K에 대한 P의 추근거림은 꽤 집요한데가 있었다. K는 끝까지 P에게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 척 했고, P도 끝까지 K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실제로 K가 L씨를 만나기 한참 한참 한참 전에 K와 P는 함께 술을 마신적이 있었다고 했다. (아... 정말 세상은 좁고도 좁은 것이다.) P는 K의 친구의 남자친구의 친구여서, 각자 친구를 한명씩 끌고와서 술을 먹는 2:2 술자리가 한번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소개팅이라고 할수도 있었겠지만, 이름 붙기가 소개팅은 아니었고, P는 어땠는지 몰라도 K는 P도, P의 친구이자 친구의 남친이었던 그 사람도 다 별로여서 두번다시 만날 염도 안냈다고 했다. P쪽에서도 아마 K가 별로였으니 그 뒤로 연락도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대학 1-2학년때의 일이니 기억났다는 게 어쩌면 더 기적이었을지도.  

K도 처음부터 P를 기억하지는 못했고, 몇번 만나다보니 기억이 나더란다. 그 P가, 친구의 아내가 될 K에게 L씨 몰래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L씨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던 K는 기겁을 했다. 처음엔 모르고 두어번 전화를 받았고, 그 뒤로는 P의 번호가 뜨는 전화는 받지를 않았다. 그랬더니 P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고, 새벽이며  한밤중에, K가 L과 있음을 뻔히 아는 시간에, 또는 P가 L씨와 함께있으면서도 전화를 해 K를 기절시켰다. 처음부터 L씨에게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L과 P의 사이가 유별나게 돈독함을 알고 있었던 K는 이러다 말겠지, 내가 반응안하면 그만두겠지, 하며 참고 있다가 더이상 참을수 없는지경, 어느 한계점을 넘어섰을때는 이미 L씨에게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친 다음이었다. 지금과서 L씨에게 말을 해 봐야, 그동안은 왜 말을 하지 않았냐는 말을 듣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뭐 이러저러 날을 잡고, K가 전화기 분실을 계기로 한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전화기를 만들지 않고... 이러면서 그 상황은 대충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지금 K와 L씨는 애 둘 낳고 잘 산다. P는 여전히 L씨의 친구이고. L씨는 아직도 그 상황은 모르는 것 같고.  

세상엔,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정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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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열기는 이 나라에서도 비켜가지 않았다. 전 세계의 축제가 맞긴 맞나보다. 참고로, 이 나라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런데도 쇼핑몰마다 월드컵 관련 조형물들을 갖다놓고 플랜카드 걸리고 월드컵 기념 세일을 한다. 박지성 얼굴을 한국만큼이나 자주본다. 진정 축구를 즐겨주시는 민족이신가보다. ㅎㅎㅎ 

이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한국 관련 채널은 YTN과 KBS월드가 전부다. 아리랑 TV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영어방송이고. 월드컵 기간 내내 YTN에선 하루 종일 월드컵 관련 뉴스를 내보냈는데, 중요한건, 정작 경기장면은 볼수도 없었다는거. 거의 하루 종일 시퍼런 정지화면에 박지성 얼굴만 떠 있었다. 뭐라더라, 방영권 문제로 해외 시청자들에게는 화면을 송출할수가 없다나. SBS 망해라, 맨날맨날 굿했다. 

뭐 그렇다고 경기를 볼수 없는 건 아니고, 이 나라 TV에서도 생중계를 해 준다. 차붐의 해설이 없이 봐야하는 한국 경기는 좀 심심했지만. 그게 어디냐고.  

월드컵 기간이 되기 직전에 공지영의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 구절이 가슴에 콱, 와서 박혔다.  


 

 

그때 한 가지 충격적인 경험이 제가 거기서 월드컵을 봤잖아요. 인터넷으로 붉은악마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기사도 봤고요.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동영상을 잘 받지도 못할 때고, 그렇게 활발하지가 않을 때였는데, 어느 날 경기장을 클릭하는데 새빨간게,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약간 섬뜩할 정도로. 그래서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이 굉장한 차이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p. 322-323 

 

그래서 은근히 기대했었던 것 같다. 나도 공지영처럼 느끼게 될까. 2002년에 나는, 공지영을 섬뜩하게 했던 그 새빨강에 점 하나를 보태고 있던 참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즐거이 동참하는 축제이려니 생각했었다. 그것이 섬뜩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니 왜? 싶었다. 1년 내내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매년 그러자는 것도 아니고, 4년에 한번 미친듯한 이벤트쯤 있어도 좋지 않은가 말이다. 이건 일종의 생의 리듬, 생의 마디 뭐 그런거 아닌가. 이런 이벤트들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나.  

그런 내게 깨달음을 던진 건 다인과 나의 영어 선생님인 아니타다. 렛슨중에 문득, 아니타가, 자기는 한국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다. 도대체 뭐가? 했더니. 그 애국심이 부럽단다. 그러면서 아니타가 말한 것이 붉은 악마였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대한민국을 연호한다는 거, 태극전사라는 이름과 붉은 악마를, 그녀는 한국어 그대로 알고 있었다. 레드 데블이 아니라. 붉은 악마는 일종의 고유명사화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국인들은 한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자랑스러워하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그렇게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애국심이 드높은 민족이란다.  

그러니까... 붉은 악마가. 애국심의 표징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렇게 보면, 외부에서 보는 붉은 악마는 얼마나 섬뜩한 존재일까. 우리는 그저 축제였는데. 미국인 수만명이 타임 스퀘어에 군집해 일제히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성조기를 두르고서 USA를 연호하는 모습을 본다면, 헉...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저... 너... 너희도 하면 되지 않니... 였다. 부러우면 해봐... 첨엔 누가 같이 하자고 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란다, 저거. 처음엔 그냥 몇천명 정도가 광화문에 모인게 시작이었어... 모여보니 재미있어서 다들 모인거지 딱히 한국을 사랑해서 모인거 아니야... 

그러니 묻는다. 그럼 너는 한국을 사랑하지 않니? 네 조국이 자랑스럽지 않아? 한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잖니?

아니... 자랑스럽지. 사랑하지. 하지만 그것하고 이건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아, 나의 짧은 영어로는 설명이 안되고. 더 심각한 건, 한국어로도 설명이 안된다는 것. 내가 머뭇머뭇하고 있는 동안 그녀가 줄줄줄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누구도 저렇게 하지 않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싫어하거든. 국적을 바꿀수가 없어서 그렇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야.  

아아... 이 기묘한 이질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그녀와의 대화 이후에 본 붉은물결은, 나에게, 아직은 설명할수가 없지만, 도저히 어떤 말로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꽤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공지영과 같은 그런 섬뜩함과는 전혀 다르고, 그냥 뭐랄까, 아아, 저 사랑스러운 민족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는 그런 느낌도 있고.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고. 

그러니까... 흠. 이건 애국심인가. -_-;;; 

PS. 이번 월드컵에서 이동국이 2002년의 황선홍과 같은 부활을 해 주기 바랬는데. 16강도 아니고 8강도 아니고 오직 하나의 소망은 그것이었건만... 아아 동국아. ㅠ.ㅠ 98년의 그 빛나던 소년은 어디로 가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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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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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언령(言靈)이라는 개념이 있다. 한국식으로 옮기면 "말이 씨된다"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정확하게 합치되는 의미는 아니다. 일본식 언령의 개념은, 일단 말이 사람의 입 밖으로 나오게 되면 말 그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이루려고 한다는 거니까 굳이 표현을 하자면 일종의 주문에 해당 되겠다. 언령이란 그 뱉어진 말이 가지고 있는 의지를 표현한 말이다. 한국어에는 이와 완벽하게 합치되는 단어가 없다.  

사물이 언어를 만들기도 하지만 언어가 무언가를 규정하기도 한다. 한국에 없는 언령이라는 단어는, 한국에는 언령이라는 것이 없고, 한국인은 언령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국어 사전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원념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원념은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은 원념이라는 단어보다 원한이라는 단어를 더욱 즐겨, 폭넓게 사용한다. 원념에 비해 원한은 좀 더 구체성을 가지고 있고 좀 더 개별화된 감정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원한은 그 상대를 가지고 있다. 원한이란 대상이 존재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원념은 국어사전에서 "원한을 품은 생각이나 마음"으로 풀이한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_- 나는 원한이라는 개념은 이해하지만 원념이라는 개념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어렴풋이 이런 것이려니 짐작할 뿐이다.  

이 책의 우부메는 원념이다.  

"우부메라는 것은 아마 산고로 죽은 사람의 유령이었지?"
"아니, 유령은 아닐세. 이것은 '산고로 죽은 여자의 원념'이라는 개념을 형상화 한 것이야. 뒷집 야마다 씨 딸이든, 귀족의 딸이든, 출산을 하다가 죽은 경우에는 그 원념이 표현되네. 동시에 이것이 나타나면 산고로 죽은 임산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유령이 아니라는 증거로 개인을 저주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원망스럽다는 표정도 아니야."
p. 72

 

그러니까, 우부메는 특정 한 개인의 유령이나 원령이 아니다. 령(영혼)이 아닌 념(생각)이 남아있는 것이다. 영혼, 즉 유령은? 뭐, 승천했나보지.

영혼이 아닌 생각이 남아있다는 개념은 한국인에게도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개념이다. 동해안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의 무덤이다. 신라를,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그의 염원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문무왕의 영혼이 아닌 염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한국인에게 원념이란 그다지 익숙하지가 않다. 언령이라는 단어와 개념이 낯설듯이. 문화적 차이인 걸까, 한국의 전통신앙도 다신의 개념이고 부뚜막에서부터 빗자루 까지도 신격화 할때가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인격화 되는 신의 개념이다. 항상 인간의 모습을 띤 신이라고 해야 하나. 부뚜막은 부뚜막 그 자체로 신이 아니라, 부뚜막에는 조왕신이(그러니까 인간의 형상으로 교체시키고 인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산다는 개념이다. 오래 쓴 빗자루에 사람의 피가 묻으면 그 빗자루가 도깨비로 변신을 한다는 것 또한, 빗자루의 인간화다. 한국인의 모든 사상에는 인간을 바탕에 깔고 있다.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헷갈리는 대목은 여기서부터다. 원념이 남았다, 이건 알겠다. 그래서 그 원념이 원하는 게 뭔데? 원념을 남긴 이유는 무엇이며, 하긴 원념이 원념 스스로 남은 것이지 사람이 원념을 남긴것은 아닐테지만.  

한국의 유령, 원혼령, 귀신의 개념은 상당히 산뜻한데가 있다. 아랑 전설을 생각해보자. 아랑은 자신의 원한을 갚아달라는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나타난다. 원한을 갚고 난 뒤의 아랑은 풀어헤쳤던 머리 싹 걷어올리고 피줄줄 흘렸던 입가 세수 싹싹 단장하여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뿐하게 절 하고 감샴다~ 하고 사라져 버린다. 두번다시 안나타난다. 은원관계가 분명하고 처음과 끝이 확실하다. 이 아랑전설이 일본으로 넘어가면, 

강간당하는 여자가 있는 곳마다 아랑이 나타난다는 말이 된다. 정확하게는 아랑의 원념이. 아니 웬 귀신이 이렇게 오지랍이 넓담. 게다가 더 중요한 건 그 강간을 막지도 못한다. 그냥 원념일 뿐이니까. -_- 그럼 너 왜 왔니? 가 되는 거지. 아하. 그럴 수는 있겠다. 이게 화간인지 강간인지 구분을 못할때 아랑이 나타났으면 강간이고 안나타나면 화간이고... 뭐. 이런 효용이 있는 건가. (아. 말이 점점 산으로...  '') 

예전에 스즈키 코지의 링을 읽었을때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위화감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이건 뭐, 원하는 게 뭐냐고,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줘서 달랠수라도 있지 이건, 뭐, 아무것도 없는 그저 원념이라니 어쩌라고.

누가 그랬지. 공포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사흘에 걸쳐 이 책을 읽으면서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특히 우부메가 나타나 난처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미는 장면은 우와 완전 압권.  

이런, 이해할 수 없다는 개념하고는 별도로,  

소설은 굉장히 잘 짜여져 있고 현학적인 언어유희들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었다. 특히 마지막의 교코쿠도의 설명은 이 작가의 이후 작품을 죄다 읽어보리라는 투지에 불타오르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념이라는 개념은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다. 흠. 

난 종종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낄때가 있는데 말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문학작품에서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러한 위화감이 현해탄 그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일본의 문학에서는 왜 이리 심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유가 뭘까.  

ps. 이 리뷰는 에파타님의 우부메의 여름 리뷰를 읽고 이 책이 급 땡겨 사흘동안 읽은다음 부랴부랴 쓴 것임을 밝혀둡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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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6-26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고쿠도의 장광설에 혹해서 저도 이 시리즈를 망량의 상자와 광골의 꿈까지 읽었는데요, 아시마님, [망량의 상자]는 정말 재미있어요. 우부메의 여름이 뭔가 충격적이고 신선했다면 망량의 상자에서는 익숙해져서 더 푹 빠져들 수 있달까요. 전 세권중에서 [망량의 상자]가 제일 좋았어요. 교고쿠도의 장광설에 언제나 혹하죠.

아시마 2010-06-27 22:5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우부메의 여름은 예전에 사서 쟁여놓은 책이라 읽을 수 있었으나. 망량의 상자는... ㅠ.ㅠ 망량의 상자가 제일 좋았다니 어우어우우...
링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넘 재미있다 미친듯이 읽어놓고, 남들한테는 진짜 잼나더라 읽어봐, 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만서도, 저는 두번다시 읽지 말아야지 결심결심하며 덮었더랬지요. 그런데 망량의 상자 이야기를 하시니... 결심이 마구 흔들리고 있어요. 흑흑...

저절로 2010-06-2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우부메의 여름은 우선 '요괴'라는, 것도 출산하다 죽은 여자요물이라는 것에 콩깍지가 씌기 시작해 책 속 독특한 캐릭터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순식간에 사건속으로 함몰되고 말죠. 문제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을 어떻게 견디어 내느냐에 따라 희노가 갈라지죠.
다락방님의 말씀대로 '망량의 상자'는 그야말로 저자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슈퍼기괴합니다. 딸아이의 밥 내몰라라하고 광골의 꿈까지 읽게한 마력의 책이죠.

거기에 비해 '광골의 꿈'은 뭐랄까. 의학, 특히 정신분석학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짜맞춰 진 듯한 '인공의 냄새'가 나요. 더군다나 교고쿠도의 장광설은 이 책 말미에서 절정(?)을 이뤄요(미칩니다 아주).

님의 리뷰를 보니, 리뷰쓰기가 겁날 정돕니다.(넘 잘쓰신 거 아녜요? ^^)

아시마 2010-06-27 22:44   좋아요 0 | URL
옴마나. 웬 겸손이십니까. ^^ 전 에파타님 리뷰나 페이퍼 맨날 얼마나 감탄하며 읽는데요.

저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이 좋았어요. 저하고 잘 맞았죠. 이건 무슨 궤변도 아닌것이 궤변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그야말로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해할 수 있다면 계속 따라와봐. 이렇게요. 전 이렇게 동서고금의 온갖 이야기들을 죄다 끌어와서 내 맘대로 잘라붙이고 끼어맞춰버리는 캐릭터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ㅎㅎㅎ

그런데요. 교고쿠도의 그 장광설과는 별개로 전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에파타님의 표현대로 "슈퍼기괴"한 그 분위기를 못견디겠어요. 이건 정말 재미하고는 별개의 문제같아요. 전 예전에 스즈키 코지의 링을 읽고서요, 얼마나 기분이 울트라 기괴해졌는지 도저히 그 책과 한방에서 잠을 잘수도 없다는 기분이 들어서, 책을 방 밖에 내 놓고 잠잤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 생각해도, 링이든 이 소설이든 무지무지 재미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으윽, 여전히 기분이 나빠져요. -_-;;;
 

결국 극한 상황의 끝에서는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이나 전망이 없이도 살아야 되는 게 삶이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기도 하다. 희망을 전제하지 않고 어떻게 사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나는 희망 없이도 역사가 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헛된 희망이 인간을 타락시킨다. 인간은 헛된 희망 때문에 무지몽매해진다.  

「사무라이, 예술가 그리고 김훈 - 남재일과의 인터뷰」中   

  

그럼에도, 희망을 버리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금의 희망도 없다는 것이 명확하면 명확할수록 더욱 희망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 인간이니... 인간으로 태어나 희망을 버린다는 건, 인간의 조건을 버리는 것과도 같은 일. 

그러나... 그러나... 버려야만 하는 희망.
순하게, 많이 다치지 않고, 잘 버려 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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