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열기는 이 나라에서도 비켜가지 않았다. 전 세계의 축제가 맞긴 맞나보다. 참고로, 이 나라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런데도 쇼핑몰마다 월드컵 관련 조형물들을 갖다놓고 플랜카드 걸리고 월드컵 기념 세일을 한다. 박지성 얼굴을 한국만큼이나 자주본다. 진정 축구를 즐겨주시는 민족이신가보다. ㅎㅎㅎ 

이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한국 관련 채널은 YTN과 KBS월드가 전부다. 아리랑 TV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영어방송이고. 월드컵 기간 내내 YTN에선 하루 종일 월드컵 관련 뉴스를 내보냈는데, 중요한건, 정작 경기장면은 볼수도 없었다는거. 거의 하루 종일 시퍼런 정지화면에 박지성 얼굴만 떠 있었다. 뭐라더라, 방영권 문제로 해외 시청자들에게는 화면을 송출할수가 없다나. SBS 망해라, 맨날맨날 굿했다. 

뭐 그렇다고 경기를 볼수 없는 건 아니고, 이 나라 TV에서도 생중계를 해 준다. 차붐의 해설이 없이 봐야하는 한국 경기는 좀 심심했지만. 그게 어디냐고.  

월드컵 기간이 되기 직전에 공지영의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 구절이 가슴에 콱, 와서 박혔다.  


 

 

그때 한 가지 충격적인 경험이 제가 거기서 월드컵을 봤잖아요. 인터넷으로 붉은악마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기사도 봤고요.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동영상을 잘 받지도 못할 때고, 그렇게 활발하지가 않을 때였는데, 어느 날 경기장을 클릭하는데 새빨간게,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약간 섬뜩할 정도로. 그래서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이 굉장한 차이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p. 322-323 

 

그래서 은근히 기대했었던 것 같다. 나도 공지영처럼 느끼게 될까. 2002년에 나는, 공지영을 섬뜩하게 했던 그 새빨강에 점 하나를 보태고 있던 참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즐거이 동참하는 축제이려니 생각했었다. 그것이 섬뜩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니 왜? 싶었다. 1년 내내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매년 그러자는 것도 아니고, 4년에 한번 미친듯한 이벤트쯤 있어도 좋지 않은가 말이다. 이건 일종의 생의 리듬, 생의 마디 뭐 그런거 아닌가. 이런 이벤트들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나.  

그런 내게 깨달음을 던진 건 다인과 나의 영어 선생님인 아니타다. 렛슨중에 문득, 아니타가, 자기는 한국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다. 도대체 뭐가? 했더니. 그 애국심이 부럽단다. 그러면서 아니타가 말한 것이 붉은 악마였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대한민국을 연호한다는 거, 태극전사라는 이름과 붉은 악마를, 그녀는 한국어 그대로 알고 있었다. 레드 데블이 아니라. 붉은 악마는 일종의 고유명사화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국인들은 한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자랑스러워하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그렇게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애국심이 드높은 민족이란다.  

그러니까... 붉은 악마가. 애국심의 표징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렇게 보면, 외부에서 보는 붉은 악마는 얼마나 섬뜩한 존재일까. 우리는 그저 축제였는데. 미국인 수만명이 타임 스퀘어에 군집해 일제히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성조기를 두르고서 USA를 연호하는 모습을 본다면, 헉...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저... 너... 너희도 하면 되지 않니... 였다. 부러우면 해봐... 첨엔 누가 같이 하자고 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란다, 저거. 처음엔 그냥 몇천명 정도가 광화문에 모인게 시작이었어... 모여보니 재미있어서 다들 모인거지 딱히 한국을 사랑해서 모인거 아니야... 

그러니 묻는다. 그럼 너는 한국을 사랑하지 않니? 네 조국이 자랑스럽지 않아? 한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잖니?

아니... 자랑스럽지. 사랑하지. 하지만 그것하고 이건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아, 나의 짧은 영어로는 설명이 안되고. 더 심각한 건, 한국어로도 설명이 안된다는 것. 내가 머뭇머뭇하고 있는 동안 그녀가 줄줄줄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누구도 저렇게 하지 않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싫어하거든. 국적을 바꿀수가 없어서 그렇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야.  

아아... 이 기묘한 이질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그녀와의 대화 이후에 본 붉은물결은, 나에게, 아직은 설명할수가 없지만, 도저히 어떤 말로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꽤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공지영과 같은 그런 섬뜩함과는 전혀 다르고, 그냥 뭐랄까, 아아, 저 사랑스러운 민족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는 그런 느낌도 있고.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고. 

그러니까... 흠. 이건 애국심인가. -_-;;; 

PS. 이번 월드컵에서 이동국이 2002년의 황선홍과 같은 부활을 해 주기 바랬는데. 16강도 아니고 8강도 아니고 오직 하나의 소망은 그것이었건만... 아아 동국아. ㅠ.ㅠ 98년의 그 빛나던 소년은 어디로 가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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