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부메의 여름에서 교고쿠도의 장광설을 읽다가, 이건 데자뷰도 아닌 것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뜬금없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한 구절이 있었다.  

"언제나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밤을 꼬박 새고 남들처럼 살겠다고 다짐한다면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처음엔 일본소설쪽 쳅터를 뒤졌고(일본소설을 읽다 생각난 구절이니 당연히.) 하루키를 뒤지다가 피츠제럴드와 레이먼드 챈들러를 거쳐 드디어 찾아냈다. 김연수였다. 헐. 도대체 김연수와 나츠히코는 무슨 연관을 가지는 걸까. -_-;;; 신기하여라 대뇌피질이여.

물론 저 위의 구절이 정확하게 떠올랐던 건 아니고, 저와 비슷한 구절이 있었는데, 하며 뒤진거였다. 저 구절은 이 소설의 정확히 33페이지 중간쯤에 등장해주신다. 덕분에 이 재미있는 소설을 다시 읽었다. 얌얌. 다시 읽어도 역시나 재미있다. 역시 김연수, 기가 막힌다.  

<굳빠이 이상>은 나름 김연수의 출세작이라 할 만한데, 이 소설 덕에 김연수는 적어도 나와 내 주변의 몇몇에게 좋고 잘 쓴 소설이지만 약간 현학적이고 어려운 글이라고 낙인찍힌지 오래였다. 이 소설은 그 낙인을 휘익 날려줬다. 사실 실제로 읽어보면 김연수의 소설은 분명 지적 유희를 즐기고 인문학적 지식의 폭이 넓게 펼처져 있긴 하지만, 읽기가 어렵지는 않다. 그의 소설은 무척 재미있다. 선입관이란 무섭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진우는, <우부메의 여름>에서의 교고쿠도와는 다르지만 역시나 장광설이라는 면에서는 일치하는, 굉장한 변설가다. 깐족깐족 어찌나 얄미운지 한대 콕 쥐어박았으면 딱 좋겠다 싶은 점이 전혀 다르지만.  

그리고 세상엔 의외로 진우같은 놈이 많은가보다. 

내 친구 K양은 고전적이게도 집안이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이건 선하고는 또 달랐다. 선에도 집안 어른들이 개입하기는 하지만(주로 엄마) 결정권은 당사자에게 있다(... 음. 아닌가.) 대부분의 선은 일단 몇가지 조건에 의해 선발된 두 남녀가 만나 두 남녀의 의견이 일치되고 나면 양가의 부모에게 '형식적인' 추후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친다.  

그러나 내 친구 K양은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정해준 남자를 만나러 나갔다. 이건 부모가 결정을 본 다음 자녀에게 지시(통보도 아니고.)를 내린 거니까 선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좀 심드렁하게 거의 끝이 보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연애중이었던 K양, 펄쩍펄쩍뛰며 내가 사네 못사네 아빠땜에 죽네 사네 (그렇다, 선은 주로 엄마가 개입하고 정혼은 주로 아빠가 개입한다. 보통 태내 혼사는 아부지 친구의 딸또는 아들하고 한다.) 나가서 보기 좋게 걷어차주고 올테니 너희는 내가 나가있는 동안 30분마다 한번씩 전화를 하라는 둥 어쩌는 둥 하고는 나가서는, 그날로 홀딱 반해서(이건 반전인가 아닌가 -_-;;;) 그 남자를 만난 그 주 주말에 남자친구를 정리해 버리고는(주말까지 기다린것도 그 남자와 만날 시간이 주말밖에 없었기 때문이고...) 5-6개월 불타는 연애하더니 휙 결혼해 버렸다. 내 친구들 중엔 가장 진부하고도 가장 어이없는 결혼이었으나 가장 잘 어울리고 가장 행복한 결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아는 그녀 결혼의 뒷이야기가 또 하나 있으니,  

K양의 남편인 L씨는 친구가 무척 많은 사람인데, P는 L의 가장 친한 친구 그룹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었다. 앞서 말한바, 집안의 정혼(-_-;;;)이 이루어 진 상태의 여자친구였으니 P에게 K는 가장 친한 친구의 예비 신부였음에도 불구하고, K에 대한 P의 추근거림은 꽤 집요한데가 있었다. K는 끝까지 P에게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 척 했고, P도 끝까지 K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실제로 K가 L씨를 만나기 한참 한참 한참 전에 K와 P는 함께 술을 마신적이 있었다고 했다. (아... 정말 세상은 좁고도 좁은 것이다.) P는 K의 친구의 남자친구의 친구여서, 각자 친구를 한명씩 끌고와서 술을 먹는 2:2 술자리가 한번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소개팅이라고 할수도 있었겠지만, 이름 붙기가 소개팅은 아니었고, P는 어땠는지 몰라도 K는 P도, P의 친구이자 친구의 남친이었던 그 사람도 다 별로여서 두번다시 만날 염도 안냈다고 했다. P쪽에서도 아마 K가 별로였으니 그 뒤로 연락도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대학 1-2학년때의 일이니 기억났다는 게 어쩌면 더 기적이었을지도.  

K도 처음부터 P를 기억하지는 못했고, 몇번 만나다보니 기억이 나더란다. 그 P가, 친구의 아내가 될 K에게 L씨 몰래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L씨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던 K는 기겁을 했다. 처음엔 모르고 두어번 전화를 받았고, 그 뒤로는 P의 번호가 뜨는 전화는 받지를 않았다. 그랬더니 P는 다른 번호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고, 새벽이며  한밤중에, K가 L과 있음을 뻔히 아는 시간에, 또는 P가 L씨와 함께있으면서도 전화를 해 K를 기절시켰다. 처음부터 L씨에게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L과 P의 사이가 유별나게 돈독함을 알고 있었던 K는 이러다 말겠지, 내가 반응안하면 그만두겠지, 하며 참고 있다가 더이상 참을수 없는지경, 어느 한계점을 넘어섰을때는 이미 L씨에게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친 다음이었다. 지금과서 L씨에게 말을 해 봐야, 그동안은 왜 말을 하지 않았냐는 말을 듣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뭐 이러저러 날을 잡고, K가 전화기 분실을 계기로 한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전화기를 만들지 않고... 이러면서 그 상황은 대충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지금 K와 L씨는 애 둘 낳고 잘 산다. P는 여전히 L씨의 친구이고. L씨는 아직도 그 상황은 모르는 것 같고.  

세상엔,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정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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