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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ㅣ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에는 언령(言靈)이라는 개념이 있다. 한국식으로 옮기면 "말이 씨된다"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정확하게 합치되는 의미는 아니다. 일본식 언령의 개념은, 일단 말이 사람의 입 밖으로 나오게 되면 말 그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이루려고 한다는 거니까 굳이 표현을 하자면 일종의 주문에 해당 되겠다. 언령이란 그 뱉어진 말이 가지고 있는 의지를 표현한 말이다. 한국어에는 이와 완벽하게 합치되는 단어가 없다.
사물이 언어를 만들기도 하지만 언어가 무언가를 규정하기도 한다. 한국에 없는 언령이라는 단어는, 한국에는 언령이라는 것이 없고, 한국인은 언령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국어 사전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원념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원념은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은 원념이라는 단어보다 원한이라는 단어를 더욱 즐겨, 폭넓게 사용한다. 원념에 비해 원한은 좀 더 구체성을 가지고 있고 좀 더 개별화된 감정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원한은 그 상대를 가지고 있다. 원한이란 대상이 존재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원념은 국어사전에서 "원한을 품은 생각이나 마음"으로 풀이한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_- 나는 원한이라는 개념은 이해하지만 원념이라는 개념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어렴풋이 이런 것이려니 짐작할 뿐이다.
이 책의 우부메는 원념이다.
"우부메라는 것은 아마 산고로 죽은 사람의 유령이었지?"
"아니, 유령은 아닐세. 이것은 '산고로 죽은 여자의 원념'이라는 개념을 형상화 한 것이야. 뒷집 야마다 씨 딸이든, 귀족의 딸이든, 출산을 하다가 죽은 경우에는 그 원념이 표현되네. 동시에 이것이 나타나면 산고로 죽은 임산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유령이 아니라는 증거로 개인을 저주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원망스럽다는 표정도 아니야."
p. 72
그러니까, 우부메는 특정 한 개인의 유령이나 원령이 아니다. 령(영혼)이 아닌 념(생각)이 남아있는 것이다. 영혼, 즉 유령은? 뭐, 승천했나보지.
영혼이 아닌 생각이 남아있다는 개념은 한국인에게도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개념이다. 동해안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의 무덤이다. 신라를,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그의 염원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문무왕의 영혼이 아닌 염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한국인에게 원념이란 그다지 익숙하지가 않다. 언령이라는 단어와 개념이 낯설듯이. 문화적 차이인 걸까, 한국의 전통신앙도 다신의 개념이고 부뚜막에서부터 빗자루 까지도 신격화 할때가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인격화 되는 신의 개념이다. 항상 인간의 모습을 띤 신이라고 해야 하나. 부뚜막은 부뚜막 그 자체로 신이 아니라, 부뚜막에는 조왕신이(그러니까 인간의 형상으로 교체시키고 인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산다는 개념이다. 오래 쓴 빗자루에 사람의 피가 묻으면 그 빗자루가 도깨비로 변신을 한다는 것 또한, 빗자루의 인간화다. 한국인의 모든 사상에는 인간을 바탕에 깔고 있다.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헷갈리는 대목은 여기서부터다. 원념이 남았다, 이건 알겠다. 그래서 그 원념이 원하는 게 뭔데? 원념을 남긴 이유는 무엇이며, 하긴 원념이 원념 스스로 남은 것이지 사람이 원념을 남긴것은 아닐테지만.
한국의 유령, 원혼령, 귀신의 개념은 상당히 산뜻한데가 있다. 아랑 전설을 생각해보자. 아랑은 자신의 원한을 갚아달라는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나타난다. 원한을 갚고 난 뒤의 아랑은 풀어헤쳤던 머리 싹 걷어올리고 피줄줄 흘렸던 입가 세수 싹싹 단장하여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뿐하게 절 하고 감샴다~ 하고 사라져 버린다. 두번다시 안나타난다. 은원관계가 분명하고 처음과 끝이 확실하다. 이 아랑전설이 일본으로 넘어가면,
강간당하는 여자가 있는 곳마다 아랑이 나타난다는 말이 된다. 정확하게는 아랑의 원념이. 아니 웬 귀신이 이렇게 오지랍이 넓담. 게다가 더 중요한 건 그 강간을 막지도 못한다. 그냥 원념일 뿐이니까. -_- 그럼 너 왜 왔니? 가 되는 거지. 아하. 그럴 수는 있겠다. 이게 화간인지 강간인지 구분을 못할때 아랑이 나타났으면 강간이고 안나타나면 화간이고... 뭐. 이런 효용이 있는 건가. (아. 말이 점점 산으로... '')
예전에 스즈키 코지의 링을 읽었을때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위화감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이건 뭐, 원하는 게 뭐냐고,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줘서 달랠수라도 있지 이건, 뭐, 아무것도 없는 그저 원념이라니 어쩌라고.
누가 그랬지. 공포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사흘에 걸쳐 이 책을 읽으면서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특히 우부메가 나타나 난처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미는 장면은 우와 완전 압권.
이런, 이해할 수 없다는 개념하고는 별도로,
소설은 굉장히 잘 짜여져 있고 현학적인 언어유희들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었다. 특히 마지막의 교코쿠도의 설명은 이 작가의 이후 작품을 죄다 읽어보리라는 투지에 불타오르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념이라는 개념은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다. 흠.
난 종종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낄때가 있는데 말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문학작품에서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러한 위화감이 현해탄 그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일본의 문학에서는 왜 이리 심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유가 뭘까.
ps. 이 리뷰는 에파타님의 우부메의 여름 리뷰를 읽고 이 책이 급 땡겨 사흘동안 읽은다음 부랴부랴 쓴 것임을 밝혀둡니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