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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불안 1
조선희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윈터스쿨』이라는 소설을 읽은 일이 있는데, 그 소설보다는 그 소설 뒤에 붙어 있던 양귀자의 추천의 말 덕분이었다. 정작 소설은 읽다 중간에 접어버려(나중에 다시 다 읽기는 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기억나지 않는데, 양귀자가 했던 말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약속시간을 조금 앞두고, 잠시 시간이나 때울까 하고 잡았는데 결국 약속을 취소하고 끝까지 읽었다." 라던. 양귀자는 내가 몹시 좋아하는 작가중의 하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추천의 글에는 약하다. 박완서가 추천한 신경숙의 『바이올렛』도, 공지영의 『고등어』도, 둘 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박완서'이기 때문에 읽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책 『열정과 불안』역시 박완서이기 때문에 잡았던 소설중의 하나다.
아니다, 우선은 '조선희'라는 한 사람의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이 책으로 끌어들였다고 해야 한다.
직업상 한 달이면 근 4-50권에 달하는 신간소설, 에세이집 등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덕분에 책을 고르는 것도 나름대로 신중하다. 게다가 매달 2번씩 하는 문학관련 스크랩 덕에 새로 등장하는 작가, 매스컴이 관심을 가지는(즉 출판사에서 미는) 작가, 재미있을 만한 책 등에 대한 정보도 빠른 편이다.
조선희 라는 작가에 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소설을 쓰기도 전에, 소설을 쓸 것이라는 것만으로 유명해지는 작가가 있다면 조금 역설적이지 않을까. 바로 이 작가 조선희가 그랬다. 소설을 쓰기도 전에, 잘 나가던 《씨네21》의 편집장을 그만 두고 소설가가 되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신문에서는 꽤나 떠들어 주었다. 어쩌면 신문기자시절의 친분이 그녀의 띄우기로 이어졌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말이 많은 걸 보면 《씨네21》에 꾸준히 실리던 그녀의 짧은 단문이 썩 괜찮았던 모양이라고, 나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책이, 신간 서적들 틈에 끼여서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내가 집에 가져다 놓고 읽을 책으로 분류한 것은 조선희에 대한 그러한 호기심 덕이었다.
집에는 이미 읽지 않은 책이 20권 남짓 쌓여 있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독서 예비 목록 중의 하나로 편입되려던 중에 새치기를 하여 먼저 손에 넣게 된 것은 아무래도 박완서 선생님의 추천의 글이 큰 역할을 하였겠고.
과외를 가기 전에 잠깐, 그냥 조금 읽어보려고 했던 나는, 양귀자처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외를 끝내고 밤을 새어 두 권을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새벽 6시가 넘었다.
신문기자 출신 작가(김훈 말이다. ^^)들의 특징인가, 글은 전체적으로 단문이고 깔끔하게 똑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김훈보다야 문장이 길지만.
1권은 무슨 기업드라마처럼 이어진다. 대학시절 운동권이었다가 같이 회사를 세운 네 명의 친구, CEO가 된 한 명의 친구가 M&A를 제의 받으면서 나머지 세 명의 친구 뒤통수를 치고, 주인공 영준은 뒤통수를 맞은 얼얼함을 달래가며 사는 이야기. 평범하고 통속적인 스토리 갈피 갈피에 조선희는 인생과 삶, 인간에 대한 통찰들을 군데군데 끼워넣어 놓았다.
그 성찰은 은희경의 그것처럼 예리하거나(그래서 조금 불편하거나) 김형경의 그것처럼 치명적이거나(그러나 무디고 둔하거나) 하지 않다. 편안한 통찰이랄까. 인간에 대해 꽤나 오래, 참 여러모로 연구하고 생각해 보았구나, 싶다. 나의 고통에만 천착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열심히 들여다보았던 결과가 이거구나, 하는 생각.
「신문기자나 소설가나 정신과 의사의 공통점은 사람에 관심이 많다는 거다. 주로 표정 뒤에 숨은 생각을 궁금해한다. 드러나는 것 뒤에 숨은 진실을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굴 만나든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조선희, 『열정과 불안』2권, 생각의 나무, 2002, p.50」
이 구절을 읽고 나면 아하, 싶다. 신문기자로서의 오랜 생활이 그녀의 통찰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구나라는 깨달음이 오는 거라고 할까.
소설은 1권과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시점도 주제도 사건도 달리하고 있다. 1권의 주인공이었던 영준은 2권에서 이메일과 사람들의 대화에서 잠시잠시 등장할 뿐이고, 2권의 주인공인 인호는 1권에서 영준의 첫사랑이자 주변 인물로 잠시잠시 등장할 뿐이다.
이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해 가며 교차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썩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2권의 인호 부분이 재미있었다. 정신과 의사인 인호의 1인칭 이야기를 읽으며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의 3인칭 세진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았고.
처녀작(엄밀히 말해서는 처녀작이라고 하기 힘들지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보았을 때, 썩 잘 쓰여진 진 소설이다. 방금 '만들어'라는 말을 '쓰여진'이라고 고쳤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건 '만들어 진'소설이다 싶은 느낌을 주는 소설들이 있는데 이 소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소설을 읽는 것은 참 좋은 일이고 유익한 일이고 재미있는 일이다. 세상에 재미있으면서 유익한 일이란 있기 힘든 법인데, 나에게 있어 소설 읽기란 유익하고도 재미난 일이니, 소설가 이순원의 말대로 조선희라는 "힘 센 작가 하나가 새롭게 출현" 한 일이 나는 몹시 반갑고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