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박완서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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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수표 같은 작가들이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이면 반드시 재미있을 거야, 라는 확신을 주는 작가. 언젠가 썼지만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자식들이 모두 오롱이조롱이 인 것처럼, 한 작가가 써내는 작품도 대개는 오롱이조롱이인 법이어서, '보증수표'가 되는 작가가 되기란 힘들다 못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된다.

그렇기에 보증수표 같은 작가는 더욱 귀하고 믿음이 가는 존재가 된다.

나에게는 박완서가 그렇다.

소설은 아주 괜찮았는데 산문이 영 꽝이어서 황당하게 실망을 주는 작가도 여럿이었는데, 박완서는 소설은 물론, 산문, 여행기에 신문 칼럼까지 죄다 재미있고 맛깔나게 쓴다. 그것은 아마 박완서가 쓰는 문장의 탄탄함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더 좋은 작품도 있고 덜 좋은 작품도 있지만 작품들 간의 편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어서 언제나 박완서는 안심스럽다.(안심스럽다, 라는 표현 역시 박완서의 어법이다.)

박완서의 산문집은 사람 냄새가 난다. 아들을 잃는 참척을 경험했던 88년도를 지나며 쓴 일기를 모아서 낸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산문집은 아직 결혼도 해 보지 않은 철딱서니 없는 계집아이의 눈에 여러 번 눈물을 고이게 만들었던 전적을 가지고 있다. 박완서의 산문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그악스러울 정도의 솔직함, 일견 위악이라고 보일 정도의 솔직성에 있는 것 같다. 자신을 볼 때에도 가차없이 솔직하고 삼엄한 시선을 통과해 나오는 글의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글들이 가지는 호소력을 감히 누가 비껴갈 수 있겠는가.

이 책 두부 역시 박완서다운 솔직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산문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과거의 글들과 무언가 다른 것은, 과거의 글들이 살벌하다 할 만큼 솔직하고 냉정하게 사람들 속의 구린 곳을 팍팍 찔러대었다면 이번 글은 부드럽고 차분하게 일러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 핍진하다못해 육감적이기까지 한 묘사력은 그대로 살았는데도 글들이 구수하게 느껴짐은 박완서가 늙었기 때문일까.

얼마 전 헬렌 니어링의 자서전을 읽었는데, 거기서 헬렌 니어링은 한결같이 늙는다는 것에대한 예찬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박완서는 예찬하는 대신 조금씩 한탄하고 그러면서도 '늙음'에서 오는 '뻔뻔함'에 대해 슬쩍 던져놓고 말 뿐, 늙음에 관한 예찬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는다는 것이 얼마만큼 아름다운 축복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박완서의 이 산문집이다.

박완서 식의 표현을 쓰자면, 고무줄 바지를 아무데서나 입고서도 전혀 눈치보이지 않는 편안함, 그것이 뻔뻔함이 아니라 편안함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늙음의 축복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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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09-12-1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취향이 너무 비슷하신 것 같아요. 저는 박완서님 책은 무조~건 삽니다. 아들을 잃고 세상을 향해 내뿜는 얘기들의 그 솔직함은 참 동감이 가더군요.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드셔서 책내기가 힘드실 것 같아 참 슬프네요. 참, 이 주의 마이리뷰 2주 연속 당선되신 거죠? 이제 머그컵을 향해 고고 하셔도 될 듯합니다 ㅋㅋㅋ 받아서 사진이라도 올려주세요. 저는 오늘 드디어 마음을 접었답니다.^^;

아시마 2009-12-12 14:06   좋아요 0 | URL
하하 그렇잖아도 방금 봤어요. 이주의 리뷰 두번째 당선된거. 남편에게 이걸로 자랑질 했더니 고작 만원가지고. 이러잖아요. 확 때릴까요?
리뷰 당선이랑 상관없이, 책 사기로 했어요. ^^ 사실 머그컵도 탐났지만, 읽고 싶은 책이 몇권 생겨서(전 이거 심하게 병적이라, 읽고 싶다 생각하면 당장 사지 않으면 몸살이 나요. 진짜 몸살이.) 방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졸랐거든요. ^^
박완서 선생님 글 너무 좋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