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의 리뷰는 "박완서 표 연애소설"을 제목으로 잡아야겠다 했었다. 그런데 읽고 나니 연애소설로는 뭔가 미진하다 싶다. 물론 연애의 장면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박완서 식 '미시적 리얼리즘'과 묘사의 핍진성은 이 소설에서도 완벽에 가깝게 드러나고, 짤막짤막하게 드러나는 두 연인의 모습은 분량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눈물나도록 짜릿한 연애를 독자의 눈 앞에서 펼쳐보인다. 게다가 분명 박완서는 이 소설을 연애소설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연애소설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모자란다.

자꾸만 박완서 선생님의 나이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이 마흔에 『나목』으로 등단하면서, 6.25에서 출발한 선생님의 소설이 여성문제와 모성문제(『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살아 있는 날의 시작』등) 거쳐 노인문제(「해산 바가지」「꽃을 찾아서」)를 다루더니 숙제를 하듯 고향 개성말을 여봐란듯 살려내고(『미망』) 따스했던 그 시절 과거의 이야기(『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쓰고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몇편 쓰더니. 이제는 다시 6.25와 미군 PX로 돌아갔다. 마치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거대한 코끼리처럼.

이 소설은, 나목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나목이 그림자라면 이 소설은 밝은 양지다.(빛이 아닌 양지다.) 나목에서는 위악적이다 싶을 만큼 어두운 면만 어둡고 힘들었던 면만 끌어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나목에서 끌어내고 싶었지만 끄집어내지 않고 아껴두었던 그 밝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을 죄다 모아서 써 냈다 싶다. 나목에서 이 이야기들을 끄집어 냄으로 해서 그 소설은 흰 머리를 솎아낸 검은 머리 처럼 말짱하고 어둡고 절망적인, 그야말로 박수근의 그림과도 같은 거칠거칠한 나목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었고, 이 소설은 잘 마전한 소창처럼 그렇게 뽀얗다. 이 소설에 숨어들 어두운 면들은 죄다 뽑아 나목으로 옮겨 간 것처럼.

그래서 이 소설은 나목과 쌍둥이가 된다. 동전의 전면과 후면처럼. '싱아'와 '그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어진 이야기가 되는 것과는 또 다른 면으로 이 이야기와 나목은 연결되어 박완서 소설의 처음과 끝을 이룬다.

나목에서 전쟁이 절망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면, 이 소설에서 전쟁은 낭만을 가중시키는 어떤 것이었다. 두 사람의 첫사랑이 더욱 화려하게 더욱 애잔하게, 더욱 불꽃같이 타오를 수 있게하는 최고의 촉매가 바로 전쟁이라는 그 어수선한 배경이었다. 전쟁직후의 폐허가 아니라면 스무살 동갑내기들의 첫사랑이 그렇게까지 반짝거릴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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